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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고대65동기의 날' 행사 강화 기행
며칠 동안 내리던 비도 그쳐 맑고 깨끗한 날씨에 신록이 우거진 늦은 봄 13일 동기 및 부인 35명(음식 준비 관계로 승용차로 먼저 출발한 동기들은 현지에서 합류)이 탄 명진관광버스는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은 9시 30분 사당역을 출발 오늘 목적지인 강화행에 나섰다. 원당희 회장과 노언규 총무가 이끄는 산우회 회원들이 많이 참여했고, 과별로는 김선규, 김문희, 김용대, 노언규, 최형화 동기가 참석하여 화학과가 과 일등이었다. 다음으로는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인데도 법대를 간 조원기, 원당희, 김영택, 이상원 동기가 참여한 법대가, 김종서, 김홍대, 최동선 동기가 참여한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간 영문과 순이었다
특별히 최형화 부부는 약 30여년의 브라질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하였는 데, 이날 마침 동기 행사에 참여하여 우리들을 기쁘게 했다. 조원기(법), 한상락(심), 이백규(교육), 조종환(통계), 전병규(임), 김선규(화), 심의섭(경제), 여운택(건축) 동기들은 부부가 함께 참여하여 동기 모임에 적극성을 보여주었는데, 일설에는 이들 부부들은 부부 동반하지 않으면 장시간 외출이 불가한 부부들이라는 설도 있다.
아침 대용으로 장만한 떡을 먹으며 시작한 오늘 여행은 최창희 교수의 강화도 조약 체결 시기의 근대 역사 강의를 들으며 올림픽대로를 거쳐 김포강변로를 지나 강화로 달렸다.
강화는 경기도 북서부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합류하는 하구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옛 이름은 갑곶, 혈구穴口, 해구海口, 열구列口 등으로 불리웠다. 이들 명칭은 모두가 '한강 또는 하구'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라는 이름이 불리우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23년(940)부터다.
강화는 동쪽으로는 염하 건너 김포시에 접하고, 서쪽은 서해에 연하고 있으며, 남쪽은 옹진군들의 섬들을 거쳐 인천에 이르고, 북쪽은 한강 하구를 건너 경기도 개풍군과 황해도 연백군에 접한다.
강화는 강화도, 석모도, 교동도 등 11개의 유인도서와 17개의 무인도서로 형성되어 있다.
나와 강화도의 인연은 1950년대까지 올라간다. 황해도 연백延白이 고향인 나는 조영남의 노래 가사에도 나오는 ‘1.4 후퇴’ 때 온가족이 월남하게 되는데, 고향과 제일 가까운 교동도로 피난오게 된다. 지역적으로 가까워 월남한 사람가운데는 황해도 사람들이 많은데 1세대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2세대들이 지금도 인천, 강화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한달만 있다가 다시 돌아가게 되겠지?”하던 어른들의 대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어언 6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북에서 전쟁 전 2학년까지 다니다 온 나는 교동도에서 이름도 아름다운 난정蘭井 초등학교를 2년 다녔다. 현대사의 아픈 상처와 함께 나와 강화도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진 출처: 한국의 산천 옛날에 교동은 연산군·안평대군 등 왕족의 유배지 전남의 남해안 지역이 관리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었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됐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 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박원종, 성희안 등이 주동이 된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 만에 사망했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봉소리의 신골, 고구리의 연산골,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읍내리의 부근당에는 일반 당집에. 어울리지 않는 관복 등을 갖춰 입은 부부그림이 걸려있다.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로 추정된다. 마을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매년 굿을 한다고 한다.
연산군의 무덤은 '능'이 아닌 '연산군묘'라는 이름으로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조성되어 있다
부근당 인근에는 '강화도령' 철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철종 잠저소가 있다. 철종이 왕이 되기 전인 13세때 먼 친척이 모함으로 피살되자 두려움으로 이곳으로 피신해 석달을 지냈다고 한다. 집터와 우물이 남아있다 사진 출처; 여인의 향기
구 강화대교와 염하
강화는 김포에서 다리로 연결되는데, 다리가 놓인 현재의 김포군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 성진 사이의 해협을 마치 강과 같다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길이 약 20킬로미터의 이 해협은 폭이 좁은 곳은 200미터 밖에 안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이기도 했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이 곳을 ‘손돌목’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이런 애절한 이야기가 전한다 .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으로 왕(고려 시대에 강화로 피신을 한 임금은 고종, 충렬왕, 충정왕, 희종이다)이 강화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 을 배에 태우고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하여 초지(草芝)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 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이때 손돌은 왕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배에 있는 박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 가면 몽골군을 피하며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이 죽은 뒤에 적이 뒤따라오므로 왕과 그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할 수 있었다. 왕은 손돌의 충성에 감복하여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 였다. 손돌이 충성스럽게 죽은 날이 10월 20일이었으므로, 그 뒤 이날이 되면 손돌의 원혼에 의해 매년 추운 바람이 불어오므로 이를 '손돌풍'이라 하고 이 여울목을 '손돌목'이라 하게 되었다. '손돌목'은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곳으로 바닷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어서 지금도 배가 지나가면 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강화도 사람들은 손돌풍이 부는 날에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또 어부들은 이날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평인들은 겨울옷을 마련하는 풍습 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손돌풍'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고래의 연중행사와 풍습을 설명한 책인 홍석모洪錫謨의《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그 기록이 보이며,역시 김매순金邁淳(1776~1840)이 조선 후기 한양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책인《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0월 조에는 "강화도로 가는 바다 가운데에 암초가 있는데, 그곳을 손돌목이라 한다. 그리고 방언에 산수가 험하고 막힌 곳을 목이라 한다. "일찍이 뱃사공 손돌이란 자가 있었는데, 10월 20일 이곳에서 충성스럽게 죽었으 므로 그곳에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 지금도 이날이 되면 바람이 불고 추위가 매우 극렬하므로 뱃사공들은 경계를 하 고, 집에 있는 사람도 털옷을 준비한다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기후로 봐서 이때가 되면 계절풍이 불고 따라서 몹시 추워지므로, 여기에 손돌의 원한에 대한 이야기가 붙어서 이러한 풍속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손돌공의 묘는 현재 물 건너로 광성진이 보이는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공의 제사는 조선 왕조 말까지 계속 되어오다가 일제 강점 후 중단되었었으나 1970년 이후 계속 지내오고 있으며, 묘는 1977년 박일양 씨 등과 면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하여 크게 단장하였다.
개성의 고려왕이 강화도로 오는 길은 지금 양사면이 제일 짧은 거리이므로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손돌목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생긴 것도 조선 후기에 와서의 일이다.
문수산성에서 내려다 본 염하와 강화대교
강화대교를 건너려는 순간 언제나 해박한 지식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모임마다 즐거움을 주는 심의섭 교수가 이 다리 건설이 육영수 여사 죽음을 가져왔다는 풍수가들의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다리 건설 시기와 육여사 사망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강화대교(江華大橋)는 1997년에 개통된 교량이며, 구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서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까지 연결하는 연륙교이다. 길이 780m, 폭 19.5m. 1993년 8월에 착공하여 1997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이 다리를 통해 48호 국도가 강화군까지 연결되었다. 1969년 준공되어 사용하던 기존의 구(舊) 강화대교는 노후화 되어 새로운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었다.
강화읍을 통과하게 되자 최교수가 이번에 둘러보지는 못하지만 좌측에 고려궁지, 용흥궁, 성공회 교회, 김상용순절비 등이 있다고 소개하는데 연무당이 보였다.
고려궁지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용흥궁 용흥궁은 흔히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의 잠저潛邸(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로 그가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11월 15일 건립된 동서 길이 10칸, 남북 길이 4칸인 한식 중층 건물이다. 이 성당은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 교회 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 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외래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서쪽에 출입문을 배치하여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뒤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김상용선생 순절비 김상용선생순절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비다. 선원 김상용(1561∼1637) 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가지 주전론을 폈던 김상헌(1570~1652)의 형으로,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하여 판동녕부사, 병조·예조·이조의 판서, 유도대장,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란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른 후 순절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으며, 선원면에 자리한 충렬사에 그의 위패를 모시었다.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하나는 정조 때 공의 7대손인 김매순이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숙종 26년(1700) 선생의 종증손 김창집이 건립한 것으로, 1976년 지금의 자리로 비각을 옮기던 중 발견되었다.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김상용 순절비
연무당 연무당鍊武堂은 1876년 2월 27일 우리측 전권대신 신헌申櫶(1810~1888)과 일본측 특명전권대신 구로다黑田淸隆 사이에 12조로 된 우리가 흔히 강화도조약이라고 부르는 한일수호 조규를 체결한 장소로 유명하다.
강화평화통일전망대 차는 48번 국도를 따라 계속 직진하다가 송해면사무소 삼거리에서 우회전 은암자연사박물관과 화문석문화관을 거쳐 양사면 전망대로(철산리)의 검문소에 도착하였다. 백승진(화공) 총무가 대표로 신분증을 확인 후 출입통제증을 받아 제적봉制赤峰에 있는 강화평화전망대에 도착한 것은 11시 반이 넘었다. 전망대 자리는 군대 생활을 한 남자들은 바로 이 자리가 지피자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전망대 오르는 길은 아름다운 꽃들을 심어 놓아 보기 좋았다.
전망대 2층에 올라간 일행은 잠시 동영상을 본 뒤에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었다. 강화평화전망대는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남북한의 상호 이해 폭을 넓히고 민족 동질성 회복과 평화적 통일의 기반을 다져나가기 위한 문화관광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민통선북방지역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고 한다.
1층에는 통일염원소(이곳에 통일염원을 담은 쪽지를 매달 수 있다), 관리실, 휴게실 및 식당, 기념품매장 등이 있으며, 2층은 전시실, 관광객이 직접 북한 땅과 주민생활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고성능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는 전망대, 3층은 북한땅 조망실(이 방에서는 전망대에서 조망되는 북한 지형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관광객들에게 북한의 현황을 설명하는 공간이다). 옥외전망대가 있다.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남한과 북한의 제일 가까운 거리는 1킬로미터 조금 넘는데 불과하고 썰물 때는 거의 바다가 들어난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건너를 보니 황사로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전방 약 2.3㎞ 해안을 건너 고려 시대 송나라와의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친 예성강의 벽란도 입구가 보이고[‘개방성開放性’과 ‘다양성多樣性’을 특징으로 하는 고려 왕조(918~1392)는 그 뒤의 조선 왕조(1392~1910)와 달리 외국인을 관리로 등용하기도 하고 국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는데, 벽란도에 드나들던 대식국인大食國人 즉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우리나라가 서양에 ‘코리아Corea’ 또는 ‘꼬레Coree’로 알려지게 되었다],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및 배천군白川郡(‘배천’으로 읽는다)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우측은 개풍군으로 북한 주민의 생활 모습과 선전용 위장 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이 보였다. 북한측의 산은 전부 민둥산이다. 우리도 전쟁 직후 땔감이 없어 나무는 커녕 낙엽까지 긁어다 때본 경험이 있으므로 현재 북한의 연료사정이 어떤 상황인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오른쪽에는 ‘평화의 소’로 여러번 뉴스 기사거리가 된 유도라는 섬이 있다. 그 기사 하나를 보자.
1996년 8월 당시 집중 호우로 북한에서 비무장지대인 경기도 김포시 유도로 떠내려 온 소를 구출해 '평화의 소'라 이름붙인 김포시는 이 소를 장가보내기로 결정하고 제주도 북제주군농업기술센터와 상의했다. 때마침 북제주군 조천읍 와흘리에 사는 축산인 강익상씨가 '통일 염원의 소'라 이름 지은 제주산 한우 암소를 선뜻 기증했고, '평화의 소'가 구출된 지 1주년인 98년 1월 16일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 후 통일 염원의 소는 7년간 수송아지 4마리와 암송아지 3마리를 낳았으며 이 가운데 98년 11월 6일 태어나 '평화 통일의 소 1호'(이하 평화 통일의 소)로 불려진 첫째 수송아지가 어미와 함께 길러지다 어미 소의 고향인 당시 북제주군(현 제주시)에 기증돼 2000년 1월 1일 우도에 정착했다. 나머지 '평화 통일의 소 2-6호'는 일반 한우 사육 농가와 한우협회 김포시지부에 분양됐고, 막내이자 암컷인 평화 통일의 소 7호는 두레놀이보존회 회원 조문연 씨의 보살핌 속에 통진두레놀이 두레 일소로 자라고 있다. 평화 통일의 소는 우도에 정착한 이후부터 줄곧 서광리 이장 정현일(53) 씨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무럭무럭 자라 2005년 4월 열린 제39회 도민체육대회에서는 성화 봉송주자로 나서 참가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기도 했다. 올해 11월 10번째 생일을 맞은 이 소는 그동안 모두 40여 마리의 자손을 낳았으며 현재 몸무게가 800㎏이 넘는 우람한 체구에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정 씨는 "작년 10월에는 평화 통일의 소에게 쌍둥이 손자손녀가 생겨 집안이 잔치분위기였다"며 "축산을 한지 40년 만에 쌍둥이는 처음 본다"고 회고했다. 정 씨는 현재 부인 오금숙(45) 씨와 함께 평화 통일의 소와 그 자손 24마리를 관리하며 살아가고 있다. 평화 통일의 소가 두 쪽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현실을 상징하는 명물이 되면서, 지난해만도 3천500명이 다녀가는 등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 씨는 "행정기관에서 축사 신축비나 사료비 등을 지원해줘 비교적 좋은 여건에서 소를 관리하고 있지만 소와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나 공간이 비좁아 좀 안타깝다"며 적절한 대책을 바랐다. -연합뉴스 2008.12.23
멀리 예성강 입구가 보인다.
전망대에서 밖으로 나오니 옥외 전시로 야외 망배단,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등이 있고 , 그밖에 시설로 제적봉 비석, 연성대첩비 등이 있었다.
망배단 망배단望拜壇은 북한에 고향을 둔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조상들에게 제를 올릴수 있는 곳으로 상시 개방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바다 건너가 더 잘 보였는데, 내가 사는 반포에서 내 고향이 차로 두어 시간 거리 내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머님을 모시고 한번 진작 왔었을 것을. 내 어머니는 월남 1세대로 올해 구순이시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영전에서 몇가지 마음 다짐을 했었는데 그 중에 어머님을 잘모시겠다는 것도 들어있었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불효로 목이 메인다. 금년 봄에는 손주놈까지 데리고 아버님 산소에 다녀왔다. 결혼 직후 추석 성묘에 처조모 산소에서 이렇게 기도했었다.
"할머님 제가 당신의 손녀딸과 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한 평생 사는 동안 아내를 아주 행복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불행하게 하는 남편이 되기 않게 빌어주십시요"
아버님 산소에서 내 사위와 딸들은 무엇을 빌었는지 모르겠다 .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는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흘러나오게 되어있었다. 두 분의 성악가의 노래가 녹음되어 있다. 갈매기 날개를 형상화한 비는 금방이라도 훨훨 날아 그리운 금강산으로 찾아갈 듯하다.
그리운 금강산 작시:한 상 억 작곡:최 영 섭 1. 누구의 주제련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2. 비로봉 그 봉우리 짖밟힌 자리 흰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 우리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지 몇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이 노래를 작곡하고 작사한 두 분은 다 강화 출신으로 모두 온수 초등학교를 나왔으며 이후 인천의 중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비석에 새겨진 가사 내용이 위에 소개한 원래 가사하고 다르게 되어 있다. 여기에 박학다식하기도 하지만 또 다문多聞한 심의섭 교수가 코멘트를 더한다. 남북회담 때 초청받은 이화여대의 이 아무개 교수가 연회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었는데, 북측에서 위 가사 내용 중 ‘더럽힌 지 몇 해’ ‘짖밟힌 자리’ 등을 고쳐 달라고 하여 개사改辭하였는데, 이 비석을 세운 남자 스무명을 당할 기개를 가진 소프라노 이 교수는 북한 고위층이 참석한 자리에서 원래 가사대로 불렀다고 한다.
제적봉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뜻을 가진 제적봉制赤峰 비석은 1966년 당시 민주공화당 김종필 의장 참석 하에 그가 친필로 쓴 비석을 세우고 758OP를 제석봉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연성대첩비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는 임진왜란 당시 개풍 연안 지역 의병들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것 을 기 념하기 위해 당시 연안 땅에 세운 임진왜란 대첩비이다. 얼마 전 우리 정부가 그것을 본 따서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원래의 비는 황해도 연백군 용봉면 횡정리에 있다. 먼저 가로쓰기로 전자篆字로 크게「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라는 비제碑題가 있고, 그 아래 세로쓰기의 비문이 있다. 내용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李廷黯(1541~1660)이 연안에서 적병을 쳐부수며 선전했다는 사실, 그 후 1605년에 임금이 포상하고 1608년에는 연안 사람들이 의논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사실, 이정암의 관직, 동생 이정형李廷馨과 임진臨津에서 적을 막다가 실패하고 연안으로 들어가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과 함께 의병 500여명을 모아 연안부延安府를 지키는데 왜장이 해주海州로부터 3,000 여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포위·공격하자 4일 동안 치열한 혈전 끝에 적병을 반 이상 사살하였으며 이에 왜적이 끝내 포위망을 풀고 도망하였다는 사실 등이 실려 있다. 끝에는 이항복찬李恒福撰 정석호서鄭賜湖書 김상용전金尙容篆 등 찬撰·서書·전자篆者의 관직과 성명을 밝혀 놓았다.
연성(연안) 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과 함께 당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연안대첩을 이끈 이정암(李廷馣)은 관료 출신으로, 연안부사 등을 지내다가 왜란이 일어난 1592년 황해도 초토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개성유수로 있던 아우 이정형과 함께 개성을 지키려 했으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실패한 뒤 황해도 연안으로 들어와 의병을 일으켰다. 1천명도 안 되는 군사로 나흘 간 왜군 3천여 명과 싸워 대승했다. 이정암은 이 공로로 황해도 순찰사와 전라감사에까지 올랐다.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목(忠穆) 시호를 받았다. 이정암의 묘는 개성에서 서남쪽 연강리 야산 중턱에 있다.
고려고종사적비 전망대를 보고 급히 다음 목적지인 강화역사박물관으로 가는 중에 심의섭 교수가 최근에 세운 비석이 있다고 하며 꼭 보고가야 한다고 우겨, 이 비석을 보게 되었다. 매우 중요한 볼거리 하나를 못보고 떠날뻔 했다. 고종(재위 1213~1259)은 고려 제23대 왕인데 재위 기간에 거란·몽골 등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강화에 천도하여, 오랜 기간 몽골과 항쟁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가 강화 천도할 때 개성에서 염하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송해면 승천보로 건너왔다는 사실,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彫板)하게 하고, 유학을 장려하고 뛰어난 고려 청자가 이때 생산되었다는 등 그의 문화적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능은 강화의 홍릉(洪陵)이다.
강화역사박물관 시간이 1시가 넘어 배고 고프지만 오늘의 두 번째 관광 목적지인 하점면 강화대로(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직행하였다. 이 박물관은 강화의 문화유산을 보존,연구하여 전시할 목적으로 세워진 공립박물관이다. 2010년 개관하였으며 상설 전시실, 기획 전시실을 비롯하여 영상실, 강당, 뮤지엄 샵 등 다양한 부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상설전시실에는 1층에 고려 강화, 조선 근대 강화, 강화인의 삶, 갯벌과 저어새의 땅 등으로, 2층은 신나는 청동기시대 탐험, 고인돌의 땅 강화,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 등의 방으로 나누어 강화의 선사시대 유적지와 고려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향교, 전통 사찰 소장품 등의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해마다 다채로운 주제의 특별전이 열린다. 그리고 강화 역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상실과 교육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강화역사박물관은 고인돌공원 옆에 위치해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강화고인돌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특히 고인돌 공원에 있는 강화지석묘는 경기지방을 비롯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으로서, 뚜껑돌은 길이 710cm, 너비 550cm나 되는 거석으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이다.
강화역사박물관을 관람한 후 우리 일행은 점심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함허동천으로 향했는 데, 가는 도중에 전등사 앞을 지나 명미당을 거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전등사 전등사는 ‘강화도 대명사로 불리 우는 사찰’인데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지 얼마 안 된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래한 승려 중의 한 사람인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건물인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과는 달리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중간에도 공포를 배치한 다포양식의 건물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 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인데 비해, 한곳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여 마치 벌을 받고 있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새겨 놓았다.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다.
이 대웅전은 당시 목수들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명미당 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도면 사기리 탱자나무 맞은편에는 영재 이건창 선생의 생가인 명미당이 있다. 이건창 선생(1852∼1898)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로 김택영에 의해 여한9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권력에 비판적이었으며 민생의 실상과 어려움을 많이 다루었다. 15세의 어린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특히 부정한 관리를 처단하는데 주저함이 없어 존경 받았던 분이며, 고종의 간곡한 부름으로 1880년과 1893년에 어사로 나가 관인의 비리를 엄하게 조사하고 민폐를 해결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내세운 양명학의 강화학파의 마지막 대학자였다. 저서로는 [당의통략]이 있는데 이는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붕당정치[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알려져 있다 문집으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이 있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약 100여년이 넘은 것으로 판단되며 경기도 지방의 전형적인 살림집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주변이 자연석 담장으로 둘러진 ㄱ자형 평면을 가진 중부지방의 민가형태로 안으로 들어가면 명미당(明美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생의 묘는 양도면 건평리에 소재한다. 건물 바로 옆에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자결한 조부 이시원 선생의 묘가 있다.
함허동천 조선 전기 승려 기화(己和)가 마니산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하여 그의 당호(堂號)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기화가 썼다는 ‘함허동천涵虛洞天’ 네 글자가 남아있는데,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에 잠겨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니산 서쪽에 펼쳐져 있으며, 빼어난 산세를 끼고 곳곳에 너럭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이 바위들을 넘나들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특히 계곡 한 켠에 200미터에 달하는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마니산의 절경으로 곱힌다. 이곳에서 마니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산행 시간 5시간 45분)
‘함허동천 식당에 도착하니 이백규, 조종환 부부가 점심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백규 동기 부인은 집에서 준비해 온 부침 50장을 식당 주인 핀잔을 들어가며 데쳐 술안주로 내놨다. 한상락 전 회장이 제공한 매실막걸리와 역시 이백규 동기가 제공한 강화인삼막걸리를 반주로 포식하였다. 음식을 준비한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식사 후 식당 근처에 숨겨두었던 보물찾기에서 찾은 상품을 걸고 2부 여흥 행사를 가졌는데 중후한 유기창 박사(물리)가 자연과학자 답지 않은 유머와 재치가 곁들인 능숙한 진행을 보여 우리는 요즘 유행하는 ‘스타 탄생-경선대회’를 거치지 않고 유능한 2부 사회자를 발굴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최형화 동기 부인이 보온 통에 준비해 온 브라질 커피를 좌석을 돌아다니며 제공하여 하루 피로를 풀게 했다. 커피가 부드럽고 향이 좋았다. 아침 일찍나오면서도 물을 끊여 준비한 정성이 고맙다.
모임 때마다 좋은 사진을 올려주는 최수복(농화) 동기와 ‘신사 중의 신사’ 김선규 동기 부인인 홍현표 후배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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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대단하십니다. 13일의 강화도 기행은 단지 서론이었고, 이 것이 본 기행인 것같습니다.
그 날 버스 안에서 강정식박사와 최창희교수가 서로 정설을 놓고 싸우는걸 보는 동안에,
옛날 중국 춘추시대에 제나라의 관중과 포숙이, 서로 싱갱이를 하면서도,
포숙이 관중을 포용함으로서 깊은 친교를 쌓아서 관포지교 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 생각나더군요.
두 분도 관중과 포숙처럼 오래오래 친교를 이어나가서, 우리나라에도
정창지교 (창정지교?)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학자님답게 잘 써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아침에 버스에서 먹었던 떡 정말 잘 맛났어요,,,
그것도 감사드립니다...
강정식박사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 드립니다 강화도 지도책을 펴놓고 읽으니 강화도 역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백규
아이구,박사논문같네요.
읽어보구서야 이렇게 좋은데를 다녀왔다는걸 실감하네요
강화다닌지 근 30여년 수십회..
그동안 돌게, 망둥어만 잡아먹었다네
함허동천 뜻도 모르고 산채비빔밥만 축 냈구려,,
오늘 글과 사진보니 사진도 반듯하고 내용도 아주 짭잘합니다.
게다가 해학까지 곁들였으니..
역시 네티즌회원답게 사진배열 적절하시구
문자속이 몹시 심오합니다.
이제야 보구 인사합니다. 감솨, 당케, 분더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