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 의 中心 哲學
(중관 체계에 대한 연구)
무르띠 지음. 김성철 옮김
2560. 7. 24
제3부 : 중관불교 및 동일 계통의 체계들
제12장 : 중관불교 및 서양의 몇 가지 변증법적 체계
2. 헤겔주의자와 중관파의 변증법
1).변증법은 헤겔의 사상과 중관파의 사상 체계의 중심 테마이다. 이성이란 그 본성상 이율배반적이고 상대적이라는 사실은 양자의 공통된 토대이다 ;
이성은 대립된 것들을 통해 작용하는데, 이런 대립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양자 모두 더 높은 입장으로 향상하여 그런 대립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변증법이란 사물들을 고립시키고 추상화시키며 산산조각 내는 오성의 입장으로부터,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 오성 내의 대립을 일시에 파악하여 통합하는 이성의 입장으로 가는 운동이다.
그러나 중관파의 의견에 따르면, 변증법이란 현상 내에 있는 붓디(이성)의 상대성으로부터 절대에 대한 불이의 직관으로 가는 운동이다.
즉, 견해에서 반야를 향해 가는 것이다.
2).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헤겔적인 변증법에서는, 정립과 반정립을 제3의 개념 하에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통합시킴으로써 양자 사이의 대립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헤겔은 이 제3의 개념에서 양자 사이의 불일치가 제거된다고,
즉 양자가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양 측 입장의 종합은, 양자를 단순히 모아 놓은 것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런 것은 자이나교의 견해이다.
헤겔은 그 종합이 보다 새롭고, 보다 풍부하고, 보다 포괄적인 관념, 그에 따라 차별들에 대해 토대를 제공해 주는, 보다 차원 높은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새로운 개념이다.
그러나 선행하는 것보다 더 차원 높고 더 풍부한 개념이다 ;
왜냐하면 그것은 선행하는 그런 개념에 대한 부정, 또는 반대에 의해 그 내용이 풍부해져서, 선행 개념도 담고 있지만 그 이상의 것도 역시 담고 있는, 선행 개념과 그 대립 개념의 통합이기 때문이다.”
존재와 비존재는 묶여져서 생성으로 통합된다.
주관과 객관은 절대 정신 속에서 포괄된다.
변증법적 운동이란, 빈약한 내용을 갖는 낮은 차원의 개념에서 풍부한 내용을 갖는 높은 차원의 개념으로 전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증법적 개념에 대해 두 가지 한계를 그을 수가 있다.
하한선은 그 내용이 가장 빈약한 관념(순수 존재)이며
상한선은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갖는 관념(절대)이다.
변증법적 운동은 3단계의 과정이다 ; 낮은 차원의 개념에 대한 종합 그 자체가 다시 시발점이 된다.
즉 새로운 3단계를 위한 정립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나선형으로 진행되는데 나선의 한 단위는 삼 단계로 이루져 있다.
절대가 모든 것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통합자이기 때문에 역 - 피라미드 모양이라고 보면 더 좋을 것이다.
설혹 사고의 본질이 헤겔이 묘사한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사고 구조에 대한 탐구가 어떻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실재에 대해 알도록 도와주는 것일까?
한 편에는 물자체가 있고 다른 편에는 사고 형식이 있다는 칸트적인 이원성에 대해 면밀하게 비판을 가한 후에 헤겔은, 의미를 완전히 잃지 않는 이상 물자체와 사고 형식의 양자는 서로 이질적일 수 없다는 해답에 도달하였다.
“왜냐하면, 오직, 이성이 그 스스로 특성을 나타내며 그 내용에 관한 한 그 자신의 주인인 한에 있어서만, 이성은 조건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고와 실재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점이 헤겔 사상의 근본 원리이다.
그는 이에 대해 증명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는 말이 된다.
위압적인 초월 - 구조로 인해 그 토대의 완벽성도 보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고의 기능이란 왜곡하고 단순히 재현만 하는 것’ 이라는, 그와 똑같이 그럴듯하게 타당한 생각들도 있을 수 있다.
3). 헤겔적인 변증법에서 제기하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있는데,
이 점에서 중관파와 헤겔은 근본적으로 갈라진다.
헤겔은 언제나 대립 항들의 종합이 보다 차원이 높고 보다 진실하고 보다 실재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종합이 대립 항들의 실재라고 입증이 되어야만,
즉 대립 항들이란 실재의 거짓된 나타남이어야만, 그런 종합은 더 차원이 높은 것일 수가 있다.
진실과 거짓은 단순히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평가가 개입된다 :
거짓이란 부인되는 것을 말하고,
진실이란 인정되는 것을 말한다.
헤겔의 경우에는, 종합이란 포괄적이고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종합 쪽이 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식의 인식이 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해 양적인 측정을 가할 수는 없다.
어떤 사물이 더 존재한다든지 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떤 것이 크다, 더 크다,
더 작다라든지 그 쪽이 많다 또는 적다라는 말은 할 수가 있다.
헤겔은 진실과 거짓 사이의 질적인 사이를 정도의 차이로 환원시키고 있다.
실재란 더 광범위하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대립 항들은 부분적으로 실재적이다.
이 말은 그 상태에서는 부분적으로 비실재적이라는 말이다.
이 경우 무엇인가가 대립 항들에 첨가되면 그것들은 완전히 실재적으로, 또는 보다 더 실재적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중관파의 주장에 따르면,
나타난 외현들과 갖가지 견해들을 부정하는 방법에 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실재라고 알 수 없다.
실재란 견해들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함으로써 도달되는 것이다.
실재란 나타난 것의 진상이다 ;
진실이란 견해들의 공성이다.
중관파의 변증법에서는 차별(유, 무, 유무, 비유비무)을 부정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그것들을 통합한다.
4). 부정 그 자체는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헤겔은 대립 항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지(保持)하고 흡수할 것을 주장한다.
종합이란 대립된 양자 간의 불일치하는 점들이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대립 항들의 차별들을 추상함으로써 얻어지는
‘생경한 보편’ 에 대비하여, 이것을 ‘구체적 보편’ 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헤겔이나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빈번히 사용하고 있는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속에서의 대립 항들의 차별들의 정확한 존재 양식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브래들리에게서도 접하게 될 이론이다.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해 보자. 어떤 특수한 사물 자체의 성질은 그에 반대되는 사물에 대비가 되어야 드러나는 법이다.
반대로 사물은 개별성을 띄고 있어야 그에 대한 대립과 불일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물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나 반대로 무엇에 수반되어 있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은 모두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
보지(保持)될 수 있는 것은 대립 항들의 특수성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 즉 그것의 실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물의 본질적인 정체와 표면적 모습 사이에, 즉 승의와 세속 사이에 구별을 지어야 한다.
추상적 보편이나 사이비 무한에 대한 헤겔적인 비판은 중관파, 심지어 베단따에 대해서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에 의하면 “유한에 대한 단순한 초월 이상인, 진정한 무한은 언제나 그 자체 내에 그것과 병합된 유한을 포함하고 있다.”
만일 실재(무한)와 유한한 외현(현상) 사이의 관계가 타자의 관계라면 이런 비판은 타당하다 ;
왜냐하면, 유한한 무한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 허수아비와 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한은 더 보잘것 없어질 것이다.
이와 달리 중관파에서 말하는 절대란, 우리가 세심하게 지적했듯이, 타자, 즉 현상 세계에 대립하여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
즉, 절대란 현상의 실재이다.
따라서 윤회와 열반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용수가 선언했던 것이다.
만일 이를 부인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실재 가운데서 무엇을 버리거나 축소하여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헤겔의 견해에서도 오성의 추상 작용은 반드시 초월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이런 식의 오해까지도 보지(保持)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5). 이제 우리는 헤겔과 중관파에서 말하는 사고(이성)의 기능에 대해 논할 차례가 되었다.
헤겔은 사고가 실제 그 자체의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관파에서는 붓디(이성)란 무지라고 보았다 ;
그것은 우리와 실재 사이를 차단하여 실재를 왜곡시키는 기능을 한다.
중관파에서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는 붓디의 상대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실재란 비 - 상대적인 절대이다 ;
붓디가 구별 작용을 통해 기능하기 때문에,
즉 어떤 것을 다른 것에 관계시킴으로써 기능하기 때문에, 절대는 붓디의 파악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
절대는 오직 직관을 통해, 즉 반야바라밀다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실재와 실재에 대한 인식은, 조금도 어긋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일치한다.
헤겔의 경우, 상호 의존성, 또는 상대성은 실재의 본래 모습이라고 본다 ; 비- 상대적인 것, 예를 들어 추상된 것과 순전히 직접적인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가장 낮은 차원의 지식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지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지식은 사고 - 스스로 소외되었다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사고 - 그 자체의 단계들이라고 헤겔은 해석하였다.
중관파가 말하는 세속은 헤겔에 있어서는 절대이다.
만일 이성과 실재가 동일하고
한 쪽의 논리가 다른 쪽의 논리와 같은 것이라면 모든 사고는,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진실이어야 한다.
양자 사이에는 불일치가 만들어져서는 안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혀 발생하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나 갖가지 철학 체계들이 서로 다투고 있고, 이런 철학적 이념들이 현실적 생활에 현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사고가 실제를 구성한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가 없다.
만일 불일치와 부조화의 발생 그 자체도 사고의 본래적인 특성이라고 말한다면, 차별이 만들어지는 것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이고 자동적인 것이리라.
이렇게 되면 사고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한 반성도, 절대를 체득하는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다 ;
변증법적 운동은 그 자체의 불가항력적인 역동성에 의해 작동될 테니까.
아마 우리는 그런 운동을 늦추거나 서두를 수도 없을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신적인 가치가 전혀 없는 일종의 멋들어진 사치품이다.
6). 헤겔은 절대를 사고와 동일시하고 중관파는 불이의 직관 (반야바라밀다)과 동일시한다.
이 점은 변증법의 전체 구조와 양 체계 내에서 작용하는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 영향을 준다.
헤겔의 경우, 변증법이란 범주들을 더 밀접하게 묶기 위한 종합 운동이다 ;
이는 현상 내에서 다루어진다.
중관파의 경우, 변증법이란 우리의 마음에서 범주들을 벗겨 내기 위해 쓰이는 비판적인 분석 도구이다 ;
이는 현상에서 멀리 벗어나는 운동이다.
중관파에서는, 상반된 이론들이나 입장들 사이의 갈등을, 각 이론을 분석하고 그 내부의 결함을 폭로함으로써, 해결한다 ;
변증법은 그런 이론들을 조금도 남김 없이 해체시킨다;
그렇다고 또다른 이론을 응축해 내는 것도 아니다.
헤겔의 경우에는 이론들을 하나의 통합체로 종합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헤겔의 견해에 의해서라도 대립 항들의 종합이 대립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
왜냐하면 첫 번째 종합이 그 다음의 종합 속에서는 다시 새로운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없는 나선 구조에는 논리적인 한계가 있을 수 없으며 그 나선에 잇대어 우리는 점점 더 넓은 원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것 자체가 절대인 것 속에서는 변증법이 결코 정점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딜레마이다 :
처음의 3단계 종합 자체에서 대립이 제거되어 더 이상의 나선 운동은 없게 되든지, 아니면 아무리 무한히 종합을 해도 대립을 제거할 수 없는 것이든지 양자택일적 난관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어떤 유한한 회수의 혁신 이후에 변증법적 과정으로 인해 갑자기 타자가 사라지며,
완전한 내적 성찰의 단계로 발달해 간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코 사고와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는 타자,
그런 타자와 대면해야 하는 것은 사고의 본질, 다시 말해 사고다운 본질이다.
사실상, 절대를 사고와 동일시하는 것은, 헤겔이 이해한 절대와 같이, 절대의 사이비 무한으로 만드는 꼴이 된다 ;
왜냐하면 ‘타자’ 란 반드시 장외로 떨어지게 마련이어서, 그 장 내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 자신의 말 가운데서 우리는 헤겔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옳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의미 심장한 구절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무한의 끝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가상을 제거하기만 하면 달성된다.
선(善), 절대적 선은 세계 내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완성해 간다 : 결론적으로 말해,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야지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암암리에 또 현실적으로도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가상(假象)이다.
그와 동시에 그런 가상만이 현실화하는 힘을 제공하며 그 힘의 토대 위에 세계 내의 관심이 놓여 있다.
관념의 진행 과정에서 관념은 관념과 대면하게끔 반정립을 내세움으로써 그런 가상을 창출한다 ;
그리고 관념의 활동은 그것이 창출했던 가상을 제거하는 데 있다.
오직 그런 허위에서 벗어나야만 진리가 발생한다.
그런 사실 가운데 허위와의 화해, 유한성과의 화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허위가 진실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허위, 또는 타자적 존재는,
여전히 진리의 역동적 요소로서 필요하다 ;
왜냐하면 진리란, 오직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곳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관파라면 위와 같이 말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 말은 헤겔 자신의 말인데도 명백히 헤겔 변증법의 일반적 경향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다.
선(善)은 끊임없이 실현된다.
그리고 사고의 기능은, 사고가 무심코 창출해 냈던 가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곳에서는 이렇게 자기 - 창조적인 사고를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실재와 동일한 사고를 말하는,
헤겔의 이론은 그 정체가 대체 어느 쪽일까?
사고는 우연 발생한 것,
즉 우리가 절대를 향해 가는 도중 초월되어야 하는 가상이다.
득자량 사경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