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錄)
세상에 이름난 산이 하나가 아니지만 동해의 삼신산(三神山 :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세 개의 산으로, 본래 중국 전설에 나오는 발해만(渤海灣) 동쪽의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하여 삼신산으로 불렀다.)이 가장 신령한데, 남쪽으로 살펴보면 두류산(頭流山 : 지리산의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이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이다. 두류산이 명승이라는 말은 무척 많이 들었지만 가볼 틈이 없었다.
융희(隆熙) 4년 기유(己酉)년[융희 4년은 일제에 강제로 합방당한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일어난 해인 1910년이고, 기유년은 그 전 해인 1909년이므로 연대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착오가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연호에 따른 연도는 세는 방식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간지에 따른 햇수는 일정하다는 점과 뒤에 나오는 기우만과 관련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1909년이 옳을 듯하다.] 정월 어느날 최습재(崔習齋)형과 함께 용성(龍城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를 가리킨다.)의 호동(壺洞)에 머무르며 세상의 도가 점점 땅에 떨어져 가는 것을 한탄하고 시대적인 양상이 크게 변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다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일들을 근심하고 분해하면서 자취를 감추고 숨을 만한 땅을 찾고자 하였다. 내가 “방장산은 단지 신선들이 그 안에 있는 굴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학동은 깊숙하면서도 넓어 예로부터 세상을 피할 수 있는 땅으로 전해져 왔으니, 한번 진짜인지 찾아보아서 오랜 빚을 갚는 것[오래도록 생각해왔던 일을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여, 같이 갈 것[원문의 ‘연몌(聯袂)’는 소매를 나란히 한다는 뜻으로, 같이 가는 것을 말한다.]을 약속하였다.
28일 정묘(丁卯)
길을 나섰는데, 짧은 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보따리는 소략하였다. 삼구정(三求亭)에 이르러 문득 길 가는 사람을 보니 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인 듯한데, 별안간 지나쳤기 때문에 갑자기 기억해내기가 어려웠다. 몇 걸음을 가다가 돌아보며 한번 물어보니, 과연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이었다. 일찍이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험난한 세상에 이리저리 치달리며 살다보니 얼굴빛이 초췌해져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할 뻔하였다. 세 사람이 길에서 만나 둘러 앉아서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토로하였는데, 말이 세세한 곳에까지 미친 뒤 헤어졌다. 원천(源川)에 이르니 해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다리도 아프고 뱃속도 빈 데다 험준한 고개를 바라보니 기운이 꺾여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으므로 무수동(無愁洞)에 들어가 노내숙(盧乃淑)의 집으로 찾아가서 묵었다.
29일
숙성치(肅星峙)를 넘어 개울을 따라 내려와 산동(山東)에 이르니 단청을 칠한 문이 있었다. 경재(敬齋) 하연(河演 : 1376-1453)공이 관찰사로서 이곳을 순시할 때[하연은 1425년에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요리사가 다섯 마리의 잉어를 얻었는데 (하연공이) 꿈 속의 조짐을 핑계 삼아 놓아 살려주었다. 그러자 용이 그 덕에 감격하여 모습을 드러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으므로, 공이 바위 위에 시를 새겨 놓았는데, 뒷사람들이 전각을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하여 놓은 것이었다. 금성치(禁聲峙)를 지나 연파정(烟波亭)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때 한수천(寒水川)에 이르러 여관에서 묵었다. 여관에는 먼저 들어온 늙은이가 한 명 있었는데 대전(大田)에 살며 승지(承旨) 이최승(李最承)과 조금 떨어진 이웃이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이승지가 굶주림을 참아가며 굳이 곤궁하게 지내는데, 문을 닫아걸고 손님을 거절하며, 옷도 입지 않고 갓도 쓰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마치 세상을 잊으려 하는듯하다고 하였다.
30일
이부자리에서 밥을 먹고 일찍 출발하여 화개동(花開洞)에 이르렀다. 일두(一蠹 :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자는 백욱(伯勗)이며 호는 일두(一蠹) 또는 수옹(睡翁)이다.) 선생의 ‘풍포렵렵(風蒲獵獵 : ‘바람이 부들에 쉭쉭 부네’ 또는 ‘바람에 부들이 흔들거리네’라는 뜻이다.)’이라는 구절을 생각하였는데, 그 당시 강학(講學)하던 정자가 옛날 그대로 날아갈 듯이 서 있으니, 그 풍모를 우러러 흠모하며 거슬러 올라가 헤아리면서 감개무량해 함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가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딸린 이는 대여섯 명 되었으며, 풍기는 기운이 몹시 곤궁하고 피곤해 보였다. 말씨가 분명 다른 지방 사람인지라 지팡이에 기대서서 물어보니 경기도 광주에 사는 신(申)씨라고 하였다. 습재와 함께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저들 또한 세상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부류가 아닌가? 깊은 산 숨은 골짜기가 북쪽에도 또한 없지 않을 터인데 어찌 갖은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골짜기 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 골짜기로 10리쯤 들어가니 도솔동(兜率洞)으로, 하늘이 맑고 깨끗한 법계를 열어 놓았다.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는 고운(孤雲) 최치원이 쓴 것으로 글자의 획이 가늘고 단단하며 험준하고 고졸한[瘦硬峻古] 것이 보면 볼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문으로 들어가 나아가니 절이 금빛과 푸른 빛으로 눈부시게 빛나 눈길을 빼앗았다. 청학루(靑鶴樓)에서 휘파람을 불다 그쳤다. 절 뒤로 해서 절벽을 붙잡고 바짝 붙어 마디마디 나아가고 걸음걸음마다 쉬며 겨우 험준한 돌길을 지나자마자 몇 아름 되는 늙은 나무들이 바로 앞에 쓰러져 누워 있어서, 옷을 걷어 올리고 그 위에 걸터앉아 넘어가기도 하고, 갓을 벗고 그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잔교(棧橋 : 나무로 엮어 놓은 다리를 말한다.)를 건너고 폭포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나서 불일암(佛日菴)의 옛 터에 이르렀다. 이곳이 바로 이전의 현인들이 말한 청학동(靑鶴洞)으로, 남쪽으로는 향로봉(香爐峰)이 있고, 서쪽으로는 청학봉(靑鶴峰)이 있으며, 천 자나 되는 폭포가 그 앞에서 쏟아져 내리니 참으로 기묘하고 빼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평평하고 넓은 땅이 아니어서 도원(桃源 :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한다. 중국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나왔다. 중국 진(晉)나라 때 호남(湖南)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저어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로 올라가 굴속에서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곳이 하도 살기가 좋아서 바깥세상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많은 세월이 지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에서 천 가구가 꽃이나 대나무처럼 흩어져 살았던 것하고는 아마도 더불어 견줄 수 없을 듯하였다. 그렇다면 그 뒤에 참된 경계[참으로 무릉도원 같은 곳을 말한다.]가 있는지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차라리 다시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것이 나으리라.
가시나무 사이를 헤치고 덩굴을 붙잡으며, 미끌거리는 걸음으로 가파른 곳에 오르고, 몸을 굽혀 험난한 곳을 지나갔다. 이처럼 수십 리를 가서야 비로소 희미한 길을 만났으며, 차츰차츰 십 리쯤 나아가니 가파른 절벽에 단단한 얼음이 갑자기 머리 앞에 닥쳐서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해서 가고자 하면 곧 나무들이 하늘 가득히 들어차 있어 몸을 들일 수가 없었다. 기어가는 것이나 차질(蹉跌 : 본래는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는 뜻으로 일이 어그러짐을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하는 것 모두 쓸 수가 없어서, 미끄러지지 않을 것을 만들어 신고[원문의 ‘木+輂’ 또는 ‘梮’은 미끄러지지않도록 징을 박은 신발이나, 삼태기를 뜻하는데, 여기에서는 나뭇가지 같은 것을 신발 밑에 묶어 미끄러지지않게 하였다는 뜻으로 보인다] 백 자나 되는 장대 끝에서 앞으로 나아가듯이[본래 선불교의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에서 나온 말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을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죽음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간다는 뜻으로 쓰인 듯하다.] 나아가서 골짜기 냇물을 따라 육칠 리를 가니 골짜기가 넓고 산들이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들판이 평평하고 사람 사는 집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비록 푸른 학이 날아다니는 것은 보지 못하였지만 학 울음소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와 들리는 듯하였다.
날이 저물어가는데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묵을 곳을 물어보니 멀리 대나무 숲에 있는 마을을 가리켰다. 짧은 산기슭을 넘어 문을 바라보며 가보니 초가집 서너 채가 있는데 저녁 연기가 바야흐로 짙어지고 있었다. 갓을 쓴 노인이 마당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멈추어 보다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니 처음에는 마뜩치 않은 듯하였으나 마침내 이끌어 방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노인은 도(都)씨였다. 땅과 사람들, 하는 일, 떠받드는 것 등을 차례로 물으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곳의 본래 이름은 ‘학동(鶴洞)’인데, 중고(中古)시기에 ‘불지(佛地)’로 바꾸어 부르다가, 우리 광무(光武)시대에 토지를 측량할 때에 기술자가 ‘이 골짜기는 산세가 학의 몸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고, 그대로 ‘학동(鶴洞)’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청암(靑巖 : 푸른 바위)이 학동을 마주보고 있다 하여 ‘청학동(靑鶴洞)’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멀리서 와서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풍년에는 먹고 살 다섯 가지 곡식이 충분히 다 갖추어지고, 쑥과 도토리는 흉년을 구제하여 주린 배를 채우기에 충분합니다. 다만 문물이 아직 열리지 못하여 교양을 갖출 방법이 없으니, 거의 오랑캐를 피하려다가 도리어 오랑캐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이날 밤에 눈이 내렸다.
2월 1일 경오(庚午)
바람과 눈이 계속 된데다가, 습재가 갑자기 눈병으로 괴로워해서 그 집에 계속 머물렀다. 한낮에 나 혼자 동쪽 언덕에 올라갔다가 사람을 만나 자세히 알아보니, 단천(檀川) 세동(細洞) 증봉(甑峰) 죽전(竹田)을 모두 합쳐 학동이라고 부르며, 그 밑으로 석문촌(石門村)에 이르기까지는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따로따로 다른 이름이 있어서 일일이 다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들어가니 자리에 한 노인이 있는데 모습이 말랐고 옷과 갓이 남루하였다. 다만 말하는 것과 견식이 매번 이치에 맞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산 속에 사는 일민(逸民 : 능력과 덕망이 있으면서 숨어 사는 이를 말한다.)일 것이다. 성은 박(朴)씨이고 해주(海州)에서 왔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문인인 박여룡(朴汝龍, 1541-161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면천(沔川)이고 자는 순경(舜卿)이며 호는 송애(松厓)이다.)공의 후손이라 하였다. 더불어 이야기하다가 한밤중에야 잠이 들었다.
2일
박씨 노인, 집주인 도씨 노인과 헤어져 동구 밖으로 나와 팔구 리를 가니 곧 세 거리의 술집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석문(石門)이 깊이 에워싸서 물이 흘러드는 곳을 얽어 막고 있는데, 몇 시간이면 다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생각하기에 혹 여러 날 집을 비운 채 머물러 놀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지름길을 물어 회남령(回南嶺)에 올랐다. 이 고개는 본디 무슨 이름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건중(健中)이며 호는 남명(南冥)이다.)이 돌아간 뒤로 이를 좇아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회남령’이라는 말이 ‘남명이 돌아간 고개’라는 뜻이다.] 악양(岳陽)을 내려다보니 한 폭의 그림처럼 산을 등지고 강을 띠고 있으며 여염집이 즐비하고 들판이 널리 열린 것이 문득 다른 세상인 듯 느껴졌다. 둔촌(屯村)에 이르러 동정호(洞庭湖)를 감상하였는데, 봉황성(鳳凰城 : 악양에 이런 이름의 성은 없다. 다만 동정호 주변 산에 신라시대의 석성인 고소성(姑蘇城)이 있는데, 혹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鳳凰城 : 악양에 이런 이름의 성은 없다. 다만 동정호 주변 산에 신라시대의 석성인 고소성(姑蘇城)이 있는데, 혹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과 악양루(岳陽樓)는 무너져서 단지 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호상서숙(湖上書塾)에 들어가서 가면(假眠)을 취하였다.
3일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 마을 앞의 여관에서 밥을 먹고 길에 오르려할 때 센 바람이 크게 일어 강의 물결이 솟구쳐 일어나고 강가의 모래가 공중에 날아다니며 산의 나무들은 가지가 꺾이니, 눈은 들 수도 없고, 지팡이는 머물 수도 없어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추고 하였다. 밤을 타고 해교(海橋)로 경당(警堂) 임현주(林顯周)를 찾아갔다.
4일
경당과 함께 곡성(穀城) 오지(梧支)로 조의경(趙義敬, 영선(泳善))의 집을 찾아갔는데, 마침 아름다운 손님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밤에 비가 내렸다.
5일
비가 계속 내려 그치지 않았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자는 이술(而述)이며 호는 화서(華西)이다.)의 훌륭한 말을 들어보니 그의 본래 바탕이 몹시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론이 담화(潭華)와 서로 등지는 것이 한스러웠다.[여기에서 ‘담화’는 ‘석담화양(石潭華陽)’을 줄여 말한 것이다. 본래 석담은 황해도 벽성군 고산면에 있는 선적봉과 지남산의 깊숙한 계곡을 말하지만, 은병정사를 중심으로 한 상·하 석담천의 아홉 굽이 풍광이 뛰어나서 율곡 이이가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붙이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기 때문에 율곡 이이를 가리키고, 화양은 충청북도 속리산의 화양동계곡을 말하지만, 조선 중기의 유학자 송시열이 경치가 수려한 아홉 곳을 정하여 각각 이름을 새겼기 때문에 우암 송시열을 가리킨다. 따라서 ‘석담화양’은 율곡 이이에서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율곡학파를 말한다. 그런데 조선 성리학사에서 율곡학파는 이(理)와 기(氣)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강조하면서 기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입장인데 반하여, 화서 이항로는 이와 기를 확연하게 구분한 뒤 이를 중심으로 하는 철저한 주리론(主理論)적 성리학설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서로 등진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하여 글쓴이가 율곡학파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6일 날이 맑았다. 조의경과 더불어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로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菴)이다.)의 영당(影堂)에 참배하였다. 검은 갓 녹색 도포를 우러러 뵈니 생생한 그 모습이 그 자리에 계신 듯 성대하였다.(영선은 면암의 문인으로서 여기에서 유상(遺像)을 받들고 있었다.) 주인과 작별하고 마을을 벗어나서 다시 경당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순강(鶉江)에 이르러 뱃삯을 치르고 잘 건너와 남원으로 들어와서, 겸산(謙山)의 누이 안경숙(安敬淑)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곧 떠났다. 비록 강하게 만류하여 떠나기 어려웠지만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길을 가다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 1846-1916)이 저들이 주는 돈을 물리치고 패랭이를 쓰고 스스로 해산(海山)으로 물러났다는 말을 들었다.[기우만은 호남의 거유(巨儒)였던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유(文儒)로 추대된 명망 높은 유학자이자,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입각하여 의병을 이끌던 의병장으로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한 뒤, 1908년 전라남도 순천시 조계산의 암자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을 듣고 은둔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바로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쓴 연도도 1908년에 좀더 가까운 1909년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아아, 저들은 돈으로 하고 우리는 의(義)로 하니, 이제부터는 우리 유교의 종자가 일망타진되는 시대가 되겠구나! 통곡을 어찌 그칠 수 있으랴! 지나는 길에 사계정사(沙溪精舍)(방(房)씨의 재실(齋室))에 들러 여러 현인들의 시과 글을 소리내어 읽고 날이 저물자 새로 생긴 주막에서 묵었다.
[일자상으로는 7일의 기록이 이어져야 하는데, 바로 8일로 넘어가고 있다 있다. 날짜를 혼동한 것인지, 빠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8일
새벽에 밥을 해먹고 겨우 운교(雲橋)에 다다랐을 뿐인데 구름이 모이고 산이 어두워지는 것이 비가 내릴 뜻이 매우 성하였다. 서둘러 움직여 가다 쉬고 가다 쉬며, 앞에서 부르고 뒤에서 답하면서 풍촌(豊村)에 거의 다다랐을 때 비가 내렸는데, 잠시 날렸다 잠시 그쳤다 하였다. 마을 앞에 우물이 있는데, 네모난 돌로 사방을 둘러쌌으며, 우물 옆에는 향나무를 심었는데, 크기가 너댓 아름 정도 되었다. 향나무의 굽은 허리가 물 속에 잠겼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위로 뻗어 있어서, 완연히 일산을 펼친 듯하였고, 빽빽한 가지와 잎사귀가 폭우가 아니면 새지 않을 듯하였으므로 잠시 그 아래에 있었다. 잠시 뒤에 구름이 걷히고 날이 개었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니, 다행스럽게도 집 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세속에 대한 생각과 세속의 일들이 다시 겹겹이 밀려왔다.
●옮긴이 : 박 해 당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