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박정희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정희
朴正熙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임기국무총리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매장지본관학력정당부모배우자자녀종교서명복무복무기간소속최종계급지휘참전서훈
1963년 12월 17일~1979년 10월 26일 | |
최두선(1963년~1964년) 정일권(1964년~1970년) 백두진(1970년~1971년) 김종필(1971년~1975년) 최규하(1975년~1979년) | |
전임: 윤보선(제4대) 후임: 최규하(제10대) | |
신상정보 | |
1917년 11월 14일 | |
일본 제국령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사곡동 | |
1979년 10월 26일(61세) |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 |
고령 | |
육군대학 | |
민주공화당 | |
박성빈(부), 백남의(모) | |
김호남(1936년~1950년), 육영수(1950년~1974년) | |
아들: 박지만, 딸: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 |
무교[1](친불교[2]적 행보[3]) | |
군사 경력 | |
만주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
1944년~1945년(만주국군) 1945년~1963년(대한민국 육군) | |
민주공화당 | |
육군 제9보병사단 참모장 육군 제5보병사단 사단장 육군정보학교 육군 제7보병사단 사단장 육군 제2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 |
중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 여순 사건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박정희(朴正熙,[4] 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병과(兵科)는 포병(砲兵)이다.
1945년 9월 21일 북경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5] 1946년 5월 10일에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귀국한다.[6]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셋째형 독립운동가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순사 출신 구미 경찰관들과 대립하다 사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사건 직후 형의 친구이자 사회주의자이던 이재복의 권유로[7] 반이승만파이던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8][9]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변란 성격의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깨면서 군복을 벗고 직선제로 치루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자주국방 및 군대 현대화 사업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생애 초반
학창시절 박정희
1917년 동학농민운동가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 밑에 놓인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를 짓이겨서 박정희에게 발라주었고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10] 이 일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 전해진다.[10]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11] 훗날 입학하는 구미공립보통학교의 입학 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재되어 있으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11]
아버지는 조선 후기에 무관직 정9품 효력부위[12]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13] 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와 둘째 형은 인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은 이를 회자화 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26년 4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14] 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15] 한편 그의 담임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 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14] 반 학생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 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하여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한다고 평하였다.[14]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1970년 4월 26일 박대통령 자신이 김종신 공보비서관에게 직접 써준 '나의 소년 시절' 회고에 의하면 어린 시절부터 군인을 무척 동경했으며,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기록한다.[16]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16]
소년 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17] 그의 동창인 한성도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18] 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18]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 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 뒤 생가로 이동했다.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인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18] 한다. 1972년 이준상이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 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1일에 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19]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나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19]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19]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20]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 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20]
청년기결혼에서 재혼까지
1936년 4월 1일 3살 연하 김호남과 21살에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으나, 신혼 이후 성격 차이로 거의 얼굴을 보지 않는 사이로 지내다 결국 1950년에 이혼을 한다.
1947년 이효 대위의 소개로[21] 이북 출신이자 이화여대 학생이던 24세 이현란을 처음 만나 1948년 약혼식을 갖고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한다. 당시 학비금도 내어주고 무척 잘해줬다고 한다. 허나 정작 이현란은 학교에서 어떤 소령과 약혼했다는 소문이 부끄러웠고, 박정희가 지프차를 타고 자주 보러 올때도 숨었다고 한다.[22] 1948년 박정희가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어 숙군(肅軍) 대상자[23]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이현란은 '이북서 공산당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라고 푸념했다 한다. 이때 박정희에게 이혼수속을 해주지 않던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괘씸한 생각이 들어 여러번 가출하다 1950년 2월 6일 결별했다고 조갑제가 기재한 자유기고가 강인옥의 녹취록 인터뷰에서 밝힌다.[22]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 정운현 기자의 2011년 기사에서는 이현란이 박정희와의 동거 때 아이가 태어났다고 주장한다.[24] 반면 1997년 강인옥의 녹취록에서 이현란은 둘 사이 소생은 없었다고 밝힌다.[25]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김호남과 이혼 후[26] 곧바로 육영수와 재혼을 한다. 박정희에게 김호남과의 첫 결혼에서 생긴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육영수는 박재옥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27] 첫 부인 김호남은 훗날 두번째 남편 사이에 태어난 아들과 함께 절로 들어가 비구니로 살았다고 한다.[26]
교사 생활 (1937 ~ 1939)
문경공립보통학교 단체사진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28] 그 해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고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시절 때 박정희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제자였던 전경준은 "선생님은 열등아나 사고아 등의 가정을 자주 방문했다"고 기억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떼내어 도와주었다고도 한다.[28] 농번기인 봄 가을에는 학생들에게 4∼5일씩의 휴가를 주어 농사와 가사를 돕도록 했다. 이 기간에 박정희는 학급원들의 가정을 찾아가서 농업과 가사 실태를 조사하였다. 제자 김경운은 자기 집을 찾아온 박선생이 보리밥과 살구를 맛있게 먹고 가던 기억을 오래 간직했다고 한다.[29]
제자 이영태는 박정희 선생이 조선어 시간에 태극기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복도에 보초를 배치한 뒤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대구사범 때 김영기[30] 선생이 쓰던 방법이었다). 또 음악시간엔 황성옛터와 심청이의 노래를 가르쳤다고 전한다. 박선생을 통해서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29]
이영태는 박정희가 경찰지서의 사찰주임인 오가와 순사부장 하고 자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제자 박준복의 증언에서는 박선생은 일본인 교사들 하고도 사이가 좋았는데 아리마 교장과 야나자와 교사와는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야나자와가 "조선인의 주제에…"라고 말하자 박정희가 의자를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29]
박정희가 담임했던 5학년의 급장이었던 신현균 또한 박선생이 특히 우리 말의 지도에 열성을 보였다고 기억했다. 이어 박선생은 운동회 때 1백m 달리기에서 일본인 교사 쓰루다에게 졌는데 연습을 많이 하여 다음 시합에서는 그를 물리쳐 문경에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는데 특히 일본인한테 더욱 그러했다 전해진다. 제자들을 모아서 나팔조를 만들고 지도했다고 한다.[29]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 1939년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였던 권상하씨의 증언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 즈음 박정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와, 스스로 밝히길 가을에 연구수업 시찰을 나온 일본인 시학(장학사)이 박정희의 긴 머리를 보고 강하게 비판했고, 이튿날 교장이 그를 불러 질책하자 울컥한 끝에 교장을 두들겨 패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문경을 떴다고 증언한다. 허나 박정희는 10월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다시 문경학교로 돌아와 근무했었다. 박정희의 주장대로 일본인 교장을 때렸다면 다시 근무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31][28]
교사 부임 당시 2학년이었던 이순희 씨의 증언에 따르면 머리가 긴 것은 박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었으며, 동네 바리캉이 한 두 개 뿐인데다 빌리기도 힘들어 제 때 머리를 깎지 못해 머리가 긴 학생들이 있었고, 일본인 교사들이 이런 사정은 제쳐놓고 무조건 머리가 긴 학생들을 벌을 세우자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간에 자주 언쟁이 발생하곤 하였다고 한다.[31] 이어서 이순희는 박정희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박정희를 집단 구타하였다 전한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박정희는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고 전한다.[29][28]
머리가 짦은 박정희
박정희의 제자 황실광의 증언에 의하면 졸업 뒤에도 박 선생한테 자주 놀러갔었는데, 1939년 10월 박정희가 머물고 있던 하숙집에 갔더니 머리카락 길이에 관한 내용은 없고 아리마 교장이 시학을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조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고 자신이 크게 반발했다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31]
현재 알려진 바로는 박정희 행적은 1939년 10월 만주 만주 목단강성에 있는 만군 관구사령부내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르고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다), 문경학교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무하다가 다음해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실린 '육군군관학교 제2기예과생도 채용고시합격자공보'를 확인 한 뒤 1940년 3월에 만주로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대통령에 대한 소년용 전기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 라고 묻자 박정희는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라며 단순명쾌하게 대답했다 한다.[31]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에 따르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징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고,[32][33] 교직은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고 한다.[34]
박정희의 셋째 딸 박근령은 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며[32][33][35]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 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 한다.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죄를 판결했다.[32][33]
이와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다른 언론들이 무죄판결을 가지고 류연산의 주장을 정당화해서는 안되며, 이 판결은 무죄가 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죄임을 확증할 근거가 없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36] 대법원 3부에서는 "역사적·공적 인물의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 망인과 유족의 명예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보호돼야 하므로 사자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허위 사실에 대한 고의성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의 특설부대 근무설은 여러 책에 언급됐고 저자 류씨는 역사학계에서도 인지도가 있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37]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재학 시절 (1940~1942)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滿洲國 陸軍軍官學校, 또는 신징 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38] 원래 1기 지원을 했었지만 나이 초과로 탈락하여 재지원을 한 것이다. 군관학교 동기생들 가운데 5·16에 가담한 사람은 없었으나, 간도·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이자 군관학교 제1기생들인 선배 기수들 대다수가 훗날 박정희의 5·16을 지지한 핵심인물들이 되었다.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이 그들이다.[39]
혈서(血書) 지원
만 23세에 만주국군 1차 지원을 했을 때 나이 초과로 서류전형 탈락이 된 박정희는 재지원 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해 제출하며 반드시 군인이 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1938년 5월경 당시 박정희와 같이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유증선씨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증언한 바 있다.[40]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를 통해 교사시절 박정희가 만주군에 지원할 때 쓴 혈서가 그가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임을 뒷받침하는 자료 근거라고 주장한다. 본 기사 내용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 마이크로필름에서 박정희의 편지 내용과 혈서 문구가 기록된 기사가 발견 되었고,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이날 자료를 공개한다"고 밝혔다[41]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만주신문> 마이크로필름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과 혈서 글귀가 적혀있다.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혈서(血書) -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42]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42]"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기사의 박정희의 혈서 부분 (주의: 진위논란)[43]
《박정희 평전: 가난에서 권력까지》를 쓴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 근거로 당시 혈서를 쓴 한국 청년이 39년 첫 해엔 45명, 다음 해 박정희가 입교했던 40년에는 168명씩이나 되었다고 주장한다.[44]
실제로 광복 이후 한국군 사이에서는 군대 지원서에 혈서를 포함시켰던 문화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51년 7월에 게제된 부산일보에는 "해병대원 모집에 수 많은 애국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지원하고 있거니와 그 중에는 혈서로써 滅共戰線(멸공전선)에 참가 하겠다고 하여와 관계관의 감격을 자아내고 있다."고 기록한다.[45]
안중근 의사의 태극기 혈서
혈서를 쓰는 문화가 무조건 일본식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1909년 2월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義士)는 항일의병들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던 순간 왼쪽 손의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태극기에 혈서(血書)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 쓰며 항일결의를 다졌었다.[46]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志士) 또한 1932년 손가락을 잘라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혈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47]
만주신문 진위 논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장하는 박정희의 혈서 내용은 박정희의 만주군 서류지원 당시 함께 교사 생활을 했던 유증선씨의 증언과 상당히 엇갈린다. 1998년 2월 12일 처음 게제됐었던 조갑제의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유증선씨는 1938년 5월쯤에 박정희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써서 만주로 보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고, 편지를 보낸지 보름 정도가 지나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증언하였다.[40][31]
반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근거로 제공한 <만주신문> 자료는 1939년 3월 31일치 기사 전문에서 박정희의 편지가 29일에 공관학교로 도착했다고 밝히고 있다. 박정희가 1938년 5월 중순에 편지를 보냈고, 보름 정도의 운송기간 뒤 만주지역의 신문에 박정희 이야기가 실렸다면, 같은해 5월 또는 6월, 길게 잡아도 7월 초에는 도착했을 시간이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시한 자료근거에 의하면 1주일 또는 보름 정도면 만주에 도착했을 박정희의 편지가 10개월 뒤인 1939년 3월 말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된다.
또한 만주신문 자료에는 박정희의 군관지원 편지와 함께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이시이 테 오호코, 또는 일사이 테 어봉공, 박정희)라고 쓰여있는 혈서 내용이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고 기록한다.[48] 허나 유증선씨의 증언에서는 박정희가 혈서에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문구를 썼다고 주장한다.[40] 조갑제가 인터뷰한 유증선씨의 증언과, 2009년 11월 5일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의 기사에서 인용된 민족문제연구소의 근거자료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이다.
"盡忠報國 滅私奉公"
박정희가 만주군 서류지원에 편지와 혈서를 동봉했던 것은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일치되는 사실이다. 허나 혈서의 내용과 기사 날짜는 근거 자료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다. 설령 유증선씨가 년도를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증언 내용들이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는 입수할 방법이 없었던 1962년 최고회의 의장비서 이낙선 중령의 비망록에도 같은 대목이 발견되고 있고,[31] 유증선의 증언이 여러 공식 자료들과 과거 박정희 제자들의 증언들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아서 섣불리 틀린 근거라고 치부할 수가 없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서류지원을 했던 시기에 동명이인이 존재했거나, 유증선의 기억이 틀리거나, 신문에 오타가 있었거나 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더 많은 자료들을 검토해봐야 하는 상황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역사의 정치적 거물들의 생애를 논할땐 항상 여러 가지 상반된 평가와 논란들이 생기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되버리곤 한다. 반면 이와 같은 무분별한 루머나 정치적인 진위논란이 팽배하는 상황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를 논란의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새로운 이슈를 만들려는 특정 사회 인물들의 독특한 정치생태계가 파생되기도 한다.
다채로운 논란들에 끊임없이 연관되어온 가로세로연구소 소장 강용석 변호사, '일간베스트' 회원 강씨, 그리고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는 각자 박정희의 혈서가 날조라는 주장을 하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박 대통령 혈서 관련 기사를 조작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쳐왔다. 결론적으로 2017년 기준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강 변호사는 500만원, 정씨와 강씨는 300만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았다.[53]
박정희가 쓴 혈서가 보도됐다고 알려진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54]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혈서에 관해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 혈서를 작성했다는 만주신문 기사도 사전 발간 직전에 알게 돼 다시 거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55]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학 시절 (1942~1944)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징 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가운데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서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56]
만주국육군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직후, 헌병 조장(曹長, 원사에 해당) 시절의 박정희[57], 이때의 계급은 일본 헌병 조장, 보직은 수습사관이었다. 그해 8월에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했다. 그리고 수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58]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되었다.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 시절 자신을 핍박하였던 일본인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59]
만주국군 복무 (1944~1945)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좌파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고 주장한다.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60][61]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들이 박정희에 관해 "박정희는 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증언했다.[60][61]
허나 이것은 당시 나라를 잃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사상적으로 갈라져 중국 국민혁명군, 중국 홍군, 중국 팔로군,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등등 여러 단체들로 흡수되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독립활동을 추진하던 시대적 배경을 배제하는 편무적 해석이다. 일단 국민공통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는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대륙에 있는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하고 있다.[62] 또한 1930년대 이후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최소 500여 명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공산당에 숙청당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 조선인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 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써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사이 연대도 약화하였다.[63] 이진영 경희대학교 교수는 2000년, 자신의 논문인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정책의 기원에 대하여》에서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1940년대에 들어서는 사실상 만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종언을 고하였다고 주장하였다.[64] 하지만 좌익 계열 독립군 단체들은 이런 공산군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사상적으로 달랐던 대한민국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중국 공산당과 팔로군에 협력하였다. 김무정 같은 조선인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중공 팔로군 포병장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버리고 북한 조선인민군 수립에 동참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조선의용군은 박정희가 갓 복무한 1944년대에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65] 이에 대해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는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조갑제가 팔로군과 독립군이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66] 성신여대 김명호 교수 또한 독립군이 "팔로군과 신사군의 지도 아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신사군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고 주장하였다.[67]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국군 제8단에서 복무한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에 따르면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며, 초임 소위 시절 팔로군 토벌 작전에 참가한건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2-3개월후 단장 부관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일선부대에서 빠지게 된다. 부관이 된 이후 박정희와 같이 복무하게 된 신현준, 방원철 등은 “박정희는 단장 부관으로 직접 전투보다는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68]
박정희 임시 육군 군인(군속) 계
창씨개명 논란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 たかぎ まさお 타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69]
1940년 여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킨 일제는 창씨 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했고, 만주군관학교에서도 같은해 가을에 조선인학생들 24명(1기생 13명, 2기생 11명)을 호출, 1주일간의 휴가를 주며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 하였다. 박정희는 고향 구미에 내려와 항일활동가이던 형 박상희와 함께 의논하여 고령박씨에서 '고목'이란 성을 작명하였다. 박상희는 '다카키 소기(고목상희)',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고목정웅)',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은 '다카키 이사무(고목용)'가 되었다.[70]
1945년 3월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일제 치하의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朴正熙)의 일본식 이름이 高木正雄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첫째 형 박동희(朴東熙) 또한 다카키 도히로(高木東熙)로 표기되어 있다.[출처 필요]
정치계에서는 창씨개명 존재를 두고 특정 인물들의 '친일성'의 근거라고 주장하지만, 창씨개명은 진보, 보수 출신 정치인들의 친일 성향과는 상관없이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아왔던 조선인들 전체가 강제로 겪은 일이다. 창씨 여부를 갖고 조상을 친일파로 낙인 찍는 것은 악의적인 정치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71]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창씨에 불응하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측의 통보를 받고 결국 자녀를 창씨시킨 다음 자신은 조상 볼 낯이 없다며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69][72]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윤동주에게는 히라누마 도오주(平沼東柱), 대한민국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는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심지어 박정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에게도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라는 창씨개명된 이름이 있었다.[73]
오히려 세간에 알려진 극렬 친일파 가운데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검거 제1호'로 붙잡혀온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朴興植)을 비롯해 중추원고문 한상룡(韓相龍), 일본 대의사(代議士, 국회의원)를 지낸 재일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 경북도지사를 지낸 김대우(金大羽), 귀족원 의원을 지낸 윤덕영(尹德榮) 등이 이에 속한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제하지 않았다는 변명거리로 삼기 위해 소위 내로라는 친일파들에게 일부러 창씨개명을 시키지 않는 잔꾀를 부렸다.[69][71]
한때 박정희가 자신의 친일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오카모토 미노루’(일본어: 岡本 實, おかもと みのる)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개명을 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북한에서 시작된 가짜 정보인 것으로 밝혀졌다.[74] 박정희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두 언론매체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에서 조차 박정희 2번 창씨개명 썰에 대해서는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키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라고 밝힌다.[69][75]
이 논란이 퍼뜨려진 경위는 1973년 8월 11일자 북한 <로동신문>이 '김대중 납치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비판글을 쏟아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73년 이전에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주장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74][76]
재미 언론가 문명자의 1999년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라고 서술하며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종합사전》 2판에서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77] 조희연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다.[출처 필요]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78]
인터넷 일간지 오마이뉴스의 정운현 기자는 "박정희가 배속된 23사단 72연대 연대장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는 김병태 교수의 주장은 허구성이 있다.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배속된 곳은 열하성 흥륭현 소재 만주국군 보병 8단이었다.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이었으며, 그의 계급은 상교, 우리로 치면 대령이었다. 당시 보병 8단에는 박정희를 포함해 이주일, 방원철, 신현준 등 한국인 장교가 4명 있었다."고 반박한다.[79][74] 또한 "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 유학 특전까지 얻은 박정희가 다시 창씨개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74]
2012년 12월 5일 인터넷 매체 '빅뉴스'의 기사에서(미디어워치로 옮겨졌다)[76] 이시완 자유기고가는 "한국 사회에 퍼진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설은" '안티박정희' 진영이 "북한의 주장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정적 비판을 위해 퍼뜨렸다"고 주장한다. 문명자가 증거로 제시했던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이며 "이 사전 초판(1991)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었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 고 지적했다.[76] 또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이 사전의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 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고 했다. 그는 "한국의 '안티 박정희'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오던 '일본측 자료'의 설득력도 이것으로 없어진 셈"이라고 주장했다.[79][76]
광복 직후광복과 귀국 (1945~1946)
박정희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80]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81]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82][83] 빈털터리 상태로 돌아온 그를 고향의 가족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한다.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84]
만주국군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한국광복군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광복군이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선전했던 투쟁지침과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85] 비밀리에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이 선전문을 보면 일본군에 위장 침투한 한국인에게 고하는 것으로서 본문에는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하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945년 8월 이전에 박정희가 독립군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비밀 선전문은 전 광복회장 김우전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에 연관된 듯 알려진 ‘원전(原典)’은 1967년 박영만이 쓴 소설 ‘광복군’이었다. '실록 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1967년 박영만은 자신의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 커녕 호통을 들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라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 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86] 5·16 이후 반혁명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정희를 지하독립운동 리더로 묘사한 책을 쓰자고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광복 직후(1946~1950)
1946년 5월 8일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 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87]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88]
1946년 10월 5일 독립운동가이자 언론가였던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가[89] 대구 항쟁 사건 때 구미 경찰서에서 시위대와 진압대 사이를 중재하다 경찰이 발포한 총알에 맞고 사살되었다.[90][91] 육사에서 훈련 중이던 박정희는 형의 피살 소식을 접했으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그 며칠 뒤 조용히 다녀갔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한 측근에게 "형이 피살된 사정을 알아보려고 장교 복장으로 고향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숙군 때 김창룡으로부터 그 점을 추궁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가장 따르고 존경했던 형 박상희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박상희의 친구이자 당시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었던 이재복이 박정희에게 접근해 남로당 가입을 권유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92]
박정희의 삶을 다방면으로 취재했던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씨는 박정희의 전반부를 다룬 <박정희-불만과 불운의 세월>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가게 된 데는 그의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92]
“ | 가난했던 어린 시절, 대구사범 재학 시절,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만군 장교 시절, 그리고 해방 뒤인 청년장교 시절에 걸쳐 일관되게 발견되는 박정희의 성격은 현실에의 불만, 기성질서에의 반항, 외세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한 박정희에게 남로당은 하나의 유혹이었다. 진보적 성향, 독립운동의 전통, 그리고 반외세를 상징하고 있던 남로당에 들어간 것은 박정희의 사상적 표현이라기 보다는 그의 기질에 맞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93] | ” |
백선엽, 여순사건 재판 당시 남조선 로동당을 배신한 그를 살려주었다.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88]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보는 앞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표현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자원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88] 이 시절 국군 초의 연대단위 기동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진급한다.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하다 만난 이화여대 1학년 이현란(당시 24세)과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고,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94]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95]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좌익전력으로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고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는 설이 존재허나[96] 거짓으로 밝혀졌다. 박정희가 군내의 남로당 수사에 걸려 구석된 것이 1948년 11월, 이때 박정희의 용산관사와 가까운 집에 살던 이효 대위가 구속된 박정희를 대신해 이현란을 방문해 자금을 챙겨주었으나 임신에 대한 증언은 존재하지 않는다.[25] 며칠 뒤 숙군수사 실무장교로 박정희의 조사를 맏았던 김창룡 또한 이현란을 직접 찾아가 경위를 설명해주며 박정희의 메모를 건네 주었음에도 약혼녀 이현란의 임신에 대한 조사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25] 결정적으로 이현란 스스로가 박정희와의 사이에서는 소생이 없었다고 밝힌다.[25]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파면된 민간인 신분에서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97]
한국전쟁 이후(1950~1959)
한국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하였다. 육종관은 딸 육영수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육종관 대신 박정희의 대구 사범 스승 김영기였다.[97] 이때 주례를 맡은 허억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하였다.
박정희의 신당동 사가(私家). 5·16 쿠데타 당시 여기에서 거주하였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처인 부산에서 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을 소개받게 된다.[98] 그는 이후 이용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정변을 계획하였다.[98][99]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100] 이용문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100],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100]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98] 정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98]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101]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101]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6군단 부군단장 시절
자유당 시절 말기 군내 부패가 극에 달했다. 미제 군용트럭으로 동해에서 명태를 실어다 팔거나, 산의 나무를 베어다 팔아먹던 시절이다. 부식비나 유류비 등을 횡령하는 장성도 비일비재했다. (사령관이) 전출할 때 보면 보통 트럭 2대에 군용물품을 잔뜩 실어서 떠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사령관 시절 ‘제닉스 라디오’로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군수기지사령부를 떠날 때 라디오를 놓고 가더라. 그래서 내가 ‘왜 안 가져가나’라고 했더니 ‘그게 내 건가. 부대 것이지’ 하고는 안 갖고 가더라. 박 사령관이 취임하고 나선 군수비리가 없었다.
당시 박 사령관 주변 사람들도 쟁쟁했다. 이후 수도경비사령관이 된 윤필용이 비서실장, 포철 회장과 국무총리를 한 박태준이 인사참모, 상공부 장관을 한 이낙선이 공보참모를 했다.
—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2017년 11월 21일 주간동아 인터뷰[102]
1957년 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103]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 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써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곽영주는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사형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103]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101]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101]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였다. 그 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 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103] 그러나 장면 총리는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103]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라며 항의하였다.[103]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었던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101]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103]
박정희는 1961년 4월 19일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그날 아무런 시위도 집회도 없었고 박정희는 당황한다. 이때 장면 정부의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에서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1961년 4월 19일로 계획된 학생들의 데모를 매수했다는 의혹이 있다.[104] 박정희 등을 비롯한 군인들은 4·19 혁명 1주년 기념식 때 일부 학생들이 정부에 대한 데모를 준비할 때,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준비하였다.
당일 학생들이 데모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자 박정희 등은 당황한다. 군부 쿠데타 모임인 혁명 요원들은 4·19 1주년 되는 날로 거사일을 정했지만, 소문에 의하면 시국 정화 운동 본부에서 학생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데모를 못 하도록 막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104] 박정희의 계획대로라면 그날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해야 했고, 군중 폭동에 자연스럽게 군부가 침투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104] 4·19 1주년은 아무 일이 없었고, 쿠데타를 기도하려던 군부는 일시적인 공황상태에 빠졌다. 한편 당시 시국정화단에서 학생운동권들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의혹, 금액과 내용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