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출간한 목천현 김은경 직계 정리 3
2) 지리지(地理誌)의 김은경 직계
김은경(金殷卿, 1855~1930)은 『강릉김씨(江陵金氏)』 36세이며,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翰林公 三愧堂公 木川派)」의 파조(派祖)인 26세 응명(應命, 1567~1625)의 후손이다.
「1) 지리지의 목천현」 읍지(邑誌)의 「무직조(武職條)」, 「문예조(文藝條)」, 「성씨조(姓氏條)」, 「유행조(儒行條)」, 「음사조(蔭仕條)」, 「효자조(孝子條)」 등에는 김은경의 선조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있다.
(1) 김응명(金應命, 1567~1625)
근동면 도원리(近東面 桃源里)의 김씨 본관은 강릉이며, 현감(縣監) 응명(應命)이 시거(尸居)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 광열(光烈)의 아들이다. 〈『대록지』 곤(坤) 「성씨조(姓氏條)」, 같은 책 「음사조(蔭仕條)」.〉
❏ 근동면 도원리 연혁
1779년(조선 정조 3 기해)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근동면 도원리(忠淸道 淸州牧 木川縣 近東面 桃源里) → 1895년(조선 고종 32 을미) 공주부 목천군 근동면 도원리(公州府 木川郡 近東面 桃源里) → 1896년(조선 고종 33 병신) 충청남도 목천군 근동면 도원리(忠淸南道 木川郡 近東面 桃源里) → 1914년(일제강점기 갑인)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郡 葛田面 桃源里) → 1942년(일제강점기 임오)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郡 並川面 桃源里) → 1963년(대한민국 임인) 충청남도 천원군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原郡 並川面 桃源里) → 1991년(대한민국 경오)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郡 並川面 桃源里) → 1995년(대한민국 을해)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市 並川面 桃源里) → 2008년(대한민국 무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市 東南區 並川面 桃源里)가 되었으며, 현재에 이른다.
❏ 역주1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26세이며, 1권 604쪽 2단에 등재되었다. 참판(參判) 광열(光烈, 25세)의 3자(子)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부친과 3형제가 양근 땅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 부친과 큰형 철명(哲命)이 순사(殉死) 당하였으며, 중형 순명(順命)과 응명(應命)은 부친의 해를 막다 중상을 입었다. 응명의 관(官)은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을 거쳐, 고창현감(高敞縣監), 전주판관(全州判官)을 역임하였다. 자호(自號)를 삼괴당(三槐堂)이라고 했다. 〈『강릉김씨대종회』 「뿌리탐구」 중시조낙향조.〉
❏ 역주2 : 목천군 근동면 지역으로 처음에 도원(挑元)이라 하였는데 세마(洗馬) 김만중(金萬重)이 병자호란의 강화를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진나라 사람들이 도원에 가서 피난한 뜻에 따라 호를 도원(挑元)이라 하고 동네이름도 호를 따라 도원(挑源)으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평기리, 도원리, 광기리, 덕신리, 가정리, 반계리, 명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원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므로 병천면 도원리가 되었다. 〈『천안시 동남구청』 읍면동 지명유래.〉
〇 역주1 : 장남 철명(哲命, 1558~1592)은 양주(楊州) 땅에 뿌리를 내렸다. 동원군(東原君)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 되었으며, 동원공파(東原公派)의 파조(派祖)이다. 2남 순명(順命, 1561~1614)은 화성(華城) 땅에 뿌리를 내렸으며, 월봉공파(月峰公派)의 파조이다. 3남 응명(應命, 1567~1625)은 병천(竝川) 목천(木川) 땅에 뿌리를 내렸으며, 삼괴당공파(三槐堂公派)의 파조이다. 시거(尸居)는 현직에서 물러남으로써 능력이 없어져 일을 못하면서도 녹을 받으며 벼슬자리에 머무름이다.
〇 역주2 : 응명(應命, 1567~1625)의 본관(本貫)은 강릉(江陵), 자(字)는 시보(時甫), 호(號)는 삼괴당(三槐堂)이며, 고창현감(高敞縣監), 전주판관(全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 광열(光烈, 1520~1592)의 아들이다.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근동면 도원리(忠淸道 淸州牧 木川縣 近東面 桃源里,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도원리 忠淸南道 天安市 東南區 並川面 桃源里)에 살았다.
〇 역주3 : 응명의 묘(墓)는,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이원동면 화청리(忠淸道 淸州牧 木川縣 二遠東面 華淸里)의 종산(宗山)에 위치하였다. 이후 충청남도 천원군 광덕면 원덕리 산 7번지(忠淸南道 天原郡 廣德面 院德里 山 7番地)로 개편되었다. 종산이 국가(國家)의 수용으로 말미암아 1990년 12월 10일 충청남도 천원군 동면 화덕리 산 59번지(忠淸南道 天原郡 東面 花德里 山 59番地)에 문중(門中)의 종산(宗山) 묘지(墓地)를 설치(設置)하여 선영(先塋)으로 삼은 후 이장(移葬)하였다. 2024년 현재 행정구역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덕리(忠淸南道 天安市 東南區 東面 花德里) 선영(先塋)이다.
(2) 김익종(金翼宗, 1588~1668)
자(字)는 익지(翼之), 호(號)는 학포(學圃), 응명(應命)의 아들이다. 〈『대록지』 곤(坤) 「문예조(文藝條)」, 같은 책 「음사조(蔭仕條)」.〉
〇 역주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27세이며, 1권 604쪽 3단에 등재되었다. 장악원은 조선시대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주부는 종6품의 관직이다. 익종(翼宗, 1588~1668)의 본관은 강릉,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를 역임하였으며, 응명의 장남이다. 묘는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이원동면 화청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덕리 산 59번지 선영이다.
(3) 김한종(金翰宗, 1601~?)
김한종(金翰宗)은 응명(應命)의 아들이다. 〈『대록지』 곤(坤) 「문예조(文藝條)」.〉
〇 역주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27세이며, 1권 607쪽 3단에 등재되었다. 한종(翰宗, 1601~?)의 자(字)는 한지(翰之)이며, 응명(應命, 1567~1625)의 2남이다. 한종은 장남 만전(萬全, 1628~1671)과 차남 만년(萬年, 1630~1675)의 두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 만전은 당대(當代)에 후사(後嗣)가 없어 대(代)가 끊겼으며, 차남 만년은 아들 일용(一用) 대(代)에 이르러 후사가 없어 대가 끊겼다. 한종의 묘(墓)는 청주(淸州)라고 기록되었다.
(4) 김만중(金萬重, 1608~1676)
자(字)는 쌍남(雙南)이다. 학포(學圃) 익종(翼宗)의 아들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 광열(光烈)의 손자이다. 도원촌(道元村)으로 돌아와 호(號)를 도원(桃源)이라고 하였으며, 당(堂)의 이름을 면실(勉實)이라 하였다. 〈『대록지』 곤(坤) 「유행조(儒行條)」.〉
❏ 도원촌은, 「(1) 김응명(金應命, 1567~1625)」의 ‘근동면 도원리 연혁’을 참고하라.
〇 역주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28세이며, 1권 604쪽 4단에 등재되었다. 만중(萬重, 1608~1676)의 본관은 강릉, 호는 도원(桃源)이다. 학포 익종의 독자이며, 이조참판 광열의 손자이다. 도원촌(道元村)으로 돌아와 호를 도원(桃源)이라 하였으며, 당(堂)의 이름을 면실(勉實)이라 하였다. 묘는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이원동면 화청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덕리 산 59번지 선영이다.
❏ 역주 : 목천군 근동면 지역으로 처음에 도원(挑元)이라 하였는데 세마(洗馬) 김만중(金萬重)이 병자호란의 강화를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진나라 사람들이 도원에 가서 피난한 뜻에 따라 호를 도원(挑元)이라 하고 동네이름도 호를 따라 도원(挑源)으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평기리, 도원리, 광기리, 덕신리, 가정리, 반계리, 명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원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므로 병천면 도원리가 되었다. 면실은 벌말, 평기(平基), 도원골 아래 벌판에 있는 마을이다. 숙종 때 학자 김일우(金一宇)가 처음 터를 잡아 살면서 실학에 힘쓰라는 뜻에서 면실(勉實)이라 하였다. 동학 때 접주 김고양이 살았으며 왜군들이 부락에 불을 놓아 전 부락이 소실되고 없었는데 새로 신축된 마을이라 한다. 〈『천안시 동남구청』 병천면 지명유래.〉
〇 역주1 : 근동면(近東面)은 일명(一名) 갈전면(葛田面)이라고도 한다. 관문에서 동쪽으로 백전리(栢田里)와 선성리(善性里)가 10리(里)이며, 병천리(竝川里)와 송림리(松林里)와 서원리(書院里)는 20리이고, 덕성리(德星里)와 도원리(桃源里)와 반계리(磻溪里)와 광기리(廣基里)는 25리이다. 명암리(鳴岩里)는 28리이며, 매당리(梅堂里)와 명성동(明星洞)은 30리이고, 의관동(衣冠洞)은 35리, 소근리(所斤里)는 38리, 석항리(石項里)는 40리이다.
〇 역주2 : 도원리(桃源里) 면실(勉實)마을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1779년(기해) 충청도 청주목 천안군 목천현 근동면 도원리(忠淸道 淸州牧 天安郡 木川縣 近東面 桃源里) → 1895년 5월 26일(을미년 임오월 병신일, 1895년 양력 6월 18일) 공주부 목천군 근동면 도원리(公州府 木川郡 近東面 桃源里) → 1896년 8월 4일(병신년 을미월 기축일, 1896년 음력 6월 25일) 충청남도 목천군 근동면 도원리(忠淸南道 木川郡 近東面 桃源里) → 1914년 4월 1일(갑인년 정묘월 정사일, 1914년 음력 3월 6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郡 葛田面 桃源里) → 1942년(임오)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郡 並川面 桃源里) → 1963년 1월 1일(임인년 임자월 갑진일, 1962년 음력 12월 6일) 충청남도 천원군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原郡 並川面 桃源里) → 1991년 1월 1일(경오년 무자월 신미일, 1990년 음력 11월 16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郡 並川面 桃源里) → 1995년 5월 10일(을해년 신사월 신축일, 1995년 음력 4월 11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市 並川面 桃源里) → 2008년 6월 23일(무자년 무오월 갑오일, 2008년 음력 5월 20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市 東南區 並川面 桃源里)가 되었으며, 현재에 이른다.
(5) 김수경(金壽慶, 1664~1717)
김수경(金壽慶)은 만중의 손자(孫子)이다. 〈『대록지』 곤(坤) 「유행조(儒行條)」.〉
〇 역주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30세이며, 1권 604쪽 6단에 등재되었다. 수경(壽慶, 1664~1717)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字)는 여인(汝仁)이며, 호(號)는 호연정(浩然亭)이다. 만중(萬重, 1608~1676)의 장남인 일우(一宇, 1644~1713)의 장남이니 만중에게 손자가 된다. 묘는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이원동면 화청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덕리 산 59번지 선영이다.
(6) 김최경(金最慶, 1682~1765)
김최경(金最慶)은 익종의 증손(曾孫, 손자의 아들)이다. 〈『대록지』 곤(坤) 「문예조(文藝條)」.〉
〇 역주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30세이며, 1권 605쪽 6단에 등재되었다. 최경(最慶, 1682~1765)의 자(字)는 여선(汝善)이며, 만중(萬重, 1608~1676)의 3남인 일우(一宇, 1644~1713)의 독자이다. 묘(墓)는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이원동면 화청리(忠淸道 淸州牧 木川縣 二遠東面 華淸里)의 종산(宗山)에 위치하였는데 충청남도 천원군 광덕면 원덕리 산 7번지(忠淸南道 天原郡 廣德面 院德里 山 7番地)로 개편되었다. 국가(國家)가 종산을 수용함으로 말미암아 1990년 12월 10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郡 並川面 桃源里)로 이장하였다. 2024년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도원리(忠淸南道 天安市 東南區 並川面 桃源里)이다.
(7) 김성구(金聖耈, 1690~1749)
김성구(金聖耈)는 만중의 증손(曾孫, 손자의 아들)이다. 임인년에 등제(登第)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아들은 군수(郡守) 도혁(道爀)이다. 아들 도환(道煥)은 을유년에 증제하여 온성부사(穩城府使)이다. 손자(孫子)는 시화(時和)인데 을묘년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덕원부사(德源府使)가 되었다. 손자(孫子) 시필(時弼)은 기유년에 등제하여 충청 병마우후(忠淸兵馬虞候)가 되었다. 손자(孫子) 시번(時樊)은 갑자년에 등과(登科)하여 훈련주부(訓練主簿)가 되었다. 〈『대록지』 곤(坤) 「무직조(武職條)」.〉
〇 역주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31세이며, 5권 776쪽 1단에 등재되었다. 성구(聖耈, 1690~1749)의 본관은 강릉, 자는 덕로(德老)이다. 임인년 과거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묘는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이원동면 화청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덕리 산 59번지 선영이다. 장남은 목천군수(木川郡守)를 역임한 도혁(道爀, 1713~1784)이다. 3남 도흡(道熻, 1719~1779)의 장남인 손자(孫子) 시화(時和, 1757~1807)는 을묘년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덕원부사(德源府使)가 되었다. 4남 도환(道煥, 1724~1793)은 을유년 과거에 급제하여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4남 도환의 장남인 손자 시필(時弼, 1763~1793)은 기유년 과거에 급제하여 충청 병마우후(忠淸兵馬虞候)가 되었다. 4남 도환의 3남인 손자 시무(時懋, 1778~1821)는 갑자년에 등과(登科)하여 훈련주부(訓練主簿)가 되었다.
(8) 김성기(金聖耆, 1694~1732)
김성기(金聖耆)는 익종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대록지』 곤(坤) 「문예조(文藝條)」.〉
〇 역주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31세이며, 5권 789쪽 1단에 등재되었다. 성기(聖耆, 1694~1732)의 자(字)는 덕랑(德郞)이며, 수경(壽慶, 1664~1717)의 차남이다. 묘는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이원동면 화청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덕리 산 59번지 선영이다.
(9) 김도혁(金道赫, 1713~1784)
김도혁(金道赫)은 세마(洗馬) 만중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며, 부친은 선전관(宣傳官) 성구(聖耈)이다. 〈『대록지』 곤(坤) 「문예조(文藝條)」, 같은 책 「효자조(孝子條)」.〉
〇 역주 : 한림공 삼괴당공 목천파 32세이며, 5권 776쪽 2단에 등재되었다. 도혁(道赫, 1713~1784)의 본관은 강릉, 자는 사장(士章)이다. 세마 만중(萬重, 1608~1676)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며, 부친은 선전관(宣傳官) 성구(聖耈, 1690~1749)이다. 묘는 충청도 청주목 목천현 이원동면 화청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덕리 산 59번지 선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