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침략기에 도심 한복판을 흐르면서 경관 면이나 위생 면에서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청계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나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간편한 방법은 '복개(覆蓋)'였다. 개천을 복개하려는 시도는 1905년 대한제국 때의 일이었다.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내정을 장악한 일제가 남대문시장을 폐쇄하려고 하자 남대문시장 상인을 비롯한 우리나라 상인들이 청계천의 일부 구간을 복개하여 새로운 시장을 조성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청계천 복개가 시도된 것은 일제침략기이다. 청계천은 시가지 중심을 꿰뚫는 배수간선이면서도 하수가 땅속으로 흐르도록 암거화(暗渠化)되지 않음에 따라 토사와 쓰레기의 퇴적으로 해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준설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청계천 복개의 필요성은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하수가 시가지 중심을 흐름에 따라 악취가 발생하여 청계천 양안(兩岸) 주민생활에 고통을 주는 등 생활환경에 위협이 될 뿐 아니라 경관 면으로도 좋지 않았다. 또한 이 당시 도심을 관통하는 도로가 부족하여 청계천을 복개하면 교통소통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950년대 중반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빈민 거주지, 슬럼(slum)지역이었으므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기초적인 생활필수품을 스스로 생산하기 어려웠던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으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은 ‘복개’ 뿐이었다.
청계천 복개는 1955년 광통교 상류의 약 136m를 복개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1977년까지 5차례에 걸쳐 다음과 같이 시행되었다.
① 제1차는 1958년에 대광교에서 장교(長橋)까지 450m 구간을, ② 제2차는 1958년 12월부터 1959년 8월까지 장교에서 주교(舟橋, 방산시장) 앞까지 969.5m 구간을, ③ 제3차는 1961년 12월까지 방산교에서 오간수교까지(평화상가) 232m 구간의 암거 하부(暗渠下部)공사를, ④ 제4차는 1965년∼1967년에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⑤ 제5차는 1970년∼1977년에 청계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 |
대광교에서 장교(長橋)까지 제1차 청계천 복개 공사는 1958년 5월 25일에 착공되어 10월 말까지 준공하기로 계획되었다. 이 공사는 당국이 책정한 가격보다도 4,500만환이 낮은 7,400만환(책정액의 65%)으로 대림(大林)산업에 낙찰되었다.
청계천 복개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1959년 초에 청계천변 상인들이 서울시에 청계천도로에 고가도로를 만들되 그 밑에 점포 2,000개를 만들게 해주면 공사비 35억 환은 자기들이 부담하겠다는 상인들의 요망에 언급하여 허정(許政) 시장은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쉬운 것이 아니다. 공사비 중 20억 환을 보여주면 고려하겠다”고 말하였다. 이 계획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부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