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호-예배인가! 쇼인가! 1.향상되는 아름다운 반복 언젠가 철사로 만든 작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애완용 다람쥐를 본 적이 있다. 다람쥐는 좁은 공간에 갇힌 채 끝없이 쳇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돌려도 늘 제자리인 바퀴... 아무리 돌려도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쳇바퀴를 다람쥐는 자꾸 돌리고 있었다. 누가 표현했던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다람쥐 쳇바퀴 같다고... 정말 그것은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삶, 무의미하게 되풀이 되는 인간의 삶을 잘 표현한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전혀 다람쥐의 쳇바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니,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에스겔이 본 바퀴 조국의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며 그발 강가에서 슬픔에 잠겨있던 바벨론의 포로 에스겔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상을 통해 나타나셨다. 이상 중에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빛나는 모습과 그분의 찬란한 보좌를 보았는데, 푸른 보석 같은 빛과 무지개로 둘린 그분의 산 보좌는 움직이는 바퀴들 위에 좌정하여 있었다. 그리고 그 눈부신 황금빛을 띤 움직이는 바퀴는 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놀란 에스겔이 자세히 보니, 그 바퀴의 형상은 바퀴 안에 또 바퀴가 들어 있어 복잡하게 서로 엉켜 있는 것 같았으나, 그것들은 완전히 아름다운 조화와 질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운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움직이는 바퀴를 본 에스겔은 깨달았다. 세상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힘보다 더 높은 어떤 힘이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마치 이 세상의 역사의 바퀴들이 서로 뒤엉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거룩한 손이 바퀴들 위에 놓여져 있어 각 부분이 완전한 조화 가운데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비록 복잡하고 난해하고 조화가 깨어진 듯이 보일지라도, 인간의 지배를 벗어난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각 사람의 생애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어서 삶의 바퀴 안에 또 다른 삶의 바퀴가 복잡하게 엉키어 있는 것만을 볼 뿐이지만,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생의 바퀴들을 인도하시는 그분의 능력의 손 안에서 쉼을 얻으며, 그리하여 평화롭고 겸허해진 마음으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걱정과 염려하는 대신 수용과 받아들임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소중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긴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필요 없는 일이나 무익한 사건들이 쓸데없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다. 만일 당신의 삶이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줄지어 달려온다면, 당신은 영의 눈을 뜨고 그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왜 당신에게 그 일이 오는지, 또 그 일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온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더 높고 넓은 깨달음을 얻어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까지 자라나는 ‘아름다운 향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난 사람, 진정으로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한 가지 일을 통해서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으며, 그 사람의 영적인 경험은 점점 더 깊어지고 향상되어 점점 더 하늘에 가까워지게 된다. 향상되는 아름다운 반복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정화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자녀들에게 쓴 잔을 마시도록 하신다. 그것은 쓰디쓴 잔이다. 그것은 고통과 슬픔과 시련의 잔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평하고 한탄하고 투덜거림으로써 그 잔을 더욱 쓰게 할 수 있다. 불평하면서 잔을 받는 사람들은 또 다른 잔을 더 마셔야 하는데, 그 까닭은 첫 번째 잔이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두 번째 잔도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면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그 쓴 잔을 계속 마셔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속에 더럽고 불결한 것들이 그냥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쓴 잔은 오직 인내와 오래 참음과 수용과 기도로써만 달게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첫 번째 잔에서 이미 소기의 목적, 곧 마음의 깨끗함과 정결을 진정으로 경험했다면, 그 사람은 그가 겪었던 똑같은 경험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필요 없는 훈련으로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시간낭비를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경험, 더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을 마련하신다. 그런 사람은 새로운 경험들을 거듭하면서 마음이 순화되고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어 그의 삶은 무한한 영적 성장의 길을 가게 되며, 그런 성장의 길을 가는 사람의 생애는 아름답게 변화한다. 이렇게 모든 일에서 값진 영적인 경험과 교훈을 얻는 사람의 삶은 ‘다람쥐의 쳇바퀴’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늘 새로운 경험으로 향상되는 아름다운 반복이 있을 뿐이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지루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공과들을 배우고 체험하며 기뻐하는 가운데 지혜롭게 생을 살아갈 뿐이다. 다른 사람들, 곧 반복되는 생애의 경험들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정결하게 됨을 입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거듭 거듭 쓴 잔을 마시고 있는 동안에...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어떤 변화도, 향상도, 영적 성장도 없이 똑같은 ‘다람쥐 쳇바퀴’의 삶을 사는 동안에 말이다. 영적인 연금술사 “연금술”이란 말이 있다. “연금술”이란 금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금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연금술사라고 불렀다. 옛날에는 금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연금술사들이 쇠나 납이나 동 같은 보통 금속을 금으로 전환시키려고 노력을 했다. 그렇게 금을 얻으려고 하던 실험과정 중에서 여러 가지 유용한 화학 기술들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연금술을, 보통 물질을 금으로 변하게 만든다고 하여 어떤 요술이나 마술을 대표하는 말로 부르게 되었다. 또 “사랑의 연금술”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곧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우주의 이치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고 마음의 눈을 뜬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고 새롭고 감사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기 위해 “사랑”이라는 방법을 그들의 삶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에는 우리 영혼을 변화시키는 연금술적인 힘이 있다. 인간의 속성, 곧 이기심, 소유욕, 질투, 교만 등의 납을 황금으로 바꾸는 신비의 연금술의 힘이... 하늘에서 오는 근원적인 사랑을 발견하고 체험할 때, 우리의 지루하고 괴로운 삶은 활기가 넘치게 되고 그 사랑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는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게 된다. 사랑을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삶에 온통 새로움과 활력이 넘치게 되는 것, 그것은 마치 보통 평범한 쇠붙이에서 순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놀라운 연금술사이다.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우리들을 사랑으로 연단하시어 아름다운 순금의 사람으로 만드시니까... 비록 입에는 쓸지라도 정결하고 순결하게 되기 위해 필요한 쓴 잔을 거듭 마시게 하며 우리를 가르치시니까... 만일 당신이 쓴 잔을 계속 마시고 싶다면, 고통과 시련이 올 때 투덜거리며 원망하면 된다. 깨달음의 성장도 없고, 성품의 변화도 마음과 행동의 변화도 없는 그냥 다람쥐 쳇바퀴의 삶을 살며... (그런 사람은 종종 교만하여 자신의 과거만을 고집하고 강한 애착을 보이며 자신의 부족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할 때 그 일을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아 자신을 얼른 돌아보고 그 일에서 지혜롭게 교훈을 배우므로 똑같은 쓴 잔을 마셔야 하는 반복이 필요 없어진다. 그런 사람의 삶에는 지상에서부터 하늘에 닿도록 까지 자라가는 ‘아름다운 향상되는 반복’이 있을 뿐이다. 당신에게 자꾸 쓴 잔이 오는가? 그럴 땐 자신을 살펴 보라! 왜 나에게 아직도 쓴 잔이 필요한가를... 그리고 알아차리라! 아직 당신은 순금으로 나오게 하는 아름다운 연금술사의 손을 더 많이 거쳐야 한다는 것을... 2.권두언 강병국 목사 왜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요? 예배란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가요? 우리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태도와 방법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 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들을 중점으로 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 예배의 형식이 자신들의 느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서, 그리고 본인들의 유익을 위하여서 드리도록 각본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에 삼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그분께 드리기 위한 예배를 만들려고 한다면, 우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한 기도와 말씀들, 그리고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리는 순서들로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의 공로나 행위 또는 아름다운 음성들을 칭찬하고 기리는 그러한 순서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에 초점을 맞추며 그분의 분부하심을 듣고 알기 위하여 드리는 순서로 바뀌어 지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예배가 없는 그리스도인 삶은 생각 할 수가 없습니다. 천사들도 하늘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을 드리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리며 감사하는 것처럼, 그리고 부모님들이 기쁘고 보람 있어 하시도록 자주 찾아 뵙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삽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요?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새롭고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찾아 갑니다. 3.가정 안에 심어져야 할 사랑의 원칙들 하나님께서는 가정이 사랑과 동정과 진정한 예의가 계발되는 이 땅에서의 작은 천국이 되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단도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기 위한 작전을 짰다. 하늘에서는 어떤 불유쾌한 말도 발해지지 않고, 어떤 불유쾌한 생각도 품는 법이 없다. 사단은 하늘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잘 알며, 천사들의 감화력이 어떠한가도 잘 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가정 안의 가족들을 자기 고집, 예모 없음, 거칠고 사나운 태도, 이기심의 잔인한 요소들 가운데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을 따르면 우리의 가정은 하늘처럼 될 수 있다. 하늘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큰 부분은 가정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를 사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있음으로 가정이 예수님이 계신 하늘나라처럼 된다면 우리는 하늘에 갈 준비가 된 것이다. 만일 가족 모두가 있음으로 가정이 하늘처럼 된다면 전 가정은 하늘처럼 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땅으로 향하여 표현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을 한 가족의 자녀로 만들고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가 되도록 하며, 영광의 왕께로 이 사랑을 뿌리박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 우리들을 위한 그분의 사명은 성취된다. 우리 마음속에 하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아가 그리스도에게 융화되는 때에 사랑은 저절로 생겨난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성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계속하여 일어나는 때, 곧 하늘의 햇빛이 마음에 충만하고 얼굴에 나타날 때에 성취된다. 행복한 결혼의 비결 “성화” 간략하게 말해서 행복한 결혼을 이루는 비결은 남편과 아내 모두가 성화되는 데 있다. 결혼한 배우자 모두가 위에 묘사된 품성을 소유할 때 그들의 결혼은 마치 이 땅에서의 하늘처럼 될 것이다. 이 같은 하늘의 품성을 이해하고 소유하기 위해 성경과 하나님이 말씀의 사상에 근거한 좋은 원칙들과 방법들을 함께 생각해 보자. 아래에 하나님의 정부의 운영 원칙들 몇몇 가지를 가족을 근거로 요약해 보았다. 1. 사랑의 원칙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강하고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 반대로 사랑은 그 본질에 있어서 조용하고 깊다. 사랑은 단순한 외관 저편을 보며, 오직 질적인 면에 의해서만 이끌린다. 사랑은 현명하며 분별력이 있고, 사랑의 헌신은 실제적이며 지속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생애의 평범한 일을 통하여 우리를 시험하시고 입증하신다. 작은 일들이 바로 마음의 구석구석들을 드러낸다. 생애의 행복의 절정을 이루는 것은 작은 친절, 다수의 작은 일들, 생활의 단순한 예절들이며, 생애의 불행의 절정을 조장하는 것들은 친절하고 용기를 주는 사랑의 말을 소홀히 하는 것과 생활의 작은 예절의 결핍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한 자아 부정은 하늘에 있는 생애의 기록의 대부분을 구성한다는 사실이 마지막 날에 끝내 드러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을 돌본 사실을 하늘 아버지께서 소홀히 보지 않으신다는 사실도 드러날 것이다. 사랑은 행동이 없이는 살지 못하며, 모든 행동은 사랑을 증가시키며 강화하고 확장한다. 쟁론과 권위가 무력해질 때에, 사랑은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랑은 이익이나 보상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랑의 활동마다 그 확실한 결과로서 큰 유익이 따르도록 정하셨다. 사랑은 그 본질에 있어서 파급적이며 그 활동에 있어서 조용하나, 큰 악을 정복하는 그 목적에 있어서는 강하고 힘차다. 사랑의 영향력은 녹이고 변화시킨다. 그것은 사악한 자들의 생애를 사로잡을 것이며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할 지라도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일을 할 것이다. 많은 가족들에 있어서 서로 간에 애정을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 큰 결핍이 있다. 가정에는 감상주의가 있을 필요가 없는 동시에 거기는 정숙하고 순결하며 품위 있는 방법으로 사랑과 친절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순전히 무정한 정신을 기르고 그 말과 행동으로 사단 편의 품격을 나타낸다. 부드러운 애정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들 사이에 항상 간직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성급한 말은 억제되어야 하고 피차간에 사랑의 결여는 그 모양까지라도 없어야 한다. 즐거워하고 친절히 말하는 것은 가정에 있어서 가족 각자의 의무이다. 각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하여 가족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성급한 말은 억제되어야 하고 피차간에 사랑의 결여는 그 모양까지라도 없어야 한다. 즐거워하고 친절히 말하는 것은 가정에 있어서 각자의 의무이다. 각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하여 가족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이생에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때 배양하는 습관은 우리와 함께 무덤으로 내려갈 것이며, 우리가 무덤에서 올라올 때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성품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오실 때에는 어떠한 마음의 회심도 업을 것이다. 흔히 우리 자신의 태도와 우리 주위에 있는 분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유약한 것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딱딱한 태도를 취한다. 이 정신이 동정의 유출을 방해한다. 사교적이고 관대한 생각들이 제어될 때에 그들은 메말라서 차고 쌀쌀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에 빠질까 주의할 것이다. 사랑은 표현 없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대들에게 관련된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친절과 동정의 결핍으로 굶주리지 않게 하라. 사랑은 사소한 실수를 보지 않을 것이며 사소한 과오들을 눈치채는 데 민첩하지 않을 것이다. 2. 남편과 아내들에게 드리는 특별한 권면 모든 사람은 배우자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모든 가정의 주위에는 결코 침범 당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영역이 있다. 어떤 다른 사람도 이 영역으로 들어 올 권리가 없다. 부부는 피차에 사랑을 강요하기보다는 그것을 서로 주어야 한다. 부부는 자신에게 있는 가장 고상한 것을 계발하고, 또 상대방의 좋은 특성을 인정하기에 민감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놀라운 힘과 만족을 준다. 동정과 존경은 고상한 것을 추구하도록 고취시켜 주고, 사랑은 보다 고상한 목적을 위하여 자극을 받을 때 그 자체가 증가된다. 남편과 아내가 상대방을 독재적으로 지배하고자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서로 상대방을 자기의 뜻에 굴복시키고자 노력하지 말라. 그대들이 그렇게 하면서 피차간에 사랑을 유지할 수는 없다. 그대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에 공헌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포착하라. 진정한 기쁨은 오직 이기심 없는 봉사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을 향기롭게 하며, 모든 거친 성격을 부드럽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높은 순결과 고상함에 대한 감각과 밝은 햇빛 같은 성격을 배양할 수 있는지 배우도록 하자. 고린도전서 13:4~8과 위의 인용문들을 요약해 보면 사랑의 원칙은 다음의 것들을 포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외적인 질이 아니라 진정한 내적 질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을 낳는다. 2. 사랑은 선을 행하며 사랑하는 자에게 오직 선만을 행할 것이다. 3.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유익을 위하여 자아부정과 자아 희생을 실천한다. 4. 사랑은 절대 자아 중심적이거나 자신만의 행복을 염려하지 않는다. 사랑은 늘 사랑하는 자의 유익과 행복에 초점을 둔다. 진정한 사랑은 절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이기심이지 절대 사랑이 될 수 없다. 5. 사랑은 절대 조급하지 않다. 6. 사랑은 항상 친절을 실천한다. 그 친절은 진정으로 보이는 예의를 낳는다. 7. 사랑은 절대 뽐내지 않으며 겸손하다. 8. 사랑은 결코 신경질 내지 않으며 항상 자제한다. 9. 사랑은 절대로 거짓 행위나 일에 참여하지 않으며 항상 진리를 말한다. 3. 가정의 체제가 있어야만 함 순종하는 법을 전혀 배우지 않은 자녀들은 약하고 충동적인 성격을 소유할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할지 모르나 그들의 경험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그들은 지배하기를 원하나 굴복하기는 배우지 않았다. 모든 자녀들의 행복은 강력하고도 균형 진 훈련에 의해 확보될 수 있다.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참으로 진실한 은혜는 단정함과 순종함에 있다. 교훈의 말을 주의 깊이 듣는 귀, 의무의 길을 즐겨 좇아 행하는 발과 손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우리 자신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과 다른 이들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자녀들에게나, 또 다른 이들의 자녀들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도록 제지하고 교훈해야 할 것이다. 부모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녀들의 품성을 지금과 영원을 위하여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양육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서투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 충실한 교훈을 주는데 등한히 한 부모의 과오나 자녀들의 결점을 알아서 적절한 제지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혜롭지 못한 애정의 방종은 자녀들의 모든 장래의 경로에 잘못된 방향을 줄 것이다. 4. 품성 건설을 최우선으로 삼으라 부모들이여, 저녁과 아침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에 그대의 자녀들과 함께 하여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라. 꾸짖거나 짜증내는 불화를 추방시키고 자녀 앞에서 결코 격정을 나타내지 말라. 그대의 사업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대리석을 정으로 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 위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는 것이다. 그대의 수고는 내세에서 말 할 수 없이 값진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대의 대화, 그대가 그대의 일을 처리하는 방식, 그대가 좋든 안 좋든 간에 나타내는 표현, 이 모든 것들이 자녀들의 품성건설을 돕는다. 그대의 자녀가 그대 안에서 친절한 성품, 자제, 침착, 예절을 보게 될 때, 그것들은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훌륭한 매일의 공과가 될 것이다. 가정과 국가 안에 존재하는 불복종의 정신은 바로 정부의 기초를 전복시키려는 위협적인 요소인데, 그 모든 원인은 가정교육에 있다. 오늘날 가정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이 점점 무시를 당한다. 고대에는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의 신성한 원칙들을 열심히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의 품성을 친숙하게 알며, 그분의 요구를 잘 알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창조주보다 자신의 견해를 따르는데 있어서 더 지혜로워졌다. 많은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제쳐 두었으며, 그분의 드러난 뜻보다 자신들의 판단을 좇았다. 그 같은 가르침이 청년들에게 미친 결과는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자아방종, 방탕함, 신성모독 등 생각만 해도 무서운 더 큰 범죄들이 세상에 온통 편만하다. 그러므로 가정에서의 훈련은 너무도 중요하다. 자녀들에게 이 일에 전혀 실패함이 없으신 한 분께 그들의 삶을 맡기고 참된 조언을 구하게 도와주라. 이것은 태초이래 부모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모든 일들이 있기에 앞서 매일 아침 그들의 모든 일들을 주님께 내어 놓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주님의 생각이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질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로 준비시킨 후 하루의 일과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5. 행복한 가정을 원하면 말을 조심하라 부모가 가정에서 가장 가까이 놓여있는 의무를 잘 수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축복하시고 그 부모들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첫 번째 선교 사업은 사랑과 빛과 기쁨을 가정 사회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오늘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얼마나 부드러운 말을 내가 할 수 있을까?” 가정에서 하는 친절한 말은 축복을 주는 햇빛이다. 남편은 그것을 필요로 하고, 아내도 그것을 필요로 하며, 자녀들도 그것을 필요로 한다. 6. 가족 예배를 드리라 각 가정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일정한 시간에 드려야 한다. 아버지가 없을 때에는 어머니가 흥미 있고 이해하기 쉬운 성경 절을 택하고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 예배 시간은 짧아야 한다. 긴 장을 읽거나 긴 기도를 드리면 아이들에게 예배가 지루하게 되고 예배 끝에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예배 시간이 메마르고 지겨운 것이 되며 지루하고 흥미가 없으므로 아이들이 그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부모들은 아침저녁으로 자녀들을 모으고 겸손한 탄원으로 그날 하루를 위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비할 데 없는 매력에 대해 한 노래를 부르라. 우리 부모들이 노래의 줄을 건드릴 때 사단은 그 가정을 떠날 것이다. 그리하여 찬송을 부르므로 사단과 그가 가정에 몰고 온 어두움과 함께 몰아낼 수 있다. 그의 어두운 그림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때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리들이 의의 태양의 빛을 없애버려서 그대로 볼 수 없도록 만들려는 것이 사단이 늘 궁구하며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나님께 향하여 들려져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자녀들의 마음에 위대한 도덕적 표준으로서 기억하는바 되어야 한다. 그들이 일어날 때, 그들이 앉을 때, 그들이 나갈 때, 그들이 들어올 때 이 율법은 생애의 위대한 규칙으로서 그들에게 가르쳐져야 하며, 율법의 원칙들은 그들의 모든 경험 가운데 새겨져야 한다. 자녀들은 왜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르심을 받아 독특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백성들과 분리된 탁월한 백성인지에 대한 이유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예배 시간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단순한 언어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야 한다.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들은 시간을 내어 부드럽게 그들의 경우에 특별히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을 읽어주어야 한다. 그들이 시험을 받고, 시련을 받거나 실망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보배로운 위로의 말들을 들려주고, 그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도록 그들을 부드럽게 인도하라. 7. 행복한 가정을 갖기 위해 건강 법칙을 따르라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이 병이 들거나 아프면 그 가정에는 근심의 그늘이 생긴다. 모든 가족들이 건강법칙을 알고 지키는 것은 아주 유익하다. 부모들은 신체의 법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자녀들에게 건강 법칙을 잘 가르쳐야 한다. 가정에서의 식사는 아주 건강 적이고 균형 진 식단이 되어야 하며, 아이들에게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반드시 식욕이 의지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의지는 조용하고 지성적인 이성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건강법칙을 모든 가족들이 지킬 때에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육적인 축복도 가정에 임할 것이다. 한 예로 작은 아기들은 정규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먹을 것을 주고 자라남에 따라 그 횟수를 줄일 수 있다. 이러한 규칙적으로 식사하는 일들 외에도 과자, 견과류, 과일 등 어떤 종류의 간식도 아이들에게 제공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몸이 지나치게 소화시키는 일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정신을 깨끗이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한 건강법칙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커다란 축복이 될 것이다. 4.몸에 유익한 약초 요즈음 건강에 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화학적인 약품을 사용하기보다 대체 요법으로 약초를 구입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한 항생제 남용으로 초래되는 면역력 약화의 문제, 그리고 항생제에 대한 내성으로 생기는 문제들은 많은 지식인들의 눈을 천연 치료법으로 돌리게 하였다. 건강 식품점이나 천연약초를 판매하는 곳에 가면 가루나 캡슐로 되어 있는, 또는 그냥 뿌리나 껍질 그대로의 여러 가지 약초들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약초들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들판에 아무렇게나 깔려있는 풀과 나무와 뿌리들에도 치료제가 되는 약품들을 넣어 놓으신 것을 감사하며, 알아놓으면 유익한 약초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 골든씰 (Goldenseal) (약초로 사용되는 부분 - 뿌리) 골든씰은 전 약초 영역에서 가장 뛰어난 치료제 중의 하나이다. 거의 모든 질환이나 염증에 좋으며, 특히 소화기관에 관련된 모든 질병에 효과가 높다. 이 약초는 위장에 관련된 모든 질병과 모든 감염과 염증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데, 직접 혈류로 들어가 간 기능 조절을 돕고 정상화시킨다. 부진한 선 장기를 촉진시키고, 인체 내 감염을 정지시키며 독을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 이 골든씰은 천연 항생제로 불리고 있다. 감기치료제로도 아주 좋으며, 코, 기관지, 장, 위장, 방광 등 모든 점막질환에 신속한 치유를 가져다준다. 다른 약초와 같이 사용할 때, 무슨 질병을 치료하든지 간에 강장제의 효능을 증진시킨다. 하제, 암, 종양, 궤양, 의욕부진, 항생제가 필요한 모든 질병에 쓰이고 약초계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즐겨 쓰이고 있다. *주의: 임산부는 복용하지 말 것. * 에키네시아 (Echinacea) (약초로 사용되는 부분 - 뿌리) 에키네시아는 골든씰과 함께 손에 꼽히는 천연항생제로 사용되고 있는 약초이다. 탁월한 혈액 정화제로서 혈액의 독을 제거하므로 혈액질환에 좋고, 조혈제로도 좋다. 종기, 암, 습진, 궤사, 임질, 백혈병, 임파선, 전립선, 매독, 편도선염, 열 등에 좋다. 목이 따갑고 아플 때 에키네시아 가루를 물에 타서 목을 헹구어내면 좋다. 특히 몰약과 함께 타서 쓰면 효과가 배가 된다. * 민들레 뿌리 (Dandelion Root) 민들레에는 혈액의 산성화를 중화시키고 혈액을 깨끗하게 하는 성분이 들어 있다. 혈액의 성분 중 영양분이 모자라 생기는 빈혈, 간질환, 간 비대증, 신장, 비장, 원기부족, 식욕증진에 효과가 좋으며, 담낭의 담즙 형성을 도와주고, 담석증에도 좋다. 또 변을 부드럽고 묽게 하므로 강하지 않은 변비약으로 쓰이며, 황달과 피부병, 신장과 연관된 모든 질병들, 당뇨병, 장염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 우엉 (Burdock Root) 우엉은 조려 먹으면 맛있는 반찬이 되기도 하고, 또 김밥에 맛을 내는 데 아주 중요한 재료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맛있는 반찬거리인 우엉은 알고 보면 아주 몸에 좋은 천연 약초이기도 하다. 우엉은 주로 뿌리를 쓰는데, 먼저 우엉은 최고의 혈액 정화제이다. 우엉은 더러워진 혈액을 아주 빠른 속도로 깨끗하게 해주므로 천연 치료에서 혈액 정화제, 소염제, 해독제 등으로 쓰인다. 또한 우엉을 다린 우엉 차는 종기나 부스럼, 등창 등등의 여러 피부병에 좋으며, 소변을 잘 나오게 하는 작용을 하고, 통풍, 류머티즘, 입안에 무엇이 나서 아플 때, 인후염, 두통, 감기, 좌골 신경통, 또 모든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 * 발레리안 뿌리 (Valerian Root) 발레리안은 신경을 안정시키고 신경과민, 우울증, 불면증에 아주 효과가 좋다. 대장염, 위궤양에 좋고 장 내 가스 생성을 방지해 주며, 심장의 빈맥을 안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옛날 아랍지방에서는 마취제로도 사용됨. * 주의: 사용시 뿌리를 물에 끓이지 말 것. * 훼네그릭 (Frenegreek) (약초로 사용되는 부분 - 뿌리) 또 다른 천연 혈액 정화제이다. 혈액의 독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해주며, 알레르기, 감기, 기침, 기관지염, 열, 빈혈, 멍든 데, 눈 아픈 데에 좋다. * 월귤 열매/잎 (Bilberry) 월귤 열매 잎은 눈의 건강에 좋다. 시력 보강, 백내장, 당뇨병으로 인한 녹내장, 근시, 눈이 쉬 피로한 증상, 야간 근무자, 컴퓨터 앞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 학생들, 운전사들, 비행기 조종사들의 눈의 건강을 위해서 사용하면 좋다. * 포디알코 (Pau D’Arco) 또는 타히보 (Taheebo) 남미가 출산지인 이 약초는 오래 전부터 인디언들이 암 치료에 다른 약초와 같이 사용했던 약초이다. 바이러스를 죽이는 효능이 있는 강력한 항생 작용이 있다. 항생작용, 동맥경화증, 암, 당뇨병, 호흡기질환, 궤양, 방광염, 전립선염, 관절염, 알레르기, 각종 종양, 혈액순환 증진에 탁월하다. 시중에는 차(tea)로 많이 나와 있어 차로 마시면 되므로 복용이 용이하다. * 부쿠 (Buchu) (약초로 사용되는 부분 - 잎) 이 약초는 비뇨기 질환에 좋은 치료제 중 하나이다. 소변볼 때의 통증(배뇨 시), 방광의 충혈(방광이 무지룩하고 불편한 것, 방광 카타르), 그리고 부종 등에 대단히 좋은 치료제이며, 모든 비뇨기의 질환의 증상을 완화시키고 편안하게 한다. 전립선 비대증에도 편안하게 해주고, 방광염, 요도염, 전립선염, 신장염, 신장질환들에 좋고, 이뇨제, 땀을 내는 발한제로 쓰이며, 요도의 점막의 자극도 이완시켜 준다. * 일반적인 약초 사용법 1. 끓인 물 1컵에 1차스푼 (가루로 된 약제는 1/4 차스푼 - tsp)을 넣고 뚜껑을 닫은 후 15분 동안 놓아두며, 불에서 멀리 한다. 왜냐 하면 끓일 때 약초가 가진 효능을 파괴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만 걸러내어 하루에 3-4회 일주일간 혹은 계속 효능을 볼 때까지 사용할 수 있다. 2. 차를 만들 때는 반드시 유리 혹은 코닝웨어(Corning Ware)나 도자기를 사용한다. 하루 분(3-4컵)을 한꺼번에 만들어 걸러낸 후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였다가 데워서 마시거나 찬 것을 그대로 마실 수도 있다. 3. 만들어진 차를 하루에 3-4회 복용하되 식전 30분, 2시간 취침 전에 마신다. 4. 일반적인 잎이나 연한 줄기로 된 차는 끓일 필요가 없고 물을 끓여서 미리 차를 담아 준비된 유리병이나 도자기 병에 부어 15분 정도 우려낸 다음 걸러내고 식혀서 유리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한다. 5. 딱딱한 뿌리와 나무껍질 종류의 약제를 쓸 경우에는 1쿼터 (약 1,000cc)의 물에 4큰 스푼을 넣고 20~30분간 끓인 다음, 위의 방법대로 보관하고 사용한다. 6. 단순히 한 가지 약초만을 사용하기도 하고 2~4가지의 다른 약초들을 필요에 따라 혼합해 쓰기도 한다. 7. 말린 약초는 두껍고 색이 있는 그릇이나 병에 담고 뚜껑을 꼭 막아 건조하고 어두운 곳에 보관한다. 5.예배인가! 쇼인가! 1부-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1.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라 예배행위 예배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 중 첫 번째 요소가 “감탄(admiration)”이다. 예배하지 않고 감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감탄 없이 예배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감탄의 감정이 극대화되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대상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존경하지 않는 대상을 예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배를 이루는 두 번째 요소는 “존경(honor)”이다. 예배의 세 번째 요소는 “매혹(fascination)”이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의 예배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놀라움과 경의에 사로잡혀 “오직 하나님만이 소유하신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라고 외치게 된다.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거기에는 매혹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예배를 향해 열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예배의 네 번째 요소는 “사랑(love)”이다. 사실 이것은 맨 처음에 언급되었어야 했던 요소이다. 어떤 대상을 예배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이 무한히 커지면 결국 “숭모(adoration)”가 된다. 예배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연합을 추구한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가 숭모하는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는 적극적인 행위가 최고의 예배이다. 예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한 하나님, 즉 천지를 지으신 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의 모든 속성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무릎을 꿇고 그분을 숭모하며 예배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은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라고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원하시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주권적이시며, 수많은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땅히 낮아지고 겸손해야 한다. 다윗은 시편 45편에서 성육신의 하나님을 발견한다. 성육신의 하나님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소유한 하나님이시요,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한 분이시요, “때가 차” 태어나신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육신의 본질도 소유하신 분이시다. 성육신의 하나님은 빛을 발할 정도로 아름답고 멋지고 매력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이신 인간,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다윗은 “아름다운”, “위엄 있는”, “왕다운”, “진실한”, “의로운”, “온유한”, “사랑이 많은”, “기뻐하는”, “향기로운” 등의 수식어를 사용한다. 성육신의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엄한 표정의 제우스나 토르 같은 신이 아니다. 그분은 향기롭고 사랑이 많으시고 의롭고 친근한 하나님이시다. 동시에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그분의 원수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신다. 바로 이분이 우리가 숭모하는 하나님이시다. 2. 온전한 예배 우리의 삶이 온전한 예배여야 한다 예배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우리의 전인격을 다 바쳐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 신앙, 사랑, 순종, 충성, 고결한 행위와 삶, 우리는 이런 것들을 모두 번제로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만일 내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정성을 다해 최대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존재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수천 번 반복한다 할지라도, 당신이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우리의 뜻대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기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전부,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해야 한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가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만일 매일의 삶이 계속 예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도 참된 예배가 되지 못한다. 교회에서 기쁨에 찬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한 후, 월요일이나 화요일에는 일상적인 생활이나 사업상의 문제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다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반드시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만 기도와 예배가 아니다. 우리는 책상에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차를 운전하면서, 설거지하면서, 다림질하면서, 학교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생각까지 하나님의 성소가 되도록 단지 “행위”로 잘못을 범해야만 죄책감을 느껴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생각”만으로도 하나님과의 교제, 그분의 임재에 대한 느낌, 또한 영적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의 생각 안에 거한다. 내가 거할 수 있도록 너의 생각까지 성소가 되도록 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악의에 차고, 더럽고, 정욕 적이며 탐욕적인 생각, 그리고 교만한 생각 안에는 거하시지 않는다. 오직 온유하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친절하고 남들을 사랑하는 생각 안에만 거하신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소가 되도록 하자.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을 받음 하나님의 창조의 첫째 목적은 도덕적 존재를 영적으로, 또한 지적으로 준비시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신자 개개인이 활력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위로부터의 신생, 즉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개인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은 그분을 숭모하며 예배하는 데서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예배의 매력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배를 사모하고 갈망했던 사람들이 큰일을 이루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가 잠에서 깨어나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난 후 영적으로 새롭게 되어 부흥한 경우를 보라. 그 뒤에는 반드시 예배를 사모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가 진정한 예배 자들 가운데 있다면 육적이고 세상적인 종교 프로젝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을 먼저 우리는 육신의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아야 한다.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사람이 주를 위하여 일하면 그의 사역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우리가 전심으로 참 예배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예배를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참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태도, 즉 마음의 상태가 한결같을 때 가능하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예배의 완전성과 열기가 언제나 동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숭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참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능하다. 2부-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라! * 참 예배에 필요한 요소 1. 첫 번째 요소 - 신령과 진리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참 예배가 되려면 먼저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배는 그분의 속성과 부합해야 한다. 예배는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령님이 없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성령님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감동에 불을 끄고, 그분의 인도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겠다는 생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이단이다. “영성”은 예배의 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영성이 없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아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회심과 중생의 경험을 거치지 못한 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의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 구속과 관계없이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회심하지 않고서도,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또한 예배는 진리로 드려야 한다. 진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입각하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 사실 우리가 예배하려는 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없이는 그분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말씀의 올바른 지식 없이도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여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2. 두 번째 요소 -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 참 예배를 드리는 데 중요한 요소 중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다. 오늘 날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러저런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본래의 하나님의 모습 -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의롭게 살도록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있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모습 - 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과거 신앙의 위인들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다. 신뢰가 없으면 존경심도 생기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할 수도 없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굴복하고 바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예배는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될 것이다. 3. 세 번째 요소 - 사랑 영적 예배의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요소는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므로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것이며, 인간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기뻐하면서 그분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가! 그 사랑을 매일 매 순간 묵상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되고 끊임없이 그분께 예배드리고 싶어 할 것이다. 성 버나드, 성 프랜시스(St. Francis), 리처드 롤(Richard Rolle, 1295~1349. 영국 사람으로서 영어와 라틴어로 된 열 두 권의 성경 주석 및 성경 번역서를 남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미국의 신학자 및 철학자로서 ‘대 각성 운동’을 일으킴),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사무엘 러더퍼드 같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그리스도를 향한 미칠 것 같은 아름다운 사랑’은 오늘 날 찾아보기 힘들다. 종교의 본질과 진정한 예배는 관습적인 종교 행위나, 축제일 준수, 종교적 의식과 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연합에 있다. 아담의 타락으로 생긴 가장 큰 비극은 인간의 내적 성소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 자신이 거하실 곳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리고 이 성소에서 안식하며 인간과 깊은 도덕적 영적 교제를 나누려고 계획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놀라운 특권” 을 박탈당하고, 그곳에 혼자 거하게 되었다. 이 성소는 너무나 은밀한 곳이어서 어떤 다른 피조물도 침입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들어오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냥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초대할 때 들어오신다. 사랑으로 마음의 문을 열 때만 들어오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4. 네 번째 요소 - 경이 예배의 또 다른 요소는 “경이”이다. “예배는 초월적 경이이다. 예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경이이다” 라고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 영국의 평론가)은 말했다. 우리는 종종 예배드릴 때 하나님에 대하여 “즐거운 놀람”에 빠진다. 이런 예배는 성경의 이곳 저곳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브라함은 거룩한 경이감에 사로잡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모세는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얼굴을 가렸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을 보았을 때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몰랐다. 요한은 교회들 사이에 거니시는 예수님을 뵈었을 때 엎드려서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무한하신 능력의 신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렇게 위대한 신을 예배하는 특권을 감사하며 경이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 진정한 예배의 본질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그러나 우리만이 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갈망을 가지고 계신다. 그 갈망이란 하나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높이겠다고 영원히 결단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갈망이다. 그분은 이런 사람들을 땅과 바다의 모든 보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신다. 그분은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한 놀라운 인자하심을 보여 주신다. 그분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들과 동행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 내가 그분과 단둘이 만난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무리들 틈에 끼어 있다 할지라도 결국 나는 혼자이고, 나 혼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신비는 언제나 우리의 이성을 무색하게 만들고 우리를 놀라게 한다. 형언할 수 없는 신비 앞에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 기독교 신앙에서 언제나 신비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주의적 이성주의자들이 되어, 모든 것들을 이성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자연의 도처에 신비가 도사리고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에도 무수한 신비가 숨어있다. 가장 지혜롭고 정직한 사람이란 그가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사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본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현인인 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와 견해를 조금 달리 하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본래 인간은 무엇인가를 높이고 그것에 감탄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감탄하여 넋을 잃을 지경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에 감탄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에도 감탄하지 않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것에 감탄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나는 하나님이다. 나를 보고 감탄하고 열광하라”고 말씀하신다. 3부-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와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수천 명의 신자들이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 예배만을 받으신다. 참 예배가 아닌 예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그 중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많다는 것이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수백만의 교양 있는 크리스천들이 단지 교회의 전통에 따라 관습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그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하지 못한다. 은밀히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교묘한 방법을 써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참 예배가 아니다. 우리의 삶의 각 부분들을 둘로 나누어 한 부분은 예배를 드리고 다른 부분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참 예배가 아니다. 또한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린다거나, 위험한 폭풍이 불어 닥치거나 혹은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을 때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참 예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에게 찾아와 마치 거울에 반사되듯이 다시 그분에게 되돌아간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내가 교회에 가서 즐겁게 하나님을 예배했다 할지라도 월요일에 그분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즐거운 노래로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했다 할지라도 월요일과 화요일에 사업상의 문제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다면 참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 내 안에 조금도 없을 때에 비로소 그분은 나의 예배를 온전히 기뻐하신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삶으로는 그분을 예배하지 않는 일을 쉽게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의 입술도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의 종류 1. 가인의 예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예배에는 세 가지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 함께 연구하여 보자. A.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분이 주권적이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본질과 품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B. 가인은 그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는 그와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없이도 그분이 자기를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태평하게 믿었다. 그는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C. 가인은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겼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속죄의 필요성을 늘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2. 공허한 예배 오늘 날 수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몹시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예배드리기 위한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도 한 가지 중요한 결핍 요소를 들라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충분하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정도로 충분히 아름답고 웅장하다. 예복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 음악, 시, 그림, 웅변술, 엄숙한 말투, 좋은 음향 시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예배 자들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는다. 그러나 종종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감동이 없을 때가 있다. 목회자와 회중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경건의 모양은 가득하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예배, 곧 마음의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 수반되어야 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공허한 예배, 외양의 경건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마음의 영적인 갈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인위적인 예배, 하나님 앞에 겸손한 심령으로 진정한 굴복을 하도록 인도하지 못하는 영적이지 못한 예배 등은 무의미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니다. 3. 사마리아인의 예배 이것은 이단적인 예배를 뜻한다. 이단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진리를 전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들은 거부하는 편협한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말씀을 따라 올바른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깨닫게 하시는 진리를 아무리 육신의 생각으로 따르기 어렵다 해도 겸손하게 수용하며 그 진리에 굴복해야 한다. 진리에 입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치 옛날 성경의 사마리아인들이 자신의 성전을 따로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예배를 드린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니다. 4. 자연 예배 이것은 장엄한 자연을 즐기며 명상하는 것이다. 자연 숭배자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아주 많다. 그들은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을 미에 집중시킨다. 이런 사람들은 몰아의 경지를 예배라고 착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음악을 예배로 착각한다. 그리하여 마음을 고양시키고 영혼을 거의 몰아의 경지에 몰아넣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예배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예배에는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예배드리지 않고 단지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면서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일보다 예배가 앞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이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이 복음에 따른 실천적 삶을 소홀히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곧 거룩한 봉사의 책무를 강하게 느껴서 봉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순종과 선행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나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제아무리 무해하게 보일지라도 나의 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과 영원한 것들에 대해 묵상해야 할 시간에 나의 주의를 다른 데로 이끄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이상은 우리가 최대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부분이 내 존재 안에 있으면, 내 존재 안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자. 4부-온전한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계단들과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살펴보자. 1. 영혼의 눈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영적인 집중력 하나님께 가납되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복잡한 세상에서 은밀한 장소로 조용히 물러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곳이 당신의 침실이라도 좋다. 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당신을 감싼다고 느낄 때까지 그곳에 조용히 앉아 있어라. 불쾌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것을 듣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을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그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라.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지 말라. 하나님께 당신을 드려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당신 자신이 되어라. 당신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되지 말라. 순간순간 마음속으로 기도하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그러면 얼마 후 당신은 심지어 일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겸손하고, 진실하고, 어린애처럼 정직해지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마음이 산만한 상태 그대로 오래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라. 정처 없이 방황하는 수많은 생각을 집으로 불러들여라. 영혼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영적인 집중력을 기르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성경을 혼자 묵상하는 기술을 연습하자. 성경을 펴서 책상 위에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라! 그러면 성경말씀이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당신을 도와주실 것이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아버지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가르치소서” 라고 믿음으로 고백하라. 영성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성을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는 일에 매우 소홀하다. 만일 영적이고 경건한 일에 착념하거나 실천하는 일에 게으른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처럼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 하는 어떤 전문 피아니스트가 있다면, 또 그처럼 나태한 야구 선수가 있다면, 그들은 음악계와 구단을 떠나야 할 것이다. 만일 거룩해지는 방법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평신도만큼 과학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는 결코 과학적인 난문제를 풀지 못할 것이다. 교회 신자들처럼 훈련이 안된 유약한 병사를 가진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적국의 공격에 곧바로 무릎을 꿇을 것이다.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성공을 하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일들을 뿌리치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홀로 있는 일’과 ‘침묵의 열매를 맺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야 한다. 시끄럽고 분주한 하루 중 어렵게 마련한 ‘묵상의 시간’은 낭비되기 쉽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요청된다. 우리의 묵상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과 대화하면서 묵상의 시간을 전부 날려버릴 수도 있다. 자신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편해질지는 몰라도 영적인 성장을 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을 늘 묵상해야 한다. 순수한 영성에 이르는 데 있어서 이것 말고 다른 지름길은 없다. 순순한 영성에 이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길을 가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지금까지 소홀하게 취급된 진리를 다시 찾아서 그것들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은 기도와 깊은 묵상이다. 우리가 기도와 깊은 묵상에 잠길 때, 마치 안개처럼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진 세상적인 생각에서 그 진리를 분리해내어 지속적으로 굳게 붙들 수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눈길과 마주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이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신다고 증거한다. 우리 영혼의 눈이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눈길이 우리의 눈길과 마주칠 때 바로 이 땅에서 천국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교회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서 있든지 무릎을 꿇고 있든지 임종의 고통 가운데 있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비밀을 발견한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영혼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꾸준히 수행한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무엇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일들에 관여해야 할 상황이 되어 그들이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 안에서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은밀한 교제가 진행된다. 그러다가 잠시라도 그들이 눈앞의 일에서 해방되면 그들은 곧바로 주의를 하나님께로 향한다. 성경말씀을 오래 묵상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이며, 교회 출석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해줄 것이다. 봉사, 일 ,활동은 모두 선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의 뿌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적 습관이다. 이런 내적 관조의 훈련을 거듭하면, 우리 ‘육신의 눈’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우리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며, 그리하여 결국 우리에게는 ‘육신의 눈’이라는 시각체계 외에 ‘영혼의 눈’이라는 새로운 시각체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훈련하겠다는 의지의 헌신을 늘 견고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습관이 거듭하다 보면 얼마 후에는 더 이상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영적인 반사작용’이 생겨나 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속에 들을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반드시 하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현대의 종교는 시끄러운 소리, 지속적인 활동, 자기주장이 강한 목소리, 그리고 대형화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만든다는 해괴한 이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힘과 안전이 시끄러운 소리에 있지 않고, 고요함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체험하라 하나님의 임재의 중요성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면전에 있으면 우리는 그분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분에 대한 감탄이 점점 더 커지면 결국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거 영적 거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고 그 체험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 갔다. 캄캄한 어둠의 공포가 아브라함에게 닥쳤을 때처럼, 혹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뵙기를 두려워 하여 모세가 그의 얼굴을 숨겼을 때처럼,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얼마 후 그 두려움은 즐거운 외경심으로 바뀌어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즐겁고 경건한 감정으로 변화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들의 변화된 삶을 설명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근거는 없다.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들처럼 살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토록 큰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일했고,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느낌이 너무나 황홀하다고 우리에게 증거했고 우리도 이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체험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기독교를 공격해도, 적이 아무리 우리를 흔들어대도 우리는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는다. 자기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반대에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그들의 체험은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기에 다른 어떤 변호나 증거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참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본질은 하나님을 정말로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외의 다른 것들은 부수적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종교는 실재의 그림자이며, 다른 사람의 체험을 옮기는 싸구려 모방일 뿐이다.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교회 안에서 살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영혼이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고 오직 신학과 논리가 합성해낸 신만을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중요하다는 강력한 감정이 신자를 순식간에 사로잡을 수 있다. 이 감정은 그의 삶과 사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의 모든 판단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견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분의 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시끄럽고 분주한 활동을 전부 그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그분은 기다리신다. 그런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성삼위 하나님께 집중시킬 수 있다. 성소 속의 진리 - 하나님의 면전으로 구약에 나오는 성소는, 죄악의 황무지를 떠나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영혼의 내적 여행을 잘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된다. 하나님께 돌아온 죄인은 성소의 바깥뜰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놋으로 된 번제단에서 피의 제물을 드리고 가까이 있는 물두멍에서 자신을 씻는다. 그런 다음 그는 휘장을 통하여 성소로 들어간다. 성소 안에는 자연광이 없으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정금등대가 부드러운 빛을 비추고 있다. 또한 성소 안에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진설병과 끊임없는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단이 있다. 성소까지 들어간 예배자는 이미 많은 것들을 누렸으나, 그래도 아직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또 다른 휘장이 있는데, 이 휘장을 통해서 지성소로 들어가야만 속죄소 위에서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그 피를 드렸다.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찢어진 휘장이 바로 이 두 번째 휘장이다. 성경기자에 따르면, 이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다고 한다. 우리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면전 앞에 나아가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현시(manifestation), 즉 그분의 임재의’나타남’은 그분의 임재와는 다르다. 임재의 현시 없이 임재가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기에 계실 수 있다. 한편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의식할 때에만 그분은 현시하신다.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를 보여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과 순종 가운데 성령님에게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하나님의 임재의 얼굴빛으로 밝게 빛나는 삶을 구분하는 것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현시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된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임재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 온 우주는 그분의 생명으로 가득하다. 그분은 이상하고 이질적인 신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죄악에 빠진 인류를 사랑으로 감싸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근한 아버지이시다. 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서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신다. 우리에게 접근해 오시는 그분에게 반응하기만 하면 그분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 믿음과 사랑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 반응하는 우리의 수용성이 더욱 온전해질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욱 많이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현재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분의 임재를 단지 이론으로만 알고 있다. 3.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탈 때까지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배우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자들과 교제하시는데,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편안하게 이루어질 때, 우리의 영혼은 안식과 치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그분 앞에서 완전히 의롭게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우리의 노력을 그분은 즉시 알아주시며,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우리의 동기가 신실하다면 그분은 우리를 받아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우주의 근원이 되는 분을 찾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빛을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이 이미 그에게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님께 직접 받은 확신으로 기쁨에 찬 삶을 살 것이다. 4.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라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교회라면 사교클럽, 뜨개질 모임, 골프나 조기 축구회 같은 것만 제공하는 교회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친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갈망했는지 알 것이다. 아브라함과 바울과 우리의 큰 차이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는 주님을 다시 찾지 않는다.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그 대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라. 우리는 우리의 성품과 생각이 항상 온전히 하나님께 머물고, 그리하여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 내면이 꽉 찰 때까지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말씀을, 마음을 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쉬지 말고 읽고 명상하라. 그분의 능력이 그대를 가득 채울 때까지 그렇게 하라. 5.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하라 감탄의 단계에 올라서지 못하는 예배는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배 자가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평안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그는 아직 어린애일 뿐이다. 우리의 예배가 감사에서 감탄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마음이’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그분에게 가서 닿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있는 복된 사람들이 가지는 이타적인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될 것이다. 경외심은 아름다운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경외심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잠깐이라도 본 사람들은 결코 불경스러운 마음을 갖지 않게 될 것이며, 자랑과 교만이 없어지고 경외심이 넘쳐 하나님을 숭모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 무릎을 꿇을 때, 인간의 말이나 언어의 표현이 무색해짐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 경외스러운 순간에 예배자는 완전히 무력해져서 오로지 “오!”라고 소리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오!”라고 소리칠 수 있으려면 조심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소위 ‘평안’을 전한다는 선지자들과 ‘안전’을 판매하는 세일즈맨들에게 빠지거나, ‘복음주의적 휴머니즘’으로 전락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적 휴머니즘’은 영적 문제에 대한 고민도, 깊은 묵상이 주는 평안도 모른다. 진실성이 없는 듯한 말로 유창하게 기도하는 습관에 빠지다보면 대개 우리의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흐르기 쉽다.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민에 찬 ‘진지한 기도’를 드리는 대신, 기도제목이나 예의바른 감사의 말을 차분히 나열하는 식의 습관에 빠져있다면,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그 다음 단계는 대개 영적 침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알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고, 그분의 성품을 무한히 신뢰하게 되고, 그분의 위대하심 때문에 감탄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면, 우리는 저절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숭모하게 될 것이다. 5부-종교적 쇼를 중단하라! 오늘날 기독교 안에 진정한 예배의 경험자들이 감소되어 가고 명목상의 말뿐인 적당하고 편안한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자, 교회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자, 예배에서 사라진 성령의 역사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소위 ‘복음주의적 예배 형식’인 ‘축제교회’의 예배 형태들이 기독교를 침투하게 되었다. 지금 전 세계 수백만의 복음주의자들은 축제예배 형식인 ‘종교적인 쇼’, 연예오락에 몰두해 있다. 그들은 신나는 빠른 템포의 음악과 감정을 자극하는 낭만주의적인 분위기의 노래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 성령의 조용하고 엄숙한 임재 대신에,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음악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취하게 하여 신자들을 기만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연예오락이 그리스도 교회를 온통 타락시켰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것이 이단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종교적 쇼에는 악취가 난다. 종교적 쇼의 진행자들이 성소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께 이상한 불을 드리는 위험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종교적 쇼는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것은 기도와 성령님의 감동을 대신하려는 가련한 시도에 불과하다. 그들의 그런 예배방식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교회 안에 들어 온 연예오락 오늘 날에는 연예오락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연예오락 없는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날마다 헤로인을 맞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연예인이나 기타 심리적 중독이 주는 위안을 얻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여러 세기 동안 교회는 온갖 형태의 세상적 연예오락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견지해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연예오락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예오락은 우리의 시간을 빼앗는 도둑이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양심의 소리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요, 도덕적인 책임으로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막는 교묘한 수단이었다. 이런 교회의 태도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교회는 점점 세상의 비판에 염증을 내며 세상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지금 ‘연예오락’이라는 큰 신(神)을 이길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그와 연합하여 그의 힘을 이용하는 편이 더 낫다고 잠정 결론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적 연예오락을 제공하는 데 수백만 달러의 돈을 쏟아 붓는 놀랍고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적 연예오락이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들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여러 곳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많은 교회가 삼류 극장과 유사해진 것이다. 거기서 삼류 제작자들이 저급한 작품을 퍼뜨리고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비행(非行)을 변호하기 위해 성경 본문까지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예오락이라는 큰 신이 그의 추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은 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본래 어린아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오늘 날 ‘성장이 더딘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부끄러운 기독교인들이 자꾸 기독교가 재미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희한한 단체들이 생겨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와 연예오락을 혼합하겠다는 목적 하나로 설립되고 존재하는 단체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연예오락을 받아들인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성도들이 소중히 여겼던 하나님과의 관계, 진정한 예배와 경건의 훈련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것은 너무 진부하고 느리다. 그들은 화려한 매력과 빠른 극적인 활동을 원한다. 그들은 성경을 한 장 읽고 짧게 기도한 다음 황급히 바깥으로 나간다. 왜냐하면 또 다른 집회에 가거나 아니면 최근 먼 곳에서 돌아왔다는 종교적 모험가의 스릴 넘치는 간증을 듣고 자기 내면의 깊은 영적인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이다. 이런 얄팍한 신앙의 비극적인 결과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깊이 없는 사랑, 속 빈 신앙관, 재미에 치우치는 신앙 집회, 예배에 들여 온 세속적인 음악, 축제식 예배 형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종교적인 형식에 의지하려는 태도, 동호회 모임과 같은 친교 활동, 세상적 판촉 활동의 도입, 인간의 열정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오해, 이런 것들이 바로 그런 비극적 결과들이다. 음악과 쇼 복음주의적인 교회 어디서나 음란한 이 시대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집회에서 부르는 많은 음악들에서도 성령님의 감화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욱 더 지배적이다. 이미 오래 전에 기독교 음악은 ‘왜곡되고 약해진 신앙’의 희생물이 되었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참는 것이 ‘사랑’이라는 잘못된 생각은 우리의 찬송가와 기독교 문학을 망쳤다. 과거 나이트클럽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댄스 리듬이 소위 복음성가라고 불리는 곡들에 들어 있으며, 그런 노래의 곡이나 가사는 욕망을 자극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노래 속에서 그리스도를 모신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그분에게 나타내는 친밀감은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경우가 많으며, 또 그것은 그분을 숭모하는 성도의 경외스러운 친밀감이 아니라, 육욕적인 연인의 무례한 친밀감을 표시한 듯한 인상을 준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너무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영화관에서도 종교영화를 볼 수 있고, 라디오나 댄스파티에서도 기독교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기독교는 또 하나의 오락이 되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의 능력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죄의 깨달음과 회개와 경건한 슬픔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보다 자신과 육신의 행복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행복감을 얻지 못할 경우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행복해지려고 매우 애를 쓴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종교적 크리스천 로큰롤(rock-and-roll)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에 호소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리듬과 화음과 곡조로 된 복음성가들을 부르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무용음악에 쓰이는 그 많은 타악기들과 드럼과 전자기타들과 쇼와 영화에서나 사용됨직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부추겨 축하해 주고, 분위기를 북돋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쁨으로 넘치는 사람은 다른 것은 아예 찾지 않는 법이다. 쾌활하고 자신감에 차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는 그다지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경축의 종을 울리는 일을 좋아하고 마치 게임 쇼의 진행자처럼 활력이 넘친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세상의 나이트클럽에 마음 놓고 갈 수 없어서 교회를 나이트클럽처럼 활용하는 것뿐이다. 이제까지 기독교의 예배의 질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온 반면, 즐거움을 얻기 위한 종교적 연예오락은 계속 번성해 왔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애쓴다. 크리스천들은 성령님의 술을 즐길 수 없을 때 육신의 술을 찾는다. 지난 25년 동안 보수적 크리스천들이 그랬다. 기쁨이 없고 메말라 있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오락거리에서 기쁨의 단물을 짜내려고 애썼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종교적인 기쁨이란 복음성가를 대중가요처럼 부르는 것이었다. 죄악된 쾌락들 오늘날은 경건한 예배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며 또 신도들에게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참 행복의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먹고 마시고 요란스레 행사를 치러야만 행복을 느끼는 체질로 변하고 말았다. 복음주의적 교회는 이런 체질을 바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성령님이 자기에게 반드시 필요한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님의 불이 아닌 다른 불 옆에 서서 불을 쬐며 따뜻하게 기운을 북돋우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더욱 잘못된 것은, 많은 출판업자들과 음반 제작자들이 그런 방법을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기독교 소설들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성(性)을 이용한다. 그런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만일 낭만과 기독교를 결합시켜서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면 순수 기독교 소설을 읽지 않을 보통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읽고 복음에 접하게 될 것이라는 얄팍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기독교 로맨스 소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건전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육욕적 충동과 성령님의 깊고 감미로운 감동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성애, 즉 에로스가 영광의 주님을 섬기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광고에 관능적인 장면을 사용하는 종교 영화는 그리스도에 완전히 역행한다. 오직 영적으로 눈먼 사람만이 그런 영화에 현혹될 것이다. 죄가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 준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 하나는 우리의 올바른 감정이 질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웃기지도 않는 것을 보고 웃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들에서 쾌락을 느끼며, 정상적으로는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기뻐한다. 참 성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죄악된 쾌락에 대한 저항’은 다른 말로 ‘인간 감정의 타락에 대한 항거’이다. 쇠퇴해가는 예배의 질과 기독교 신앙 오늘날 교회는 도처에서 출현하고 있는 아마추어들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다. 훈련받지 못했고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영적이지 않은 야심에 찬 수다쟁이가 신앙의 길로 돌아선 것처럼 행세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강사료를 지불하고 무대에 세워 그를 도우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에게 현혹되는 사람들은 참 예배자가 아니다. 참 예배자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종교 프로젝트에 빠지지 않는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영화관 다음으로 연예오락성이 강한 장소를 찾으라면 교회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교회에서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지도적인 위치에서 일한다. 그러다 보니 성령님의 은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식되거나 사용되지 못한다. 성령님이 개입하지 않으시고 오직 인간의 재능만으로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종교적인 활동에 불과하다. 이런 일이 계속될 경우 신자들은 그 두렵고 큰 날이 도래하기까지 거의 개선되지 않은 신앙을 품은 채 생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날에는 자가발전하여 사용한 재능은 전부 불에 타 버리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 행한 일들만 남을 것이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공연 자들이 공연하고 관객이 돈을 지불하는 종교 극장이 아니다. 교회는 구속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다. 하나님에게 인도함을 받아 그리스도께 나아온 그들은 그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들이다. 오늘날 아주 많은 교회 건물과 종교 기관의 건물들이 크게 건축되고 있다. 그리고 교회 신자의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앞지른다. 갖가지 종교가 사회의 각계각층과 각 연령층의 사람들 중에서 개종자를 얻으려고 애쓴다. 특히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을 개종시키려고 열성이다. 그들은 확성기를 장치한 선전트럭, 라디오, 텔레비전, 전철광고, 광고 게시판, 네온사인, 음료수병과 풍선을 이용한 광고 등을 활용한다. 또 그들은 드라마, 마술사, 훈련된 말과 개와 카나리아, 복화술을 하는 사람 등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려고 애쓴다. 또한 수많은 동업자 조합, 상공인 클럽, 비즈니스맨 협회에서도 기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과 교제를 제공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나선다. 직업적인 연예인들의 레퍼토리에 기독교적인 노래가 포함되는가 하면, 나이트클럽의 연예인, 프로 권투선수, 유명 영화배우, 심지어 감옥에 갇힌 갱도 기독교를 퍼뜨리는 데 앞장선다. 그러나 이 갱은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아직까지 애통하거나 회개하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 놀랍게도 기독교는 이제 큰 사업이 되어 버렸다.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특히 젊은이들에게) 진지한 교육 프로그램은 최대한 적게 제공하고 연예오락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 모임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런 현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싫증이 났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종교영화, 게임, 기분전환용 오락 같은 ‘막대사탕’을 주지 않는다면 집회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교회 분위기 자체가 바뀌게 되었고, 심지어 ‘황금 송아지’를 모시느라 교회의 건축양식까지 바꾸기도 한다. 우리의 신조는 정통에서 이탈한 변종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신앙 관습은 이단에 빠졌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막대사탕 작전은 우리의 사고에 너무나 깊이 파고 들어왔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현상으로 피해를 보면서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교훈이 아니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황금송아지를 섬기는 현대 기독교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면, 황금송아지 숭배자들은 “그래도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이끌지 않느냐?”라고 대답한다. 도대체 그들을 어디로 이끈다는 말인가? 참 제자의 길로?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자기부정으로? 세상을 거부하는 믿음으로? 거룩한 삶과 성품으로? 세상의 좋은 것들에 초연해지는 성숙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헌신으로? 유감스럽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노(No)’이다. 요즈음처럼 진정한 영적 예배가 낮은 수준에 처했던 적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목회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박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와 교회는 질적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양적 팽창을 추구하고, 정상적인 성장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과장을 통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구성된 대중은 소리 높여 양적 팽창을 주장하며, 영원하고 충실한 가치를 추구하는 목사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한다. 목회자의 느린 방법을 비웃으며 빠른 결과와 인기 영합만을 요구하는 ‘잘못 배운’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잔인하게 압력을 가한다. 그들은 스릴 넘치는 일에 목말라 있다. 그러면서도 감히 나이트클럽에는 가지 못하겠고 그런 것들을 도리어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연예 오락과 흥미거리에 따라서 운영되는 교회는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참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얄팍한 자극을 갈망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시이다. 주일마다 사이비 기독교의 자극으로 짜릿함을 느껴보려는 ‘세례받은 속물집단’은 참신자의 무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말로는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해도 그들은 참 그리스도인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 신실한 목회자는 세속적인 방식을 교회 예배에 도입하여서라도 교인 수를 늘리고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든가, 아니면 점점 인기가 없어지는 참 예배의 경건한 방식을 그대로 따름으로 양적인 성장을 포기하든가 둘 중에 결정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목회자의 책임도 되지만, 철없는 교인들의 영적 수준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현대 목회자들의 딜레마이다. 6부-재미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지금은 새로운 종교개혁이 요구되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무책임하고 연예오락에 현혹되고 이교화(異敎化)된 사이비 기독교를 완전히 끊어버려야 한다. “즐겁게 지내기 위해 죄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너무 기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재미있는 것들을 붙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신자들은 완전히 속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운 지금,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종교적 오락거리로 골몰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놀랍고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은 잃어버린 경건을 되찾아야 할 때이다. 1. 재미를 위한 기독교 오랫동안 미국에서 기독교는 가장 ‘재미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섬기면서도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즐기는 것보다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다. 신앙생활을 재미있게 하자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질문한다. 건전한 복음주의 교회들조차 그런 의견에 동조한다. 이런 사람들이 전하는 기독교는 ‘재미를 위한 기독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것이지, 단지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또 하나의 다른 연예오락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잘못되었다. 과거 청교도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은 무수한 세상의 오락거리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회심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세상의 오락거리를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후 기독교계에는 서서히 변화가 나타났다. 보수적 신앙인들조차 대문을 열고 세상의 오락거리를 하나씩 받아들여서 그것들에 성수(聖水)를 뿌렸고, 그 결과 이제 누구도 세상의 오락거리를 반대하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더 나아가 그것들을 권장한다. 이제 세상의 오락거리는 우리 신앙과 삶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2. 활동 중독증 요즈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 둔감하고 열기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너무나 중요한 것인데, 바로 이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다른 일들을 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열성적이고 의욕이 넘친다는 점이다. 우리는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한다. 교회 안의 여러 부서 간에 운동 시합을 하고, 교회 친목회를 가진 다음 기도회를 열고, 주말에 캠핑을 가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성경퀴즈대회를 열고, 교회소풍을 가고, 건축헌금 모금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고, 목회자 조찬 모임도 갖는다. 신자들은 아주 신바람이 나서 이런 일들을 한다. 그러다가 개개인의 경건을 챙겨야 하는 성스러운 경내로 들어오면 그들의 열의는 갑자기 식어버리고 만다. 영적으로 냉담한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우울한 분위기를 극복하려고 자꾸 활동을 늘리게 된다. 우리는 우울하고 침체된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이런저런 활동에 몰입하거나 종교적 놀이에 의지하지만, 실상 이런 방법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영적인 곤고함과 비참함을 애통해하며 하나님 앞에 주저앉아 울어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종교적 오락과 활동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애쓴다. 영혼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무엇이 보이게 마련이다. 우리를 만드신 전능하고 크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찾게 마련이다. 지금 교회는 우리에게 평안을 공급한다. 마치 비누를 팔듯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간판으로 내걸고 사람들에게 평안을 사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 교회는 파티를 열고, 삼삼오오 모여서 커피를 즐기고, 놀이를 곁들인 교제를 나누면서 아주 풍성한 평안을 즐긴다. 그러나 교회는 진정한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활동 중독증은 기독교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그다지 유익이 되지 못한다. 교회를 둘러보면 절반만 거룩하게 된 육적인 사람들의 무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성경보다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물건에 대해서, 성령님보다는 연애소설과 연속극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우리는 단순한 신앙적 활동과 도덕적 행위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신앙의 표피만 건드리고 본질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통속적인 활동이 너무 많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종교적 활동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인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실상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영적인 진보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익한 활동에서 돌이켜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이루려고 애쓰는 도중에도 우리는 종종 ‘일의 주님’과의 접촉을 잃고 만다. 3. 방향을 잃은 교회 ‘방향 부재’는 많은 교회 활동이 비극적 실패를 가져온 원인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일을 맡기셨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남녀들이 교회에는 너무 많다. 방향을 잡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고 그럴싸한 것들’이라면 무조건 발 벗고 나서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도덕적인 능력이나 영적인 열정 없이 단지 시끄럽고 무모하게 종교적 활동에 몰입하는 이상하고 모순된 현상이 일어난다. 만일 어떤 교회가 진정 순수하고 성령 충만한 교회라면, 만일 어떤 교회가 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지도를 받고 인도된다면, 그 교회에서는 순수하고 신령한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인정받고 존경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사람들은 ‘경건’을 더 이상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종교 활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건하고 신령한 사람들은 점차 잊혀간다. 그 대신, 목소리 크고 자기주장을 잘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인기를 누리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교회를 끌고 가므로 교회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4. 세상의 방법인가, 하나님의 방법인가?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역사적 안목이 없기 때문에, 성령님이 어떻게 일해 오셨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방법에 의지한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사용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성경의 방법에 완전히 모순되고 역행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대기업을 운영하는 방법, 연예업(show business)을 하는 방법, 메디슨 애비뉴의 광고업자들이 쓰는 방법들이다. 우리는 역사적 안목과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성령님의 활동과 자신의 인간적 열심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 결과, 성경의 방법은 밀려나고 사라진다. 교회의 일, 전도, 세계 선교와 같은 거룩한 일을 대기업 운영 방법, 연예업 운영방법, 메디슨 애비뉴의 광고업자의 방법으로 하려는 것은 바벨론 포로 상태에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며,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드는 일이다. 지금 교회에는 뚫린 구멍으로 세상의 방법이 흘러들고 있다. 5.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는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 쾌락, 방법, 가치, 야망, 악한 것들, 관습에서 떠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의 윤리와 세상의 윤리는 첨예하게 배치된다. 그것들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세상적인 삶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들고, 세상을 흉내 내는 것은 영적 성장을 가로 막는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불경스러운 것들이 교회와 예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우리는 이상한 불이 여호와의 제단 위에 드려지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이상한 희생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이상한 신(神)들이 우리의 성소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어리석고 천박한 것들을 좇는 형태가 복음적 신앙을 잠식해가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받아들이는 영적 수용성도 없고, 그분을 갈망하지도 않고, 성결을 사모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내면적 굶주림도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 심판, 은혜, 구원 같은 무거운 얘기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늘 상냥하고 즐겁기만 하다. 모든 교회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탁월하다 할지라도 그 방법이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주의적 교회는 ‘허영의 축제’(vanity fair)로 변해 버렸다. 교회여,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재미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진정한 예배를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진정으로 당신을 사모하고, 마음 깊이에서부터 그분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다 바쳐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다. 당신은 진정한 예배자인가, 아니면 마음이 아닌 겉으로 만의 찬양을 부르는 거짓 예배자인가? 당신이 드리는 것은 참 예배인가, 아니면 쇼인가? 7부-손 흔들며 찬양하기 전에 생각해 봅시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 있는 기독교 교회내의 공통적인 고민이 있는데 그것은 매년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 있는 많은 기독교회들에서 청년들이 신앙에 흥미를 잃고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들과 목사들은 축제식 예배 형식을 교회 안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축제식 예배 형식은 원래 천주교회에서 시작하였는데, 오순절파(순복음) 교회들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고, 지금은 거의 모든 기독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배 형식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떠나간 교인들에게 영적인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신앙부흥을 일으키려는 노력 대신에, 교인들이 떠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흥미 위주로, 또한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축제식 예배 형식을 교회에 받아들였다. * 교회 안의 두 부류 축제식 예배 형식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언급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복음을 전파해야 할까? 아니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할까?” 우리는 신실한 교인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재, 교회 안에는 이 질문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한 부류는 복음과 진리에 초점을 맞춰서 그것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면에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올바로 세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교육시키는 일에 강조점을 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한 부류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교회를 빨리 성장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일하고 있다. 교회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론에 대하여 골몰하게 되는데, 그들은 교인 수가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진리와 원칙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 수를 늘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교회에 축제 예배 형식을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눈을 감고 손을 흔들며 복음 성가를 부름으로써,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 하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가 바로 축제식 예배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 방식은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성령의 음성을 소홀히 여기게 이끌어 간다. 왜냐하면 일단 감정적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러한 교회들은 더 이상 교인들의 죄의 문제와 회개에 대한 촉구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인들의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깨뜨리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지만, 사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하여 접근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개, 감정적 예배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가?”, 또는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지금은 축제의 기분에 들뜰 때가 아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전에서 손을 들고 몸을 흔들면서 복음 성가를 부를 때가 아니다. 지금은 드럼과 현란한 조명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해서는 안 될 때이다. 지금은 예수께서 다시 재림하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는 때로서, 재림을 위해 준비하며 자신의 죄와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살아야 할 때이다. 거룩한 천사들마저 하나님 앞에서는 날개로 얼굴과 몸을 가리며 깊은 경외심을 나타내는데, 어찌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경박한 음악과 몸짓과 손동작을 할 수 있을까? 축제식 예배를 받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 보고 경건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 오순절파식 예배와 방언 오순절 주의(Pentecostalism)의 흔들어 대는 손과 몸, 극히 감정적인 설교들, 크고 쿵작거리는 음악, 실신하여 쓰러짐, 방언을 말함, 기적적인 치료들을 우리들은 주위에서 많이 보아 왔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까? 방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본(A. D. Bohn) 목사님은 자신이 시카고에서 어떤 날 저녁 한 오순절 교회의 장막 집회에 참석해서 한 부인이 중국어로 방언을 하는 것을 들었고, 자신이 아는 한 중국인 세탁업자가 청중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다. 후에 본 목사님이 자신의 세탁물을 찾으러 그 중국인 세탁업자가 하는 세탁소에 가서 말했다. “당신이 전에 그 장막 집회에서 중국 방언을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하고 묻자, 그 중국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며, “재미없어요.”라고 했다. “왜요? 그 부인이 당신네 나라말로 방언한다고 하던데요.” 그 중국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중국말로 하는 것은 맞았는데, 얼마나 욕지거리를 하는지.” 하와이 섬 북부 연안에 살고 있던 한 젊은 포르투갈 여인이 자기네 교회에서 드리는 의식들에 싫증이 나서 오순절 교회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 교회 교인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그녀는 방언까지 말하게 되었다. 열렬한 선교정신으로 그녀는 한 필리핀 사람들의 야영회에 참석하여 포르투갈 말이 섞인 엉터리 영어로 필리핀 사람들에게 증거하려 했으나 언어 소통이 어려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좌절한 그녀는 잠시 멈춰서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고, 기적적으로 그녀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당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든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든지, 그녀를 흘겨보든지 하였다. 놀란 그녀는 방언을 멈추고 엉터리 영어로 물었다.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왜 여러분들은 나 말 하는 것 싫어합니까? 나, 일로카노(Ilocano) 말 하는 겁니다. 아닙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일로카노 말은 잘 하는데, 당신이 하는 말은 순전히 입에 담지 못할 소리들이란 말이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일로카노 말로 음담패설을 토해냈다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성경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결국은 방언에 대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성경을 함께 공부한 목사님에게 그녀가 방언을 말한 후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었었던 것을 종종 두려워했다고 덧붙였다. 사단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남은 무리가 준비되고 늦은 비 성령의 운동(요한계시록 18장에 나타난 예언)과 큰 부흥이 가까이 이른 것을 알고, 미리 오순절 식의 굉장한 거짓 부흥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자기의 거짓 부흥이 먼저 있도록 고안한다. 그는 이 마지막 큰 성령의 운동(큰 성령의 운동과 외침으로 각 종파와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함께 모여 마지막 남은 무리를 이루게 됨)을 방해하려고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꾸며 냄으로써 이를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속이는 권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내린 것처럼, 소위 큰 부흥이 일어난 듯이 일반에게 생각되도록 하는 일들이 나타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볼 때에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신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놀랄만한 일을 행하신다고 기뻐 날뛸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사단의 기만적인 권력 아래 모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유의하라. 거기에는 마치 큰 종교적 부흥이 있는 것처럼 나타내질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볼 때에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영, 즉 사단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서 놀랄만한 일을 행하신다는 생각으로 미혹될 것이다. 거짓 부흥과 참 부흥이 우리가 곧 통과해야만 할 두 가지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가 첫 번째 것인 거짓 부흥과 그 다음 것인 참 부흥을 구분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거짓 부흥과 진짜 부흥에 대해 연구해 보자. * 진짜 부흥 모든 진짜 부흥들에서 남녀들은 죄를 깊이 자각하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낌으로 자백과 회개로 용서를 발견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그들은 믿고 침례를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애를 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그들은 전에 행하던 그들의 정욕을 따라 자기 자신들을 꼴 짓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주님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그들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그리하여 전에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고, 전에 사랑하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게 된다. 교만하고 자기주장만 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며, 허영적이고 교만한 사람들이 착실하고 조심성 있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의 결과이다. 개혁이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 거짓 부흥 거짓 부흥들의 성격을 살펴보자. 1. 상상력에 호소 2. 감정을 자극 3. “무언가 새롭고 깜짝 놀랄만한 것에 대한 사랑”을 불러 일으킴 4. 성경 진리에 과히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음 5.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 색채를 원함 6. 조용한 이성에 호소하는 기별 같은 것엔 아무 반응이 없음 7. 진짜를 거짓과 혼합함 - 많은 사람들이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신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기뻐함 8.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릇된 태도 9. 마음과 생애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음 10. 그리스도로 더불어 연합함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참가하게 됨 * 거짓부흥의 특징들 1. 큰 소리로 외치는 것, 드럼과 요란한 음악과 춤이 따름 2. 악기들의 남용과 오용 3. 혼잡한 소리와 광적인 태도 4.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 없게 됨 올바르게 사용되었더라면 축복이 될 음악이 잘못 사용될 때는 사단의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시끄러운 음악과 요란한 리듬들이 축제 교회 예배 형식을 타고 교회에 자리 잡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일 축제 예배가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던 자들을 교회에 오도록 한다면 좋은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난잡한 음악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하실 지도 모르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만을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진정한 신앙의 부흥이란, 마치 옛적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견책의 기별을 받았을 때 즉시 마음을 겸비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처럼, 열광적인 기쁨은 별로 없을지 모르나 오히려 마음을 깊이 살피고, 죄를 고백하고, 세상을 버리며,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소원하며 끈기 있는 기도와 확고한 헌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오순절파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무리들, 심지어는 “대중”을 끄는 데 있어서 굉장히 성공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표면적으로 부흥을 판단할 수는 없다. 축제식 예배 형태를 도입한 교회들에 몰려드는 대중들을 보면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인데, 거기에는 피상적인 회심이 넘칠 것이며,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하고 산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피상적인 많은 신자들로 교회가 가득 차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축제 예배” 라 불리는 오순절 교회의 예배 형식을 보면, 그 예배는 크고 꿍꽝거리는 음악으로 이루어지며, 또 손과 몸을 흔들고 성경은 아주 조금만 가르치는 형식의 예배이다. 또한 기도로 병을 고치는 치유의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하고(나중에 가서 보면 다시 증상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음), 진정으로 회개하여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새로운 생애와 성품으로 변화하는 참된 개심의 경험이 전혀 수반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죄된 생활에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 스스로를 위해 예배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니라 그들의 귀를 아니 오감을 즐겁게 하기 위한 한 “축제”에 불과할 뿐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조용하며 깊다. 그곳에서는 진정한 개심의 변화가 수반된다. 자신의 마음대로 또는 기호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볼” 것이다(엡 5:10). 그리고 그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를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등을 그들의 삶 속에서 맺을 것이다. 온 우주에 셀 수 없이 수많은 별들(행성들)을 창조하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정확하게 움직이시는 질서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질서하고 방정맞게 소리지르는 인간의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위의 자연계를 볼 때에도 상식적으로도 “축제식 예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교도 제사장들과 홀로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운 엘리야의 경험을 통해 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우리의 제사는 시끄럽게 정신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또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간구할 때 받으실 만한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엄숙하고, 신성하며, 지성적이어야 한다. 어떠한 세상적이나 표면적인 예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최후의 선과 악의 싸움에 있어서 참된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마지막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에 의해 모양뿐인 신앙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진행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안전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찾고 말씀대로 행할 때에만 위험이 없다.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 축제식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그 예배 형식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고 있다. 교회들은 단지 교인 숫자의 “성장”만을 추구하여 축제예배 형식을 따르고, 칭송하고, 확장시키며, 오순절주의로 쏠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 우리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 축제예배 형식은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일어날 진짜 부흥이 있기 전에 나타날 사단의 거대한 거짓 부흥의 시작일지 모른다. 함께 휩쓸려 껑충껑충 뛰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