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성어 활용의 주의점
한문은 한자 자체의 음과 뜻을 안다고 하여도 해독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자가 문장 속에서 파생의 뜻을 갖거나 한자가 둘 이상 결합한 한자어가 특수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후자를 成語라고 한다. 성어는 배경 이야기가 있거나 관습적인 표현으로 굳어져서 한자의 뜻 그대로와는 달리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중국 戰國時代에 여러 사상가들이 爲政者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故事를 사용하는데, 그 고사의 주요 어휘가 성어로 굳어졌다. 그리고 또 문인이나 저술가들이 쓴 시와 문장 가운데 생동적인 어구도 성어로 굳어졌다.
성어 가운데 시에서 온 것은 특히 원래 문맥과는 달리 사용되는 예가 많다. 《시경》小雅 <鶴鳴>편에 나오는 '他山之石'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 말은, 다른 산의 쓸모 없는 돌이라 해도 내 옥을 硏磨하는 데 쓸모가 있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된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인격을 닦는 데 거울로 삼을 수 있다고(反面敎師로 삼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말로 쓰인다. 원래 구절은 "즐거운 저 동산에는, 박달나무 심겨 있고, 그 밑에는 닥나무 껍질 있네. 다른 산의 쓸모 없는 돌도, 그것으로 옥을 갈 수 있다네(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有穀. 他山之石, 可以攻玉)"이다.
그런데 漢唐의 옛 주석은, '다른 산의 돌'이란 다른 나라나 다른 족속의 사람을 가리키며, 이 구절은 외국 사람이라도 인재라면 등용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남송 때 朱熹의 《詩集傳》은 이 시의 돌은 소인을, 옥은 군자를 비유하며, 이 구절은 군자가 소인의 횡포를 견디면서 학덕을 쌓아나가야 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본래 주희의 해석은 邵雍의 설을 기초로 한다. 소옹의 주장은 程子의 언급 속에 드러나는데, 주희는 다시 정자의 말을 《詩集傳》속에 인용하였다. "정자가 말했다. '따스하고 윤나는 옥은 천하의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고 거칠고 울퉁불퉁한 돌은 천하의 지극히 못난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옥을 서로 갈아서는 좋은 물건이 될 수 없다. 돌로 갈아야 좋은 물건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군자가 소인과 함께 있으면서 횡포한 일을 당한 후에야 자신을 닦고 반성하며 두려워하고 피하며 동심인성(動心忍性 : 조심하고 잘 참아냄)해서 미리 막는 마음을 더욱 다잡음으로써 의리가 생겨나고 도덕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나는 이 말을 소자에게서 들었다." 주희는 이렇게 소옹의 설을 인용하면서도, <학명>편의 앞뒤 문구를 고려하여, 소인도 장점이 있으므로 그것을 나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하였으니, 남의 단점을 보고 자기에게 반면교사로 이용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명나라 사상가 이지(李贄)의 서한에 나오는 용례를 보면, '타산지석'은 자기 잘못을 고칠 때 도움이 될 만하거나 거울이 될만한 외부의 힘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뜻은 후대의 용례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과 꼭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성어는 원전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朝三暮四는 남을 기만하여 우롱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것은 《列子》<黃帝>편에서 송나라의 조련사가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도토리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성을 내므로,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자 기뻐하였다는 寓言에서 나왔다. 그런데 《列子》란 책은 《莊子》에서 영향을 받아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데, 조삼모사의 우언도 《莊子》<齊物論>에 나온다. <齊物論>에 나오는 조삼모사 우언은 남을 기만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들은 사물에 명칭을 붙인다든가 하는 식으로 사물을 구별하는데, 지나치게 사물을 구별하고 是非를 가리다 보면, 사물들 사이의 조화를 깨뜨리기 쉽다. 마치 원숭이가 전체 수 七을 보지 못하고 朝三과 朝四의 차이에 집착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원숭이 조련사는 원숭이의 喜怒를 이용하여 朝四가 좋다면 아침에 네 개를 준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도를 깨달은 성인은 시비를 조화하고 자연 그대로 내맡겨둘 따름이라고 장자는 말하였다. 이 맥락에서 보면, 조삼모사는 인위적인 分別智識에 구애되지 말라는 경고의 뜻을 지닌다.
또 우리 속담에서 왔다고 알고 있는 성어 가운데 '畵中之餠'이란 말이 있다. '그림 속의 떡'을 옮긴 한자성어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 말은 원래 불교에서 나왔다. 不立文字를 주장하는 禪家에서 언어문자란 쓸 데 없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그림 속의 떡은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고 비유로 든 것이다. 《傳燈錄》의 香嚴智閑 조항에 나온다. 그림 속의 떡은 곧 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언어와 문자를 비유한다.
더구나 그간 중국 고전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도 있다. 一石二鳥나 七顚八起 등이 그 예이다. 일석이조란 말은 一擧兩得, 一擧二得, 一擧兩獲의 표현을 기초로 일본 사람이 만든 성어이다. 그리고 칠전팔기란 말은 達磨의 수행 자세를 표현하려고 일본 사람이 고안한 말이다. 사실 칠전팔기는 논리상으로 이상하다. 일곱 번 쓰러져도 일곱 번 일어난다고 해야 맞지,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한다면 공연히 한 번 더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은 아마도 칠전팔도(七顚八倒)를 의식하여 만든 것이리라. 칠전팔도는 몇 번이고 자빠진다거나 세상이 혼란스러움을 뜻한다. 七과 八이란 숫자를 사용한 것은 음조때문이다.
사실, 어문생활에서 窮僻한 성어를 사용하는 일은 말뜻을 심오하게 하거나 맛깔스럽게 하기보다 의사소통을 방해할 뿐이다.
출처 : 한학입문/심경호/황소자리
첫댓글 공부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