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더전 4 - 경덕진에서 도자기를 보면서 원나라 신안유물선과 고려청자를 생각하다!
10월 23일 루산庐山(여산) 에서 버스를 타고 주장치처짠 九江汽車站(구강기차참) 에 도착해
10시 30분 버스를 갈아타고는 1시간 40분을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려 12시에 도자기
도시 징더전 景德镇(경덕진) 에 도착해서 주차장의 行李奇存(행리기존) 에 배낭을 맡깁니다.
반바퀴를 돌아 시짠(西站 서참) 이라 불리는 景德镇汽車站(경덕진기차참) 터미널로 들어가
무원 가는 버스표를 끊은 다음 택시를 타고 징더전 런민꽝창 景德镇 人民广场
(경덕진 인민광장) 에 도착해 도공들이 도자기를 만들거나 운반하는 청동 조각상 을 봅니다.
그러고는 인민광장 을 나와 도로를 건너니 여러 빌딩들이 모두 도자기를 전시 하고
있는데.... 그 중에 도자국제무역중심 (陶瓷国际贸易中心) 이라는 빌딩으로
들어가니 점포들은 고급으로 한눈에 보아도 품질과 수준 이 뛰어나다는 것을 느낍니다.
징더전 景德镇(경덕진) 은 장시성(강서성) 동부 도시로 안휘성 경계선인 양쯔강의
남안에 위치한 중국 제일의 도자기 도시 로 송(宋) 의 경덕연간 (景德年間) 인
11세기에 시진(市鎭) 이 설치되었으니 중국 4대진(四大鎭) 의 하나로 알려졌습니다.
원래는 신핑(新平) 이라 불리다가 양쯔강(揚子江) 의 남동쪽에 있다고 하여.... 창난전
(昌南鎭) 이라고도 하였으며.... 푸량(浮梁) 이라고도 불리다가 송(宋) 나라
경덕연간(景德年間) 인 1004年 에 징더전 이라고 개칭하여 지금 까지 그대로 불립니다.
경덕진 부근에는 도토(陶土) 가 많으니 한(漢) 때부터 도자기를 굽기 시작하여
수당시대 부터 희게 칠한 “가옥기” 라는 도자기를 구웠다는데.....
남조(南朝) 진(陳) 나라때 부터 도자기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송(宋) 나라 때 생긴 징더전요(景德鎭窯 경덕진요) 에서 나는 도자기는 조정에 진상하는
공품(貢品) 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송나라에서 원나라시대를 거쳐 명나라 시대에
광동 분산진, 호북 한구진, 하남 주선진 과 더불어 도자기 4대 명소 로 불렸다고 합니다.
명(明) 의 선덕연간 (宣德年間) 에 어요(御窯) 가 건조되면서 도자기의 생산이 활발해
졌다는데.... 주로 생활용품, 미술제품과 건축용품으로 유명하며 북쪽
푸량(浮梁) 과 남쪽의 러핑(樂平) 등지에서 양질의 자토(瓷土) 가 생산되고
경덕진 부근에서 유약의 원료 도 산출되어 도자기 제작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경덕진 도자기 들이 한국에 왔으니 신안 유물선 으로, 원대에 징더전 동쪽 닝보(영파)
를 출발해 일본 하카다(후쿠오카) 로 가던 배가 고려땅 신안 앞바다 에서
침몰했는데..... 몇 년전에 그 배 를 건져내어 목포 박물관에서 전시회 를 연 것입니다.
“ 전남 목포시 국립해양문화재 연구소 에 ‘신안선과 그 보물들’ 특별전이 열렸으니
길이 34m 의 거대한 선체 잔해(殘骸) 와 한때 여기 실렸던 4500여 점의
유물 들이 오버랩돼어 관람객을 압도했다. 신안선 정면과 옆면으로
고급 목자재인.... 자단목 (紫檀木) 과 도자기 진열장 이 배를 감싸듯이 배치 됐다.”
“ 각기 따로 떨어져 있을 땐 느낄 수 없던 옛 무역선의 생생함 이 694년의 간격을 뛰어
넘어 고스란히 전달됐다. 본래 배와 화물은 한 몸뚱아리니 당연한 조합이겠지만,
이런 장면이 가능하기 까지 무려 41년이 걸렸다. 신안선과 유물들의 소장처가
각각 목포 국립해양문화재 연구소 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안선은 원나라 무역선 으로 1323년 6월(음력) 중국 경원 (慶元· 저장성 닝보)
에서 출항해 일본 하카타 (博多·후쿠오카) 로 향하던 도중 전남 신안군 앞바다
에서 침몰했다. 1976년 한 어부가 바다에서 도자기를 발견한 일을 계기로
수중 발굴이 시작돼 1984년 까지 9년에 걸쳐 총 2만4000여 점의 유물 을 건져 올렸다.
“신안선 과 배에 실린 유물 4,500여점 을 나란히 보여주는 건 전례 없는 시도다. 앞서
몇년전 발굴 4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은 유물 2만여점 을
풀어놓는 과감한 전시 기법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선체 재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 전시는 유물 수량은 중앙박물관 전시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어디서도
대체할 수 없는 선체 원형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다.”
"닝보(영파) 출항 당시 신안선 은 일본 귀족들 이 사용할...... 중국의 고급 도자기
들과 값비싼 향신료, 약재, 자단목, 동전 등을 가득 실은 상태였는데...
그 중에 하얀색 유약 을 입힌 중국 원나라 시기의 ‘백탁유도기’ 가 눈길을 끌었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선 다양한 색상의 유약을 입힌 화려한 도자기들 이 눈길을
잡아끈다. 이 중 하얀색 유약이 흘러내리는 느낌을 살린 백탁유(白濁釉)
도기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회화 를 연상시킨다. 7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촌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세련된 감각의 수작 이다. “
“신안선 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들이 있다. 항해 중간에 고려를 들렀는지,
침몰 직후 생존자들이 존재 했는지가 그것이다. 이번에 전시된 고려청자 와
청동숟가락 은 고려인의 탑승 가능성과 고려 기항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려 유물의 수량이 워낙 적은데다가 화물표 목간 내용이 주로 일본 사찰 과
관련된게 적지 않아 한반도를 경유하지 않았을 거라는 견해도 제기된다.”
생존자 존재 여부와 관련해 연구소는 이번 전시에서 새로운 주장을
소개했으니.... 신안선 승객 일부가 침몰 직후 살아남았을 가능성 이 높다는 것이다.“
“일본 승려인 다이치(大智) 선사 의 전기에 “1323년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 도중
흑풍을 만나 고려 연안에 표류해 고려 충숙왕을 알현했다. 왕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으로 향하던 다이치 선사가
표류한 1323년은 신안선이 침몰한 해 이기도 하다. 고려사에도 “충숙왕
11년(1324년) 7월 19일 표류민 220명을 일본으로 귀국 시켰다” 는 내용이 있다.“
“문동수 연구소 전시홍보과장은 “신안선 발굴 은 우리나라 수중 발굴의 효시” 라며
“2023년 신안선 출항 700주년 을 맞아 블록버스터급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고 밝혔다“
956년 중국 후주(後周) 의 사신단 일행으로 온 쌍기(雙冀) 는 병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남았다가 고려 광종 의 눈에 들어 958년 당나라의 과거제도를 고려에 도입 했는데
이후 그의 건의로 중국 도자기 기술자를 초빙해 고려자기 가 시작되고..... 이어
독창적인 기법을 발전시켜 세계 도자기사에 유명한 고려청자 가 탄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청자는 조선초에 사라져 버렸으니 몇가지 이유를 들수있는데 먼저 왜구의 침탈 이니...
공민왕시기 급증한 왜구는 우왕 (1374~13858 14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370회 나
달했으니 강화도가 함락되고 수도 개경이 왜구에게 위협 당했으며, 고려청자 생산지
강진 등 해안 지방은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변해 황폐화 됩니다.
조선초에도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태종 은 섬 사람들을 육지로 철수시킨 공도령(空島令) 을
시행했는데 고려시대에는 함경도에 사는 여진족 (고려 국경선은 평안남도 ~ 원산) 들이
강원도 동해안과 일본 서해안, 심지어 규슈 까지 해적질 을 다니며 중도에 울릉도에
기항하는지라 사람이 살지 못했는데, 조선조에서는 아예 울릉도를 싹 비워버린 것 입니다.
그래도 조선은 고려 보다는 나은게 3년에 한번씩 순시선 을 보내 불법 거주자를 잡아오는데
1693년 안용복 이 고기 잡으러 울릉도에 가니 일본사람들이 집을 짓고 거주 하는지라
"일본령" 이라 쓰인 나무 팻말을 빼서 던지며 항의하다가 돗토리현 요나고로 잡혀갔으며,
1882년 울릉도를 수색하니 거주자가 일본인 140명에 조선인 78명 이라.... 놀란 고종의
조선 조정은 1883년 일본인을 추방하고는 전라도와 경상도 백성들을 울릉도에 식민 시킵니다.
두번째로 비싼 고려 청자 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산과 강으로 자기땅을 구획하는 대지주 인
권문세가 들인데,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과 조준등은 고려시대 토지문서를 불사르고
땅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토지세와 특산물, 부역에 병역 의무를 지자면
농민이 토지를 소유해야했기 때문이니 권문세가의 몰락 으로 고려청자는 수요를 잃었습니다.
세번째로는 조선은 유교 를 국가경영 이념으로 택했으니 질박하고 근검한 정신 에다가...
사치를 금하고 무역마저 중단해 쇄국정책 으로 들어가는지라 청빈한 이미지 백색
이 강조되니 14세기 중국에서 생산된 백자 기술을 15세기에 받아들여 청화백자 를
생산하게된지라 푸른색 화려한 고려청자는 밀려나고 청화백자는 이조백자 로 이어집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도자기를 China” 라고 부르듯 '중국은 도자기의 고향’ 이니 전세계에
도자기를 수출하는 나라인데, 경덕진(景德鎭) 은 자기(磁器) porcelain 의 고향 으로
조선 백자에도 영향 을 끼쳤으며 경덕진의 도자기 전통 은 현재도 계승되고 있다고 합니다.
징더전 (景德鎭 경덕진) 주민들은 대부분이 도자기 생산에 종사 하고 있으며.....
종래의 고급품 제작 외에 대량생산 도 하고 있다는데 현재 도자기 제조
판매 외에도 유수의 전자공업기지이며 비행기 및 자동차 제작도 한다고 합니다.
현재 징더전 (景德鎭 경덕진) 에는 1,450개 학교와 도자기 학원, 도자기 연구소 가
있으며 지금은 관광지로 변한 "고령토" 라는 이름이 유래한 유명한
가오링산 (高嶺山 고령산) 에다가 고요(古窯) 의 옛터 가 관광객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흙을 고령토 라고 하는데 그 “고령” 이라는게
바로 여기 가오링산 (高嶺山 고령산) 의 고령(高嶺) 에서 온 것임을 경덕진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으니 박제균 씨 신문 칼럼 “中國夢(중국몽), 한국부터 깨야” 기사가 떠오릅니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 미중(美中)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 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했다는 말인데, 135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 1882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무역협정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인데 조선 을
'청의 속방(屬邦)’ 으로 명기하고 있으니 종주국과 종속국의 관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이 체결됐는데 청나라 이홍장이 조선을 대리해 조약을 체결했으니
이홍장 은 조약 1조에 조선이 청의 속방 임을 명기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자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서라도 조선이 속국 이라는 점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습니다."
"왕조시절 중국은 한국을 식민지로 여기지 않고 내치에도 간여하지 않았지만 독립국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으니... 조선은 광해군 을 세지로 책봉한 다음 윤근수를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세자 책봉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나 명나라가 거부 하니 이후
수없이 사신을 보내는데.... 그럼에도 명나라의 승인에 목을 메는게 조선 이었습니다."
이 도시 경덕진에는 타오츠관 陶瓷馆(도자관) 이라고 있으니 9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징더전의 도자기 를 전시해 놓은 곳으로 시대별로 분류 되어 있어 도자기 변천
과정을 이해하기 쉬우며 또 관내의 흠자허에서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 볼수도 있다고 합니다.
서쪽 도자박람구 古窑民俗博覽區 의 타오츠리스보우관 陶瓷歷史博物馆 에는 昌江(창강) 의
高嶺村(고령촌) 에서 생산된 자토로 청자 를 만들었으니 1004년 송나라 진종이 연호를
하사해 경덕진 으로 이름을 개명했는데 방문객도 도자기 제조과정을 구경할수 있다고 합니다.
구야오츠창 古窑瓷广(고요자광) 이라고 박람구 오른쪽에 도자(陶瓷) 역사박물관 이 있으니
청나라때 왕실에 바칠 도자기를 굽던 어용요를 재현해 놓은곳 으로 DPT 공예품, 작업장,
고요실이 보존되어 있으며 청대의 방식으로 제조하는 가마를 볼수 있는데 20위안 이랍니다.
중국은 송나라 시대에 세계적인 첨단 기술이었던 도자기 제조법 을 가졌으며 화약, 나침반,
인쇄술과 종이 등 4대 발명품을 서양에 전했으니 칼 마르크스 는 이 발명품들이
유럽에 전해져 근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태동 할수 있었다고 격찬했었는데.... 이후
쇄국주의로 빠져 1840년 아편전쟁에 패배 한후 중국은 종이 호랑이 라는 비웃음을 샀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양대 강국 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으니.... 김용석 씨가 동아일보에 쓴 “‘워라벨’ 대신
‘에밀레’ 택하는 1% 인재들” 이라는 기사가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국내 정보기술(IT) 대기업 의 최고경영자(CEO) 인 A 사장은 정부 고위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말하기를‘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상위 1% 인재 들이
이젠 우리 회사에 안 들어옵니다. 몇년 사이 신입사원 수준이 뚝 떨어졌어요.’”
“부장급 연봉이 1억 원을 훌쩍 넘는데다 복지도 국내 최고 수준인 회사고 이미지도 좋다.
그런데 왜 인재가 오지 않을까. 입사한 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이 성장하기
어렵다고 본다는게 회사가 진단한 이유중 하나다. 보통 일하기 좋은 회사라고 하면
천국 같은 복지 혜택 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상위 1% 인재를 끌어들일수 없다"
“회사와 함께 성장할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한다. 세계 천재들이 모이는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이라고 하면 언제나 제공되는 훌륭한 음식들, 소파에 누워 자유롭게
일하는 문화, 아무 때나 출퇴근하는 유연한 근무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상당수 직원들이 그 어느 곳 보다 많은 시간 일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실리콘밸리에 각성하는 목소리가 나오니‘벤처캐피털의 전설 마이클 모리츠' 는
17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실리콘밸리가 달콤한 복지 혜택에 젖어있는 동안
중국 벤처는 쉬지 않고 일한다. 열심히 일하면 많이 얻는다는 중국 벤처 정신이
미국을 앞서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중국을 따르는 게 현명할 것” 이라고 했다. 라네요?
“중국 창업가들은 손만 뻗으면 닿을듯한 성공을 갈구하며 미친 듯이 일한다. 실리콘밸리
에 진출한 중국의 A급 인재들이 캘리포니아의 파란 하늘을 버리고
미세먼지 가득한 중국으로 유턴하는 것은 ‘워라밸’ (일과 삶의 조화) 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열망을 좇기 위해서다.” 라니.... 중국의 굴기 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첫댓글 정말로 중국 도자기 엄청납니다.
신안선도자기 중국이 안 돌려주라고해서 다행입니다
하아..... 신안 유물선?
하기사 원나라 배와 유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