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4월, Eastern Summit호의 수리(修理) 겸 검사(檢査)를 위해 네덜란드의 로텔담(Rotterdam) 외항에 도착했다. 북유럽 특유의 추위와 짓궂은 날씨 속에 새벽 3시부터 준비, 4시간이 지난 7시경에 겨우 Floating Dock(艀船渠)에 올렸다. 모두가 녹초가 됐지만 그로부터 약 보름 동안은 배가 육지에 올랐으니 한낱 쇳덩이에 불과했지만 우선은 흔들릴 염려는 없었기에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승무원들로 봐서는 해상호텔인 셈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어떤 연유인지는 기억이 없지만 암튼 일성(一醒) 이준(李儁) 열사의 묘소에 참배하러 가기로 했다. 혼자가 아니고 여러 명의 직원들이 함께 간 걸 보면 나 혼자의 발상은 아닌 것 같다.
이준 열사는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배우고 들어온 존경의 대상이었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의 합방에 대해 국제만국평화회의장에서 할복자살함으로 세계만방에 대한(大韓)의 기개를 떨쳤던 분이라 배웠다.
좌로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사진: 나무위키)
자료에 따르면, 그분은 1859년 현 함경남도 북청구 용전리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는데, 전주 이씨로 태조(太祖) 이성계의 이복형이었던 완풍대군(完豊大君) 이원계(李元桂)의 후손이다.
1895년, 6개월 코스였던, 한국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 기관인 법관양성소(서울법대의 전신)를 졸업했는데 동기생으로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이었던 함태영(咸台永)이며, 입학을 권유한 분은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이었다.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이후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되었으나, 검사 5년차에 법무대신 이하영(李夏榮)을 탄핵하였다.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서 박해받기도 할 정도로 강직한 근무를 했다고 한다.(이덕일과 이희근 지음, 《우리역사 수수께끼》
이 때문에 1개월만에 면직되었다고 했으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한 강직한 성품이었나 보다. 요즘도 이런 검사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고종(高宗)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1907년 고종(高宗)이 당시 개신교와 감리교회의 지원을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특사로 정사 이상설(李相卨), 부사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과 이들을 도와줄 호머 헐버트(미국인. 감리교 선교사)를 파견했던 것이 헤이그 사건이다.
그가 서울을 출발, 네덜란드에 도착하기까지와 내용을 보면,
「고종(高宗)의 특사로 참석하기 위해서, 1907년 4월 22일 가족들과 작별, 서울역을 출발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시베리아에서 철도편으로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준과 이상설은 이위종의 도움을 받아 공고사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회 만국평화회의 의장국인 러시아에 제출하고 지지를 요청했으나 응답은 없었다. 결국 일행은 6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향했으며 베를린에서 문서 인쇄작업을 거친 특사단은 6월 25일 개최지인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6월 28일 베를린에서 인쇄한 공고서와 문서들을 일본을 제외한 회의 참가국 40여 국 의원들에게 배포했다. 의장인 러시아인 넬리도프 백작은 문서를 받고 특사단과 네덜란드 정부의 접견을 주선해 주었으나 네덜란드 정부는 을사조약은 이미 각국 정부에서 승인된 것이므로 무효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대한제국에는 외교권이 없으므로 회의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특사단은 네덜란드 외무대신 M. Van Tets 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은 '어찌어찌 회의에 참석을 한다 해도 발언은 어려울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으며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고 사료에 나와 있다. 요즘에도 그 코스로 여행하자면 힘든 여정인데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위의 사실은 한참이나 뒤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오직 온국민이 존경하는 애국지사를 성묘(省墓)한다는 자부심에 가득찬 기분으로 나섰다.
물론 사전에 그곳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가는 길을 물어 두었다. 트램(전차)를 타고 한참 걸린 것으로 기억된다. 젊은 선원들이 잘도 기억하고 안내했다.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제주(祭酒)로는 내가 산 위스키 1병과 제수(祭需)는 일행들이 준비한 그곳 과자 등 몇 가지를 준비했다.
헤이그(Hague)는 네덜란드의 정부 소재지이다. 수도는 암스텔담이나 실질적인 정치 중심지는 헤이그이다. ‘헤이그’는 영어식 이름이며, 네덜란드어로는 덴하흐(Den Haag)라고 하며, 네덜란드 서쪽 북해 연안에 위치한다.
용케 찾았다. 인근 사람들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놀란 것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 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4월이라지만 북구의 날씨는 쌀쌀했다.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위스키 한 잔을 부어놓고 큰절을 두 번 올리곤 어한(禦寒)을 겸해서 음복도 나누어 마셨다.
우측 뒤에 선 사람이 필자
후에 안 사실이지만 1963년에 유해는 이미 고국으로 운구하여 서울 수유리에 안장했었다고 한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헤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으로 머나먼 이곳까지 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복 자결함으로써 세계만방에 대의를 표명한 장쾌한 거사를 이룩하신 분이라는 자긍심이 가슴 가득히 채워졌다.
누가 갖다 두었는지는 몰라도 예쁘게 종이로 싼 꽃들이 차가운 바람을 이겨내고 있었다. 일 년 내내 이 꽃다발은 떨어지지 않고 계속 바꾸어 가며 놓여진다고 하니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이 사건이 이곳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만은 분명한 듯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잘 왔다는 뿌듯한 마음이었다.
이역만리를 찾아간 것이 아니고 간 김에 뵌 것이지만 오랜만에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동안 친구들의 모임이나 강의 중에도 자랑을 해왔는데,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읽은 책 속에서 이준 열사가 ‘할복자살’이 아니고 ‘병사(病死)’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심히 분개했다.
『一醒 이준 열사의 죽음에 대한 것은 1907. 7. 18일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전 평리원 검사 이준…(중략), 충분(忠憤)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로 사실로 보도했다. 그러나 황성신문(皇城新聞)은 7월 19일자에서 “(전략) … 자결하였다는 전보가 동우회 중에 도착하였다는 설이 있더라”하고 사실이 아닌 자살설(自殺說)로 보도했다』
당시 현지인 네덜란드 헤이그의 유력 신문인 <헤트· 화데란트>의 7월 15일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고자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대표 이상설, 이위종 두 사람과 함께 온 차석대표 이준 씨가 어제 저녁 서거하였다. 그는 이미 지난 수일 동안 병환 중에 있다가 바겐 슈트라트가에 있는 모 호텔에서 사망한 것이다.” 라고 보도 했다고 한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是日也放聲大哭(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을 <황성신문>에 실었던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선생은 <이준 전>이란 글에서 이준의 사인을 병사(病死)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병(火病)이었다고 했다. 당시 신문뿐만 아니라 연대기 등 각종 기록물들도 이준의 자결설과 관련된 내용은 대부분 신문기사나 풍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일제의 침략에 분개하는 민심과 함께 진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기(2). 이덕일. 이희근. 감영사. 1999.8)
결국 이준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지병이었던 뺨의 악성종기가 도져 생을 마감하였다. 그 분의 죽음을 ‘순국(殉國)’으로 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56년 이준 열사 추모 단체인 ‘일성회(一醒會)’는 “국민 사기 앙양을 참작해 분사라 해도 자살로 해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요구했다. 6년 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성회 요구를 수용해 ‘분사(憤死)’도 ‘할복자살’도 아닌 ‘순국(殉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국편위 보고서) ‘할복자살설은 모든 사실로 보아 근거 없는 것이지만 나라를 위해 일을 하다 타국에서 별세한 만큼 이를 순국으로 적기로 했다’는 것이다(1962년 10월 28일 ‘조선일보’ 등)」.
충분히 이해는 한다고 하지만 역사적인 일을 사실(史實)이 아닌 사실(事實)로 알려져야 후세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얘기하자, “그래?” 하면서 놀라는 모습을 미루어 봐서 아직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국민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 교육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다.
한참 후인 2018년 7월 이 사진과 사실을 ‘대구사범 카페’에 올렸다. 대구 초등교육계의 중진이었던 동기(同期) 도계 이방범 군이 이 글을 보고는, “이준 열사의 주검, 할복(割腹)한 것이 아니고 병사(病死)했다…. 거짓 역사를 배우고 또 가르쳤다니…. 이게 진실이오???” 라는 댓글을 달았다.
같은 댓글로 위와 같은 상세한 내용을 올렸더니, 다시 “소상하게 밝혀 준 사료(史料), 탱큐입니다.”라는 답글이 올랐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위해 능청을 떤 것 같기도 했다. 일찍 타계한 것이 안타깝다.
이준 평화 박물관(사진: 서울대총동창화 사이트)
후기(後記) : 이준 열사가 순국한 헤이그에는 당시 특사단의 숙소였던 드융 호텔이 있는데 1995년 이기항 씨가 약 20만 달러에 호텔을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개장해 「이준 평화 박물관(YI JUN PEACE MUSEUM)」으로 이름 붙였으며, 1995년 8월 5일 개관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본 박물관에는 이기항 씨 부부가 일본, 러시아, 네덜란드 등에서 수집한 관련 유물과 광복절 60주년 제1호 태극기가 소장되어 있으며, 박덕영 연세대학교 로스쿨 교수가 기증한 이준 열사 기념 우표도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서울대총동창회 사이트 참조) 유럽 여행 도중에 이곳을 들릴 기회가 있으신 분은 꼭 한번 참관해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첫댓글 애국지사를 참배하러 낯 선 길 찾아 간 성의가 바로 애국입니다.
이준 열사가 활복 자살은 아니더라도 기록에 있듯이
머나 먼 타국에 나라 위한 마음으로 병고를 무시하고 감행한 것은
자신을 버릴 각오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순국(殉國)한 것이라 생각되네요.^^
다시 이준 열사의 내력을 읽게 되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늑점이님의 40대가 아주 멋쟁이고 카리스마가 있네요.ㅎㅎㅎ
또한
'늑점이'라는 요상한 닉네임의 내력도 올려주시고....ㅋㅋ
세계여행을 함께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넉점이 서완수 논픽션 작가님이준 열사에 대한 자세한 사실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청산님!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넌픽션 작가가 아닙니다. 그냥 자신이 살아온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회고하는
의미에서 쓸 뿐입니다. 참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세요. 부산넘
청산님 '늑점이'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각종 사료까지 검토하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