적벽대전(赤壁大戰)의 격전지를 찾아서
1.
적벽대전(赤壁大戰)은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의 소설 <三國志>에 나오는 후한(後漢, 25-220)말기 위(魏)나라의 조조(曹操)와 오(吳)나라 손권(孫權)과 촉한(蜀漢) 유비(劉備)의 연합군이 적벽(赤壁)이라는 강(江)에서 싸웠던 전쟁을 말한다.
당시의 전쟁에 대해 송(宋)나라때 소동파(蘇東坡, 1307-1101)는 유배지 황주(黃州)에서 양자강(揚子江) 유람중 역사를 회상하며 후세에 회자될 부(賦) 한편을 짓게 되는데 이를 후인들은 적벽부(赤壁賦)라 부르며, 우리민족에게 전해오는 경기잡가의 하나로도 적벽가(赤壁歌)가 있어 서기 208년에 있었던 한족(漢族)의 전쟁이야기가 우리민족에게도 널리 퍼져 회자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원소(袁紹)를 무찌르고 화북(華北)을 평정한 조조(曹操,155-220)가 형주목(荊州牧)을 지키고 있는 유표(劉表)를 정복하고 형주땅을 차지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게 되고 당시 유표의 급사(急死)로 손쉽게 형주(荊州)를 차지한 조조가 강릉(江陵)으로 달아나는 유비를 추격하게 된다.
위(魏)나라 군대는 양자강을 따라 이동해 적벽(赤壁)의 강(江)가에서 손권-유비 연합군과 대치하게 되는데 제갈공명(諸葛孔明) 화공(火攻)전략에 말린 조조(曹操)군의 전선(戰船)이 불타는 대패를 당해 후퇴하고 그 결과 손권의 강남(江南) 지배가 확정되고 유비도 형주(荊州:湖南省) 서부에 세력을 얻어 천하 3분의 형세가 확정되었다고 전한다.
2.
이 적벽대전이 일어났던 그 격전지의 위치에 대해 위대한 조선독립군(朝鮮獨立軍)이었던 전(前) 고려대총장 김준엽(金俊燁, 1920-2011)선생은 그의 회고록 <長征>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적벽(赤壁)은 한수(漢水)가 양자강과 합류하는 부근(호북성 가어현嘉魚顯)에 있는 곳으로서 공명(孔明)과 주유(周瑜)가 합력하여 80만이라는 조조의 수군을 격파한 유명한 사적지(史蹟地)다.>
또한 대만(臺灣)출신의 일본사학자 진순신(陳舜臣, 1924-2015)도 그의 저작 <중국의 역사>에서 “赤壁(적벽)은 湖北省 嘉魚縣(가어현)의 강가이다” 라고 정확히 기술해 놓고 있다.
거대한 대륙의 조선(朝鮮)이 반도강제이주 후, 1949년 중국공산당이 대륙 전체를 통일하여, 과거 웅대했던 조선민족의 역사를 하찮고 왜소하게 만들어 마치 한족(漢族)의 역사가 오천년동안 대륙전체를 지배한 듯이 역사를 새롭게 조작하면서 한족(漢族)역사의 강역속에 존재했던 지명들이 조선이 영유(領有)했던 드넓은 대륙의 전체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현재 만들어진 중국이라는 강역속에 몽고(蒙古), 하북성(河北省), 하남성(河南省), 호북성(湖北省), 호남성(湖南省), 산동성(山東省),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 감숙성(甘肅省)일부, 강서성(江西省), 안휘성(安徽省), 강소성(江蘇省)장강이북, 그리고 신강(新講)지구 북쪽과 알타이산에서 러시아 투바공화국으로 이어지는 2천리의 지역과 바이칼호 동남지역이 모두 구한말 조선(朝鮮)의 강역이었음을 정확히 분석해 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은 역사를 조작,기술하면서 위촉오(魏蜀吳)삼국시대에 일어났던 적벽대전의 격전지 또한 지명이동과 함께 조작을 하게 되는데, 이들이 지명이동시킨 적벽(赤壁)을 지도에서 살펴보면, 김준엽(金俊燁)선생의 기술과는 완벽히 다른 엉뚱한 지역이 되어 버린다.
이전의 글들에서 현 사천성(四川省)의 가릉강(嘉陵江)이 한족(漢族)역사속의 한수(漢水)였음을 이사벨라 버드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의 기록과 다나베 히사오(田辺尚雄,1883-1984)의 기록을 비교 논증하면서 고찰했다.
위대한 독립투사들의 회고록(回顧錄)에 나온 지명은 분명 현 중국대륙의 지명위치와 일치하지 않고 있으며 대표적인 지명이 바로 중경(重慶), 무한(武漢), 북경(北京), 만주(滿洲) 등이며, 이 지명들의 본래 역사속의 지리강역을 찾아 복원하기 위해서는 조선독립군 회고록과 당시 대륙에 생거했던 청(淸)과 조선(朝鮮)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기록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로부터 시작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와 삼대(三代),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지나 진(秦)한(漢)수(隨)당(唐)송(宋)원(元)명(明)청(淸)의 모든 사서(史書)는 원본이 없는 교열본으로 그 강역의 지리위치는 현재의 위치로 새롭게 교열되어 진짜로 위장해 놓은 완벽한 위서(僞書) 즉 가짜 책들일뿐이며, 또한 일본인 샤쿠오 슌조(釋尾春芿)가 설립한 조선고서간행회로부터 시작된 조선역사오천년의 모든 사서(史書)도 원본이 없는 필사본으로 조작된 현 반도역사의 지리강역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날조된 위서(僞書)들이다. 이러한 위서(僞書)를 붙잡고 천년을 연구한들 어찌 찬란했던 선조들의 지리강역을 한 치라도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어불성설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적벽(赤壁)이란 지리위치도 중국공산당이 필사(筆寫)해 낸 현재 존재하는 사적(史籍)속의 기술과, 1944년 직접 대륙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의 양자강(揚子江)가의 적벽(赤壁)을 답사했던 조선의 역사학자 김준엽 선생의 기록과 완벽히 달랐음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3.
다나베 히사오(田辺尚雄)는 그의 저작 <朝鮮中國音樂調査紀行>에서 적벽대전의 격전지였던 赤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23.4월 해질무렵 潘陽湖(반양호-포양호)의 입구를 보았다. 10시 조금전에 좌현(左峴)의 물가에 길게 등화(燈火)가 이어진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아세아 및 스탠더드 석유(石油)회사이다. 그 규모는 상당히 크다. 10시에 남경(南京),한구(漢口) 사이에서 최대의 시가인 구강(九江)에 도착했다.
새벽6시쯤 사환이 깨워 주어서 유명한 大冶(대야)의 철산(鐵山)을 보았다. 그 설비의 광대함에 놀랐다. 10시에 황주(黃州)에 도착, 그 맞은편에 무창현(武昌縣)을 보았다. 여기에 이름높은 적벽(赤壁)이 있다. 옛날에는 강안(江岸)에 있었으나 지금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그 석벽(石壁)에 <東坡赤壁賦동파적벽부>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이전의 여러글들을 통해 우리는 현 중경(重慶)이 바로 역사속의 무한(武漢)임을 고찰해 보았다. 아래의 지도에서 보게 될 가릉강(嘉陵江-역사속의 한수)이 양자강(揚子江)과 만나는 곳 부근이 바로 <삼국지>라는 소설속에 나오는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역사적 전장(戰場)이었던 것이다.
2023.03.14.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첫 번째 사진을 보면 서쪽지역을 뺀 거의 중국 대륙 전체가 조선의 광역이 되는데 그럼 저 서쪽지역에서 명, 청이 존재했었다는 건가요?
삼국시절 당시 위촉오가 병립했었던 지리적 위치는 어떻게 구획할 수 있나요?
명나라는 선조실록에도 나오지만 조선에 비하면 작은나라였습니다. 현 사천성과 운남성.감숙성 그리고 베트남 위쪽의 월나라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강역크기로 본다면 매우 크지만 거대한 조선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았습니다. 그래서 선조임금은 명나라 황성규모를 논하는 자리에서 작은나라의 정양문이 어찌 우리나라 문만큼 크단 말인가? 하고 묻게 되는데, 식민사학은 이 작은 나라의 글자를 선조임금이 우리나라를 칭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청나라는 북만주에 이어 남만주를 차지하고 이후 명의 강역을 전부 차지한후 다시 우랄산의 동남쪽 위구르족의 강역을 정벌해 신강지구를 편입하게 됩니다. 위촉오의 강역은 지명찾기 항목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계 송계님,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