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문화해설 자료입니다. 퍼온글이니 재미로 읽으세요.
용두암과 용연야범
제주대학교 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에서 해안으로 200여m 간 곳에 용두암이 있다. 용두암에 얽힌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①용궁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오르려다 굳어졌다. ②용왕의 사자가 한라산에 불로초를 캐러 왔다가 산신이 쏜 화살에 맞아서 죽었는데 그 시체가 물에 잠기다가 머리만 물위에 떠 있다. ③용이 승천할 때 한라산 산신령의 옥구슬을 입에 물고 달아나려 하다 산신이 쏜 화살에 맞아서 죽었는데 그 시체가 물에 잠기다가 머리만 물위에 떠 있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흘러내리던 용암이 굳어진 것이다.
용두암의 동쪽에는 용연이라는 깊은 못이 있는데 한천의 하류이고 바다와 연결된다. 내의 양쪽에 7-8m 높이의 병풍 같은 바위가 서 있는데 옛 선비들이 이 곳에 배를 띄우고 낚시를 즐기고 달밤에 주연을 베풀며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관덕정(대한민국 보물 322호)․제주목 관아터00(사적 380호) 삼도2동 43-3번지 일대
보물 322호인 관덕정은 조선시대 건물로서 세종30년(1448)안무사 신숙청(辛淑晴)이 군사들의 훈련청으로 제주의 중심지인 현 위치에 창건한 후 8차의 중수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28개의 민흘림기둥으로 떠받쳐진 단층누각이다.
관덕정 앞마당은 창건 당시부터 연무장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활쏘기 시합을 하게 되면 목사와 판관 등이 이 정자에 좌정하여 시합 상황을 지켜보곤 하였다. 또한 관민이 서로 더불어 의논할 일이 있거나 큰 잔치를 베풀 때에도 이 곳에서 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5일장터로도 이용하였고 광복이 되어서는 한 때 도청 청사로 활용되거나 북제주군청 청사로도 활용한 적이 있다. 이 광장은 지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도민과 살아 숨쉬어 왔고 우리의 정신이 숨겨진 곳이라 하겠다.
제주도에서는 대표적인 옛 건물로서 들보 양면에는 작자 미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모두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한 것이 안타깝지만 격조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내용을 보면 〔醉過楊州橘滿軒〕〔商山四皓〕〔赤壁大捷圖〕〔大狩獵圖〕〔陣中西城彈琴圖〕〔鴻門宴〕〔十長生圖〕이다. 지금은 그림이 퇴색하여 전혀 알아볼 수 없다. 다만 전에 찍어 둔 사진이 있으므로 최근 그림 복원 0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두 작품은 복원하여 모충사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다.
제주목은 선사시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정치․행정․경제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제주도는 제주부(濟州府), 대정현(大靜縣), 정의현(旌義縣) 등 이른바 삼읍(三邑)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제주목의 관청이 있었던 곳이다. 관아터에는 관덕정 앞 파출소 바로 서쪽에 〔守令以下皆下馬〕라고 쓰인 옛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보통 ‘하마비’라고 부른다. 제주부에는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을 목사로 두었는데 때에 따라서는 종이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자가 부임하기도 했다. 당시 목사가 있는 동헌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물론 이 포정사문 앞을 지나는 사람도 이곳에 이르면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게 했다. 비단 이 비는 통행인에게 하마를 명한 데 그치지 않고 목사가 있는 정청(政廳)을 알리는 표석이기도 했고 경종비(警鐘碑)이기도 했으므로 목사보다 낮은 품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지역에 이르면 누구나 몸가짐을 근엄하게 하 여 소란을 떨거나 방자한 행동을 삼가게 했다.
복신미륵 (지방민속자료 제1호) 제주시 건입동 1275,0 용담동 385.
이 石像은 ‘資福’ ‘資福彌勒’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건입동에 있는 동자복과 용담동의 서자복은 둘 다 달걀 모양의 둥그스름하고 얌전한 얼굴에 벙거지 같은 감투를 써서 늠름히 서 있는 모습으로, 그 키는 290cm이다. 어느 것이나 다 형상과 조각 수법이 같은 것으로 보아 동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신기한 것은 동자복과 서자복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미륵이 있는 자리는 萬壽寺, 일명 동자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서미륵이 있는 자리는 海輪寺, 일명 서자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 두 사찰은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절은 없어지고 원래 이 사찰에 세워졌던 미륵불만 남은 것이다.
두 미륵이 민간에서 命福神으로 숭배되고 있음은 같은데 구체적으로는 그 기능이 조금씩 다르다. 동미륵은 사찰이 없이 민가의 뒤뜰에 있으며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집안의 除厄과 育兒에 특히 효험이 있다 하여 근처의 민간인들이 승려를 청해 오든지 또는 본인대로 택일하여 수시 치제하고 있다. 서미륵은 현재 용화사 구내에 있는데 이 미륵을 보호하기 위하여 龍王閣이라는 각을 지어 놓았었다. 이 미륵이 용왕신앙과 관련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근처의 주민들0은 해상어업의 안전과 풍어, 출타한 가족의 행운을 빌면 효험이 있다 하여 치제하고 있다. 1995년을 전후하여 용왕각은 ‘미륵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제주향교 濟州鄕校 (제주도 유형문화재 2호) 제주시 용담동 298번지
제주도에는 제주향교, 정의향교, 대정향교 3개의 향교가 있었으며, 향교가 세워짐으로써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의 발달을 보았으나, 조선 중엽부터는 서원이 압력을 받게 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문묘제향으로 유지하고 있다.
제주향교는 조선 태조1년(1392) 제주성내 교동(지금의 원정로)에 처음 창건하였는데, 1827년 이행교 목사가 서문 밖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계성사․좌우협문․삼문․전사청이 있으며 공자상(孔子像)이 세워져 있다.
대성전은 문묘(文廟)이며 그 안에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 등의 5성(聖)과 공문(孔門) 10철(哲), 송조 6현(宋朝六賢), 우리 나라 신라․고려․조선의 18현을 봉안하고 있다.0
명륜당은 유학을 강의하여 안재를 양성하는 강당이며 지금의 학교 교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현판에는 ‘新安朱熹書’라고 낙관되어 있다.
계성사는 5성(聖)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제향된 위패는 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의 아버지이다. 처음에 김몽신 등이 몇 차례 상소하여 계성사의 건립을 요청하였었는데 1854년 가을에 이르러 또 유생 고사징(高泗澄)이 요청하자 당시 영의정 김좌근이 왕에게 아뢰어 윤허를 얻어 세우게 되었다. 계성사는 옛 도읍지에만 세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고인돌 용담동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데 우리 제주도에서는 주호 시대로부터 탐라시대에 이르는 동안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시 한천변에는 고인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중 찾아보기 쉬운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공항 고인돌 공항에는 2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용담동 751번지 속칭 먹돌생이에 있었던 것을 공항 확장 공사에 따라 현지로 0이전 복원하였다. 상석은 길이 285cm, 폭 205cm, 두께 35cm로 할석상 지석이 4군데 고여 있다. 상석에는 성혈이 1개 확인되었다.
다른 하나는 용담동 755번지에 있던 것이다. 상석은 길이 275cm, 폭 212cm, 두께 55~75cm로 괴석상 지석이 4군데 고여 있다.(제주 고인돌 조사보고 19~20쪽)
②사대부고 고인돌 용담2동 587번지 사대부고 내 본관 건물 북서쪽 구내 소나무 사이에 있다. 상석은 길이 270cm, 폭 207cm, 두께 50~105cm로 비탈면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장축은 북동쪽을 가리키며, 비탈면은 남서쪽이 낮고 낮은 쪽으로 상석의 하부시설이 노출되고 그 좌우에 판석상 지석을 고였다. 지석 2매는 각각 65×65×10cm, 50×63×12cm의 크기이다.(제주 고인돌 조사보고 19쪽)
③용담2동 고인돌 제주시 적십자회관 부근 남성 로타리에서 ‘우리식품’ 쪽으로 300여m 가면 남쪽으로 난 좁은 길이 있는데 100m 못 미쳐 개인화물자동차 사무소가 있고 그 울타리 안에 고인돌이 있다. 상석은 길이 315cm, 폭 217cm, 두께 105cm으로 장축 방향은 정남북이다. 지석은 11매의 잘 다듬은 높이 68~90cm, 폭 39~74cm의 판석으로 상석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병풍처럼 고였다. 매장부는 1959년 조사 때 길이 160cm, 폭 100cm의 장방형의 테두리를 괴석으로 돌리고 바닥면에 자갈돌을 깐 시설이 지석으로 이루어진 석실 한가운데서 확인되었다고 한다.(제주시 1991년 제주 고인돌 조사보고 18쪽) 이 고인돌은 지상에 매장부가 있으면서 판석형 지석이 13개인 것 즉, 판석으로 벽을 쌓아 놓고 벽안에 시신을 놓은 후 큰 돌을 지붕 삼아 덮은 형태였으나 판석 2개는 없어져 버렸다. 현재까지 제주도에서 발견된 고인돌 중에 가장 큰 것으로 상석의 무게가 8~10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고인돌이지만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건축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박물관에 있는 고인돌 모형은 바로 이 고인돌을 본뜬 것이다.
산천단 곰솔 제주시 아라동
제주시에서 5.16도로를 따라 8Km 지점에 산천단이 있다. 이 곳에는 곰솔(Pinus thunberginia Franco ; 해송 또는 흑송이라 불리기도 함) 노목 8그루가 우람하게 서 있는데 이 나무들은 1964년 1월 31일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곰솔은 잎0이 짙은 녹색이고 길이 9-14cm로 두 개씩 엽초에 모여나며, 수피(樹皮)는 흑갈색이고, 겨울눈(冬芽)은 백색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서쪽으로 경기도, 동쪽으로 강원도 명주군까지 바닷가를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주 분포지역은 남부 지방과 제주도의 해발 700고지 이하이다. 이 곳의 노목들은 수령 500-600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수고(樹高) 19-23m, 흉고직경 3-6m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곰솔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이 곳 부근이 상당수의 곰솔로 군락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은 주변이 야초지로 변해 있다. 지금 이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이 곳이 신성한 곳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거목들이 지금까지 보호되어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제주목사(이전 탐라왕국 시대에는 탐라왕 또는 왕의 신하)는 백록담에 올라가 천제(天祭)를 올렸으나 산길이 험하고 날씨가 나쁠 때에는 동사자가 생기는 등 이를 시행하기가 어려워 조선 때 이약동 목사가 이 곳에 제단을 만들어 천제를 드렸다고 한다. 산천단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며, 곰솔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그늘에는 1300년 전부터 천제를 지냈던 제단과 이약동 목사가 세웠다는 ‘漢拏山神古禪碑’가 남아 있고, 현대(단기4323년)에 세운 이약동 목사 기념비(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가 귀부이수(龜趺이首)를 갖추어 서 있다.
삼성혈 사적134호(1961년6월15일 지정) 제주시 이도동 1313번지
삼성혈은 제주도 원주민의 발상지로 고․양․부 三神人이 湧出하여 수렵생활로 皮衣肉食하다가 오곡육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의 삼공주를 맞이하여 이 땅에 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다는 탐라개국신화(耽羅開國神話)가 깃든 곳이다.
李元鎭의 耽羅志 古跡條에는 다음과 같이 삼성혈과 삼성신화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三姓穴在州南三里 卽古毛興穴 高麗史古記云 厥初無人物 三神人從地湧出 今鎭山北麓有穴曰毛興是其地也 長曰良乙那次曰高乙那三曰夫乙那 三人遊獵荒僻 皮衣肉食 一日見紫泥封木函 浮至東海濱就而開之 內有石函 有一紅帶紫衣使者隨來 開函有靑衣處女三人及諸駒犢五穀種 乃曰 我是日本國使也 吾王生此三女云西海中嶽 降神子三人 將欲開國而無配匹 於是命臣侍三女而來宜作配以成大業 使者忽乘雲而去 三人而歲次分娶之 就泉甘土肥處 射矢卜地 良乙那所居曰第一徒 高乙那所居曰第二徒 夫乙那所居曰第三徒 始播五穀且牧駒犢就富庶”
“삼성혈은 제주에서 남쪽 3리쯤 되는 곳에 있으니, 옛 이름은 모흥혈이다. 고려사 고기에 이르되, 애초에 사람이 없더니 땅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다. 지금의 한라산 북녘 기슭에 모흥굴이라 부르는 혈이 있는데 이것이 그곳이다. 맏이가 양을나요, 버금이 고을나며, 셋째가 부을나다. 세 사람은 거친 두메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더니 하루는 자주빛 흙으로 봉해진 목함이 동해변에 떠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안에는 석함이 있는데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함을 여니 속에는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의 씨앗이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세 따님을 낳으시고 말씀하시되 서해중의 산기슭에 신자 세 사람이 강탄하시어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라 하여 왔습니다. 마땅히 배필을 삼으셔서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세 사람은 나이 차례에 따라 나누어 장가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점치었다. 양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일도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이도라 하고, 부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삼도라 하였다. 비로소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게 되니 날로 백성이 많아지고 부유해 갔다.”(현용준, 제주도 신화. 22-24쪽)
‘瀛州誌’ 高得宗, 序 世文의 기록에 의하면 ‘射矢卜地 高乙那 所居 曰 第一都 漢拏山之北一徒里, 良乙那 所居 曰 第二都 漢拏山 右翼之南 山里房 今 大靜也, 夫乙那 所居 曰 第三都 漢拏山 左翼之南 土山里 今 旌義也’라 하여 여기서 일도, 이도, 삼도는 현재의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이 아닌 제주, 대정, 정의를 말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제주성지(제주도 기념물 3호) 제주시 이도1동 1437-6.
제주성은 탐라시대부터 축성된 성곽으로 다공질 현무암을 이용하였는데 당초의 성의 규모는 알 수 없다. 주성(州城)은 길이 5489자, 높이 11자인데 격대 27개소, 화살막이 타첩 404개이다. 동 서 남으로 세 개의 문이 있었고, 남북으로 두 개의 수문이 있었으니 고량부 삼을나의 소거지라 하였다. 성안에 식수가 없었으므로 명종 21년(1566) 목사 곽흘이 성을 밖으로 물려 쌓아 2중성으로 하고 가락천과 산지천의 물을 성 안 사람들이 쓰게 하였다고 한다.(제주의 문화재 122쪽) 이 성을 언제 쌓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태종 16년(1416)에 정의현성이 축성되었고 태종 18년(1418)에 대정현성이 축조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에 비하여 훨씬 먼저 축성되었을 것이다. 충렬왕 28년(1302)에 중국에 보고한 공문서 중에 탐라 등처에도 지계를 나누어서 봉수를 설치하고 병선을 감추어 놓고 하여 밤낮으로 살피고 순찰하여 오로지 일본국의 적도를 방어한다 하였으니 본도에 봉수대가 설치되는 시초로 보인다. 이 때에도 주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없음을 보면 주성은 이보다도 앞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성벽을 헐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써 버렸기 때문에 성의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고, 1997년 8월에는 성벽 바로 남쪽으로 길을 내었는데 치성 두 개가 길가에서 볼 수 있는 상태로 노출되었다. 성벽은 복원되었으며 오현로로 인해 성벽은 끊어졌는데 길 동쪽은 단 몇 m에 불과하지만 복원한 것이 아니라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오현단 남쪽을 비롯하여 제주의료원의 남쪽 등 몇 군데에 불과하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제주기상대의 축대, 제주의료원 서쪽, 남문로터리 동북쪽 등에 성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는 석축물이 있는데 이것들의 위치로 볼 때 주성의 일부가 아닌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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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단 五賢壇 제주시 이도1동
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교학에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했던 곳이다. 오현이라 함은 1520년에 유배된 김정, 1534년에 목사로 부임했던 송인수, 1601년 안무사로 왔던 김상헌, 1614년 유배왔던 정온, 1689년 유배왔던 송시열 등 다섯 분이다. 단은 원래 1578년 조인준 판관이 가락천 동쪽에 김정 선생을 모시는 충암묘를 세운 것이 시초였는데 1655년 최진남 판관이 현재 위치로 옮겼으며, 숙종 임금이 1682년 ‘귤림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리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4현을 봉향하다가 1695년 이익태 절제사 때 송시열이 추향되었다. 1871년 전국의 서원을 철폐할 때 귤림서원도 철폐되었으나 1892년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5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송시열의 ‘증주벽립’이라는 마애명,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 향현사유허비, 그리고 조두석(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 5 개가 있다.
향사당 鄕社堂 (지방유형문화재 제6호) 제주시 삼도1동 973-2.
향사당은 제주의료원 정문 북쪽 100여m 길 서쪽에 있다. 향사당은 고을의 閑良들이 춘추 2회의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酒饗을 베풀며 그 동안에 닦은 기량을 겨루고, 당면 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하여 논하던 곳이다.
향사당은 당초(연대미상) 가락천 서쪽에 창건되었으며 숙종17년(1691) 이우항(李宇恒) 절제사 당시 김동(金凍) 판관이 현 위치로 이건하고 향사당(鄕射堂)이라 題하였다. 정조21년(1797) 류사모(柳師模) 방어사는 이름을 鄕社堂이라 改題 遍額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에 좌수의 처소로 이용되었고, 1879년에는 신성여학교 교지로 이용된 바 있다. 1981년에 改建했는데, 건물은 도로변에 접한 관계로 좌향이 동남향이던 것을 북동향으로 바꾸었다. 양식은 韓式 一字 八作 지붕과 오고주 七樑이며 退間과 내진수 사이에 우물마루가 있고 바닥은 강회다짐을 했다. 기둥은 角校 민흘림, 基壇은 현무암 자연석을 이용했다.
원당사지 오층석탑 (대한민국 보물 제1187호,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
오층석탑은 제주시 삼양1동 696번지 원당봉 불탑사의 동쪽 울타리에 붙어 있다. 이 석탑은 고려 충렬왕26년(서기1300) 우리 나라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원의 기황후의 지시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당시 원나라 순제에게는 태자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북두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의 땅에 탑을 세워 불공을 드려야 한다는 승려의 계시를 받아들여 탐라국 원당봉을 적지로 선택하게 되어 이 곳에 원당사를 짓고 사자를 보내어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원당봉이 적지라는 것은 삼첩인 원당봉과 그 북쪽에 작은 봉우리가 벌려 있기 때문이다.(제주도의 문화유산. 118쪽)
기황후란 고려 사람으로 관료였던 기자오(奇子敖)의 딸이며 기철(奇轍)의 누이인데 1333년(충숙왕 복위 2년) 고려 사람 내시 고용보(高龍普)의 힘으로 원 왕실의 궁녀가 되어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았으며 딸을 하나 낳았고, 1339년 황태자 아이유스리다례를 낳았으며, 다음해 1340년 4월 제2황후에 책봉되었다. (이 기록으로 보면 기황후의 발원에 따라 절을 세웠다는 앞의 주장은 틀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황후가 되자 실권을 장악하여 쇠운이 깃든 원나라를 극도의 부패와 혼란에 빠지게 하였으며, 고려 조정에도 큰 영향을 끼쳐 기철 일파로 하여금 탐학과 횡포를 자행하게 하였으므로 이 후 공민왕의 자주운동 때에는 기철 일파의 세력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된다.(「동아세계대백과사전」 6권 283쪽, 「역사신문」2권 84, 86쪽)
당시의 절은 화재를 당하여 없어져 버렸고 탑만 남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원당사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불탑사로 되어 있다. 탑은 고려시대의 조각수법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데 1층 기단 위에 5층탑으로 구성되었다. 다공질 현무암으로 높이 395cm, 측면 너비 84cm, 정면 너비 89c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받침돌의 3면에는 연꽃무늬가 음각되어 있고, 한 면에는 네모난 홈이 있다. 탑의 맨 위에 있는 진주 모양의 조각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천제연폭포와 채구석기적비
옥황상제를 모시는 칠선녀가 한밤중이면 자주빛 구름다리를 타고 옥피리를 불며 내려와 맑은 물에 미역감고 놀다 올라간다고 하여 ‘하느님의 못’이란 뜻의 천제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폭포의 수심은 21m나 된다. 폭포 주변의 울창한 난대림은 천연기념물 제182-7호이다. 난대림 안에는 송엽난을 비롯하여 담팔수, 구실잣밤나무, 조록나무, 참식나무, 가시나무, 빗죽이나무, 감탕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바람등칡, 마삭풀, 남오미자, 왕모람, 자금우, 돈나무, 백량금, 석위, 일엽, 바위손 등이 자생하고 있다.(내고장 의미 찾기 제주관광가이드 84쪽)
천제연폭포 주차장 서쪽 소나무숲 안에는 채구석 기적비가 있는데 군수 재직시 논을 만들어 준 데 대한 공덕비이다. 비의 크기는 관석과 대석을 합하여 180cm이다. 비 전면에 “通訓大夫大靜郡守蔡龜錫紀蹟碑”라 새기고 이면에 碑記와 함께 비 건립에 관계한 사람과 연대를 기록하고 있다. 비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대정현 천제연폭포는 중문천이 흘러 靈沼를 이루었다. (중략) 누구나 이 곳을 探勝하는 사람은 嘆美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물을 당겨서 민생을 이롭게 한 사람은 없었다. 채구석이 이 곳을 한 번 보고 난 후 玩賞에만 그치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관개에 이용된다면 만인을 살릴 수가 있는데 그 방도가 없겠는가를 궁리했다. 비록 물 있는 곳이 낭떠러지가 되어 물 끌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지세를 잘 이용하여 바위를 뚫고 한 줄기 물길을 열어 놓았다. 이 물이 성천봉 아래까지 2-3리 끌어당겨 5만여 평의 땅을 水田으로 개간하였다.(하략)”고 되어 있다.(제주도,「제주의 문화재」, 330쪽)
法華寺址(지방기념물 제13호)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법화사지는 서귀포시 하원동 우회도로 북쪽에 있는데 현재의 법화사 주위에 옛 법화사의 유적이 있다. 법화사는 13세기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元의 순제가 날로 세력이 강해지는 明의 주원장을 염려하여 만일의 경우 피난처로 탐라에 궁전을 지었는데 이 법화사지가 바로 그 궁전터라고 전해진다. 공민왕 16년 무렵 元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순제는 만일의 경우 피난처는 제주도뿐이라고 여겨 사전에 피난처 적격지를 조사하기 위해 몽고인 단장 1인과 중국인 부단장 1인을 파견한다. 순제는 피난처로 타당하다는 보고 결과에 따라 제주에 궁전을 짓게 하는 한편 사신 고대비를 파견하여 제주에 황실의 금은보화를 옮기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 의하면 피난궁전 건설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조선태종실록에 의하면 명(明)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사신을 보낼 만큼 법화사에 안치되었던 불상이 걸작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책에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주의 법화사 노비 280명과 수정사 노비 130명을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각각 30명씩만 가지게 하고 나머지는 전농사(典農司)에 속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법화사에 속한 사원전(寺院田) 등 사찰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며 탐라에서는 가장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60년 경내 정리 작업중 당시 건물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지름 65cm나 되는 주춧돌 10개(전장 15cm, 가로 90cm, 세로 7cm)와 70여개의 축대들이 발견되어 이를 지방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제주도의 문화유산」 116-117쪽)
그러나, 원래 법화사는 원나라 순제가 피난궁을 지으려고 하기 훨씬 이전인 통일신라시대 문성왕1년(839)에 장보고가 창건한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장보고는 청해진과 중국 산동성 적산촌, 우리 동포들이 거주한 양자강 하류 그리고 제주에 법화사(법화원)라는 같은 이름의 절을 지은 것이다. 고려시대 충렬왕5년(1279)에는 충렬왕비(장목왕후)의 원찰(신분 높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지정하여 다니는 절)로 중창되었다. 이 때부터 국가가 지정하는 비보사원(裨補寺院)이 되어 국찰이 되었다. 그리고 왕은 공주(충렬왕비 장목왕후를 말함)와 두 차례에 걸쳐 친히 법화사에 행차하였다. 법화사의 불상 반납을 요구한 명의 황제라고 하는 왕은 영락제(永樂帝)이며 영락제는 부모인 주원장 부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남경에 황실의 원찰 대보은사를 세우고 거기에 모실 부처님을 구하게 되는데 가장 원만하고 자비하신 부처님으로 제주 법화사의 아미타삼존여래가 회자되어 꼽히게 되어 반납 문제로 외교적 쟁점이 된 것이다. 그 사신은 조선에서 90여일을 머물다 금동미타삼존여래상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4328년 4월 16일, 법화사 주지 시몽스님, 법화사, 사적지 도지정 문화재 법화사 연혁 및 역사. 1-3쪽)
정방폭포와 서불마애명
정방폭포는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이다. 높이는 23m, 깊이는 5m 폭 8m이다. 두 줄기로 떨어지는데 까만 절벽에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한 물줄기에서 피어오르는 물방울로 인해 햇빛을 받으면 무지개가 생긴다. 이 절경을 정방하폭이라 하여 영주십경의 하나로 꼽았다
서귀포의 지명은 제주도의 원주민의 구성에 관한 설화 중 서불과차설(徐巿過此說)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정방폭포의 절벽에 「徐巿過處」의 마애명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記) 28년조(條)에「旣已 齊人徐巿等 上書言 海中有三神山 名曰 蓬來 萬丈 瀛州 仙人居之 請得齊戒 與童男女 求之於是 遣徐巿發 童男女數千人 入海求仙人 ……」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서불이 시황제에게 글을 올렸는데 동남녀와 함께 바다를 항행하여 봉래 만장 영주의 삼신산에 가서 신선과 같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약을 구해다 폐하께 바치고자 합니다. 시황제는 이를 허락하고 동남동녀 삼천명과 여러 가지 곡식과 공인들을 딸려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 때 일행이 영주산(한라산)의 불로초를 캐려고 제주도에 들렸다가 정방폭포의 절벽에 「徐巿過處」의 마애명을 새겨 두고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서귀(西歸)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다. 이것은 이들 일행의 잔류자가 제주도 원주민인 삼성인(三姓人)이 되었다는 설을 포함하기도 한다.(「설촌유래」, 21-22쪽)
그러나, 서불의 전설은 최근 중국과 일본이 고대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논거가 되고 있는 것으로서 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까지 초래하게 된다고 본다. 서불은 원래 약장사를 하던 사기꾼으로서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는 구실로 진시황의 학정에서 도피한 망명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계는 서불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고대부터 일본으로 진출하여 문화를 전래하였다는 우월심 때문이고, 일본 또한 한반도에서 문화를 배워 간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전해 받았다는 학설의 논거를 위해 서불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제민일보 4328년9월18일)
외돌개와 열두 동굴
삼매봉 남쪽 해안은 외돌개, 우두암, 선녀바위 등이 있고 절벽과 바다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데 이 곳 절벽에는 인근 주민들이 ‘열두 동굴’이라 부르는 높이 약 3m, 폭 약 3m, 깊이 10여m쯤 되는 인공굴 12개가 있다. 이것은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판 것이다. 일본군은 미군이 상륙하려 할 때 폭탄을 실은 ‘소형 어뢰정에 몸을 싣고 함정에 부딪혀 적과 함께 자폭’하도록 어린 병사들을 훈련시켜 두고 있었고, 그 소형 어뢰정을 숨겨 두는 곳이 바로 이 동굴이다. 따라서 동굴에서부터 바다 속으로 기차길과 같은 레일이 깔려 있다. 그러나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일본군의 이와 같은 전술은 실천에 옮겨질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인공굴은 제주도 해안의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성산 일출봉의 해안 절벽, 송악산 남동쪽 산이수동 해안 절벽, 고산 수월봉 해안 절벽 등 특히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일본군의 헛된 욕망에 의해 보기 흉하게 구멍이 뚫려 파괴되고 말았다.
천지연폭포․바위그늘집자리․패류화석
천지연폭포는 높이 22m, 너비 12m, 폭포 밑의 수심 22m이다. 물 속에는 천연기념물 제23호인 무태장어가 서식하고 있으며, 계곡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163호인 담팔수가 자생하고 있다.
천지연폭포에서 남쪽으로 500미터 지점에 이르는 하천 서쪽 절벽 경사면에는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바위그늘집자리가 있다. 천지연(솥밭내) 주변의 얕은 구릉과 절벽 위의 넓은 대지가 당시 생활 영역권에 속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78년 정영화 교수의 지표조사를 통해 유물이 발견된 범위는 동서 길이 4미터, 남북 길이 10미터 가량이다. 지표 아래 20cm 지점의 갈색 토층과 현무암편이 섞인 층에서 첨기(尖器 point) 1점, 홈날석기(Encoche, Notch) 1점이 나왔으며, 이 밖에 전형적인 돌날 8점 박편 6점이 있다. 이들 석기는 후기구석기에 속할 수 있는 형태학적 특징을 갖고 있으며, 전체적인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후기구석기시대 중에서도 중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천지연폭포 주차장에서 바다 쪽으로 가면 서귀포시 삼매봉 해변에 신생대 제3기인 플라이오세(世)에 속하는 해성층(海成層)인 서귀포층이 발달하고 있는데 이 곳은 천연기념물 제195호이다. 층의 두께는 50-60m이며 이 곳에 3매(枚)의 현저한 패류화석대(貝類化石帶)가 있음이 특징이며 이 층의 상하는 모두 용암류(熔岩流)와 부정합(不整合)으로 접하고 있다. 이 지층은 주로 회색 또는 회갈색을 띤 역질사암, 사암, 사질셰일 및 점토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위 화석대(化石帶) 외의 암석 중에서도 많은 동물화석들이 산출된다.(제주도, 제주의 문화재, 32쪽) 이 패류화석지대에서는 어류의 등뼈․이빨 등 각종 화석 150여 점이 발견되었다.(한겨레신문 4327년8월17일) 패류화석의 거의 대부분이 현생종(現生種)이지만 현재는 그 곳 또는 그 부근의 해역에서 서식하지 않고 있어 이것이 서귀포층 퇴적 당시의 고환경(古環境)을 유측(類測)하는 데 큰 자료가 된다.(제주의 문화재 32쪽)
화석에 나타나는 종류의 조개류는 현재 제주도 지방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열대 지방에서 서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수백만 년전의 제주도는 지금의 열대 지방과 같이 온도가 높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지미망 指尾望(봉수대)
제주도의 방어시설은 조선시대 초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주성은 탐라국시대부터 있었지만 제주에 왜구의 침략이 여러 차례 있은 후 조선 세종 19년(1437) 정월에 韓承舜을 안무사로 임명하여 방어 시설을 갖추도록 하여 정비되기 시작한 것이 3성(제주성, 대정성, 정의성) 9진(김녕,조천,별방,애월,명월,차귀,동해,서귀,수산) 10수전소(화북포,조천포,魚登浦,애월포,명월포,閱雲浦,서귀포,모슬포,塞浦,友浦) 25봉수대(통신망) 38연대(감시망)이다. 봉수와 연대는 군사통신시설로서 진 또는 수전소로 연락하였다.
봉수는 해변 가까운 산악에 설치하여 50리 밖을 후망하고, 연대는 해변 높은 지대에 설치하여 적선인지 표류선인지를 확인하였다. 통신방법은 밤에는 횃불(烽), 낮에는 연기(燧)로 하는데 거화법은 5거법으로 평상시에는 1개,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나면 2개, 지경에 가까이 오면 3개, 지경을 침범하면 4개, 접전이면 5개로 통신하였다. 그러나 안개 등 날씨 관계로 연락이 불가능할 때는 봉졸이 직접 달려가서 연락하였다. 봉수와 연대 주변 100보 이내에서는 봉수로 오인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火氣를 사용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였다. 봉수와 연대에는 별장 6인과 봉군 12~36명이 배치되어 1番(組)에 별장 2인과 봉군 4~12명씩 3번으로 나누어 3교대로 24시간 수직하였다. 봉군은 인근에서 충당하되 이들에게는 다른 군역을 부과하지 않았다.(제주의 문화재 증보판 312쪽)
구좌읍 종달리 지미봉 정상에 수산진에 속한 지미망 즉 봉수가 있었다. 봉수대 남동쪽으로는 수산봉과 성산일출봉, 북서쪽으로는 별방진, 남서쪽으로는 독자봉이 위치한다. 지미봉수는 성산봉수(5.4Km)․왕가봉수(8.3Km)와 교신하였다. 이 봉수는 중심부에서 반경 21.4m(내부반경 12.5m) 거리에 둑을 돌아가면서 사이에 고랑을 두어 이중으로 쌓고, 다시 한 단계 높게 반경 12m, 둘레 37m, 높이 2.3m의 봉우리 형태로 토축한 두 겹 원형 봉수이다.(제주의 방어유적 194쪽)
이곳에 오르면 바다 건너 잡힐 듯이 우도가 보이고 일출봉과 섭지코지의 모습이 절경이다. 오름 머리와 구름이 허리를 감고 있는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 또한 오름에 오르는 멋이라 할 것이다.
아부오름 구좌읍 송당리
구좌읍 송당-대천간 도로 건영목장 입구에서 남동쪽으로 약 800m 지점, 건영목장 안에 위치한 오름이다. 이 오름은 전사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가운데 크고 넓은 원형의 대형 분화구가 있고, 이 화구는 깊이가 78m로 오름 자체의 높이 51m보다 27m나 더 깊이 패여 들어가 있다. 화구 안 사면의 중간 부분에서는 일부 자연 침식되어 있어 스코리아층의 노두단면을 관찰할 수 있다. 특이하게 우리 나라에서는 황해도 이북에서만 자라는 ‘피뿌리풀’이 자생하고 있다.
‘아부’라는 이름의 어원은 ‘앞’(前)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亞父)의 뜻으로 플이하기도 한다.
하도리 철새도래지
구좌읍 하도리의 창흥동․동동․지미봉 기슭에는 수십만평의 면적에 물과 갈대가 어우러져 있는데 매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황새․저어새 등의 희귀조를 비롯하여 백로․갈옥․청둥오리 등의 철새들이 한겨울 동안 이곳에서 보금자리를 튼다. 지하수를 이용하여 송어와 숭어를 기르는 양식장의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각종 철새들의 먹이가 많고 주변이 비교적 조용하여 철새들이 서식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내고장 의미 찾기 「제주관광가이드」 121쪽)
별방진성 別防鎭城 (제주도 기념물 제24호) 구좌읍 하도리 성 3354-57
성은 하도리 마을을 둘러싸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중종5년(1510) 목사 장림이 쌓았다. 왜선의 정박지가 우도였기 때문에 왜구를 막기 위하여 김녕의 방호소를 이 곳으로 옮겨 별방이라 하였다. 둘레 2890자, 높이 7자, 동 서 남 세 곳에 문(초루)이 있었다. 지금도 ‘동문’ ‘서문’이라는 명칭이 남아 있다. 성안에는 샘이 2 곳 있었으나 해변이므로 물맛이 짜다. 다른 진보다 병력이 갑절이나 되었다. 성을 쌓을 때에 흉년이 심하여 부역 장정들은 인분까지 먹어가며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현장의 안내판)
둘레 960m의 타원형 성으로 전체적인 지형은 남고북저(南高北底)가 되고 있다. 성의 보존 상태를 보면 동문지와 서문지는 민가에 의해 변형되어 그 위치만 찾아 볼 수 있으며, 남문지에는 옹성만이 훼손이 심한 상태로 남아 있고 문루는 남아 있지 않다. 남문지의 동쪽은 1995년 일부를 복원하였는데 2단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속 채움은 돌만 사용한 구간이 있고 돌과 흙을 혼용한 구간이 있다. 성벽 상부는 완벽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없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미석(眉石 ; 석성의 상부, 여장 밑에 여장을 쌓기 위해 눈썹처럼 판석을 약간 나오게 설치한 돌)과 여장(女墻 ; 성 위에 쌓은 낮은 담으로 총구와 살받이가 있는 구조물)이 있었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옹성의 축조는 성벽과 일체식으로 하였으나, 치성(雉城)의 축조는 성벽을 먼저 축성한 후 덧쌓는 방법으로 하였다.(제주의 방어유적 80-90쪽)
비자림 (천연기념물 제182-2호, 제374호)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
구좌읍 평대리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약 6Km 되는 지점에 비자나무가 약 45ha의 광대한 면적에 집단적으로 자생하고 있다. 비자림은 300~800년생 비자나무 2570그루가 밀집하여 군락을 이룬다. 나무의 높이는 7-~14m, 직경은 50~11cm, 수관폭은 10~15m에 이르고 있어 단순림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숲 속 중앙에는 제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로 알려진 900년 이상 된 비자나무가 있다. 키 25m, 둘레 6m로 비자림의 조상목이라고도 한다.
주목과에 속하는 비자나무는 암수 딴 그루로 나이테 분간이 어렵기 때문에 정확한 수령을 알기가 힘들다. 15~20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지난해에 맺힌 열매가 올해 가을까지 달리고, 올 봄에 피어난 꽃이 열매로 달려 내년 가을에 수확한다. 지방분이 있어 비자유를 짜기도 하는데 기관지 천식이나 장기능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무는 재질이 좋아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 데 이용되어 왔다. 예부터 섬의 진상품으로 바쳤던 비자는 구충제로 많이 쓰였고, 음식이나 제사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삼림욕에 가장 좋은 나무가 비자나무숲이라고 하는데 혈관을 유연하게 하고 정신적 육체적 피로회복과 인체의 리듬을 되찾는 자연 건강 휴양 효과도 있다.(내 고장 의미 찾기 「제주관광가이드」 116쪽)
이 비자림은 완전히 자연적으로 숲을 이루었다고 보기보다는 조선시대에 진상품을 안정적으로 마련하기 위하여 비자나무 이외의 나무를 계속적으로 베어내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비자나무가 주를 이루는 숲이 된 것으로 보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실제로 다른 수종 중에는 수령 100년을 넘는 나무가 드물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비자림에 관찰로가 개설된 것은 1992년이며, 청소년수련소, 야영장 등이 설치되어 있다.
만장굴 (천연기념물 제98호)
세계 최대의 용암동굴인 만장굴은 구좌읍 동김녕리 산7번지에 위치한다. 용암굴이란 화산이 분출할 때 땅 속 깊이 잠겨 있던 암장이 화구로부터 솟아나 지표면으로 흘러내리면서 생긴 동굴이다. 길이가 13.442m이며, 관람할 수 있도록 허용된 길이만도 1Km이다. 여기서 말하는 총길이는 만장굴 8928m와 김녕사굴 70.5m, 그리고 이웃한 밭굴과 개우셋굴 3789m를 같은 시스템에 포한한 것이다. 만장굴은 높이 3~20m(보통 6m)이며, 너비는 3~23m(보통 4~5m)이고, 굴 안의 온도는 15~18℃, 습도는 87~100%를 유지하는데 항상 쾌적하다. 70cm나 되는 용암석순을 비롯하여 용암튜브터널․용암선반․용암기둥․거북바위 등 대표적인 용암굴로서의 다양한 형태뿐 아니라 경관면에서도 우수하다.(내고장 의미 찾기 「제주관광가이드」 118쪽)
산굼부리 조천읍 교래리
3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된 화산 분화구인 산굼부리는 다른 분화구들과는 다른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즉, 다른 분화구들은 용암과 화산재가 쌓여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상에서 위로 볼록하게 솟은 오름을 형성하면서 정상에 분화구가 생긴 데 비하여, 산굼부리는 용암이 강력한 폭발에 의해 날아가 버리고 분출물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봉우리를 형성하지 않고 평지에서 밑으로 분화구만 생긴 형태라는 점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내부 면적 30만㎡에 내부 밑둘레 756m, 외부 둘레 2070m, 깊이가 130여m로 백록담보다도 조금 크고 깊은 분화구이지만 분화구에는 물이 조금도 고이지 않는다.
분화구 안에는 ‘식물의 보고’라 할 만큼 42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노루․오소리 등 수많은 포유류와 조류․파충류 등이 살고 있다.(내고장 의미 찾기 「제주관광가이드」 110쪽)
고두기엉덕 바위그늘집자리 조천읍 북촌리 고두기엉덕
북촌리 마을에서 해안일주도로를 따라서 동쪽으로 150m쯤 가면 남쪽으로 올라가는 좁은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이 길을 따라 300m쯤 올라가면 왼쪽에 유적이 있다. 해안에서 직경 거리 600m, 해발 20m의 들판 가운데에 용암동굴의 천정부가 무너져내려 최대직경 50m의 陷沒地가 형성되었다. 유적지는 그 동북쪽 절벽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을 ‘고두기엉덕’이라 부른다. ‘엉덕’이란 바위그늘의 제주 사투리이다.
바위그늘 집자리의 정면 길이는 11m, 최대 높이 2.5m, 입구에서 안쪽까지의 거리 3m로 입구는 정남향으로 트였다. 동쪽 바닥면은 천정에서 무너져 내린 커다란 암반으로 평탄면을 이룬 반면 서쪽은 잔돌층 위에 인위적으로 잡석을 깔아 고르게 다듬어 놓았다. 이 잡석층 위 여러 지점에 검정 재가 있었고, 갈판, 갈돌 등의 製粉用 도구와 炭化된 개산초 열매가 발견되어 이 구역에서 부엌일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층에서부터 쌓인 堆積層位는 다음과 같이 구분되며, 이 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토기는 押印點列무늬토기, 二重口緣(겹아가리)토기, 기타 토기로 나눌 수 있다.( 「제주도지」. 623-625쪽)
① 제1층(표토층 ; 지하 15-25cm) - 비교적 많은 양의 조개와 동물 뼈의 파편이 섞인 흑갈색 토층이다. 근래에 버려진 유물도 포함된 교란층이나 원래는 耽羅시대 문화층인 것으로 파악된다.
② 제2층(갈색 사질토층 ; 표토 아래 30-45cm) - 역시 조개와 동물 뼈 조각이 많이 섞이고 州胡시대와 耽羅시대의 적갈색 토기 파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③ 제3층(다소 밝은 흑갈색 점토층 ; 35-55cm) - 조개와 동물 뼈는 적은 양이 섞여 있으며 주로 州胡시대의 적갈색 토기 파편이 출토되었다.
④ 제4층(밝은 갈색 점토층 ; 52-72cm) - 조개편이 제3층보다 많아진다. 이 層位에서 인공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으나 여러 점의 구멍무늬 토기편과 골아가리 무문토기편이 이 층에 소속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⑤ 제5층(밝은 갈색의 사질토층 ; 67-83cm) -조개편(보말,소라,전복 등)은 화석처럼 서로 엉켜 붙었으며, 신석기시대 유물이 원형대로 출토된다. 바로 밑바닥으로는 신석기시대 당시의 생활면으로 이어진다.
북촌 환해장성① 北村還海長城 조천읍 북촌리
북촌리에는 마을 동쪽 동복리 경계로부터 용물이 있는 곳 「선진수산」에 이르는 약 500여m의 환해장성이 남아 있다. 고두기엉덕 입구에서 맞은편으로 내려가면 바닷가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보인다.
부분적으로 무너진 곳이 있지만 온전하게 보존된 곳도 있어서 장성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짐작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무너진 곳은 대부분 바깥쪽으로 무너져 있다. 높이는 지형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2.5m정도이고, 너비는 2m 정도로 넓은 곳과 1.2m 정도로 좁은 곳이 있었다. 동쪽으로 갈수록 상단 폭이 좁다. 회곽도로 보이는 시설이 있는데 안쪽 지면과의 높이가 2m가 넘는 상태이고 회곽도와 성벽의 높이도 어른의 키를 넘는 정도여서 회곽도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회곽도와 이어지는 꽤 넓은 공간을 둔 곳이 두 곳 보이는데 다른 장성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설이다. 이 시설이 있는 곳은 특히 안쪽 지면과의 높이가 높고 작은 밭과 이어져 있다. 이곳 성은 바깥쪽에서의 높이보다 안쪽에서의 높이가 1m 이상 더 높게 되어 있는데 이는 안쪽이 농경지이고 바깥쪽은 굵은 돌들이 있는 것을 그대로 이용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여장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장성의 바깥쪽에는 현대에 설치한 전투경찰초소가 군데군데 들어서 있고, 그와 관련된 통로를 만들어 놓았으며 장성의 일부를 반쯤 허물어 통로와 연결한 곳이 있다.
북촌 환해장성② 北村還海長城 조천읍 북촌리
서쪽 환해장성은 학교 옆길로 내려가서 바닷가에서 서쪽으로 가면 서우봉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장에서 만난 지역 주민의 말로는 4․3 때 쌓은 성이라는 증언과 환해장성이라는 증언으로 엇갈리고 있으나 92세 되신 분이 어렸을 적부터 있었다고 하며 그 성을 부르기를 ‘장상’이라고 하고, ‘아홉 장성을 쌓은디, 다 쌓안 보난 손손지가 났더라’라는 말이 전해 온다(4330. 3. 19. 통화)고 하는 것을 보면 환해장성이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아홉 장성’이라고 해서 수를 말하는 것은 아홉 개의 진성(鎭城) 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환해장성과 9진을 혼동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4․3 때 쌓는 것을 보았다는 분의 말은 이미 있는 환해장성을 4․3 때 보수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성을 쌓은 목적을 강한 북서풍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져 버린 부분(학교 아래쪽, 1조합)에 대해서는 약 20년쯤 전에 군인들이 실어갔다고 하는데 그 돌들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곳의 성은 폭이 1m 정도이고 높이는 5-6m쯤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4m를 넘은 곳이 없다. 이곳에는 바닷가로 통하는 출입구가 직선을 중간에서 잘라낸 모양이 아니라 짐(주로 듬북)을 지고 출입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띄고 어긋나게 2-3m 정도 겹쳐지는 겹담 형식으로 나 있었다고 하며 그 위치는 ‘개코지’ 녀불턱에서 남남서 방향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확인이 어렵다. 군사적 목적의 환해장성을 일상 생업에 접목시킨 선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4․3 때 쌓은 성은 일주도로변과 학교 뒤쪽에 일부 남아 있다. 4․3 때에는 성담을 따라서 보초막이 세 군데 있었고 밤마다 보초를 서서 마을을 수비하도록 했었다. 그리고 4․3의 영향으로 6․25후까지도 보초막에서 경계근무를 했다고 한다.(황요범씨 증언 4330. 3. 19. 통화)
와흘 한거리하로산당 조천읍 와흘리
제2우회(중산간)도로 와흘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400여m 지점에 있다. 줄기 끝이 뿌리보다 더 밑으로 쳐질 만큼 큰 팽나무 신목이 堂의 분위기를 한층 위엄 있게 해 준다. 당은 마을 사람들이 깨끗이 관리하고 있으며, ‘백조도령’과 ‘서정승님’의 신위 위패가 조그만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당의 경내에 있는 본풀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堂神의 내력이 적혀 있다.
송당 소천국의 열여덟 자식 중에서 열한 번째 백조도령님이 성장하여 한라영봉에서 논흘일문도성책을 맡아 사냥을 하면서 내려오다가 기시내오름에서 발도 왼발, 손도 왼손, 귀도 왼귀, 눈도 왼눈, 왼발로 뛰며 다니는 선씨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선씨할아버지가 백조도령에게 ‘사람입니까, 신입니까?’ 여쭈니 백조도령은 ‘신이며 논흘일문도성책을 맡아 왔노라.’ 하였다. 선씨할아버지는 ‘그것은 아니됩니다. 한거리당에 왕대윗성가람실 밑에서 태어나신 서정승따님이 자손에 장적차지, 호적차지, 생산물고를 잡아 있어 안됩니다.’ 하였다. 백조도령이 ‘그 여자는 남편이 있느냐?’고 묻고 과수(寡守)며 일곱 애기를 혼자 양육함을 알고 선씨할아버지에게 중매를 부탁하고 선을 보아 한거리당에 같이 있게 됐으나 서씨부인은 자손들이 돝을 잡으면 생머심귀퉁어리 알아구리를 받아먹으니 깨끗치 못하다 하여 백조도령은 서씨부인에게 바람 아래로 내려 동백자리에 좌정케 하고 백조도령은 웃판상단으로 좌정하였다.(현장에 있는 본풀이 비석)
마을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풍년을 기원하고 본향당신에게 신년하례를 드리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신과세제’를 음력 정월초에 이 곳에서 치른다.(제민일보 1995. 2. 14.)
신흥리 방사탑과 왜포연대 조천읍 신흥리
신흥리 바닷가의 조간대(朝間帶)에는 물고기를 가둬서 잡는 시설인 원(垣)을 만들어 뒀다. 원담을 조금 넘서서면 마을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새벡개라 부르는 한적한 바닷가에 ‘새벡개탑’이 서 있다. 궂은 것(厄)이 들어오는 길목이라서 이를 막기 위한 방사탑을 세운 것이다. 현무암 잡석을 대강 다듬어 원뿔대 형태로 쌓았다. 층이 없는 허튼층 쌓기로 직벽을 이룬다. 높이는 2.4m, 너비는 3.4m정도가 된다. 탑 속은 잡석채움을 하였다. 탑 위에는 길쭉한 돌을 곧게 세웠다. 새를 뜻하는 것이나 이것 때문에 ‘양(陽=男)’이라고 한다. 듬직한 남자를 표현하려 위아래를 넓게 한 것이다.
음(陰=女)를 상징하는 큰개탑은 신흥포구(큰개) 방파제 끝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지막한 탑이 물 속에 잠길 듯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밑은 비교적 큰 돌이며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자연스러운 허튼쌓기로 쌓아올렸고, 맨 위는 오목하게 패여 있다. 바닷새가 잘 앉아 쉰다고 하여 생이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두 기의 돌탑은 북쪽에서 비추는 새(邪, 厄)를 막기 위하여, 또는 殺氣를 제하기 위하여 쌓은 것인데 신흥리 설촌이 200여년쯤 전(1801)의 일이고 분향 후 80여 년이고 보면, 축조된 것이 100여 년 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 탑들은 태풍이 불어 큰 파도가 탑을 덮쳐도 무너진 적이 없다고 한다. 큰 돌로 밑을 쌓고 작은 돌로는 위에 쌓으면서 끼움돌을 적게 써 정성 들여 축조한 것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주요 요인인 것 같다.(제민일보. 4328. 5. 3.“제주도의 석조물”)
왜포연대는 신흥리 ‘마농개(마을 서북쪽에 있는 바닷가)’에 있는데 다소 허물어진 채 주위는 가시덤불로 뒤덮여 방치되고 있다. 왜포연대는 다른 연대들과 구조가 다르게 직육면체 모양으로 되어 있지 않고 둥그스름하게 쌓아져 있고, 봉졸들이 출입하는 남쪽은 지형을 이용하여 돌을 많이 쌓지 않고 계단식으로 만들었으며, 연대 위에는 높이 1m정도의 방호벽을 이중으로 쌓았다. 신흥연대의 原形이 둥그렇고 상단에 이중방호벽으로 되어 있었느냐는 확실하지 않다. 전문가의 의견으로는 나중에 변형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신흥연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조천연대가 또렷이 보여 두 연대가 교신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연북정 戀北亭(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2690.
이 건물은 조선 초기 조천관으로 지어진 것을 선조23년(1590) 이옥(李沃) 목사 때 쌍벽정이라 이름 붙였는데 선조32년(1599)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건물을 중수하고 연북정(戀北亭)이라 이름을 고쳤다. ‘연북’이란 북녘에 있는 임금에게 사모하는 충정을 보낸다는 뜻이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했는데 지금 건물은 1973년에 수리한 것이다. 높이 14자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동남향으로 건축했으며 서쪽은 포구이다. 건물 북쪽에는 타원형의 성곽을 쌓았는데 이는 조천진성이다. 이 성곽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이 정자는 망루의 용도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재목을 결합하는 방식이나 기둥 배열 방식이 모두 제주도 주택의 형태와 같고, 바닥은 마루이며 벽이 없이 내부는 모두 개방되었다.
구엄리 돌염전 애월읍 구엄리
구엄을 비롯한 중엄과 신엄을 통틀어 속칭 ‘엄쟁이’라 한다. 예로부터 소금 곧 ‘鹽’을 제조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이 마을 사람들에겐 소금을 만드는 일이 생업의 한 수단이었는데 1945년을 전후하여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구엄 마을 포구 ‘철무지개’ 서쪽 ‘쇠머리코지’에서부터 중엄 마을과의 경계인 ‘옷여’까지가 소금밭이었다. 이 일대는 제주도의 다른 해안에 비하여 평평한 암반지대를 이루는데 그 길이는 약 400m이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50m이다. 이곳은 북서풍이 셀 때 파도가 쳐 올라올 뿐 바닷물에 잠기지 않는다.
소금밭은 공유수면상에 위치하여 지적도가 있을 수도 없지만 일정량 개인 소유가 인정되었으며, 매매도 이루어졌고 뭍의 밭에 비하여 값도 상당히 비쌌던 듯하다. 전통적인 밭 나눔과 같이 4표(四標)‘로 구획하였다. 한 가정에 보통 20~30평 정도의 소금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염 과정을 보면 ①물 운반 ②물 만들기 ③염도 확인 ④물 보관 ⑤소금 만들기 순으로 진행된다. ①허벅으로 바닷물을 지어 올린다. 농축도에 따라 호겡이의 위치를 바꿔간다. ②소금기가 농축된 바닷물을 물이라 하는데 소금빌레는 보통 여섯 개로 칸을 나누어 ‘두렁막음’을 한다. 물을 마련하는 구역을 ‘물아찌는돌’ 또는 ‘호겡이’라고 하고 소금을 직접 만드는 돌을 ‘소금돌’이라 하는데, 보통 여섯 개의 ‘호겡이’ 중에서 물을 만드는 호겡이가 넷이면 소금돌은 둘 정도이다. ‘물아찌는돌’에서 소금기를 농축시키는 일을 ‘춘다’고 한다. ③달걀로 염도를 확인한다. 달걀을 띄워서 가라앉으면 염도가 부족한 것이고 뜨면 물이 된 것이다. ④소금돌에서 바로 소금을 만들지 못한 물은 일정한 장소에 보관한다. 농축시켜가는 과정에서 비가 오거나 일조량이 부족하면 어차피 보관해야 하는 것이다. 비로 보관했을 때에는 비가 그치면 다시 내놓아 농축시키고, 일조량이 부족하면 겨울에 솥에서 달여 소금을 만든다. 물은 ‘’에 보관한다. ‘’은 가까운 곳에 찰흙으로 빚어 한 곳에 고정시킨 항아리이다. 사람이 그 안에 서면 목이 찰 만한 높이, 폭은 양 팔을 벌려도 충분할 정도이며 깨지지 않게 두껍게 만든다. 나중에는 큰 항아리를 썼다. 그 위에 빗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람지’를 덮는다. ⑤호겡이에서 햇볕으로만 물을 증발시켜 만든 소금을 ‘돌소금’이라 하고, 물을 솥에서 달여 만든 소금을 ‘은소금’이라고 한다. 돌소금이 넓적하며 굵어 품질이 높아 인기가 있었다.(「제주민속유적」 295~299쪽)
남두연대 南頭烟臺(제주도 기념물 23호) 애월읍 신엄리
신엄 마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길 바닷쪽에 붙어 있는 연대를 볼 수 있다. 연대는 옛날 적이 침입하거나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방호소나 수전소 등 군대가 주둔한 곳에 연락을 취했던 통신망의 하나이다. 제주도 일원에는 산을 이용한 봉수대 25개소와 해안선 고지대에 설치한 연대 38개소가 있었다. 남두연대는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연대의 규모는 높이 4m, 가로 8m, 세로 10m로 여기에는 별장 6인과 망지기 12명이 배치되어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제주병제총람에는 애월진에 고내망(봉수대)이 속해 있었고, 고내망에는 남두연대와 애월연대가 속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제주통사」. 104쪽)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한라장촉’에는 남두연대가 표시되어 있지 않고 지금의 남두연대의 위치에 해당하는 곳에 엄장포(嚴 莊浦)연대가 나와 있다.
항바드리 토성 土城(제주도 지방기념물 제28호)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
고려 때 무신들이 문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고 있던 때가 있었는데 최충헌이 오랜 기간을 집권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야간 경비를 하던 부대로 ‘야별초’가 있었다. 야별초는 후에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고종18년(1231)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그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고려군이 기회를 보아 탈출하여 오자 이들을 별도로 모아 ‘신의군’이라고 하였다.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합하여 삼별초라 불렀다. 삼별초는 그 당시 특수정예군이었으며 국내치안유지, 친위대, 몽고군과의 싸움에 있어서 전위대 역할을 하였다.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고종19년(1232)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고 끈질긴 항쟁을 하였으나 물리치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이에 대하여 배중손 장군을 중심으로 삼별초 군인들이 불복하여 승화후 온을 왕으로 받들고 고려와 몽고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작하였다. 원종11년(1270) 삼별초는 천여 척의 배에 사람과 물자를 싣고 진도로 가서 용장성을 쌓고 항전하였으나 고려 장수 김방경과 몽고 장수 흔도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배중손 장군과 승화후 부자는 전사하였다. 원종12년(1271) 5월 15일에 진도 용장성이 함락되니 김통정(金通精) 장군이 진도를 탈출한 사병을 거느리고 앞서 이문경 별장이 장악한 탐라에 들어와서 후일의 재기를 다짐했다.
김통정이 한라산 북쪽 귀일촌(貴日村)에 외성은 토성을 쌓고 내성은 돌로 성을 쌓으니 이것이 항바드리성이다.(‘항파두리’라는 말은 이 고장 지명 ‘항바드리’를 한자말로 옮겨적은 것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항바드리 윗 지경을 ‘장태코’라고 부르는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흐를 때면 지형이 마치 장태코에서 물이 흐르는 것과 같고, 그 아래 지경은 장태코에서 내리는 물을 받는 큰 물항아리처럼 생겼다 해서 이런 지명이 붙여졌다.) 이외에 애월포에는 목성(木城)을 쌓고 하귀포를 군항(軍港)으로 삼았다. 지금 동귀리를 군항동(군냉이)이라 함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성의 규모를 보면 외성인 토성은 둘레가 15리이며 성내에는 백성들을 살게 했고 석축을 한 내성에는 관아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토성의 면적은 약 27만평에 달했으며,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고, 내성은 둘레 약 1Km의 石城으로 알려지고 있다. 내성 안에는 대궐․관아․막사․병영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향사․옥사․사찰․군기고․곡창․훈련장․후망소․요지․우물․못(址) 등이 토성 안팎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북제주군지」. 141쪽)
이 곳은 지대가 높고 동서로 하천이 있어서 천연적 요새를 이룬다. 또 성밑에 있는 샘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식수의 확보가 용이하였으므로 이 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토성이 완성된 후에는 민가에서 재(木灰)를 거두어 성 위에 살포하였다가 적의 침공이 있을 때에는 말을 그 위로 달리게 했는데 말꼬리에 대빗자루를 달았으므로 재먼지가 충천하여 연막을 편 것처럼 성의 모습이 감추어졌다고 전한다.
외도․광령 고인돌군 제주시 외도동, 애월읍 광령리
제주시 서쪽으로 북제주군 애월읍과 경계를 이루는 외도천 서쪽의 너른 구릉상 지대, 해안에서 2-3Km 범위에 위치하는 유적지에 23기의 고인돌이 있다. 정식 발굴조사는 아니지만 地上조사를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곳 고인돌의 형태는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板石狀의 上石에 지석이 확인되지 않은 이른바 無支石式 혹은 蓋石式 고인돌이고, 둘째는 비교적 크지 않은 塊石狀의 지석을 낮게 고인 형식, 셋째는 상석이 아치 모양을 이루는 형식, 넷째는 판석상의 지석을 곧추 세운 형식으로 여기에는 다시 비탈면을 이용하여 낮은 곳에만 판석형 지석을 곧추 세워 고인 것, 3-4매의 판석형 지석을 고인 것, 10매 이상의 판석형 지석으로 상석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서로 아귀를 맞추어 고여 지석 자체가 석실을 구축한 것 등이다.
첫째와 둘째 형식은 매장부가 지하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셋째와 넷째 형식은 지상에 매장 시설을 둔 것으로 이해되며 시신은 橫口式으로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식은 아직까지 확실하게 남한 지방에서 발견된 바 없는 제주도 특수형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고인돌의 대부분의 상석에는 性穴이 있는데 많은 것은 60여개, 적은 것은 5개 내외가 확인되었으며 성혈은 고인돌이 아닌 큰 돌에도 있는 것이 목도되었다.(「북제주군지」 113-115쪽) 이는 支石의 표시적 기능 또는 用器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제주의 문화재」. 120쪽)
그 중 외도동과 광령리의 경계에 해당하는 곳(외도천 다리에서 1.9Km 지점)의 길가 밭담 바로 안에 있는 고인돌은 이 지방 사람들이 ‘지경돌’이라 부른다. 지경돌이 있는 곳에서 100여m 서쪽에 있는 고인돌은 상석이 두 개로 깨어져 있는 것이 있는데 깨어진 고인돌에는 상석 윗면에 수없이 많은 성혈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고인돌들이 판석형 지석을 하나 또는 둘 정도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광령 지경의 동북쪽에 있는 고인돌 하나는 밭담 가운데 위치하면서 판석 9개를 가지고 있어서 특이하다. 고인돌을 가운데 두고 두 밭이 나누어져 있는데 두 밭은 2m 정도의 높이 차이가 있다. 위쪽 밭에서는 고인돌의 상석 부분도 흙에 덮여 있어서 고인돌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래 쪽 밭에서 보면 판석이 이루고 있는 석실 내부를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석실 내부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다. 이 고인돌의 주변에서는 선사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 파편들이 발견된다.
난대림지대와 포제단 애월읍 납읍리 1457. 금산공원내
북제주군 애월읍 납읍리 납읍초등학교 바로 남쪽에 있는 조그만 동산으로 금산공원이라 불린다. 이 곳은 북제주군의 서부 지역에서 평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으로, 학술연구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주로 후박나무․생달나무․종가시나무 등이 상층목을 이루고, 하층에는 자금우․마삭줄 등이 全面을 덮고 있으며, 송악이 상층목의 樹冠을 감아 올라가고 있다. 수종의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나 전형적인 난대림相을 이루고 있다.(「제주의 문화재」. 42쪽)
이 고장의 원로들의 말에 의하면, 납읍 마을은 600년전에 설촌됐고, 당시 이 자리는 돌산이었으며 풍수에 따르면 화재를 당할 형국이라 하여, 이를 방지하고자 이 곳에 나무를 심고 포제단을 설치하며 벌채나 화입 및 입산을 금하도록 했는데 이 때문에 이곳의 지명이 ‘禁山’으로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제민일보 1995. 2. 9.)
금산공원 안에는 포제단이 있다. 포제는 이사제(里社祭)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을 지키는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보통 음력 정월초에 날을 정하여 제를 지내는데, 제일이 정해지면 마을의 입구에 금줄을 치고 며칠 전부터 제관들이 한 곳에 모여 지내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한다. 제관은 초헌(初憲), 아헌(亞憲), 종헌(終憲), 집례(執禮, 제의 순서가 적힌 홀기를 보며 낭독함. 오늘날의 사회자), 대축(大祝, 축문을 읽음), 알자(謁者, 제관의 행동을 안내함), 찬자(贊者, 집례를 도움, 집례가 ‘국궁배 - ’한 후에 ‘흥(興)- ’하고 구령함), 전사관(典祀官, 제물을 진설하는 책임을 맡음), 봉로(奉爐, 집사의 역할을 함), 봉향(奉香, 집사의 역할을 함), 도여차(都與次, 제관 중 유고가 생겼을 때 대신 맡음), 차지(次知, 궂은 일을 제관 대신 함) 등 12명으로 한다.
선인장 자생지 (제주도지방문화재 기념물35호) 한림읍 월령리
한림읍 월령리 바닷가와 돌덩이가 쌓여 있는 곳에 선인장들이 군락을 형성하여 자생하고 있다. 이 곳에 자생하는 선인장은 멕시코 원산으로 형태가 손바닥처럼 되어 있어서 ‘손바닥선인장’이라 한다. 선인장이 이 곳에 자생하게 된 것은 선인장 씨앗이 난류를 타고 이 곳으로 밀려와서 바위틈에 기착한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선인장이 해안에 자생하고 있는 곳은 제주도에서는 이 곳밖에 없어서 서기1976년 9월 6일 제주도지방문화재기념물 제35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제주도의 문화유산」. 357쪽)
금오름 今岳 한림읍 금악리
한자로는 今乙岳․琴勿岳․黑岳․琴岳․今岳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하고 있다. 이 이름들의 공통점은 ‘금’ 또는 ‘검’이라는 소리를 가졌다는 점이다. ‘검․감․곰․감’ 등은 어원상 神이란 뜻인 ‘’과 상통하며 고조선시대부터 쓰여온 말이라고 한다. 금오름(검은오름)은 결국 神이란 뜻의 어원을 가진 호칭으로 해석되며 예로부터 신성시되어 온 오름임을 알 수 있다. 금오름은 해발 428m에 비고 약 180m의 가파르고 둥글민틋한 사면을 가졌다.(「오름나그네」 365~366쪽) 금악-동광간 도로를 따라 오름 기슭에 이르면 남동사면을 사행(斜行)하는 길이 산 위까지 훤히 나 있다. 통신기지국 설치에 따른 도로로 자동차가 오름의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남북의 두 봉우리가 동서의 안부(鞍部)로 이어지면서 에워싼 타원형 화구에는 물이 고인다. 화구의 둘레는 1.2Km 정도이다. 이런 화구를 가진 화산을 호마테(HOMATE, 臼狀火山)라고 하는데 주로 화산쇄설물로 이루어지며 다소의 용암류를 수반하기도 한다. 火山碎屑丘의 일종이며 화산활동이 短命으로 끝난 것을 뜻한다. 이 화구호를 「금악담(今岳潭)」이라 하는데 이를 찬양하는 책(「한림읍지」. 1963)에는 ‘천고에 청징하여 가뭄이 계속되어도 수심이 내리지 않으니…… 백록담에 버금가는 분화구의 못’이라고 했으나, 요즘에는 가뭄이 들면 물이 말라 버린 적도 있었다.
환해장성 環海長城 한림읍 귀덕1리 바닷가
귀덕리 환해장성은 귀덕1리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500m 정도가 남아 있는데, 성 위의 폭은 1m쯤 되며, 성 안쪽에는 폭 1.5-2m, 높이 1m 정도의 회곽도(군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가 남아 있어 환해장성의 축조 양식을 알아볼 수 있다. 특히 이곳에는 하수 구멍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명월대와 난대림 군락 (지방기념물 제7호) 한림읍 명월리
명월대는 조선말 이 지방 유림들이나 시인묵객들이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명월대가 있는 천변(川邊)은 상류에서 하류까지 수백년 묵은 팽나무 60여 그루가 밀생하고 있어 자연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간간이 흐르는 물소리가 정결하다. 대는 마을을 끼고 있는 천변 중앙에 사각형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팔각형의 단을 1층 쌓고, 그 위에 원형의 반석을 만들었는데 요즘들어 바닥을 콘크리트로 처리하였으며, 1998년 1월에 다시 보수공사를 하였다.
축대 동쪽에 ‘明月臺’라는 현무암 석비가 세워졌다. 비의 규격은 높이 75cm, 너비 12cm이다. 뒷면에는 ‘昭和六年五月五日 明月里靑年會’라고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硏農 洪鍾時 書’라고하여 서예로 유명한 홍종시의 필적임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홍종시의 필적은 외도동 ‘月臺’ 碑, 삼성혈의 ‘乾始門’에서도 볼 수 있다.
명월대 바로 북쪽에는 1910년경에 시설한 돌다리가 있으며(「제주의 문화재」. 128쪽) 주변에는 수령 500년 이상의 팽나무와 푸조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고대 식물상을 연구하는 자료가 되고, 학술적 가치가 높아서 제주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키 13m, 가슴높이 둘레 5m 안팎인 나무가 10여 그루 있으며 산유자나무, 보리밥나무 등이 사이사이에 섞여 있어 웅장한 풍치를 보이고 있다.
명월진성 明月鎭城 (제주도 기념물 제29호) 한림읍 명월리
명월진성은 비양도에 왜선이 자주 정박하면서 민가에 피해가 크자 이를 방비하기 위하여 조선 중종5년(1510) 목사 장림(張琳)이 명월포에 쌓은 성으로서 성벽의 둘레는 3020척, 높이는 8척이었다.(탐라지) 선조 때 목사 이경록(李慶錄)이 개축하였다. 탐라지(耽羅誌)에는 “동문 서문 남문이 있고 성안에는 샘이 있으며 마치 샘물처럼 물이 솟아오르므로 사시사철 물 걱정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샘을 ‘조물’이라 하는데 그 위치에 지금은 정수장이 자리잡고 있다.
명월진은 별방진 성내에 있었던 동별창과 더불어 제주목의 중요한 창고였는데, 명월진내의 병고(兵庫)와 서별창(西別倉)에는 3300여석의 곡식과 흑각궁 향각궁 교자궁 장전 환도 천자총 등 주요 무기류가 보관되어 있었다.
두모연대 頭毛煙臺 한경면 두모리 2605.
명월진에 소속된 연대이다. 두모리 일주도로에서 북서쪽으로 500m쯤 가면 주위 해안보다 돌출된 지역에 두모포구와 인접하여 연대가 있다. 연대의 동쪽으로는 배령연대가 있는 금릉리 해안, 서쪽으로는 신창리 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대포연대(大浦煙臺, 직선거리 1.2Km) 서쪽으로는 우두연대(牛頭煙臺, 3.7Km)와 교신했다. 두모연대는 대지가 경사져 있어서 높이 1.2m의 석축을 쌓았으며, 연대를 이루는 돌의 크기는 폭 40cm, 높이 58cm 정도의 막돌을 이용하여 허튼층 쌓기로 구축하였다. 높이는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도대불’(등대 시설)로 사용하면서 상부가 허물어져 지금은 1.8m 정도만 남아 있으며(제주방어유적 234쪽) 그 위에 돌을 다듬어 쌓고 시멘트로 돌 틈을 보완한 도대불 시설이 남아 있다.
절부암과 박달목서와 방사탑
옛날 차귀촌에 고(高)씨 성을 가진 처녀와 강사철(姜士喆)이라는 총각이 살았다. 둘은 너무너무 사랑하여 고씨 처녀가 열아홉 되던 해에 혼인하였다. 그런데 너무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남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테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아침 출발할 때는 괜찮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광풍이 불어 결국 남편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아내 고씨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남편의 시체만이라도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생각하며 기다린 지 석 달만에 고씨는 소복으로 단장하고 속칭 엉덕동산 절벽의 커다란 팽나무에 목을 매었다. 그러자, 바로 그 다음날 아내가 목매어 죽은 바로 밑에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1852년(고종3년) 대정판관 신재우(愼哉佑)는 관비로 두 시신을 합장하여 장례를 치러 줬으며, 고씨가 목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명명하고 마애명을 새겼다. 또한 제사 비용 충당을 위해 제전(祭田)을 마련해 준 뒤 매년 1회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용수리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고씨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당산봉 밑에 있는 이들 부부의 묘도 매년 벌초하고 있다.(제주신문, 4328. 5. 21. 제민일보 4328.) 현장에는 신재우 판관이 자연석에 새기도록 한 【節婦岩】이란 음각이 깊게 남아 있다.
절부암 암벽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늙은 200년 된 희귀수목인 박달목서 3그루가 자라고 있다. 박달목서는 암수 딴그루의 나무로 오랫동안 숫나무들끼리 노총각 신세로 지내오다가, 제주대학교 김문홍 교수가 거문도에서 종자를 따다가 이를 번식시켜 4328년 6월 14일에 암나무 30그루를 옆에다 심어 주어 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제민일보, 4328. 6. 15.)
방사탑은 용수리 포구에서 서쪽으로 좌우에 하나씩 있다. 모두 바닷물이 닿는 암반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큼직한 돌들을 이용하여 허튼층 쌓기를 하였다. 두 개 똑같이 새(매)를 하나씩 올려 놓아 음양을 구별하기 힘드나 왼쪽에 있는 것이 윗부분의 형태로 보아 음탑인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매조재기탑’이라고 부르는데 바다의 재앙은 돌탑이 막고 공중으로부터의 액은 매가 쪼아 막으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주민의 말에 의하면 용수 바다에는 해난사고를 당한 시신들이 많이 올라왔었는데, 이 방사탑을 쌓은 후로는 줄어들었으며 용수리 어부들도 해난사고를 당하지 않는다고 한다.(KBS 4329. 1. 4. ‘제주저널’)
일곱르 노랑굴 陶窯址 한경면 고산2리
고산에서 산양으로 가는 칠전동과 전답동 사이의 길가에 가마가 있다. 겉으로 보면 원형 그대로이나, 안을 들여다보면 무너진 곳을 합판으로 받치고 흙을 덮어 복원했음을 알 수 있다.
선인들의 생활도구의 하나인 옹기(물허벅, 항아리)를 굽던 곳이다. 제주에서는 고려말부터 조선 초,중기까지 분사청자(대접, 병, 접시 등)와 분사편병 또는 흑유(黑釉) 등을 많이 산출했으나 당시의 도요는 알 길이 없다. 옛부터 도기를 구워냈던 요는 모두 폐지되었으나 18-19세기에 재축조하여 구워내었었고 애월읍 광령리, 한경면 고산2리, 대정읍 신평리, 구억리, 무릉리 등지의 요는 최근 1950년 전후하여 폐지되었다.(「제주의 문화재」 278쪽)
대정읍 중산간 지대는 대토로 이용할 수 있는 흙이 풍부하고 물이 좋은 관계(철분 함량 미량)로 도요지가 많았다. 여기에서 근래에 생산한 것은 주로 옹기로서 자라병, 기름병, 허벅, 물항, 단지, 고소리 등 일상생활 용구들이었다.(「제주도의 문화유산」. 150쪽)
대정성지와 돌하르방․정온유허비
대정성은 태종16년(1416) 한라산 남부에 정의, 대정 양 현을 설치한 후 왜구 침입 방지를 위하여 태종18년(1418) 초대 대정현감 유신(兪信)이 축조하였다. 성의 주위는 4890척 높이 17척4촌이고 동․서․남 3문이 있었는데 문 위에는 문루가 있었다. 또한 선조 연간에는 옹성과 포대를 가축(加築)했고 성 안에는 우물 하나와 3문 앞에 옹중석을 각 4기씩 설치했다. 동헌은 지금의 보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제주도의 문화유산」. 147쪽)
동쪽과 남쪽 성은 멸실된 것을 복원했고 북성은 복원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데 복원한 것보다 훨씬 높아서 약 5m 정도가 된다. 옹성은 북성(北城)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은 둘레 40여m, 높이 2m 정도가 남아 있다. 옹성 위에는 20여년 전에 만든 것이라고 하는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다.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자리는 원래 5m 정도 깊이의 호가 있었고 호의 서남쪽 구석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으며, 성 위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바닷돌을 수없이 깔아 놓았었고 두께 10cm 정도의 작은 방석만한 넓적한 돌들이 많았었다고 한다.(보성리 출생 인성리 거주. 여. 75세. 정임춘 할머니. 1998년 5월 31일) 바닷돌은 전투시 투석용(投石用)이다.
이 곳 돌하루방은 제주의 것보다 작은데 그 이유는 목과 현의 관등 차 때문이다.(제주통사 164-166쪽) 대정현에는 동․서․남문에 각각 4기씩 12기를 세웠었다. 현재 12기의 돌하르방이 모두 대정성 내외부 여러 곳에 흩어져 남아 있다. 또한 보성리 마을 길가에는 미완성 돌하르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재질은 현무암이며, 털벙것과 같은 모자가 표현되어 있고, 눈과 코 일부가 양각 혹은 반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외에 팔과 손이 나타나 있다. 이 돌하르방은 상단 부분이 파손되어 있는 상태지만 전체적인 상태로 보아 현존하는 다른 돌하르방을 조각할 당시 미완성 또는 실패작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주도내의 돌하르방들이 그 지방(濟州牧․大靜縣․旌義縣) 석공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을 입증하는 최초의 확증 자료이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390쪽)
보성리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정온유허비가 있다. 정온(1569~1642)은 광해군 때 제주에 유배되어 10년 동안 생활하다가 인조반정으로 유배가 풀려 출륙한 사람이다. 문관으로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본관은 초계(草溪) 진사 惟明의 아들이다. 광해군6년(1614) 부사직(副司直)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인륜에 어긋났음을 상소하고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로 인해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유배생활 중에 「德辨錄」․「望北斗詩」․「望白雲歌」를 지었다.
이 비는 1842년 제주목사 李源祚가 정온의 적소였던 막은골에 세운 것으로 그 후 동문성 밖으로 옮겼다가 1963년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1977년 현 위치로 이동되었다. 전면에는 ‘桐溪鄭先生遺墟碑’라 새겨져 있으며 비신의 높이는 120cm, 너비 61cm, 두께 18cm이다.
秋史 金正喜 謫居地 대정읍 보성리
근세 조선의 고증학과 금석학의 대학자이며 서예가요 정치가인 추사 김정희는 헌종6년(1840)부터 헌종14년(1848)까지 9년간을 제주도에 유배와서 대정에서 적거생활을 했다. 그가 머문 9년 동안 이 지방의 학문과 서예를 비롯하여 예절과 풍속 등 다방면에 걸쳐 주민들의 정신생활에 영향을 준 바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김정희는 정조10년(1786) 충청도 예산군에서 호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순조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과 병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 등 매우 많다. 그는 천성이 우애 청렴하고 품성이 곧고 공명정대하여 국사를 논할 때 그의 논조는 흠잡을 데 없이 정연하고 칼날과도 같아서 사람들이 경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는 청년 시절에 당시 대학자였던 박제가에게서 수업하고 순조9년 그가 24세 때 그의 부친이 동지부사로 북경에 갈 때 수행하여 북경에서 대학자인 옹방경과 완원에게 지도를 받았다. 당시 옹방경은 78세의 노학자였는데 김정희를 만나 보고는 해동의 영재라 칭찬하며 금석, 서화와 경학(經學)을 열심히 지도했다. 완원은 당시 47세였는데 김정희의 비범함을 인정하여 특별히 우대하여 화산묘비탁본 등 중국의 서체와 귀중품을 선물로 줌과 동시에 당시 학풍인 실사구시지학(實事求是之學)을 강설했다. 김정희는 50여일 동안 북경에 머무르며 이 두 거두에게 도움 받고 배워 온 바를 귀국 후에도 꾸준히 연마하여 경학과 금석학에 새로운 권위를 세웠다.
추사는 서도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중국의 명필을 따라 필법을 연구한 결과 초서, 해서, 행서의 묘를 체득할 수 있어서 말년에는 중국의 서풍을 벗어나 자유무애하고 독창적인 추사체를 확립하기도 했다.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가 추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건립한 것임을 규명된 일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며 남대문의 편액인 「숭례문崇禮門」이 신백의 글씨임을 고증하기도 했다.
유배지인 제주에 도착하는 즉시 추사는 대정으로 가서 교리 송계순의 집에 적소를 정하여 지내다가 나중에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적거생활을 하며 그는 전야의 초목을 감상하며 외로운 심정을 달래었으며 특히 수선화를 매우 즐겨서 수선화를 소재로 한 시도 남겼다.
9년이란 세월 동안 추사는 지방 유생과 교류하는 한편, 학도들에게는 경학과 시문과 서도를 배우게 했고 그 자신도 독특한 추사체 글씨를 많이 남기기도 했다. 한편, 추사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진도의 유명한 서화가 허소치 같은 사람도 헌종13년에 추사에게 사사하기 위하여 제주를 다녀가기도 했다.
추사는 헌종14년(1848)에 방면되어 서울로 갔다. 그러나, 2년 후인 철종2년(1850)에 헌종묘천 문제로 말미암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갔으니 그의 나이 66세 때의 일이다. 그 후 그는 70세 때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집을 지어 살면서 수도에 정진하다가 1856년 광주 봉은사(廣州 奉恩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동아세계대백과사전」, 1993.)
알드르비행장 터 大村飛行場址 대정읍 상모리
1935년에 만든 왜정시대의 비행장으로 동으로는 섯알오름, 서로는 하모리 시가지, 남으로는 바닷가, 북으로는 일주도로에 이르는 평야지대까지 80만평을 차지했었다. 시설로는 격납고 20개, 대공포탄 탄약고 2개, 송악산과 해안에 땅굴 2개, 막사 2동, 대촌병사(大村兵舍) 등이 있었다.(제민일보 4327. 10. 20.)
탄약고 1동은 광복 직후 미군에 의해 폭파되었고 대촌병사는 여러 용도로 전용되다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이곳에는 시멘트로 만든 격납고 20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격납고는 소형 비행기를 보관하기 위한 것으로 ‘붉은잠자리’라는 별명의 연습기로 소년들을 훈련시켜 폭탄을 실은 비행기에 태워 대륙으로 보냈다.(「오늘에 남아 있는 일제의 흔적들」. 12쪽) 우리들의 입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바로 이것이다.
격납고의 공법을 보면 널판으로 거푸집을 지은 다음 철근과 시멘트를 넣고 굳힌 다음 널판을 떼어내는 방법으로 만들었는데, 지붕은 아치형으로 만들어 위에 잔디를 덮었으며 아랫부분은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낮은 형태로 되어 있다.
활주로였던 곳은 지금은 초지로 방치되고 있으며, 활주로 가까운 곳에는 관제탑으로 썼던 건물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관제탑은 이층으로 되어 있고 건물 내부에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옥상에는 평면도는 팔각형 모양, 측면으로 보면 오각형 모양으로 된 철골 구조물이 녹슨 채 남아 있는데 각면에 유리를 붙여 밖을 관측하였던 곳으로 보인다.
관제탑에서 동쪽으로 보면 10m가 넘는 시멘트 구조물이 있는데 남쪽과 북쪽으로 높이 1m․폭 1.5m쯤 되는 출입구가 있고, 돔 형식으로 된 지붕 위에는 ‘띠(새)’를 심어 위장했으며, 가운데로 밖을 관측하는 데 썼을 것으로 보이는 굴뚝 모양의 통로가 있으며 거기에는 철근으로 사다리를 붙여 놓았다. 이것은 탄약고이다. 또한 주변에는 물탱크․통신시설 등의 잔해가 남아 있다.
송악산과 해안절벽 인공동굴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 바닷가
송악산은 제주도의 많은 오름들과는 달리 이중분화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 번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긴 분화구에서 다시 폭발하여 더 높은 봉우리와 분화구가 생긴 모습이다. 높이 107m의 송악산 서쪽 능선 정상에는 저별봉수가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왜적의 침입을 감시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방산과 대평리 해안까지 보이고 남서쪽으로는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한눈에 바라보인다. 저별봉수는 송악산 명칭에 따라 ‘저리별이봉수’ 혹은 ‘송악봉수’로 불리기도 하였다. 동쪽으로는 호산봉수, 서쪽으로는 모슬봉수와 응신하였다.
송악산의 동쪽 절벽에는 15개의 인공동굴이 파져 있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결7호작전의 1단계 작전인 미군의 상륙에 대항하기 위해 ‘回天’이라는 자폭용 소형 어뢰정을 숨겨 놓았던 곳이다. 수면쪽으로 남아 있는 시멘트 구조물은 어뢰정의 상륙로인 것으로 보인다. 굴의 구조는 일직선으로 15m 정도 파들어간 것이 있는가 하면 옆 굴과 안쪽에서 연결되는 것도 있는데 복잡한 미로 형태는 아니다. 어떤 굴에는 양쪽 벽에 수직으로 홈을 파 놓았는데 구체적인 용도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곳곳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곡괭이 자국을 보면 당시 강제 동원된 노무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비통한 심정에 젖게 된다. 해안 절벽 인공동굴은 일출봉, 삼매봉, 수월봉, 서우봉 등의 절벽에도 파 놓았다.
바굼지오름과 대정향교 안덕면 사계리
바굼지오름은 단산의 원래 이름이다. 산방산에서 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 안덕면 사계리와 대정읍 인성리에 걸친 바위산이다. 표고 158m에 비고는 110m이다.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거칠고 험악하여 부드러운 느낌이라고는 없으며 가까이 갈수록 그것은 누워 있는 긴 괴물이 머리를 치켜들고 꿈틀거리기 시작할 듯한 인상이다. 위압적이리만큼 사나운 모습은 날개를 편 거대한 박쥐를 연상케 하는데 이 형상이 이 오름의 이름을 바굼지오름으로 부르게 한 것이다.
지방유형문화재 제4호인 안덕면 사계리 3126번지 대정향교는 태종16년(1416) 조원(趙原) 목사 때 대정 성내에 창건되었다. 그 뒤 북성에서 동성 외로, 또 서성 내로 옮겨다니다가 효종11년(1653) 이원진(李元鎭) 목사 때 향교가 있는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 지금의 바굼지오름 아래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조 때 현감 변경붕이 주자필을 본받아 명륜당이라는 액을 게시하였으며, 대정 사람 훈장 강사공(姜師孔)은 이 고장에 유배왔던 추사 김정희에게 필을 청하여 의문당이란 액을 게시하였다. 경내에는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삼문 등이 있다. 대정향교는 향교재단에서 총 관리되고 전교(典校) 중심으로 매년 4월과 9월에 석존제를 봉향하고 있다.(제주의 문화재 86쪽)
산방산과 절노리코지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은 사계리 해안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345m의 높이로 버티고 서 있는 웅장한 종 모양의 종상화산체(鍾狀火山體)이다. 산을 이루고 있는 조면암질 용암의 절대연령치는 약 70~80만년 정도이다. 이는 제주도의 지표지질을 구성하고 있는 화산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용암임을 말해 준다. 남쪽 절벽의 높이 150~300m 사이에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풍화혈과 애추가 발달되어 있고, 해발 150m쯤에 길이 10m, 너비와 높이가 약 5m인 해식동굴(산방굴)이 바다를 향해 특색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어 영주십경 중의 하나인 ‘산방굴사’라 부른다.
산방산은 워낙 높고 바다에 접해 있어서 구름이 산머리에 걸리거나 휘몰아치는 모습, 골에서 구름으로 변하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모습 등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런 기후의 특성 때문에 식생에도 영향을 주어 식물학적으로도 중요한 보호지역이 되고 있는데 천연기념물 182-5호로 지정되었다. 산방산에 서식하는 식물은 235종으로 확인되었다.
옛날에 설문대할망의 아들 오백장군 중에 맏형이 사냥이 제대로 되지 않아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옥황상제의 옆구리를 건드리고 말았다. 크게 노한 옥황상제가 홧김에 한라산 정상의 암봉을 뽑아 던져 버렸는데 뽑힌 자리에 생긴 것이 백록담이고 날아가 떨어진 것이 산방산이라고 한다.(「오름나그네」)
절노리코지는 요즘에는 ‘용머리’로 더 많이 불리고 있는 곳으로 산방산 아래에서 바다 쪽으로 나간 ‘코지(곶)’이다. 바다에서 이곳을 보면 산방산은 거북의 등, 절노리코지는 거북의 머리와 같은 모양으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절노리코지는 조금씩 바다 쪽으로 커지고 있었는데 고려시대에 호종단이 혈을 잘라 버린 후로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은 화산쇄설물이 쌓여 굳어진 응회암층인데 완전히 굳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파도에 의한 침식이 매우 쉽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 결과 기이한 모양의 절벽을 형성하게 되었다.
안덕계곡과 바위그늘집자리․서재유허비 안덕면 감산리
안덕계곡은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계곡이다. 조면암으로 형성된 양쪽 언덕에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계곡의 밑바닥은 평평한 암반으로 깔려 있다. 그 위로 맑은 물이 항상 흘러서 운치있는 곳이다. 기슭에는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가시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조록나무 등 난대수림이 울창하게 덮여 있으며, 남오미자, 바람등칡, 백량금 등이 하층식생을 형성하고 있다. 3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이 계곡은 특히 양치식물이 많은 것이 특색이며 희귀식물인 담팔수와 상사화 등이 자생하고 있다. 보존이 잘 되어 난대림의 원시림으로 가치가 높아서 천연기념물 제18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맑은 용암생수가 흘러나오는 곳이 여러 군데 있는 안덕계곡은 먼 옛날 하늘이 울고 땅이 진동하고 구름과 안개가 낀 지 7일만에 큰 산들이 일어서고 시냇물이 암벽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 치안치덕(治安治德)한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내고장의미찾기 「제주관광가이드」 174쪽)
안덕계곡 매표소 앞에 ‘서재임선생적려유허비’라는 비석이 있다. 비신의 높이는 145cm이고 갓돌이 있다. 서재 선생의 5대손인 임헌대(任憲大)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을 당시인 1862년(서재 사망후 130여년)에 임헌매가 비문을 짓고 임헌대가 비기를 써서 건립한 비이다.(제주도의 문화유산 161쪽) 서재 임징하 선생은 숙종-영조(1686-1730) 때의 인물로서 1713년 27세에 사마양시 갑오 문과에 합격하였다. 노론이 집권하자 掌令으로 등용되어 6개조의 상소문을 올려 탕평책을 반대하며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순안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대정현 감산리로 위리 안치되었다. 1728년 유배지에서 연행, 투옥된 뒤 고문을 받다가 1730년 7월 옥사하였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157쪽)
안덕계곡 매표소를 지나 계곡으로 약 60m쯤 내려가면 절벽 아래에 바위그늘집자리가 두 개 있다. 바위그늘(1)이 트인 방향은 남서쪽이고, 높게 드리워진 바위그늘의 입구 직경은 11m에 이르며, 입구 높이는 2.5~2.8m, 굴 입구에서 안쪽까지의 길이는 7m 정도이다. 바닥의 상태는 수평으로 고르게 평평하며, 토층의 두께는 대략 60~110cm 정도로 예상된다.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굴 내부에서 확인된 유물은 탐라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두께 1cm 미만의 곽지2식 토기편이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44쪽)
바위그늘집자리(2)는 앞의 바위그늘집자리(1)에서 30m 정도 동쪽에 있다. 바위그늘 앞에 있던 돌들을 진입로 담 쌓는 공사에 써 버렸기 때문에 앞이 훤히 트여 있다. 바위그늘이 트인 방향은 남서쪽이다. 입구 직경은 6.5m, 높이는 2.7~2.8m,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3.4m인데 균형 잡힌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굴의 퇴적 상태는 깊이 50cm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되며 중앙부 상층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안쪽 북서편에는 폭 1m 남짓 되는 작은 굴이 나 있는데 길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동굴 모서리 벽 쪽에서 출토된 유물은 탐라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곽지2식 토기편과 공이돌 등이다.(「남제주군의 문화유산」. 45쪽)
고인돌 남원읍 신례리
고인돌은 석관묘와 더불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우리 나라의 고인돌은 대체로 청동기시대 혹은 무문토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제주도의 고인돌은 대부분 州胡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남원읍 신례리에는 고인돌이 세 개 있다. 하나는 일주도로변(너븐돌 고인돌 ; 1998년 일주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는데 어디로 옮겼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른 두 개는 각각 다른 과수원 안에 있는데 그 중 하나(지서모르에 있는 것 ; 하례다리 옆 냇가를 따라 500여m쯤 되는 곳에 있는 과수원 안)는 일부분이 깨어져 버렸다.
우뜬모르에 있는 고인돌(신례1리로 가는 큰 길로 가다가 변전소 서쪽 농로를 따라 200m쯤 가서 남쪽으로 들어간 과수원 안)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지석이 있는데 지석 밑에 돌무더기를 깔았으며 석관 위에 상석을 얹은 형태이며 주변을 돌아가며 굵은 돌들을 둘러놓았다. 이 고인돌 주변을 발굴한 결과 1-3세기의 탐라시대 전기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는 이미 고인돌이 사라지고 석관묘가 유행하고 있을 때였다.
열녀비 남원읍 태흥리
약 200여 년 전 보한리(오늘날 태흥리) 김창언의 가정은 부유한 편이었다. 김창언은 오원번 씨의 딸과 혼인하여 첫아들이 태어난 뒤 한 달쯤 되었을 때 말을 타다가 떨어져 아내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부인 오씨는 남편을 장사지내고 난 뒤 아들을 시누이에게 맡기면서 잘 키워 달라고 당부한 뒤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집 가까이에 있는 냇가 깊은 물(속칭 흑수, 검은 물)에 빠져 세상을 떴다. 그 아들은 김천겸으로 그 후손들이 지금도 태흥리에 살고 있다.
임금의 명에 의하여 의귀리에 열녀비가 세워졌고, 일제시대에 태흥리 무두동산에 옮겨졌었다가 수년전 지금의 위치인 태흥교회 옆으로 옮겨졌다. (서귀포교육청,「설촌유래」. 128-130쪽)
비석은 순조12년(1812)에 태흥리 937번지에 세워졌었다. 비의 높이는 66cm, 전면 길이 32cm, 측면 길이 10cm이며, 높이 80cm, 전면 길이 72cm, 측면 길이 53cm의 석실 안에 세워져 있다.(「남제주의 문화유적」. 118쪽)
검은물은 깊이가 7-8m 정도로 매우 깨끗하여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음용수로 이용하였었으나 사라호 태풍 때 큰 돌들이 굴러 떨어지면서 창이 터져 버려 지금은 물이 말랐다. 다만, 물팡으로 썼던 자연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 모습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城邑 民俗 마을 (지방민속자료 5호)
성읍 마을의 設村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 때 (1275-1313) 노목이 우거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1300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명은 ‘정의고을’ 또는 ‘정골’ 등으로 불리어 왔는데 1961년 지금의 성읍1리로 개편되었고, 상,하,동,서 4개동에 300가구 1400명의 주민들이 주로 농업, 축산, 관광 등에 종사하고 있다.
성읍리는 제주도 중산간 지대 마을 중 그 특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구역이며 유형 무형의 많은 문화 유산이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옛 마을 형태의 민속 경관이 잘 유지되어 있어 민속마을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구역이다.
문화유산으로는 민가군, 향교, 일관헌, 돌하르방, 성지, 연자매, 옛 官署址, 古碑, 중산간지대 특유의 민요, 민속놀이, 향토 음식, 민간 공예, 방언 등을 들 수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느티나무, 팽나무 등 거목은 유서 깊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으며 마을의 경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제주도,「제주의 문화재」. 198쪽)
(1)日觀軒(제주도 유형문화재 제7호)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809-1
이 건물은 정의현감이 집무하던 청사로서 현재의 군청과 같다. 처음 정의현 치소는 성산읍 고성리에 두었으나 조선 세종5년(1423) 현 위치로 옮기고 석성을 축조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을 고증하여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성읍은 1914년 정의 대정이 남제주군으로 합병될 때까지 정의현의 중심이 되었다. 태종17년 정의현감 이이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 중에 치소를 옮겨야 한다는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 즉 정의현 치소가 너무 동쪽에 치우쳐 있어 현재의 서귀포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백성들이 현청에 일을 보려면 이틀이나 걸리기 때문에 현 전체의 중심부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중앙 정부에 장계를 올렸고 의정부 회의에서 장계대로 시행하도록 결정하여 치소를 옮기게 된 것이다.
일관헌은 조선시대 정의현감이 政事를 보던 동헌이다. 당초 구 治所였던 고성에서 성읍으로 옮긴 것은 7년만으로 일관헌은 세종25년(1443) 이건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중,개수를 거듭했으나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고 광무2년(1898)중수된 기록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면사무소로 이용하다가 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현 건물은 1975년 옛 건물을 헐어내고 시멘트 기둥을 사용 새롭게 단장했다. 구조는 정면 3간, 측면 2간이며 2층 기단석 위에 축조되었다. 건물의 좌향은 서북편에 영주산을 뒤로 하여 남동향하고 있다. 사방으로 창호문을 시설하였고 退는 개방하고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측면은 현무암으로 마감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제주도,「제주의 문화재」. 92쪽) 경내에는 채수강의 비와 강우진의 비가 있다.
(2)旌義鄕校(지방유형문화재 제5호) 표선면 성읍리 820번지
정의향교는 처음 사당을 짓고 聖賢 5위를 모셔 祭享을 한 것이 시초인데 헌종15년(1849) 목사 장인식이 현 위치에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제주도,「제주의 문화재」.334쪽) 경내의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과 3문 등이 있다. 대성전은 영조14년(1738) 창건했는데 평면은 5간에 전후에 退가 있다. 구조는 7樑이고 기둥은 민흘림으로 직경 38cm로 굵은 편이다. 지붕은 8작이며 곡선은 그간 수차의 이건과 보수로 인하여 원형이 다소 변형되었다. 또한 명륜당은 영조14년 창건한 바 평면은 정면 5간이며 전후좌우에 退가 있다. 前退는 앞으로 개방되어 士房으로 사용되고, 중앙 3간은 바닥이 마루로 되어 청방이며, 좌우익은 온돌방과 고방으로 쓰고 있다. 礎石은 원뿔대형이며 기둥은 민흘림으로 되었고 지붕은 팔작이다.(제주도,「제주의 문화재」. 88쪽) 최근의 많은 보수로 용마루와 추녀 끝이 올라가는 육지풍을 띤 건물로 변형되었다.(제주도, 「제주의 문화재」. 334쪽)
(3)안할망당 표선면 성읍리
성읍리 마을의 중심부 현청(日觀軒) 옆에 있다. 과거에는 늙은 팽나무 신목 앞에 돌을 모아 제단을 꾸몄고 주위에는 돌담 울타리를 둘렀으나 1971년 리사무소를 신축하게 됨에 따라 그 부지에 접하게 되어 팽나무 밑둥에 있던 당을 그 바로 서쪽 돌담 너머에 2평 가량의 슬레이트집을 짓고 이설하였다가 그 후에 기와집으로 개축하였다. 이 때 ‘안할망神位’라고 새긴 비석과 같은 위패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출입문을 열면 시멘트 단 위에 목조 神壇이 마련되어 있는데 가운데에는 縣海守護神之位라 쓰인 위패, 왼쪽에는 구슬 목걸이가 걸려 있고 위패 밑에는 붉은 방석 위에 비녀가 한 개 놓여 있다. 목조 신단 위에는
‘李朝 世宗 5년 本 晋舍村에 旌義邑地를 설정하니 초대 현감이 현 守護神으로 仰尊 官民 一致 奉安하다. 신해년 3월 일 移設’
이라 쓰인 팻말이 놓여 있다. 본향당 본풀이를 할 수 있는 심방은 현존하지 않으나 촌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안할망’은 ‘안칠성’(집안 고방에 모시면 富를 갖다 주는 蛇神)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家神으로 모셔지나 이 마을에서는 마을에 富를 갖다 주는 당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것이다.(「표선면향토사」. 89쪽)
(4)열녀비와 효자비 표선면 성읍리 표선쪽 마을 입구
표선쪽에서 성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동산 위에 비각이 서 있고 비각 안에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淑夫人礪山宋烈女旌閭碑》이고 다른 하나는 《展力副尉康孝子旌閭碑》이다. 두 사람은 母子이다. 새로 크게 세운 비석이 비각 안에 있고 원비석(높이 65cm, 폭 32cm, 두께 10cm)은 담장에 기대어 방치한 상태이다.
제주민속촌
표선면 표선리 바닷가 14만여 평의 대지에 관광객을 대상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마을이다. 조선왕조 말엽에서 1890년대까지를 기본 연대로 설정하여 오랜 조사 연구와 고증을 거쳐 제주도 특유의 생활 풍속을 재현한 곳이다.
제주민속촌은 산촌-중산간촌-어촌-식물원-장터-어구전시장-야외전시장-장터-무속신앙지구-관아-무형문화재 가옥 순으로 자리잡고 있다. 각 촌락을 구성하고 있는 제주초가가 81동, 장터의 식당, 무속신앙의 집, 방언의 집, 관아 등의 건물을 합치면 모두 117동이나 된다. 그리고 각 초가마다 다 특징이 있어서 외거리 막살이집, 마주앉은 세거리집, 외기둥집, 움집, 좌우로 앉은 세거리집, 네거리집, 종가집, 모로 앉은 두거리집, 고팡없는 막살이집, 마주 앉은 두거리집 등 옛날의 초가 형태를 망라하였다. 간간이 대장간, 연자매, 죽공예의 집, 말총공예의 집, 서당, 한약방, 띠공예의 집, 유배인의 집, 해녀의 집, 심방집 등이 배치되어 있다.(내고장 의미찾기 「제주관광가이드」. 132쪽)
혼인지와 황루알․환해장성
제주도 기념물 제17호인 혼인지는 성산읍 온평리 마을에서 서쪽으로 800여m 올라간 곳에 있는 연못으로 삼성혈에서 태어난 고양부(高良夫) 삼신인(三神人)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 온 함 속에서 나온 벽랑국의 3공주를 맞이하여 각각 배필을 삼아 이들과 혼례를 올렸다는 곳이다. 이 연못 바로 옆에는 3신인이 혼례를 올린 뒤 신방을 치렀다는 조그만 굴이 있는데 굴 내부는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 이 굴은 선사시대 바위그늘집자리로서 토기 및 석기의 파편이 출토된 바 있어 신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황루알은 3을나가 3공주를 맞이하였다는 바닷가이며 3신인이 타고 다니던 말발자국이라는 흔적이 남아 있다. 다만, 조간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밀물일 때는 볼 수가 없다.
황루알 주변 해안에는 환해장성이 남아 있다. 성산포를 중심으로 해서 서귀소(消)까지 이르는 곳곳에 해안 성곽이 축성되어 있는 바, 완전하게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없고 거의 반파 또는 유실된 상태이다. 성벽에는 약 20m 간격으로 방어초소와 유사한 한 변의 길이가 2m정도의 정사각형의 석곽이 있다. (「제주의 문화재」. 347쪽) 온평-신산 부근 해안에 남아 있는 것은 약 2Km이며, 신천에는 흔적이 미미하다. 현재 온평리 환해장성에 보이는 석곽은 전경초소에서 경계근무용으로 시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회곽도(廻廓道, 성 안쪽에 붙여 만든 폭 2m, 높이 1m 정도의 段처럼 된 보초 근무 중 왕래하던 길)의 흔적이 약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으나 최근 일부 주민이 골재용으로 환해장성의 돌들을 실어다 써 버린 일이 발생하였고, 복원공사를 하였지만 원형을 전혀 무시한 모양으로 쌓아놓았다.
섭지코지와 협자연대
성산읍 신양리에서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반도가 ‘섭지코지’이다. 섭지코지 남쪽은 신양해수욕장으로 세계에서도 손꼽는 윈드서핑 적지이며, 북쪽으로는 일출봉의 위용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코지의 끝에는 외돌개를 닮은 커다란 바위가 있고 물새들이 그 바위를 많이 찾는다. 막다른 길까지 가면 잔디 동산이 있어서 바다 바람을 마시며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며, 그 잔디 동산에는 협자연대가 있다. 제주도에는 38 군데에 연대가 있었으나 이 협자연대를 비롯하여 신산-온평 사이의 말등포연대와 표선 소마로연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35 군데의 연대는 모두 원형을 잃거나 멸실되었다. 연대의 모양을 보면 위가 약간 좁아지긴 하지만 가로․세로는 약 8m이고 높이는 4m 정도인 직육면체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오조포연대와 성산봉수, 서쪽으로는 수산봉수, 남쪽으로는 말등포연대를 직접 바라볼 수 있다. 협자연대에서 더 북쪽으로 가면 코지의 맨 동쪽에 ㄷ자 모양의 담 안에 2m×2m 정도의 정사각형의 시멘트 구조물이 있다. 이것은 일본군이 만들었던 고사포대이다. 인가가 없는 이곳에 고사포를 설치한 까닭은 가까이에 있는 일출봉의 어뢰정기지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사람은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려고 연대를 설치했고, 같은 장소에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고사포를 설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두고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일출봉
일출봉(지방기념물 36호)의 원래 이름은 성산(城山)이다. 성산반도의 중심을 이루는 높이 182m의 석봉(石峰)으로 화산의 분출에 의해 형성된 분화구로서 본도에서는 산방산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기생화산의 하나이다. 분화구의 바깥쪽은 오랜 기간 강한 해풍 등에 의해 대부분의 토양․암석이 유실되어 직벽을 이루고 있고, 분화구 안쪽은 넓이 2.64㎢의 초원으로 평지를 이루고 있다. 분화구 안은 예부터 성산리민의 연료와 초가 지붕을 이는 띠와 억새 등의 채초지로 이용되었고 방목지로도 쓰여져서 매년 화입(火入)을 했기 때문에 나무는 거의 없고 억새와 띠의 군락을 이루고 있다. 희귀식물인 풍란의 자생지로 알려지고 있으나 지금은 극소수만 남아 있다.(제주의 문화재. 182쪽)
일출봉을 이루는 암석은 제주도의 거의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현무암과는 다른 응회암이다. 일출봉 절벽을 해안에서 보면 푸른빛이 감도는 치밀하고 고운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에 운반되어 퇴적된 퇴적암처럼 보이지만 퇴적암이 아니라 화산 활동에 의하여 생성된 암석이다. 대략 1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일출봉의 생성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온도가 1천도가 넘는 용암이 지표로 나오다가 갑자기 물을 만나면 폭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폭발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현무암질 용암도 분출도중 물을 만나면 폭발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용암이 모래(화산재)처럼 부서져 분화구 주위에 쌓이게 된다. 수중폭발화산의 폭발력은 용암과 물의 비가 1: 1 정도일 때 가장 크다. 이 경우 화산재는 점성이 크지 않아 분화구 둘레로 넓게 흘러 나가 거의 수평에 가까운 층리를 이루며 쌓인다. 이렇게 생긴 것을 응회환이라고 하며 송악산 하부․수월봉․산방산 앞 용머리 해안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물의 비율이 더 많을 경우 폭발력은 줄지만 폭발로 부서진 용암 조각이나 가루․화산재 등의 점성이 높아져서 원뿔처럼 경사가 급한 화산체인 응회구를 이룬다. 일출봉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만들어진 응회구이다. 서북사면을 제외한 모든 곳이 절벽이 된 것은 파도에 의한 침식 때문이다.(한겨레신문 4327. 4. 26.) 일출봉 절벽에는 일본군이 파 놓은 동굴이 흉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미군의 상륙에 대항하기 위한 ‘回天’이라는 자폭용 소형 어뢰정을 숨겨 놓았던 곳이다.
최영장군 사당 (지방기념물 11호) 추자면 대서리 산 155번지
최영은 1316년(고려 충숙왕 3년)에 태어나 1388년 이성계 일파의 손에 암살될 때까지 고려의 명장과 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그는 대호군에 임명된 1352년(공민왕3년)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장수 40여명과 군사 2000여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승상 탈탈 등을 무찔렀으며, 1358년에는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다. 또 1361년에 홍건적 10만이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성을 수복하였다.
고려 공민왕23년 8월에 탐라에서 원나라의 목호들이 난을 일으킴에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영은 삼도도통사가 되어 이를 진압하러 제주도로 오던 중 심한 풍랑으로 이 곳 검산곶에서 바람 자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민들에게 어망편법을 가르쳐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는데 이러한 장군의 위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매년 춘추에 봉향하고 있다. 1964년 사당 단청 및 담장을 보수하였고, 1970년 국고보조에 의하여 건물이 복원되었으며, 1971년 8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건평이 약 5평이고 평면 3칸이며 기와로 덮인 사당 안에는 1m 높이의 비로 만들어진 위패가 서 있다. 위패에는 「朝國都統大將崔瑩將軍神位」라고 새겨져 있다. 이 사당에서는 7-8월 성어기 때(또는 백중날과 음력 섣달 그믐날)면 전 도민이 단성을 모아 길일을 택해 제가 올려진다. 옛날에는 제를 지낼 때 축을 고하지 않고 했지만 이조말 본도로 유배온 선비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축문을 지어 주어서 제례시에 고하고 있다.
처사각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제9호) 추자면 영흥리 14번지
태인박씨의 입도조인 박인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이 사당은 한식 기와지붕에 제단을 마련했었는데 건물이 노후하여 1955년 지붕을 스레트로 개조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우진각 지붕이며 외벽은 잡석쌓기로 마감하였고 내부는 제단으로 통하는 곳에 창호시설을 하였다. 제단 좌우로는 칸막이가 되어 있고 바닥은 진흙다짐이다. 면적은 4평 정도로 소규모이며 대지는 25평이고 안으로는 잡석 담장 시설을 하였다.
박인택은 이조 중기 추자도에 유배와서 당초에는 사당 뒤편 산기슭 석간수가 흐르는 곳에 살다가 말년에는 사당이 있는 곳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하며, 불교를 생활화해 살아가며 주민들에게 불교의 교리를 가르치고 병을 고쳐 주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주민들은 박인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처사각을 짓고 매년 제를 지내 오고 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문중 후손들이 병이 들어 갖가지 약으로도 고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꿈에 박인택이 나타나 사당을 건립하고 공을 들이면 나을 것이라고 하여 그렇게 하자 바로 병이 나았다고 한다.
순효각 포구를 따라 영흥리 마을을 지나는 길목
아버지의 병에는 꿩을 어머니에게는 손가락을 잘라 수혈했다는 학생 박명래(朴明來)의 순효비이다. 순효각 앞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자는 응칠 밀양인이요, 경력공 효원의 13세손이다. 일찍이 아버지가 병이 들어 꿩고기를 먹고 싶다 하므로 슬피 울어 하늘에 빌자 다음날 꿩을 얻어 드리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도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여 그 목숨을 연장하니, 목사가 순시하여 포상하고 그 행실을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에 기록했다.」
반공탑 대서리 추자수협 뒷동산
1974년 5월 20일 깊은 밤 북한의 무장간첩들이 추자도에 침입하였다. 이를 흔히 추자도간첩사건이라 부른다. 이 때 이들과의 전투에서 네 분이 전사했는데 전사한 분들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탑이다. 높이 10m의 이 탑은 북제주군 관내 학생들과 주민들의 성금으로 사건 발생 1주년이 되는 1975년 5월 세워졌다. 탑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쓰여 있다.
‘’여기 바람과 비와 눈보라와 파도와 국토의 남단을 지켜 온 대한의 파수 추자, 1974년 5월 20일 그 날 칠흑의 밤에 북괴의 무장간첩들이 향토를 유린했을 때의 우리의 파수들은 목숨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조국을 지키셨으니 故지방행정서기 원학상님, 故경사 서병철님, 故방위용사 변길만님, 故방위용사 조재선님 천년의 비바람과 눈보라와 파도가 지우지 못할 거룩한 이름들, 만년의 어둠 가운데서도 타오를 님들의 뜨거운 충혼을 여기에 새겨 기린다. 1975년 5월 20일‘’
할망당(처녀당) 추자면 묵리
묵리 마을 남쪽 속칭 ‘당목치’라고 하는 바닷가의 높은 동산 꼭대기에 당이 있다. 추자면에서는 유일하게 당집을 지어 모시고 있다. 블록으로 벽을 쌓은 뒤에 시멘트를 발라 마무리하고 지붕은 기와 모양의 슬레이트를 덮었다. 당집 안 정면에 가로로 길게 제단을 만들었고, 정면 벽에는 한복을 입은 여인(처녀)의 상반신을 그린 그림 액자가 걸려 있다. 그림은 수채화인데 전문가의 솜씨가 아니라 초등학교 고학년 아니면 중학교 저학년 정도의 솜씨로 추정된다. 액자는 유리가 덮여 있는데 유리 위로 왼쪽 눈 부분에 무슨 액체가 묻어 내려 불그스름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벽 왼쪽에 맨 줄에는 노랑 저고리와 빨강 치마, 하얀 버선이 걸려 있고, 옷 옆에는 하얀 옷감과 명실이 걸려 있다. 옷 밑에는 꽃고무신이 제단 위에 놓여 있다.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제주도에서 물질하러 올 때 데리고 왔던 아기업개가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당에는 여자들만 가는 것이 아니라 어부들도 다니며 명절 때에는 마을에서 제관을 정하여 제를 올린다고 한다.
진작지 추자면 장작리
추자십경 중에는 '장작평사'(長作平砂)라는 풍광이 있다. 이는 신양항 인근 ‘진작지’의 작고 동글납작한 돌들이 폭 20m, 길이 300여m의 해변에 층층이 쌓여 있는 장관을 말한다. 그런데 이곳은 눈으로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귀를 기울여 들어 봐야 한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나갈 때 자갈들이 구르는 소리가 참으로 듣기에 좋은 소리이다. 파도가 세면 센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듯 신비한 느낌을 준다.
선돌 立石 대정읍 가파리 10.
가파도 선돌은 하동 마을에 있는데, 마라도를 정면으로 마주 대하고 있다. 선돌은 고인돌군의 앞에 높이 183cm, 폭 120cm, 두께 45~55cm로 서 있다. 아래 몸통 부분이 넓적하고 끝 부분이 다소 뾰족한 타원형의 할석을 곧추 세웠다. 석재는 가파도에서 확인되는 안산암 계통이며 5분의 1 정도가 지표 아래에 묻혀 있었다. 1995년 조사에서는 선돌의 하단부를 조사하였는데 밑 부분은 직경 10~15cm의 작은 川石과 자연석 4매를 이용하여 곧추 세워질 수 있도록 받쳐 있었다. 정면만을 확인하였으나 밑 부분을 돌아가면서 모두 고여 끼운 것으로 판단된다. 하단부에서 전복으로 만든 패도편이 보이나 토기편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선돌은 현재까지 확인된 제주도 유일의 선돌이며, 이처럼 선돌이 고인돌군과 같이 있는 예는 전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한 지방 여러 곳에서 확인된 바 있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84쪽)
가파도 고인돌군 대정읍 가파리 서남쪽
고인돌은 일반적으로는 청동기시대 지도자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고인돌들은 탐라시대 전기에 해당한다. 가파도의 고인돌군은 네 곳에 있는데, 마라도를 마주보는 가파도 남쪽의 경작 지대에 수십 개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이 지석이 없거나 지표하에 묻혀 있는 형식이다.
상동 매부리당 대정읍 가파리 상동 포구 시리
가파초등학교를 지나 상동 바닷가에 가면 포구 오른쪽 바위에 아담하게 꾸며진 당이 있다. 오른쪽 정면에 있는 돌로 만든 神石(궤)을 신체로 하고, 그 궤 안에 지전과 물색을 걸고 울타리를 두른 석원형․궤형․지전물색형의 당이다.
이 당에는 정월, 6월, 8월에 택일하여 다니는데 몇 년에 한 번씩은 ‘수굿’을 한다. 당에 갈 때에는 메 3기, 돼지고기, 명실 등을 가지고 간다. 이 당은 상동 어부와 해녀를 수호해 주는 해신당이고, 당신을 ‘돈지하르방․돈지할망’이라 한다. 하모리에서 가지갈라온 당이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297쪽)
본풀이는 다음과 같다.
“삼천백매 문수물 신도본향, 동산이물 개할망당 일뢰중, 섯산이물 서낭당 일뢰중, 가파리 매부리 신도본향, 토지관이 좌정기는 올히가 일백이십년. 해용왕 몸 받은 신도본향 일뢰중.” 제일은 매달 7일.(「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 542쪽)
항개당(뒷성 서낭당) 대정읍 가파리 하동 포구 바위
가파도 하동 본향 ‘뒷성’ 서낭당은 ‘황개당’이라고도 하며, 당신은 ‘돈지하르방․할망’이라 부른다. 바닷가 바위 궤(神石)를 신체로 하여 울타리를 두르고 궤 안에는 지전 물색을 걸어 놓고 있는 석원형․궤형․지전물색형의 당이다.
제일은 따로 없고 정월과 6월에 택일하여 다닌다. 몇 년에 한 번씩은 영등굿을 한다. 이 당은 상동 ‘시리’에 있는 매부리당에서 가지갈라다 모신 당으로 가파도 하동의 어부와 해녀를 수호해 주는 당이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296쪽) 본풀이는 다음과 같다.
“뒷성할망 선앙당. 상선 중선도 휘여 받고(휘어잡고), 상수 중수도 휘여받고, 요왕 하강 수십 개 몸 받은 어진 본도 조상 설연지후 구십육년. 선앙고 할망고 이 놀아서 일처 점서야 만대길는 조상” 제일 손에 생기 맞은 날.(「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542쪽)
아기업개당(할망당) 대정읍 마라도
마라도 처녀당은 마라도 북쪽 바닷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마라도 본향이다. 이 당에는 아기업개의 원령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처녀당’․‘비바리당’․‘아기업개당’이라고 부른다. 마라도에는 소라 전복 등이 무진장이었기 때문에 가파도나 모슬포 수들도 이곳까지 와서 물질을 하였다. 한 번은 모슬포 수들이 식량을 싣고 마라도에 물질하러 왔었는데 파도가 세어서 물질을 할 수가 없었다. 식량도 떨어지고 돌아가려 해도 바람이 세어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밤에 상수의 꿈에 아기업개를 놔두고 떠나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다가는 우리 모두 물귀신이 된다 하니 이 아이를 희생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하니 수와 사공들이 모두 찬성하여 아기업개를 놔두고 섬을 떠나니 무사히 귀향할 수 있었다. 아기업개는 자신을 버리고 가는 배를 향하여 손을 흔들며 발버둥치다 쓰러지고 말았다.
해가 바뀌어 모슬포 수들이 마라도에 다시 물질을 갔을 때에는 아기업개의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마라도를 찾는 수들은 불쌍한 아기업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 당을 짓고 1년에 한 번씩 당제를 지내게 되었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298쪽)
고인돌 우도면 동천진동
우도면 서쪽 기슭에 있다. 바닷가의 암반들 사이에 끼어 있다. 길이 2.2cm 너비 1.8cm 두께 125cm 정도의 넓적한 현무암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북제주군지」)
그러나 현장 확인 결과 서쪽 기슭에서는 발견하지 못하였으며(노인회장 및 우도면 총무계장 증언) 동천진동 해안 길 옆에 있는 고인돌을 확인하였다. 지석은 남서쪽에 보이며 북쪽은 흙에 묻혀 있고, 길에 바짝 붙어 있기 때문에 시멘트로 길 포장하면서 일부가 시멘트로 가려져 있다. 누군가가 정을 이용해 돌을 깨뜨리려 했던 흔적이 생겼고 금이 간 상태이다.
방사탑 북제주군 우도면 하고수동, 영일동, 주흥동
①②하고수동(섬의 북서쪽) 포구 양쪽에 하나씩 있다. 크기는 대략 250 내외이다. 바닷가의 잡석을 이용하여 허튼듯이 쌓아 놓았다. 탑 속은 잡석채움을 하였고, 탑돌 사이에 깬돌받침을 하였다. 일컬어 「액탑」이라 한다. 남쪽의 탑을 「여자」또는 「할망」, 북쪽의 탑을 「남자」또는 「할으방」이라고 하는데 이는 음양의 뜻과 남녀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돌탑은 바다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액」 등을 막기 위한 것이다.
③④주흥동(북서쪽 해안) 포구의 남쪽(당알코지)와 북쪽(할망알코지)에 1기씩 있다. 남쪽 탑은 높이 220, 지름 310, 북쪽 탑은 높이 210, 지름 270정도이다. 주변의 바닷가 잡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원뿔 형태로 쌓았다. 남쪽 탑을 「할으방」 북쪽 탑을 「할망」이라고 부른다. 남쪽 탑에는 상단에 신묘□석(申卯□石)이란 음각이 있다.
⑤⑥영일동(섬의 북동쪽 해변) 포구와 남동쪽 방향의 경작지에 1기씩 있다. 바닷가의 탑은 잡석을 이용하여 허튼층 쌓기를 하였고 속은 잡석채움을 하였다. 평면 사각을 이루고 정면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어 듬직하고 균형미가 돋보인다. 높이 530, 너비450 정도이며, 상단면은 시멘트로 발랐는데 〈1962. 10. 11 공사〉라고 음각되어 있다. 이것은 제주도의 방사탑 중 유일한 사다리꼴이다. 남동쪽의 경작지에 있는 탑은 주변 잡석을 이용하여 약간 다듬어서 허튼층 쌓기를 하였고, 속은 잡석채움을 하였다. 높이 290, 지름 280 정도이다. 탑 위에는 길쭉한 돌을 세워 놓아서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고 세련된 양상이다. 이 탑들은 조일리 마을의 액을 막고 안녕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워졌다. 마을에서 보아 바깥쪽에 해당하는 남동쪽 해변은 옛날에는 많은 시체가 떠올라왔었으며 궂은 것(光)이 비쳐서 이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런 기능은 다른 탑들에서도 비슷하다.(제민일보 4328. 7. 19. ‘濟州島의 石造物’)
녀항쟁기념비 潛女抗爭記念碑 북제주군 우도면 우도포구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항해서 제주 녀 수천 명이 비창을 들고 일어서서 싸운 적이 있다. 서기1932년의 투쟁으로 약 3개월에 걸쳐 연인원 17,000여명이 궐기한, 어민 항쟁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을 살펴보자. 우리 녀가 어렵게 따낸 해산물을 강탈하다시피 헐값에 사 가는 데 대하여 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서기1920년 김태호 등이 중심이 되어 도사(島司, 近藤晋二郞)를 설득하여 ‘해녀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라남도 해각(亥角, 일본인 이름)도지사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우여곡절 끝에 경상남도지사와 출가 녀들의 권익에 대하여 각서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녀들의 권익을 위한 일을 좀 했으나 나중에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다. 해녀조합의 조합장을 일본인 도사(島司)가 겸임했기 때문이었다. 수탈 상황을 보면 입어료(入漁料), 지정판매제, 해조회사에 수수료, 조합에 수수료, 조합비, 뱃사람 임금, 소개인 사례비 등등으로 다 떼이고 나면 생산자인 녀의 몫은 2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녀들은 1932년 1월 8개 항의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도사에게 전달했는데도 도사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1932년 1월 7일 세화장터에 모인 세화․하도․종달․우도․시흥․오조 마을 녀 300여 인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모여 제주읍에 있는 조합사무실로 진군했다. 이 때 이들의 결의는 다음과 같다.
1.조합원 전원 조합사무실로 가서 데모를 강행하고 그 곳을 점거하여 요구조건이 모두 관철될 때까지 농성 투쟁할 것
2.이 투쟁에 참가하는 해녀들은 모두 10일분의 양식(주로 떡)을 휴대하여 올 것
이에 당황한 경관들과 면장이 5일 후 시찰차 이 곳을 지나가는 도사(島司)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므로 제주시로 가던 길을 중단했다. 그러나 조합은 녀들이 가장 불만으로 여기는 패류에 대해 지정판매를 1월12일에 강행하는 공고를 내었다.
1월 12일 신임 도사(田口楨憙)가 초도순시차 도일주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좌면과 성산면에서 온 녀복을 입은 천여 인의 녀들이 세화리와 하도리 사이에 모여 있었다. 마침내 도사가 세화리로 들어서자 녀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에워쌌다. 경관들이 칼과 발길질로 해산을 시도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이 일로 부춘화 김옥련 등 주동녀 20여 인이 구속되었다. 이에 격분한 녀 500여 인이 1월 24일 새벽에 세화 주재소로 쳐들어가 당직순사 1명의 모자와 옷을 찢고 상처를 입혔는데 녀들도 부상을 당하였다. 이 소식에 놀란 제주경찰서에서는 전라남도 경찰부에 응원을 요청하였다. 한편 주재소에 쳐들어갔던 녀들은 일시 우도로 피신하였는데 1월 26일에 경찰이 우도에 가서 녀 30 인을 체포하고 이들을 배에 태우려고 선창에 나왔다. 이 때 순식간에 800여 인의 녀들이 경찰관을 포위하고 잡혀가는 동료들을 구하려 하자 공포를 발사하여 간신히 진압하였다. 1월 27일에도 녀 100여 인이 주재소에 쇄도하여 동료들을 구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실패하였다.(「북제주군지」. 221-222쪽)
이 사건으로 많은 녀들이 갖은 고초를 당하였고, 이들을 지도하였던 강창보(姜昌輔) 등 비밀결사도 이 일로 조직이 탄로되어 검거되는 등 78인의 애국지사가 검거되었으며, 이들은 2-3개월 뒤 모두 석방되었으나(한겨레신문 4328.1.26, 김봉옥,「제주통사」. 228쪽) 부춘화, 김옥련은 6개월의 실형에 복역하였다.(「북제주군지」. 222쪽)
고달인효자비 孝子高達仁之閭 우도면 서광리 신피앗동산 땅콩공장 옆
1982년 5월 18일 우도의 효행소년 고달인에게 1905년 고종이 하사했던 효행상(완문)과 기록을 발견하였다. 고달인은 아홉살 때 위독한 아버지(高宗辰)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하게 했는데 그 행적이 이웃과 관청에 알려져 효자로 표창을 받게 된 것이다. 고씨 일가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효자를 낳은 아버지는 흙을 밟고 다니지 말게 하라는 어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늘 말에 태우든지 업고 다니느라고 식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完文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을 만들어 주는 것은 일찍이 들으니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은 나면서부터 타고난 양능(良能)이라 하였다. 이 말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로다. 이제 고종진의 큰아들 9세인데 섬 중에서도 외딴 섬 우도에서 태어나서도 하늘이 주신 타고난 양능이 있어 놀이를 한참 할 나이에 능히 효성을 다하여 그의 아버지 죽음 앞에 실오라기 같은 목숨을 잇게 하고자 지혈(指血)을 거듭 한 모금씩 마시게 하였으니 칼날에 끊긴 손가락 흔적이 애처롭다. 이를 본 고을 첩보와 마을 보고서를 같이 하니 눈으로 보는 듯하다. 즉 이 말을 믿는 것은 소위 아이가 아버지를 사랑함이 본연의 孝心인 까닭이며 하물며 島民들은 소송하기를 좋아하며 스스로 人倫을 저버리는 일을 예사로 하며 눈을 부릅뜨고 사소한 이익을 탐내어 돌아다니는 판인데 이 때 한 효자첩이 나오게 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로다. 視務 후에 처음이라. 政事를 봄에 仁義忠孝의 道를 가르침에 있어서 옳고 떳떳한 일이로다. 이에 특별히 표창하는 바이니 마을에서 보고한 아이 이름은 高達仁이라 하였으니 일후에 身戶의 役을 전례에 따라 탕감하는 뜻을 여기 완문을 만들어 밝혀 주노라. 고종6년(서기1869) 6월 제주목사 趙羲純”
勅命 孝子父 □正三品 통정대부 고종진 孝子母 孺人 秦氏 金氏 姜氏 封 淑夫人
孝子弟 九品從仕卽忠義者 高守敬
김석린유애비 進士金公錫麟遺愛碑 우도면 중앙동
진사 김석린은 헌종10년(1844)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 우도에 정착한 사람이다. 「慶州金氏益和君 濟州派世譜」 등의 문헌에 따르면 우도는 김석린이 하사 받은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806년에 태어난 김석린은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릴 만큼 영특·비범하여 순조 때에 진사에 응시 장원급제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품에 매료된 당시 朝官 申참판은 그를 극진히 총애하여 처자가 있는 몸임에도 그를 사위로 삼았다. 결과 그는 부족함 없는 서울 생활을 하게 되고 새로 자식까지 얻게 되었는데 삶이 윤택해질수록 鄕愁가 더 커져 귀향을 결심하게 된다. 장인인 申참판에게 이러한 뜻을 전하자 사위의 뜻을 꺾지 못한 장인은 임금에게 청하여 우도를 하사 받고 이를 김진사에게 전수했다. 그 후 진사는 勅旨를 가지고 돌아와 무인도였던 우도에서 농축업을 시작하고 입주해 오는 이들에게도 농축업을 권장하는 등 우도를 개척해 나아갔다.
그가 노환으로 숨을 거두고 그이 아들 亮洙가 모든 것을 계승했다가 손자인 根蓍로 이어졌는데, 日帝 大正 때에 토지 측량령의 시행으로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명의귀속이 실시케 되었다. 이 때 마을 대표인 高아무개가 金根蓍를 만나 이를 의논했는데 그는 아무 조건 없이 주민들의 연고지별로 토지를 소유(등록)하라고 했다. 이에 감동한 주민들이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2000원을 모금해 전달했으나 金根蓍는 이를 거절하며 조부의 우도 설촌의 신성한 뜻을 어기지 말라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감명을 받은 주민들은 김진사의 공덕을 기리는 비(救恤碑閣)을 세웠다.(조맹수,「제주의 섬」)
첫댓글 아름다운 제주를 한번에 다알렸으니 다음에는 어쩔려고 조금씩 나눠 올려야 원순일가님 부담도 덜것인데
원순 일가님 편히 앉아서 제주도 관광 하게되어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재밌는것 부터 조금씩 읽으셔야 하는데 암튼 통달하십시오. 두분 일가님 고맙습니다.
들려 제주 공부하고갑니다.
하이고 자료가 너무 어마 어마해서 어떻게 한꺼번에 ..............먹고도 살아야되고 제주도도 알아야하고 이것 정초부터 비상입니다. 다음에 각오 하세요 거제도편 올립니다. 비록 제주도 다음으로 큰섬 이지만 만만한 섬이 아니랍니다. 불황이 없는 곳이 거제도입니다.
예 마음에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지는 12개월로 나눠서 읽을 것이니까요.
ㅎㅎㅎ 이제 거제해금강 공부도 해야겠네요. 역시 이런자리를만들어준 현수씨께도 감사드려야겠고 성룡 반갑습니다.
예 잘계시죠 올한해도 예년처럼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해금강 자료 저한테 좀 있습니다.
역시 한라산님은 마당발이십니다.
그래서 한라산은 관광회사를하지않습니까. 현수일가님 께서 한라산관광회사를 띠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