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라도 / 눅 14:1-6
2013년에 개봉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가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대본을 쓰고 감독한 “설국열차”라는 영화이지요. 정말 할리우드의 최고가는 거장들이 만들어낸 작품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좋은 영화입니다. 본래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나온 만화가 원작인데, 봉준호 감독이 2004년 홍대 앞 만화가게에서 우연히 이 만화를 읽다가 영감을 얻어서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기상이변으로 지구가 온통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가 그랬던 것처럼, 열차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이 설국열차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 나가는데, 17년째 달려가는 도중에 열차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는 공상과학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열차는 객실마다 등급이 있습니다. 맨 앞쪽에 열차의 엔진을 장악한 채 절대 권력을 누리는 윌포드가 있고, 맨 뒤쪽 꼬리칸에 간신히 무임승차해서 목숨을 부지한, 마치 빈민굴의 거지들과 같이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댑니다. 꼬리칸은 말 그대로 생지옥입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고 유리창도 없습니다. 꼬리칸에 탄 승객들은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덩어리를 식량으로 공급받기 전까지, 먹을 것이 없어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설국열차는 꼬리칸에서 앞쪽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좋아집니다. 마치 3등석에서 2등석, 1등석, 특등석으로 환경이나 대우가 좋아지듯이, 앞쪽 칸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환경이나 생활수준은 점점 더 좋아집니다. 신선한 과일이 넘쳐나고 갓 잡아 올린 생선으로 초밥을 만들어 먹는 등,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사치와 호사를 누립니다. 영화는 바로 이 꼬리칸에 탄 억눌린 사람들이 객실을 차례로 점령하여 맨 앞쪽에 있는 엔진실을 점거해나가는 쿠데타, 또는 혁명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설국열차야말로 가장 철학적이며, 또 신학적인 영화입니다. 열차를 하나의 우주로 설정해서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하여 인류의 계급투쟁의 역사와 진보과정, 등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 영화 안에는 수없이 많은 상징 장치들이 숨어 있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다 다양한 해석을 쏟아 놓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정작 영화보다 SNS에 쏟아놓는 관객들의 영화평이나 해석이 훨씬 더 흥미로울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설국열차에서 설정한 객실의 등급이 인간의 계급질서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꼬리칸에서부터 맨 앞쪽칸까지 사람들의 신분질서는 물론이고, 신분과 지위에 따라서 환경과 대우까지 달라지는 인류의 역사와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요즘 최고의 화두는 검찰 개혁이란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혁이라기보다 법제도를 변경해보자는 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적폐는 검찰입니다. 가장 큰 권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없는 죄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검찰의 권력이 대단합니다. 그 동안 그 권력으로 유죄인 사람을 무죄로, 무죄인 사람을 유죄로 만든 사건이 상당수입니다. 때문에 검찰이 공정하고 확실한 개혁으로 바로 서야 국민의 법질서 안정과 없는 죄도 만들어내어 국민들을 겁주는 검찰행태를 없앨 수 있다고 봅니다. 검찰의 내부적 모순은 검찰출신들에 의하여 현직 검찰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권력화적 연결고리로서 매우 우려되는바가 크다고 봅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검찰개혁을 시도하려다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꼭 검찰개혁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우리는 여러 정권 하에서 개혁이란 말을 계속하여 들었습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까지 개혁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개혁이 사라지고, 점점 더 사회층의 분리가 가속화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들이 물러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번엔 잘 되어야 할 텐데, 수구세력 곧 자기 이익에 조금도 손해보려고 하지 않는 집단들이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최근 ‘판결과 정의’란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우리 사회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좁아진 느낌이라며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하는 사다리를 걷어차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계층 이동에 대한 갈망이 큰 사회이고, 계층 이동이 비교적 쉬웠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좌절감을 완화시켜 주고 그 열망을 더 키워주고 그것을 실현해주게끔 제도를 구성해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개혁이란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개인주의를 따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대개의 경우 인생은 일생동안 자신의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죽는다.”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요, 하나는 개혁의 순서에 있어서 먼저 자기 자신이란 거죠? 사실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도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이것을 도외시합니다. 개혁의 대상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려고 합니다. 개혁의 칼자루를 잡은 사람들이 남들에게만 개혁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정작 자신을 개혁하는 데는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개혁의 대상이 개혁을 외치는 일이 벌어지는 우스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정치권에서 개혁이란 말을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지만 국민들은 다 압니다. 사실은 그들이 개혁의 대상 1번이라는 걸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개혁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지금까지는 상대방을 제압하고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혁을 말해오지 않았습니까? 개혁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개혁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개혁의 방향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개혁은 자기의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개혁의 방법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틀을 바꾸는 개혁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형식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용을 바꾸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폼(Form)을 변경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럼 답이 나왔습니다. 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영적인 개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그리스도인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개혁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이 개혁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자리에 많이 진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길러내야 합니다. 성경적 가치관을 가진 인재를 양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이르면 이를수록 좋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학교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교회학교가 발전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요,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나라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교회에 아동부, 중고등부 학생들이 매우 적은 수지만, 그래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축복입니다. 그들이 나중에 어떤 인물이 될지 모릅니다. 그들이 훗날 하나님께 얼마나 크게 쓰임 받을 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의 미래는 무한히 열려있습니다. 그들의 잠재력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붙들고 비전을 품고 바른 목표를 세워서 최선의 대가를 지불한다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잘 들으세요. 우리는 이러한 아이들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그들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들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여러분이 기도할 때마다 어린 영혼들을 위해 잊지 말고 기도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오늘 말씀의 배경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복되게 구별하신 날입니다. 육체적 노동을 주로 했던 당시에 일손을 멈추고 하루를 쉰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노동을 쉰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매일을 하나님께 경배하며 살아가지만 특별히 그날은 회당에 나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안식일을 통해서 영적인 충전과 육체적인 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주일의 의미도 그렇습니다. 일주일 중 7일 전부가 주일이지만, 그 중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한 주간이 시작되는 날을 주일로 지킵니다. 육체적인 일손을 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사실 일손을 놓지 않으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일손을 온전히 놓아야 합니다. 그에 따른 손실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고 육체적인 쉼을 누려야 합니다. 욕심 부리면 안 됩니다. 우리 신체구조는 엿새 일하고 하루 쉬어야 건강이 유지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거스르면 몸에 무리가 오게 됩니다. 그게 나중에 병이 됩니다. 하나님이 쉬라고 하면 푹 쉬면됩니다. 하나님이 일하라고 하면 열심히 일하면 됩니다. 그게 순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순리대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자칫 개혁을 역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닙니다. 참된 개혁은 역리를 순리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개혁자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철저히 하늘의 순리를 따르신 분입니다. 당시 모든 종교인들이 다 지지한다고 해도 순리가 아니면 행하시질 않았습니다. 유력한 정치지도자들이 다 지지를 표해도 순리가 아니면 미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체제의 변화를 무척 싫어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요. 사실 개혁의 길은 외롭습니다. 원래 지지 세력도 많지 않습니다. 시대마다 개혁의 발목을 잡는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그들이 대세를 이뤘습니다. 그들이 이러저런 이유를 갖다 붙였지만 실제 이유는 자신은 변화되기 싫다는 겁니다.
앤드류 매튜스가 쓴 책 중에 ‘Follow Your Heart(마음 가는 대로 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이것이 모두였다. "주여, 내게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옵소서." 중년에 이르러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 놓지 못한 채 내 반생이 흘렀음을 깨닫자 내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 나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옵소서. 그저 가족과 친지들만 개종시켜도 만족하겠나이다." 이제 노인이 되어 죽을 날도 오늘 내일로 다가오니 이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나 자신을 고칠 은총을 주옵소서."” 처음부터 이렇게 빌었다면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요, 세상은 잘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기도자가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해야 합니다. 거기에 행복의 비결이 있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에 행복할 수 있는 비결도 그렇습니다. 내가 변하고 보니 그토록 지옥 같던 가정이 천국으로 바뀌더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초대받으신 식사모임에 함께 가보십시다. 1절을 보세요.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의식이 끝난 후 함께 둘러앉아 공동식사를 하였습니다. 마치 우리교회에서처럼 말입니다. 한 바리새인의 지도급에 속하는 사람이 안식일에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참인데 마침 기회가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식탁을 풍성하게 차린 후에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 혼자 초대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1절 끝부분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여기서 엿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바리새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이 어떤 동기를 가졌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설사 그가 순수한 동기로서 예수님을 초대했을지라도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사이가 평소 워낙 좋지 않았기에 혹시 그가 다른 바리새인들과 사전에 공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건만 식사초대에 응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서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은 식사초대를 한 번도 거부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놀릴 만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좋지 않은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 7:34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먹기를 탐하는 사람을 우리나라에서는 뭐라고 불러요?(먹보, 식충이...) 포도주 곧 술을 즐기는 사람은요?(술고래, 알콜중독자...) 예, 이스라엘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까지, 이건 말이 별명이지 예수님을 밑바닥 인생 취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런 별명이 붙게 된 데는 누가 청하든 사양하는 법이 없었고, 가셔서 아무거나 맛있게 잡수셨고, 또한 누구하고나 잘 어울려 지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잖아요. 함께 친해지고 가까워지는 방법 중에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은 함께 먹는 것입니다. 분위기 좋은 교회를 보면 서로 식사초대가 많아요. 금식을 해 보니까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먹지 않는 것이 식구들에게 얼마나 불편을 초래하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정말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어서 청하기만 하면 가시는 분이었을까요? 정말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어서 부르기만 하면 무조건 응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해도 맘 편한 사람들끼리 식사하는 것을 원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를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긴장되고 어떻게든 시간이 빨리 흘러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까를 생각하겠지만, 예수님은 그 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의 대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그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리셨습니다. 2절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여기서 “수종병(水腫病, dropsy)”은 옛 성경에 “고창병”이라고 했는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됩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수종병 든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일부러 데려다 놓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가를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의 엿보고 있는 것은 슬쩍 훔쳐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감시하듯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책잡기 위해 타인의 약점을 잡기 위해 수사관 같은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하늘로부터 임하는 날입니다. 예배 후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 교제와 사랑을 나누는 날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수종병 든 자를 이용하여 안식일 정신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축복의 날을 남에게 올무를 놓는 날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비뚤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비뚤어져 있고 시각이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쉽게 말하면 이 사람의 병을 고쳐줘도 되느냐? 오늘이 안식일인데도 괜찮겠느냐? 당신들이 괜찮다고 하면 고쳐주고 그렇지 않다면 고치지 않겠다. 뭐 이런 뜻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언제부터 그들에게 물어보고 그들에게 허락받고 병을 고치셨습니까?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참 의외의 질문을 하신 겁니다. 이 전혀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허를 찔렸는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합당하냐?”의 원어 ‘여세스틴’은 문자적으로 ‘그것이 율법적이냐?’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적이냐,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않는 것이 율법적이냐’를 물으신 겁니다. 당시 랍비들의 안식일 해석을 몰라서 예수님이 그렇게 물으셨겠습니까? 그들의 악한 의도를 이미 간파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물으셨을 겁니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은 이미 6장과 13장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기록되지 않아서 그렇지 수도 없이 많았을 겁니다. 그만큼 그들이 안식일을 중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 중에는 안식일 날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는 입상이 유력한데도 출전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일을 너무 경시하는 것 같습니다. 주일 한 번 빠지는 것을 예사로 압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갑니다. 그래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여러분이 큰 어려움에 빠져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구해주세요! 건져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젊잖게 말씀하십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걸 같고 그렇게 아우성이니?”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답할 말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어느 운송 회사의 사장이 사원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선박이 토요일 밤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일요일에 모두 나와서 선박의 짐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사장 앞에 나와서 말했습니다. “사장님! 내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저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장은 자신의 지시를 거역하는 사람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면서 회사를 그만두든지 내일 나와서 일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사장에게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전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제가 비록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는 처지이지만 주일에는 일을 할 수가 없군요!” 그 뒤에 청년은 약 3주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했으나 마땅한 자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시중의 모 은행 총재가 평소 알고 지내는 운송 회사의 사장에게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 좀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점을 하나 더 열어야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사장은 자신이 전에 해고했던 그 청년이 떠올라 그를 추천했습니다. 총재가 그를 추천하는 이유를 묻자 사장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물론 내가 그 청년을 해고했었네. 그가 일요일에는 절대로 일할 수 없다고 해서 그렇게 했던 것일세. 하지만 자신이 처한 형편에 따라 신념과 원칙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야 돈을 맡길 수 있지 않겠나?” 결국 그 청년은 이전의 직장보다 더 좋은 곳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를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즐겨 순종하는 자를 반드시 잘되게 하십니다. 주일날 결혼식에 참여하느라 간혹 예배에 빠지시는 분들이 있는데 여러분, 주일날 하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관계가 깨진다고 생각하십니까? 4촌이 6촌이 되고 사돈이 팔돈이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예식일 이전에 축의금과 함께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미리 인사를 드린다면, 그걸 이해해 주지 못할 친척은 아마 없을 겁니다. 요즘은 청첩장에 은행 계좌를 적어 보냅니다. 오지 못하면 은행에 입금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일성수에 대한 우리의 정신자세가 해이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주일성수를 하겠다는 우리의 확고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성수에 대한 또 다른 문제는 형식화입니다. 주일날 교회는 나오지만 그게 습관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을 향한 열망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열정도, 성령님과 교제하고픈 열의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안식일 문제도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아 있다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하나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나올 줄 짐작하셨나 봅니다. 대답을 재차 촉구하지 않으시고 곧 바로 그 사람을 데려다가 병을 고쳐서 보내셨습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이뤄진 일입니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눈 뜨고 당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정말 눈 뜨고 당한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옳다고 하기도 그렇고, 그르다고 하기도 그렇고 해서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면 맞든 틀리든 대답을 했겠지만, 그들의 의도는 비난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엿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엿보는 사람의 시각치고 바른 시각이 있을 리 없습니다.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비뚤어지게 보입니다. 바로 보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더 이상 엿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의 개혁을 이뤄내시기 바랍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건전하게 볼 수 있도록 시각을 조정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좋게 볼 수 있도록 시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교회 믿음의 식구들을 사랑스럽게 볼 수 있도록 시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수종병자의 고통을 봐왔던 사람들일 겁니다. 수종병자의 고통을 진즉부터 알았던 사람들일 겁니다. 수종병자가 그들의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짐작컨대 그들의 형제일 수도 있고, 그들의 친구나 친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해 하고 있습니다. 그 병든 영혼을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는데 도구로 이용해 먹고 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죄인된 인간은 비록 그들이 종교 지도자라 할지라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수종병 든 사람은 어떤 면으로 보나 자기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자기들이 지위로 보나 권위로 보나 수종병 든 자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관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인 토마스 해리스의 저서 가운데 ‘I'm OK, You're OK’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나도 옳을 수 있고 당신도 옳을 수가 있다. 또 나도 틀릴 수 있고 당신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나는 옳은데 당신은 틀렸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항상 당신이 틀렸다며 상대방을 비난하기 때문에 항상 자기가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의의 잣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항상 불의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합니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도 불행하고 공동체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웃을 더불어 살아가는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그들도 여러분을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지 않을까요? 설사 여러분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그 주장 안에 긍휼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바른 주장이라고 해도 주장하는 사람에게 이웃의 불행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웃을 보는 시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긍휼의 시각으로 조정하시기 바랍니다. 관용의 시각으로 개혁하시기 바랍니다. 5-6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예수님은 수종병 든 사람을 돌려보내시고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엿보고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현재의 사건과 연결시켜 보면 이런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수종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만일 당신들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수종병 든 사람이 우물에 빠진 당신들의 소였다고 할지라도 건져내지 않고 그대로 두어 죽게 하겠느냐?’ ‘아무리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살려 내기 위한 방도를 찾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귀에 거슬리는 말씀일 텐데도 그들은 묵묵부답입니다. 유구무언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생명의 위태로움을 딛고 수종병 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수종병 든 자는 왕의 아들이 아닙니다. 유력한 권력가의 후계자도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다 못해 아는 사람들도 돌아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일가친척에게조차 버림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건강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히 여기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질병에서 자유하게 하시려고 자신의 위험을 자초하셨습니다. 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이 버림당하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럼 수종병 든 사람에게만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낫게 하시려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때문에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옛날의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비뚤어진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엿보는 시각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교회에 대한 시각은 물론이고 이웃에 대한 시각의 개혁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생을 살 동안 예수를 바른 시각으로 보고, 바로 믿고 바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긍휼의 시각으로 보고 관용을 베푸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이웃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존재와 한계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평생 변화 받아야 될 대상으로 인식하고,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과 가정의 중심에 오셔서, 우리를 친히 다스리시고 은혜 베푸시는 주님과 막힘없는 교제를 통해, 삶에서 주님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 믿는 연륜에 따라 변화의 기쁨도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높이는 자와 낮추는 자 / 눅 14:7-11
2차대전시에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할 때 최고의 극비사항은 언제, 어디서 상륙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정보가 빠져 나가면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최고 극비사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작전이 이루어지기 며칠 전에 미국 육군 중장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술에 취해서 날짜를 말했습니다. ‘6월 5일! 6월 5일!’ 헨리 밀러라는 인물입니다. 그 보고가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올라갔고 헨리 밀러는 당장 영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이젠하워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룸메이트요 동기였습니다. 아이젠하워가 밀러 중장을 찾아가서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술에 취해서 그랬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거냐?’ 아이젠하워가 ‘너를 본국으로 보낼 거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지 말라. 우리는 다 같이 핵심 서클이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핵심 서클, 그 말을 듣고 아이젠하워가 싸늘하게 대답했습니다. ‘핵심 서클이란 없다. 전쟁에서는 죽는 자와 사는 자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헨리 밀러 중장을 대령으로 강등해서 본국으로 보냈습니다. 실화입니다. 모름지기 군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극비사항을 노출시키고, 그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병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그런 사건에서, 자기가 핵심 서클이라는 이유로 면책을 주장한다면 그건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핵심 서클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열두 명 중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핵심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기 때문에, 이 세 사람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야말로 제자 중의 제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두 명중에 최초로 순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야고보입니다. 이 세 명 중의 한 사람 야고보가 최초로 순교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했습니다. 핵심인물인데 왜 먼저 죽느냐. 핵심인물이기 때문에 먼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핵심인물이란 없습니다. 가장 핵심이신 예수님이 특권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누가 예수님 앞에서 특권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인간의 심리를 통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심리가 일치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생각은 어긋납니다. 서로 상반된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만은 하나님 나라의 원칙과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가 일치하는 경우입니다.
자기 심령에 예수를 모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행복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비그리스도인이나 다를 바 없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입으로는 그렇게 노래하지만 실제로는 높은 산이라고 불평합니다. 거친 들이라고 원망합니다. 초막이라고 불만을 갖습니다. 그럼 그런 사람이 궁궐이라고 만족할 수 있을까요? 높은 산에서 불평한 사람은 낮은 산에서도 불평할 것입니다. 거친 들에서 원망한 사람은 기름진 들에서도 원망할 것입니다. 초막에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궁궐에 살면서도 불만을 가질 것입니다. 환경을 무시할 수 없지만 환경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환경이 너무나 중요하고,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환경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행복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천국이 있고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보좌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정원과 같습니다. 정원을 가꿀수록 아름답듯이 마음의 정원도 가꿔야 합니다. 오늘 아름다운 정원도 며칠만 방치해두면 추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음의 정원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오늘 행복했다고 내일도 행복하란 보장은 없습니다.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계속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금방 마음이 오염되게 되고, 과거의 상처와 실패의 쓴뿌리로 인해 마음이 건강을 잃게 됩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영혼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육체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변화 없이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의식의 변화 없이 참된 변화를 바랄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자크 엘룰 교수는 ‘뒤틀린 기독교’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기독교로 회심을 했으나 사고방식은 기존의 방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너무나 예리한 지적입니다. 겉모습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경건한 신앙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모습은 거룩함이 풍겨집니다. 그러나 사고방식은 그대로입니다. 가치관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뒷전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것에 비중을 크게 두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온통 관심이 쏠려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예수의 상(image)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복음’이 아니라 ‘내가복음’을 믿는 거지요.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역훈련은 별로 시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마음훈련입니다. 3년 동안 그들에게 인격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훈련과 순종훈련에 집중하셨습니다. 믿음을 강하게 해주는 마음훈련과 철저히 순종하게 하는 인격훈련이 제자훈련의 핵심이요 전부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어떤 인격을 가져야 하는지를 실례를 들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았습니다. 청함을 받은 것이지요. 예수님 혼자 청함 받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흐름으로 볼 때 예수님이 일찍 도착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착해보니 몇몇 사람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7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님이 도착해서 보니까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경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꼴을 보고 그냥 보아 넘기실 리가 없지요. 그들에게 한 마디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교적 직설적인 어투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13:3절과 5절에서 갈릴리 사람들의 학살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묻는 질문에 뭐라고 답하셨어요?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15절에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자들에게는요? “외식하는 자들아!” 32절에서 헤롯이 당신을 헤치려고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고는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다소 투사적인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늘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제자들을 교육할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예수님의 특별한 교수법입니다. 정말 중요한 가르침을 주실 때는 이처럼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에 대해 마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3:34절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은 약간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예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마다 비유를 사용하신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번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침의 주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주제절이 나옵니다. 몇 절입니까? 11절입니다. 먼저 11절을 보세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겸손이 주제입니다. 교만한 바리새인들을 실례로 들어 제자들에게 겸손을 교육하신 것입니다. 겸손의 모델에게서만 겸손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사람에게서도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선한 사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악인도 무수히 나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공적인 신앙인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신앙인을 만나는 것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선인을 골라서 볼 수만도 없고, 성공적인 신앙인을 선택하여 읽을 수만도 없습니다. 사실 선인과 악인이 함께 실려 있고, 성공자와 실패자가 함께 나오는 것은, 선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악인에게서도 교훈을 받아야 하고, 성공자에게서 뿐만 아니라 실패자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부전자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아들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다윗과 견줄 수 있는 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악인입니다. 실패한 신앙인입니다. 열왕기하 16:2-4절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이만하면 그는 완벽한 악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실패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선왕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왕이 나왔습니다. 그 왕의 이름이 누굽니까? 16:20절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히스기야입니다. 히스기야는 악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그걸 본받지 않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실패한 아버지 아래서 자랐지만 성공하기 위해선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결국 그는 유다 역사에 이런 이름을 남겼습니다. 열왕기하 18:5-7상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내 인생이 이렇게 밖에 안 풀릴 것은 부모 때문이다. 선생 때문이다. 남편 때문이다. 아내 때문이다. 친구 때문이다.’ 여러분,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내 신앙이 이 정도밖에 자라지 못한 것은 교회 탓이다. 목사 탓이다. 장로 탓이다. 직분자들 탓이다.’ 여러분, 누구누구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그것처럼 비겁한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당시에 상에 앉는 자리가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정해져 있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유대인의 연회석은 ‘ㄷ’자 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그중 높은 자리는 그 세 면의 중앙 부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도착해서 보니까 높은 자리를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8절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말씀이 높은 자리가 좋지 않은 자리란 뜻이 아닙니다. 끝자리가 좋은 자리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끝자리를 목표로 삼고 끝자리에 앉기를 힘쓰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리에 얽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자리를 구별하려고 합니다. 낮은 자리와 높은 자리, 귀한 자리와 천한 자리를 구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자리에 예민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리에 얽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자리는 어디까지나 자리일 뿐이라는 겁니다. 사실 자리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으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인격으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인격적으로 문제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차라리 그 자리에 앉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자리가 사람을 망칠 수 있습니다. 자리에 잘못 앉으면 사람 버릴 수 있습니다. 한번 자리에 맛들이면 자리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 자리에 만족할 수 없기에 평생 자리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눈독 들이는 사람은 많겠지만 상석일수록 수가 적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현재 앉아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야 합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안 되니까 부정한 방법을 씁니다. 중상모략을 합니다. 없는 말을 만들어냅니다. 그럴듯한 설을 지어냅니다. 결국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악을 행하게 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를 아시죠? 그는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후 목사로서 또 대학교 교수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서도 활약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서 몹시 고통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교인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가 의학 공부를 다 마친 후, 아프리카의 적도지방인 랑바레네에 도착하여 혼자 힘으로 병원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병원 유지에 쏟아 부었으나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입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모금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고향인 알자스에도 들러 모금하러 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의 동료들과 친지, 그리고 각계 인사들은 슈바이처가 기차역에 도착하기 전에 마중을 나왔습니다. 조금 있다가 기차는 도착하였고, 환영 나온 사람들과 기자들은 그 기차의 1등 칸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슈바이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둥대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맨 뒤 3등 칸에서 내려 초췌한 모습으로 플랫폼을 걸어 나오는 신사 한사람 있었는데 그가 바로 슈바이처 박사였습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은 슈바이처 앞으로 달려가서 그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아니 박사님, 어떻게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질문이라기보다는 불평에 가까웠습니다. 그때 슈바이처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4등 칸이 없어서 3등 칸을 타고 왔습니다." 슈바이처의 이 대답은 그들 모두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겸손한 그의 말과 태도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자리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3등 칸을 타도 자신은 슈바이처이고, 1등 칸을 타도 자신은 슈바이처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3등 칸 자리에 몸을 싣는다고 삼류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고, 1등 칸 자리에 몸을 싣는다고 일류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3등 칸은 1등 칸에 비해 많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의 불편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계산하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겠지만 3등 칸의 불편을 나중에 존경받음으로 넉넉히 보상받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리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의 자리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자리에 예민하지 말고 인격에 예민하시기 바랍니다. 8하-9절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둘째, 자리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높여주는 것입니다. 잔치 시작 시간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높은 사람이 안 올 모양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비스듬히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높은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청함은 받았지만 사정이 있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청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그러면 할 수 없이 끝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손님들이 아무리 권했어도 처음에 끝자리에 앉았더라면, 주인이 와서 어쩔 줄 모르고 높여줄 텐데, 처음에 상석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다가 주인에 의해 끝자리로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낯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입니다.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높여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이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높여줘야 합니다. 내가 높이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고보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4: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건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낮추는 즉시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언제까지 낮추어야 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낮추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낮추어야 합니다. 주님이 보시고 ‘그만하면 됐다’고 하실 때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더 이상 낮춰지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들어 높이십니다.
요셉을 기억하시죠? 그는 최저의 자리에까지 내려갔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자리에까지 내려갔습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그를 훌쩍 들어 높이셨습니다. 노예 죄수에서 일약 총리로 높이셨습니다. 요셉이 스스로를 높여서 총리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높여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성 프란시스의 제자가 환상 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천국 구경을 했는데 거기에 보좌가 쭉 있는데 가장 높은 보좌가 있더래요. “이건 누구겁니까?”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란시스의 의자다.” 아무리 스승이지만 조금 질투가 났습니다. 언젠가 조용한 시간에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선생님, 그건 위선입니다. 선생님은 성자입니다. 세상에 강도, 살인자, 뭐 도둑 등,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악하다면 그게 어디 말이 됩니까?” 그러자 성 프란시스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나는 참으로 악한 사람이거든.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어서 그 은혜로 인하여 내가 있는 거지. 내게 주신 은혜를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셨다면, 그 사람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네.” 요셉이나 성 프란시스는 자리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높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고,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 안전합니다. 스스로 높이면 언젠가 추락하게 됩니다. 높였다가 떨어지면 높아지지 않았더니만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높아지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높이지 말고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10절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셋째, 자세를 낮추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이 말씀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했으니, 그리스도인은 아랫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신 것은 높은 자리가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세를 낮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바닥에 맴돌고 있으면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같은 기독교라도 구교인 카톨릭교회와 신교인 개신교는 선교방법을 달리했습니다. 카톨릭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선교방법을 취했습니다. 개신교는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선교방법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전방위 방법입니다. 선교지의 형편과 필요에 따라 위로부터의 방법을 취할 수도 있고, 아래로부터의 방법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위-아래로부터의 방법을 동시에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현재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위로부터의 방법이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아랫자리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파급효과가 빠르고 뛰어납니다. 말단 직원보다 사장이나 임원이 믿을 때 복음의 영향력을 크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신앙 좋은 사람이 각계 각 분야에서 정상에 서야 합니다. 믿음 큰 사람이 크게 되어야 합니다. 사업도 크게 해야 하고, 경영도 크게 해야 합니다. 예수 정신으로 충만한 사람이 사회의 리더로서 골고루 포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가 자녀를 축복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축복의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장래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신앙교육을 철저히 시켜야 합니다. 록펠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는 세계 제일의 거부로 손꼽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부와 명성을 타고났던 사람은 아닙니다. 처음 그는 지독히도 가난하여서 하루 4센트의 보수를 받으며, 뜨거운 감자밭에서 일을 했고,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으며, 역사상 남에게 가장 많이 자선을 베푼 사람이 되었고, 장학재단을 세워 많은 인재를 키워냈습니까? 그가 그렇게 성공한 비결은 그의 어머니의 유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②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③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해 두라. ④ 원수를 만들지 말라. ⑤ 예배를 드릴 때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드려라. ⑥ 항상 아침에는 그 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⑦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를 드려라. ⑧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⑨ 주일날 예배는 꼭 본 교회에서 드려라. ⑩ 아침에는 제일 먼저 말씀을 읽어라. 록펠러가 재벌이 되지 못했다면 자선을 베푸는 것도 장학재단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마음뿐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세를 낮추라고 하셨지 결코 실력을 낮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실력과 자세의 관계를 가지고 4종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실력도 높고 자세도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트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② 실력은 없는데 자세만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허풍쟁이 스타일로 웬만한 건 입으로 때우는 사람입니다. ③ 실력도 없고 자세도 낮은 사람이 있습니다. 무능한 사람으로 어디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④ 실력은 높은데 자세는 낮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은 실력이 뛰어나고 자세는 겸손한 네 번째 사람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실력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대단한 실력가라는 사실은 당대의 모든 사람이 알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전 15:9절상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그는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자세를 낮추었습니다. 그는 좀 더 자세를 낮추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엡 3:8절상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사도가 아닌 “모든 성도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라고 자세를 낮췄습니다. 급기야는 자신을 뭐라고까지 낮추었습니까? 딤전 1:15절하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실력 있는 바울이었기에 그 고백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책망 받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교회 안에 남아 있는 풍습이 있습니다. 부탁하면 뒤로 빼는 것을 겸손으로 아는 풍습 말입니다. 감당할 수 있겠다 싶어서 어렵게 부탁을 하면 “예, 고맙습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하면 좋을 텐데,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 아직 그 정도의 믿음이 못됩니다.” “전 그 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하고 뺍니다. 그 때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모릅니다. 아니, 3년 이상 교회 다녔으면 그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만한 실력은 이제 쌓아져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 그 정도의 믿음이 못됩니다.” 하면서 뒤로 빼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전 그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하면서 빼는 것이 겸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배우면서 해 보겠습니다.” 하는 것이 겸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크게 키우시고 허리는 겸손으로 동이시기 바랍니다. 실력은 높이고 자세는 낮추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혹시 자기를 낮추면 손해 본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래요, 처음엔 낮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주님이 높여 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높이면 주님이 낮추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높여주실 수 있도록 그분께 기회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겸손이 적용되는 범위는 실력에 대한 것이 아니고 믿음에 대한 것도 아니고 인격 곧 삶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언제라도 주님이 쓰실만한 실력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또 주님께 인정하실 만한 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겸손한 인격을 갖추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우리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역들로 다들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낮아짐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는 실력은 높이고, 자세는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자리에 맛을 들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고, 언제나 변함없이 어떤 자리에서든지 주님께 충성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큰 잔치를 베풀고 청하였더니 / 눅 14:12-24 50대 이상의 여자들을 대상으로 가장 인기 있는 남편은 어떤 남편인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요리 잘하는 남편? 씩씩한 남편? 집안 일 잘 도와주는 남편? 가정적인 남편? 힘 좋은 남편? 그 어느 남편도 아닌 집에 없는 남편이 가장 인기 있는 남편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은퇴하고 집에서 잔소리만 하고 있으면 미움 받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상황 안에서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먼저는 자기라는 상황입니다.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입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객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먼저는 자기가 자기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실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이웃 또는 사물과의 관계상황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웃이라는 상황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떤 인간으로 평하느냐, 내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도 균형이 참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에 대해서 지나친 신경을 쓰느라 자기 자신의 충실을 잃어버리면 위선자가 되고, 그렇다고 남이 날더러 무어라 하든 말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이 사람은 고집불통의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두 상황의식의 균형을 잘 이룬 사람을 인격자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또 하나의 상황의식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지금도 하나님께서 나를 보살피시고 있다는 신 임재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이것을 인정하고 민감하게 의식하는 사람이 신앙인이요, 신앙적이지 못한 사람은 불인정, 불감각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힘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시기는 이 상황의식들의 일치를 볼 수 있을 때입니다. 자기 자신도 자기를 옳다고 확실하게 인정을 해주고, 이웃들도 자기를 성원한다고 믿어질 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이때가 가장 강하게 설 수 있는 때이며, 이와는 반대로 만약에 이 세 가지 상황의식이 다 나를 정죄한다면 나는 회개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의 대부분은 혼인잔치였습니다. 마태복음 22장과 25장을 보세요. 명확히 혼인잔치라고 했습니다. 3대 잔치비유에 속하는 본문은 혼인잔치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혼인잔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8절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예수님이 유독 혼인잔치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신 것은 ‘잔치’하면 혼인잔치라고 할 정도로 혼인잔치가 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혼인잔치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늘 혼인잔치에 마음 빼앗기고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젠가 혼인잔치와는 약간 성격이 다른 잔치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3:29절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하나님의 나라 잔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는 지상이 아닌 하늘에서 벌어지는 잔치를 말합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벌인 잔치를 말합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종말에 있을 잔치를 말합니다. 그 하나님나라 잔치는 문맥으로 볼 때 구원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 가서는 혼인 잔치와 하나님나라 잔치가 하나로 통합됨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7-9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통합된 이름이 무엇입니까? 어린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혼인기약이 이르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잔치에 참여하려면 신부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 신부예복이 무엇입니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입니다. 세마포가 무엇을 뜻합니까?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정혼한 셈입니다. 혼인기약이 이를 때까지 신부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신부수업을 받는 것입니다. 신부수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랑을 맞이할 때까지 자기 몸을 순결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5: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온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전한 신부만을 혼인잔치에 부르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딴 남자와 잠자리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 그 결혼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간음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에 마음을 주는 것을 성경은 간음으로 간주합니다. 야고보서 4:4절 ‘간음한 여자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세상과 벗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건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이라고요. 그건 하나님과 원수되는 길이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발 부탁합니다. 예수 믿기로 했으면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으면 예수님만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았으면 예수님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날의 어린양 혼인잔치를 생각하며, 신앙의 정조와 믿음의 지조를 잘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사회는 서로 주고받는 문화가 오늘날보다 훨씬 정례화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사람이 선물을 해주면 반드시 그만한 규모의 답례를 해 주는 것이 사회의 관습으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상류사회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규모 있는 큰 잔치에 초대해 주었다면, 초대받은 사람도 다음에 그런 융숭한 자리에 반드시 초대해야만 했습니다. 서로 간에 주고받는 격이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상류층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렸습니다. 신분적 균형을 깨는 상하 계층간의 교류는 거의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 뿌리내린 ‘주고받기식 문화’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그런 틀은 깨뜨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편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기어이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자청하여 고달픈 삶을 사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길 꺼려하는 좁은 길을 찾아서 가신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분의 뒤를 올곧게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말씀하신 좁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세상에 뒤처지지 않을까 불안해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물결을 역류하셨는데, 우리는 세상 물결에서 벗어날까 봐 불안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내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닐까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예수 정신으로 충만하지 못한 자신, 예수님과 너무나 동떨어진 자신을 발견하며, 오늘도 겸손하게 말씀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주여, 나에게 예수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우리 힘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물결 앞에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엄청난 물결 앞에 역류는커녕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헛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성령으로 충만하지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 할 때 예수 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제정신이 아닌 예수 정신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거꾸로 사는 것만을 예수님의 정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조건 세상과 상반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런 뜻도 아닙니다. 예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럼 예수 정신이 무엇입니까? 예수 정신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보면 그분의 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14장에서만 봐도 예수님의 정신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정신이 나옵니다. 겸손에 대한 예수님의 정신이 나옵니다. 주고받기식 문화에 대한 예수님의 정신이 나옵니다. 우리는 좀 고달프더라도 예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는 믿지만 예수 정신으로 살기를 거부한다면, 그가 믿는 예수와 성경이 말하는 예수와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믿는 예수는 자기가 생각하는 예수, 자기가 만든 예수입니다.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예수입니다. 예수님을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수는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입니다. 모든 인생의 주도권을 가지신 예수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 마음의 보좌에서 내려와 그 자리에 예수님을 앉게 해드립니다. 자기 인생의 운전석에 예수님을 앉게 해드리고 자신은 조수석에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키를 예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2절상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가 나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을 청한 사람은 바리새인의 한 지도자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만 해도 상류층에 속했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귀족층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서도 지도자이니까 지도급 인사에 속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청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3절을 봐도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7절을 봐도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2-14절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지금까지 해오던 초청방식과 대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여태껏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만 초청했던 사람들에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만 초청하라는 말은 180도 바꾸라는 말 아닙니까? 이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생각을 180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의식을 180도 수정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설사 생각과 의식이 바뀌었다고 해도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단번에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 주간동안 기도해 보고 그 이후에 결정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대개 주님은 그런 식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생각을 바꾸는데 긴 시간이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의식을 바꾸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릴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떻습니까? 생각을 바꾸고 의식을 수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머리로는 인지하면서도 실제의 삶으로 연결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게 ‘옳고 그르고’는 나중 문제이고, 그게 일단 자신에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본인에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바꾸고 나면 덩달아서 바꿔야 할 것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당장 불편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라, 그대로 살자. 지금까지도 잘 살아왔는데 뭘’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주님의 요구는 다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어도 지금부터라도 바꿔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바꿔야 한다고 하시고 나는 그대로 살겠다고 하고, 이게 팽팽한 균형을 이룹니다. 거기서 긴장이 생겨납니다. 그 때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주님께 지는 것입니다. 주님께 두 손을 번쩍 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백 번 옳습니다. 제가 바꾸겠습니다. 좀 불편이 따르더라도 제가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엔 다소 힘들겠지만 제가 수정하겠습니다.”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는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의 길이 좁은 길일지라도 그 길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이 십자가일지라도 그 방법이 사는 방법입니다.
15-17절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 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손님을 부르고 초대하는 분은 바로 천국을 예비하시고, 수많은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신적인 초대를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상에 성소를 마련해 놓으시고, 복음의 식탁과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죄인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생명의 떡과 신령한 음료와 생수의 성령을 예비하여 두시고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는 불쌍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뜨거운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주님의 잔치 비유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18-20절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첫 번째, 당당하게 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나는 장가들었기 때문에 도저히 갈 수가 없노라고 초청에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자기 집에 음식이 넘쳐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남의 집 잔치에 가는 것을 시간 빼앗기는 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별로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두 번째,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올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일거리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으며, 주는 사람도 없어서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상류층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기에, 초대만 해주면 감지덕지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23절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세 번째,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는 인력시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은 돈 얼마를 받고 가서 하루 일하고 그날 품삯을 받아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일할 힘이 있고 기술도 있지만, 그날 고용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도 길과 산울타리 가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먹고 사는데 급급하여 다른 데에 눈 돌릴 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주인의 초대에 확실하게 응할 사람들은 두 번째 사람들입니다. 곧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입니다. 불러주기만 하면 언제라도 달려올 준비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금의 나라가 속히 끝나고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없고, 어떤 것도 기대할 게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가진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있는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들은 부인할 것도 버릴 것도 떠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따라나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을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21:31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그 다음으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세 번째 사람들입니다. 바로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잔치에 참석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먹고사는 일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혼자 입만 생각할 수 없어서 잔치 참석을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어떻게 할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셨어요? 강권하라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치하게 사양하는 자들에게는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사양하는 말을 주인이 듣고 종을 보내며 “다시 가서 권해보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서 좀 더 설득해보아라”고 다시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자들에게만 강권하여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강권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분부대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막 16: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나 복음을 전해야 할 일차적 대상이 따로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입니다. 왜 이들이 복음을 받을 일차적 대상입니까? 이들은 복음에 대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복음 수용지수가 높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길과 산울타리 가에 서성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는 강권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사정하지 말고, 그들을 붙들고 애원하지 말고, 그들에게 강권하라고 했습니다. 사정과 강권은 다릅니다. 애원과 강권 역시 다릅니다. “사정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일의 형편이나 그렇게 된 까닭을 말하고 도움을 청하다’입니다. “애원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애처롭게 사정하며 간절히 바라다. 통사정을 하며 애절히 바람’입니다. 이에 반해 “강권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억지로 부추기거나 무리하게 권함’입니다. “강권하여”의 원어 ‘아낭카조’는 ‘억지로 ~하게 하다’입니다. ‘사정’이나 ‘애원’이 상대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데 비해 ‘강권’은 상대에게 다소 강제성을 띠고 있습니다. 왜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들과 달리 강권하라고 했을까요?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어떤 계기만 마련된다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없잖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심령에 성령의 빛이 비취기만 하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24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마지막으로 주인의 초대에 사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예수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전하는 순위에 있어서 마지막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을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복음을 영접할 기회를 저버리고 육신의 정욕에 눈먼 사람의 종국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한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닐지 몰라도, 거의 희박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현저하게 욕보이고 끝끝내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은 밖에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 잔치에 초청받은 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첫 번째 사람들은 아닙니다. 두 번째가 아니면 세 번째 사람들입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두 번째 사람일 것입니다. 강권에 못 이겨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세 번째 사람일 것입니다. 어떻게 믿게 된 것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나라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죄와 허물과 모순투성이인 우리를 하나님나라 잔치에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우리를 강권해서 불러주신 주님을 송축합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어린양 혼인잔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신부수업을 잘 받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 어린양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들은 주님의 초대를 받았고 주님이 직접 마련하신 잔치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거룩한 영적 권위가 모두에게 주어져서 인생이 달라지고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며 먼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분별할 줄 아는 영적 능력이 주어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눅 14:25-35
십여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 반기독교 정서가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인터넷 반기독교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기독교에 대한 노골적인 욕설과 불신과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가 무슨 해충이나 되는 듯 박멸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대중 매체들 특히 공중파 TV나 신문 잡지들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일부 목회자들의 비리나 몇몇 교회의 문제들을 집중보도하면서, 마치 전체 목회자들과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과 같은 이미지를 확산시켜가고 있습니다. 또한 보수측 기독교인과 정치인들이 동원한 광화문 집회에서 기독교 대표로 전광훈, 장경동 목사의 연설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대로 좌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반기독교 정서를 부축이고 조장하는 세력의 의도적 음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의 비판과 공격이 기독교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삶의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에 문제가 많습니다.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목회자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대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제대로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우리 주님의 소중한 교훈입니다.
25절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수많은 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수만 명은 아닐지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처럼 예수님을 따르게 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메시지에 그들이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은 희망을 발견했고 삶의 의욕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적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아니고는 행할 수 없는 기적들을 보면서 그들은 열광했습니다. 예수님 곁에만 있으면 굶주림의 문제가 해결되고, 여러 가지 질병의 문제가 해결되고, 무엇보다도 민족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적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기들의 유익을 따라 예수님을 따른 것이지요. 그걸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가 자기와 함께 가는 것을 크게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예수님은 그리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숫자의 노예로 사시지 않았습니다. 몇 명 모이는 것에 예민하시지 않았습니다. 집회 인원이 몇 명이나 되느냐에 별 관심없어 하셨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예수님이 최고’라며 예수님의 팬을 자처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곧 떠나갈 사람들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고 있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따라와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참된 제자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천수만의 다수보다 비록 소수에 지나지 않더라도 참된 제자를 원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육하고, 제자들을 훈련하는데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천국비밀을 알려주고, 그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심어주는데 온 정열을 쏟아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기심에 사로잡힌 무리가 아닌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제자”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배우는 자입니다. 스승에게 열심히 배우는 자가 제자입니다. 스승의 지식을 배우고 스승의 경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스승의 인격이요, 스승의 정신을 배우는 것입니다. 둘째는 훈련받는 자입니다. 영어 사전에서 “discipline”을 찾아보면 그 뜻은 ‘훈련’ 또는 ‘훈련하다’입니다. 그런데 뜻풀이 이전에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disciple과 같은 어원임”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데로 “disciple”은 제자라는 뜻입니다. “훈련”이 “제자”와 같은 어원을 가졌다는 말에서 우리는 훈련받는 사람이 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등록하는 ‘순간’ 교인은 됩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신자는 됩니다. 하지만 제자는 ‘순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의 훈련을 통하여 되어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따르는 자입니다. 스승을 따르는 자가 제자입니다. 따르되 끝까지 따르는 자가 제자입니다. 스승은 안전한 길로만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승은 평탄한 길로만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승은 진리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진리의 길은 안전한 길만은 아닙니다. 꼭 평탄한 길만도 아닙니다. 위험한 길일 수 있습니다. 거친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스승을 끝까지 따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스승을 끝까지 따르는 사람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무리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소원이나 이루고, 떡이나 얻어먹고, 병이나 고치기 위할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무리로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신자와 제자란 말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자신을 제자로 여겼습니다. 이전의 길에서 180도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죽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신자와 제자를 분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는 순간부터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배움의 기회가 주어질 때 잘 배우기를 바랍니다.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예수님과 함께 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따르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따르기 위해서 먼저 일어나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끝까지 따르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내가 참된 제자인가, 아직 무리에 속해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참된 제자의 길을 걷고 있는가, 여전히 무리의 길을 걷고 있는가를 평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무리에 속해 있고 무리의 길을 걷고 있다면, 얼른 돌이켜 참된 제자로 거듭나 참된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입니까?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첫째, 참된 제자의 길은 예수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선뜻 동의하고 따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동기로 믿었다면 실족하기 좋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미워하지”의 원어 ‘미세이(misei)’는 ‘조금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의 뜻입니다. 덜 사랑하고, 조금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26절의 직접적인 뜻은 자기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와 자기 목숨을 주님보다 덜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우선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첫째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둘째, 주의 종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셋째,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넷째,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주의 종에게 순종하는 것은 교회생활을 말합니다. 부모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가정생활을 말합니다.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은 사회생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순종, 말씀에 대한 순종의 범위는 교회는 물론이고 가정과 사회 곧 우리 삶의 전 영역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말씀’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예수님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했습니다. 이웃 중에 이웃,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구입니까? 부모입니다. 처자입니다. 형제자매입니다. 이들을 제쳐놓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또한 우리는 친구도 사랑해야 합니다. 옆집 사람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이 비록 불신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주님보다 덜 사랑해야 합니다.
주일은 사랑하는 주님과 데이트하는 날입니다. 주님을 그들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일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들을 주님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주일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뒤바뀐 사람은 못 지킵니다. 그러니까 주일성수는 나는 예수님을 1순위에 놓고 산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주님을 물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십일조를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을 주님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뒤바뀐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나는 예수님을 물질보다 더 사랑한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어떤 시골에 믿음 좋은 집사님 내외가 있었습니다. 그 해에 송아지 두 마리를 얻었습니다. 잘 키웠습니다. 너무너무 탐스러워서 부부가 의논했습니다. “여보 하나님 은혜가 너무 감사한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립시다.” 그래서 송아지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부부가 합의했습니다. 밖에서 남편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만 송아지 한 마리가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뛰어들어오며 말했습니다. “여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어 버렸어.” 영문도 모르는 아내가 묻습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 것으로 지정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척보면 알 수 있어. 틀림없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다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습니까? 집사님 네 송아지가 죽었습니까? 미리 정하지 않았으니까 누구 것이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향으로 묻겠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사랑한 사람입니까? 자기 송아지가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자기 송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송아지를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자기 그물을 사랑했을 겁니다. 그물은 어부에게 있어 밥그릇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그물을 버렸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습니까? 그물을 예수님보다 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물보다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야보고와 요한은 그물은 물론이고, 배와 부친까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이 낡아서가 아닙니다. 배가 수명이 다 되어서가 아닙니다. 부친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을 주님보다 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그 모든 것들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 사랑하는 것들에 순위를 한 번 매겨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여러분에게 있어 1번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있어 1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1번 자리는 비워 두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무리 귀중한 것일지라도 그게 1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만 1번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 삶의 1순위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 존 네이스빗은 우선순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 또한 찰스 휴멜은 “우리들이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들은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함에서 온다.”라고 말했습니다. 삶의 목표를 이루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우선순위를 확실히 지키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우선순위 1번으로 선택하기 바랍니다. 주의 몸인 교회 일에 우선권을 두기 바랍니다. 영적이고 신앙적인 일을 앞세우기 바랍니다. 믿음의 식구들의 어려움을 먼저 돌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바로 할 때 참된 제자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둘째, 참된 제자의 길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충격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는 찬송가 341장을 비장한 각오 없이도 부를 수 있습니다.
1)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갑니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받겠네. 2)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당하리. 세상 사람 간사하나 예수 진실합니다. 예수 나를 사랑하사 빛난 얼굴보이면, 원수들이 미워해도 염려할 것 없겟네. 3) 내가 핍박당할 때에 주의 품에 안기고, 세상 고초당할수록 많은 위로 받겠네. 주가 주신 기쁨 외에 기뻐할 것 무어냐? 주가 나를 사랑하니 기뻐할 것뿐일세.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 찬송가를 부른다면,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를 진 사람을 처형장으로 끌고 가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이 죽음을 뜻하는 것이라는 걸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을 최고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인을 죽이는 사형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하실 때 그들은 몸서리가 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꺼이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기꺼이 죽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생명을 기꺼이 드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오라는 곳까지 가야하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가 지고 있던 짐은 사실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건 죄의 짐입니다. 우리 죄의 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하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질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 십자가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당하게 되는 불이익을 말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받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당하는 아픔을 말합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받는 고초가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떤 수도사가 사막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좀 도와주십시오. 어디 계십니까?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 그리고 나는 네 가슴에 머리를 대고 쉬고 있느니라.” “주님 이상합니다. 주님 내 마음에 계신데 왜 내 마음속에는 아픔이 있습니까?”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있기 때문이니라.”
우리가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 안에 있는 자는 기쁨 중에 살게 됩니다. 요 15: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을 마음에 모신 자에게는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요 16:33절상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주님을 모신 것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며 겪는 거룩한 아픔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고자 할 때 생겨나는 신령한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찾아오는 경건한 몸부림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거룩한 아픔과 신령한 고민과 갈등, 그리고 경건한 몸부림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참된 제자의 길을 걸어온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현재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지십니까? 남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 큰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그걸 믿는다면 주님은 내가 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십자가를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느 정도의 십자가를 질 수 있을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결코 우리에게 무리한 십자가를 지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곧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립니다.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집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알기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타처럼 겸손하게 자기 짐을 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 됩니다. 괜히 쓸데없는 짐까지 같이 지고 끙끙댈 필요가 없습니다. 근심 걱정 염려의 짐은 과감히 던져 버리세요. 하나님을 위한 순종의 십자가를 지세요. 교회를 위한 충성의 십자가를 지세요.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를 지세요.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참된 제자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28-33절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셋째, 참된 제자의 길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28-32절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하나는 망대 짓는 비유입니다.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여 자기가 확보한 돈으로 건축을 시작해도 될지를 잘 판단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도 그 길은 결코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임을 알아, 냉철한 판단에 의해 따르기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정확한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망대의 비유와 같습니다. 적군의 숫자가 아군에 비해 두 배나 많게 언급된 사실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 마치 중과부적과도 같은 상황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제자의 길은 “주여 믿습니다. 아멘” 하며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써만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로서 여러분이 주님을 따를 때 분명히 알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제자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축복의 길도 아닙니다. 영광의 길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고통의 길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고통, 자기를 부인하는 고통, 자기를 버리는 고통 없이는 결코 못가는 길입니다. 찬송가 341장 2절 첫 번째단 가사 기억하시죠?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 주님이 곤욕을 당했느니 나도 곤욕을 당할 것이다는 사실을 알고도 따라가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한 소년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제자에게 내놓으면서 예수님이 이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길 것이다는 믿음으로 바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먹을 걸 포기하고 바친 것입니다. 어른들은 눈치만 보고 있는데 어린 소년은 자기 것을 포기했습니다. 물론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 건 예수님의 능력 때문이지만, 그 이면에 있었던 한 소년의 아름다운 자기 포기를 간과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고 합니다. 원숭이들이 다니는 길목의 나뭇가지에 열매를 넣은 조롱박을 매달아 놓습니다. 그리고 조롱박에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놓습니다. 원숭이는 조롱박에 들어있는 맛있는 열매를 확인하고 그 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조롱박의 구멍이 너무 작아서 열매를 움켜쥔 손을 빼내지 못합니다. 사냥꾼들이 몰려오면 자신이 쥐고 있는 열매를 놓고 도망을 가면 되는데도 원숭이는 그걸 놓지 못하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원숭이는 손만 놓으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열매를 잡긴 했지만, 먹어보지도 못하고 사냥꾼에게 잡혀가는 어리석은 원숭이입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 이야기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요? 우리 역시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쉽지 않아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참된 제자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기하면 되는데 그걸 붙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냥 놓아버리면 되는데 억지로 그걸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붙잡고 있어야 할 사명은 놓아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목숨을 걸고 붙들어야 할 말씀과 기도는 포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포기해야 할 것과 포기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제자가 되는 조건을 3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을 우선순위 1번에 두라고 하셨을까요? 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왜 모든 소유와 지위와 권리를 포기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34-35절에 나옵니다.
34-35절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제자의 조건을 엄격하게 한 것은 소금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맛을 내는 소금,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으로 살게 하기 위해섭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제자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에서 일터에서 제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제자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거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거나, 자기를 포기할 줄 모르면 주님이 기대하시는 소금같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소금같은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소금같은 제자의 삶을 살아 불신자들의 심령에 갈증을 일으킬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하여 겸손히 끝없이 노력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주님을 따르는 일에 목숨을 건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하옵소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