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느새 칠월입니다. 올 한 해도 반이 가고 새로운 반을 살아가게 됐습니다.
그리운 어머니,
사람은 이렇게 살다가 떠나가게 마련인가요? 살다 죽으면 그뿐인가요?
아니지요, 그렇지가 않은 거지요. 내세가 있고, 상선벌악이 있고, 천주존재와
천지창조 등등 우리가 대세자들에게 일러주는 4대 교리도 있는 거지요.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모자라서도 아니련만, 웬지 이즈음에 와서는
시간이 빨리 간다는 느낌속에 자괴감과 아쉬움과 그런저런 상념들로 일손이
잘 잡히지 않을 때가 곧잘 있습니다.
어제 양평 나들이에서 세시쯤 미사를 드리고 음식을 나눠 먹고, 일곱시가 넘어
귀로에 올랐지만,
일박이일이 아닌 당일 행사로 끝나면서 오늘 하루를 집에서 쉬게 돼 새 자동차
번호판도 받아서 붙이게 됐습니다. 51 수 6123. 수요일에 받았다고 '수'자가
들어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몇 번 운전해보니 오토매틱 차도 익숙해지려 합니다. 딸아이와 모든 이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 좀 더 가치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니, 제 시 한편이 다음주 '독서신문'에 소개된다고 합니다. '한국현대시문학'
여름호에도 한편이 나가고요.
새로 쓰지를 못하고 있던 시가 나간다고 하는데, 이번 강진 나들에에서 몇 편을
건져올릴 '상'이 남아있습니다만.
밤에,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나무와 대화하면서 그 옛날 다산선생을
떠올렸고, 만약 그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가 이곳을 방문했다면, 그도 이 언저리
를 거쳐 초당에 올랐을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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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Luglio 2009. Sabato
어머님,
오늘은 어머니가 아니고 어머님입니다.
제 마음이 그렇게 불러보고 싶은 겁니다. 7월 4일이면 미국 독립기념일이지요.
7,4 남북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지 서른일곱 해. 세월이
많이도 흘렀습니다. 남산 중앙방송 시절, 남과 북이 분단 이후 거의 처음으로
대화를 시작하게 된 그 시점에,
어머님에겐 막내가 만으로 열 살, 맏이가 서른 살, 아직 장가도 들기 전이었습니다.
"저, 평양에 다녀왔습니다."로 시작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특별방송을 들으면서
세상이 달라지려니, 꿈을 꾸게 됐지요.
그러나 양쪽은 그를 계기로 더욱 더 체제를 강화하고 마음대로 통치해나갔습니다.
백성들은,
백성이란 말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용어라며 쓰지 말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사람들은 가렴주구, 어렵사리 세상을 살아가게 마련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힘든 나날을 사셨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다들 행복했다는 소리보다 어려웠다는 추억담을 내놓고는 한답니다. 그래서 명절이면
술 한잔 받아놓고 어머님은 늘 자식들의 불편한 소리를 들으시며 감내하셨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머님을 그렇게 모시는 게 아닌데,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이 납니다.
마음고생, 몸고생, 돈 빌리러 다니던 시절의 서글픔, 이번만 고생하면 햇볕 쨍하고 드는 날
오려니, 하고 참아받으셨으나, 그날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다 그런거려니, 하면 그뿐이겠으나, 우리 어머님만은 명절 때 한 잔 하고 씨름하는
자식들 서리에,
몸 둘 곳 못 찾으시며 슬픔을 더 많이 안으셨다는 점에서
저는 이렇게 통곡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어머님, 지금 천상에서 쉬고 계시겠지요? 자식들 내려다보고 계시겠지요?
머지 않아 저희도 찾아갈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울컥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인 까닭인지요?
베드로가 강남의 큰집을 팔고 강북의 조그만 집을 새로 샀다는 전갈을 받고 문득 어머님,
아버님의 옛날이 떠올라서 몇 자 적었습니다.
15 Luglio 2009
어머님, 며칠 전에 이런 시를 적어봤습니다.
<말씀께서
비가 내린다, 철철철
인천공항 김포공항 오고가는
비행기 소리 들린다
탁트인 수풀 속에 모습 드러내는
산동네 근린공원 바라보며
아내와 나누어서 생활말씀 읽자하니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하신다,
말씀께서
실상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버릴 것도 내어줄 것도 많은 나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하신다
여분의 것이 많으니 내어주라 하신다
돌아보면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넉넉해서 갈무리하고
도둑이 들까 애태운 적 없건마는
내가 먼저 술값 낸 적은 참 많았다
남들보다 더 바쁘게 일한 만큼
고만큼 더 벌어서 술 사준 적 있었으나
대학생 딸아이 등록금 마감날에
젊은 나를 찾아온 그 할아버지께
꾸어드린 적 있었으나
적선을,
베풀어야 할 처지에 거저 준 적
바이 없다
서러워서 애통해하는 그 친구의
눈물 닦아주지 못했고
잠자리도 주지 못했다
아,
그들 모두 이제는 저 세상 사람 되었구나
죽은 이의 아들이 날 찾아 인사한다 했으나
흔쾌하게 받아주지 못했으니
장마비 내리는 이 아침 나에게
가진 것을 내어놓아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 하신다
말씀께서>
===
20 Luglio 2009. Lunedi
어머님,
베드로의 덧글을 보고 다시 어머님을 떠올립니다.
소자가 처음 집을 살 때,
약수동 전셋집에 살다가 응암동 조그만 '내집'을
390만원 주고 사서 들어갈 때 재산관리가 이렇게 저렇게
된다고, 함께 살던 동생들과 의논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지금도 문득문득 납니다.
그런 전통을 세워두었더라면 우리 집 형제애가 또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재산을 내어놓고 공유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쯤은 함께 알고 지내는 풍토를 만들어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지요.
어머님, 저는 요즘도 미사 때 교황과 주교 성직자를 기억하는 대목에서
레오 사제를 기억하고,
세상 떠난 이들이들을 찾는 부분에서 어머님, 아버님을 기억하며,
저희를 위해 기도하는 차례에서는 저희 가족과 대자 대녀들,
그리고 동생들,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생들을 더욱 많이 사랑해주십사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4단에서도 그 형제들을 바쳐드리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그들을 맡겨드립니다.
요즘 교정을 본 '마리아'에 관한 책에
성자를 낳아준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시에
하느님이신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따님이시기도 하다는 대목에 한참을
멈춰서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방배동 원룸을 전세 얻어 시작하는 '새가정운동본부' 개소식이 있습니다.
저희가 몸담고 있는 포콜라레운동 새가정들이 활동하는 곳이지요.
천상에서 굽어살펴주십시오, 어머님.
23 Luglio 2009. Giovedi
어제가 어머님 본명첨례였군요.
미사 때 어머님을 기억했습미다만, 명동 10시 미사가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
장례미사였거든요.
그 전주 토요일에는 이병문 베드로 신부님이 현역 잠원동성당 주임라서
그랬는지, 장례미사에 본당이 넘쳐서 꼬스트홀까지 만원을 이뤘습니다만,
어제는 원로 사목자인 관계로 성당도 차지 않고 듬성듬성 빈자리가 더러 보였을 정도였습니다.
최몬시뇰은 어머님과 같은 1922년생이고, 김수환 추기경님과 동성학교 입학 동기라고
했습니다.
최몬시뇰께는 소자가 진 빚이 있습니다. 원고빚이지요.
아내가 옆에서 슬쩍 건드렸는데, 죄송한 일이지요.
젊은날, 치석우 신부님이 조광 교수와 함께 저를 불러 명동 일식당에서 저녁 대접을 하시면서
중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써달라시며, 한국교회사 통사를 부탁하셨는데,
그리고 독촉도 여러 차례 하셨는데, 원고 스타트만 드리고는 더 못써드린 기억이 죄스럽습니다.
방송일로 그때는 정말 바빴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였습니다.
이제 그분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양성당 신문에 쓰고있는 것도 교회사 통사를 위한 기초가 되기를 바라면서
연재중에 있습니다.
동성학교 을조에 12명이 입학했는데, 지금 단 한 분 임응승 신부님만 남았다고,
장례미사에 참례한 당사자 임신부님이 주례자인 정추기경께 전해드렸다고 했습니다.
정추기경님은 강론에서, 내년 3월부터는 동성학교에 '을조'와 같은 신학교 지망생을
신입생으로 받는다고 공표했습니다.
모두가 다 가는 인생입니다.
저는 어제 한국문인협회 모임에 착석했습니다.
일본 가는 사람들이 모였더랬습니다.
토요일에 갔다가 다음 주 화요일에 돌아옵니다. 교토와 나라, 오사카를 돌아볼 예정입니다.
그 동안 남쪽으로 나가사키와 후꾸오카는 여러 차례 다녀왔고, 북으로 삿보로와 유바리, 아오모리,
중북부로 아키다와 센다이도 다녀왔으나 교토와 오사카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문학적인 소재도 많이 건져오겠습니다.
어머님,
서로 섭섭한 일들은 잊어버리기라도 해야 하련마는
집착이 너무 강한 것이 저희들의 흠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첫댓글 큰 형님! 저절로 눈물이 납니다. 왠지 눈물이 그냥 흘러내립니다. 어머님에 대한, 아버님에 대한 맏이로서의 그 애틋한 그리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동생들에 대한 몸짓과 표정은 서툴지만 그 안에 담긴 큰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형님은 언제나 저희들의 형님이십니다. 연세가 드시면서 점점 약해지시는 듯한 표현을 접하면서 그냥 눈물이 흐릅니다. 형님, 저희들이 있잖아요. 힘 내세요! 얼마나 잘 살아오셨습니까. 얼마나 무거운 십자가 지고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해야지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7월 17일 61회 제헌절에 사목정보실에서 못난 동생 베드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