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와 하늘신 이비가(夷毗訶)가 낳은 알이 떠내려왔다는 장기리 '알터마을', 악성(樂聖) 우륵이 만든 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다고 전해지는 쾌빈리 '정정골(琴谷)'. 1천500여 년을 흘러온 유서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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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때 배를 만들었다는 고아리 '골안마을', 왕실의 말을 길렀다는 본관리 '덕촌마을'(옛이름은 둔덕(屯德)), 대가야와 신라군의 격전지로 알려진 쾌빈리 '메나릿골'.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에는 지금도 그 때의 신화와 전설, 설화가 희미하게나마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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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운수면 봉평리 '한다리 마을'에는 일렬로 드문 드문 세워진 큰 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자손을 잉태할 수 있다고 해서 '고자바우'로 불리는 고인돌이 논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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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면 '곽촌리'에는 대가야와 신라군의 전쟁터였다는 전설이 얽힌 '장사암'(일명 집동방구)이, 성산면에는 고령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낙동강으로 실어 날랐다는 '질나루(陶津)'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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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면 '상곡리'는 신라 진흥왕이 비화가야(창녕)를 점령한 뒤 지나다 행궁(行宮)을 두었다고 해 상국(上國)으로 불리다 다시 상곡(上谷)이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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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개진면 개포리에는 예부터 고령읍에서 낙동강으로 통하는 관문인 '개포나루'가 대가야의 하천 교통로를 짐작케 하고 있다. 그 뿐이랴. 통일신라 때까지 고령군에 속한 현으로, 경남 합천군 야로면과 가야면 일대를 아우른 '적화현(赤火縣)'. '붉은 불'이란 뜻에서 철과 제련을 연상할 수 있는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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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노에서 쇠를 단련한다'는 뜻을 지닌 '야로면(冶瀘면)'에 눈길이 간다. 야로면 금평1리에는 쇠를 캐냈다는 '금평(金平)마을', 야로2리에는 쇠를 불렸다는 '불묏골', 금평2리에는 불린 쇠를 창고에 보관했다는 '창동(倉洞)마을'이란 지명이 오롯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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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9년 5월부터 1개 읍(고령읍), 7개 면(쌍림, 우곡, 개진, 성산, 다산, 운수, 덕곡), 147개 리로 구성된 경북 고령군. 562년, 신라(진흥왕)에 병합된 고령지역은 당초 '대가야군'으로 불리다 742년 '고양군', 1018년 경산부 '영천현', 1413년 '고령현', 1895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고령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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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과 합천군에 편입된 야로면, 가야면 일대에는 이처럼 AD 300~500년대, 대가야인들의 삶과 생활, 대외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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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읍 연조리 대가야 왕궁 터와 왕궁 우물(御井), 이를 감싸 안은 주산과 주산성. 지산리의 주산 능선을 따라 펼쳐진 왕과 왕족들의 무덤 수십 기를 포함해 모두 2천여 기에 달하는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위용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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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터 북쪽에 위치한 본관리 고분군. 북쪽으로 소가천이 마을을 감싸 흐르고 있는 지역이다. 지산동 고분군에서 2.5m 가량 떨어진 '관동마을' 뒷산 정상에 직경 20m의 대형 무덤 1기가, 북쪽 능선에 중형 무덤 4기, 동쪽 경사면에 중.소형 무덤이 밀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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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이 심해 소형 철기류 일부와 토기 몇점만 나왔지만, 대가야시대 왕궁 터 북쪽을 방어하던 집단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본관리 고분군에서 1.5km 떨어진 쾌빈리 '정방마을' 뒷산에 위치한 쾌빈리 고분군. 산 능선의 동남쪽 아래로는 대가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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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기의 중.소형 무덤이 밀집한 이곳에서는 돌널무덤 외에도 나무널무덤이 발굴되고 500년대 이후 토기들도 나타나 300년대부터 200여년 동안 쌓은 고분군으로 추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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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고령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나무널 무덤은 대가야가 위용을 과시하기 이전 시기의 유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 운수면 월산리 '선듬마을' 동쪽 뒷산에서 남으로 뻗은 능선에 15기 가량의 중형 무덤이 있는 월산리 고분군은 대가야 궁성의 서북쪽을 방어하던 집단이 당시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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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대 접어들어 가야제국의 중심국으로 두각을 드러낸 대가야는 가천, 야천, 회천을 기반으로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점토가 풍부한 내곡리에 토기 요지를 만들어 대가야 양식 토기를 본격 생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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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조리에 궁성을 쌓고 이를 둘러싼 주산에 산성을 쌓아 방어망을 구축했다. 궁성의 북쪽에는 본관리 산성, 동쪽에는 망산성(장기리), 서북쪽에는 운라산성(운수면), 동북쪽에는 풍곡산성(성산면)을 쌓아 도읍지를 요새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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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낙동강을 따라 월성리 토성(다산면), 무계리 산성(성산면), 봉화산 토성(성산면), 도진리 산성(우곡면)을 쌓아 신라를 견제했다. 대가야가 영역 확장에 앞서 도읍지를 근거로 궁성을 축조하고 주변에 산성으로 방어망을 갖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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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생산력과 방어망을 갖춘 대가야는 야천을 따라 서쪽으로 야로면, 가야면 일대를 장악했다. 야로 철산지의 확보와 개발은 다량의 무기 생산과 철제품 교역을 통해 무력과 경제력을 두루 갖추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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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천을 따라 서남쪽에 만대산성(쌍림면)을 축조한 뒤 의봉산성(운수면)과 가야산성(가야면)을 구축, 일찍이 신라에 기운 성주세력을 견제했다. 400년대 후반 방어망과 힘을 갖춘 대가야는 이제 서쪽으로, 남쪽으로 세력권을 확장하는 일만 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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