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2.
지난해 9월 학술지 ‘네이처’에는 ‘가짜 뉴스’ 같은 연구결과를 담은 논문이 실렸다. 9만 년 전 살았던 사람의 뼛조각에서 DNA를 추출해 게놈을 해독한 결과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라는 것이다.
2010년 이래 게놈 분석을 통해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는 게놈에 남아있는 흔적을 통해 추측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서로 다른 종인 남녀가 만나 짝을 이루는 낭만적인 장면이 종종 묘사됐다. 그러나 게놈 해독으로 이들의 자식, 즉 1세대 혼혈의 존재가 밝혀질 거라고 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로또 1등 당첨에 버금가는 행운을 거머쥔 논문의 제1저자인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고(古)유전학자 비비안 슬론 박사는 지난해 ‘네이처’가 선정한 ‘2018 과학계 화제의 인물 톱 10’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논문의 공동 저자 가운데 이 발견의 숨은 공로자가 있다. 바로 사만다 브라운이다.
▲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굴된 뼛조각 2315개의 콜라겐 단백질을 분석한 결과 사람 뼈는 단 하나였다(사진.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여기서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엄마가 네안데르탈인이고 아빠는 데니소바인인 여성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 사이언티픽 리포트 제공
뼛조각 2315개 가운데 사람 뼈는 하나뿐
이야기는 2015년 독일 예나에 있는 막스플랑크 인간역사연구소에서 시작한다. 이곳 고고학과의 박사과정 학생인 브라운은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굴한 뼛조각 700여 개에서 사람(데니소바인이면 가장 좋다)의 뼈를 찾는 과제를 맡았다. 뼈에 들어있는 콜라겐 단백질을 추출해 아미노산 서열을 분석하면 사람 뼈인지 동물 뼈인지 구분할 수 있다. 콜라겐은 피부나 뼈에 많이 존재하는 섬유 단백질로 아미노산 수천 개로 이뤄져 있다.
사만다는 2002년 학사 출신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유명한 다나카 고이치가 개발한 연성탈착이온화 질량분석법(MALDI-MS)으로 화석에 남아있는 콜라겐을 분석했다. 먼저 뼈의 일부를 떼어내 가루로 만든 뒤 용매에 넣어 단백질을 추출한다. 여기에 단백질분해효소를 처리해 단백질을 아미노산 수십 개로 이뤄진 조각(펩티드)로 쪼갠다.
질량분석법으로 펩티드의 질량을 알면 그 구성원인 아미노산의 조성과 서열을 알아낼 수 있다. 이때 사람에 고유한 아미노산 서열이 존재한다면 사람의 뼈다. 분석결과 실망스럽게도 700여 개 모두 동물의 뼈였다.
시쳇말로 '열 받은' 브라운은 데니소바 동굴 발굴 현장으로 날아가 그 사이 찾아낸 뼛조각들을 뺏다시피 챙겨 돌아왔다. 주위에서는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미리 위로했지만 브라운은 추가로 1600여 개의 뼈에서 콜라겐을 추출해 아미노산 서열을 분석하는 단순 반복 작업에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길이 2㎝인 뼛조각 하나가 사람의 것으로 밝혀졌다.
브라운은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사람 뼛조각을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로 보냈다. 이곳에서 슬론 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방법대로 DNA를 추출했고 다행히 양질의 DNA를 얻었다. 먼저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분석하자 네안데르탈인인 것으로 밝혀져 약간 실망했다.
여기까지 결과를 담은 논문이 2016년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실렸는데, 브라운이 논문의 제1저자이고 슬론은 제3저자다.
이어서 슬론은 핵의 게놈을 분석했고 놀랍게도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데니소바인이 아빠인 혼혈 여성(미토콘드리아는 네안데르탈인인 엄마에서 유래)으로 밝혀졌다. 브라운의 집념이 없었다면 이 결과를 담은 2018년 논문(슬론이 제1저자이고 브라운은 제10저자)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인류학에서 단백질 분석이 게놈 해독에 도움을 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콜라겐 같은 몇몇 단백질은 DNA보다 더 안정하기 때문에 DNA가 파괴된 시료에서도 정보(아미노산 서열)를 지닌 유일한 생체분자로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분석 기술과 데이터 처리 기법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화석에 남아있는 단백질의 정보를 해독해 고인류 또는 고생물의 실체를 규명하는 ‘고(古)단백질체학(paleoproteomics)’이 떠오르고 있다.
▲ 16만 년 전 티벳 고원에 살았던 인류의 화석이 데니소바인임을 증명한 질량분석 데이터다. 이를 통해 콜라겐 1알파2 단백질의 979~996번째 아미노산 서열을 해독한 결과 996번째 아미노산이 라이신(K)으로 밝혀졌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는 996번째 아미노산이 아르기닌(R)이다. / 네이처 제공
아미노산 2000개 가운데 하나 달라
‘네이처’ 5월 16일자에는 고단백질체학의 위력을 보여주는 논문이 실렸다. 해발 3280m인 티벳 고원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16만 년 전 턱뼈의 주인이 데니소바인이라는 사실을 턱뼈에 붙어있는 어금니의 상아질에서 추출한 단백질을 분석한 결과 밝혔기 때문이다.
중국과학원이 주축이 된 다국적 연구팀은 아래턱의 형태가 네안데르탈인과 비슷하면서도 어금니가 꽤 큰 이 뼈의 주인공이 데니소바인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이를 입증하지는 못했다. DNA를 추출했지만 완전히 파괴돼 있어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차선책으로 단백질을 분석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만다 브라운이 한 수준으로 분석해서는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현생인류를 구분할 수 없다. 게놈(DNA) 분석을 통해 얻은 콜라겐 아미노산 서열 데이터를 보면 이 부분이 똑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표지가 되는 특정 아미노산 서열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일단 얻을 수 있는 모든 펩티드의 아미노산 서열 정보를 얻은 뒤 이를 게놈 데이터에서 만든 단백질체 데이터와 비교해 실체를 규명하기로 했다.
그 결과 콜라겐 단백질 여섯 가지에서 아미노산 2000개에 이르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단 하나를 제외한 모든 아미노산의 서열이 세 종에서 동일하다. 유일한 예외가 콜라겐 1알파2 단백질의 996번째 아미노산으로,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는 아르기닌(R)이고 데니소바인은 라이신(K)이다.
어금니에서 추출한 콜라겐 1알파2 단백질의 996번째 아미노산은 라이신이었고 따라서 뼈의 주인공인 데니소바인으로 밝혀졌다. 데니소바 동굴을 벗어난 지역에서 처음 확인한 데니소바인 화석일 뿐 아니라 이들이 현생인류보다 훨씬 앞서 추위와 저산소 환경에 적응한 인류였음을 보여준 쾌거다.
180만 년 전 코뿔소의 단백질 분석 성공
▲ 흑해 동부 연안 드마시니에서 발굴된 180만 년 전 코뿔소 이빨에서 단백질을 추출해 분석한 결과 1만 년 전 멸종한 털코뿔소와 가까운 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진은 털코뿔소의 상상도. / 위키피디아 제공
고생물학에서도 최근 고단백질체학이 한 건 올렸다. 약 180만 년 전이라는 아득한 과거에 흑해 동부 연안(오늘날 조지아) 살았던 코뿔소과(科) 동물의 화석(이빨)에 남아있는 단백질을 분석해 그 계보를 밝힌 연구결과가 ‘네이처’ 10월 3일자에 실렸다.
오랜 세월 동안 코뿔소과에 속하는 여러 종이 명멸했고 오늘날 4속 5종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세 종은 멸종이 임박한 상태다. 1만여 년 전 멸종한 털코뿔소의 경우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분석한 결과 현생 코뿔소 가운데 수마트라코뿔소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네덜란드 코펜하겐대 등 다국적 공동연구팀은 조지아 드마니시에서 발굴한 180만 년 전 코뿔소 화석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DNA를 분석했지만 예상대로 파괴돼 있어 정보를 얻지 못했다. 다음으로 이빨의 법랑질과 상아질에서 단백질을 추출해 분석했다. 연구자들은 변이가 거의 없는 콜라겐의 정보만으로는 정확한 분류가 어렵다고 판단해 다른 단백질의 정보를 얻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법랑질에서 아멜로게닌(amelogenin)을 비롯한 여러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이를 현존 코뿔소 및 털코뿔소의 단백질 정보와 비교분석한 결과 180만 년 전 살았던 코뿔소가 털코뿔소와 가까운 종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사실 드마니시는 18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 화석 다섯 점이 발굴되면서 유명해졌다. 최초로 아프리카를 벗어난 인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두개골 네 점에는 치아도 남아있기 때문에 만일 코뿔소에서처럼 단백질을 추출해 분석할 수 있다면 호모 에렉투스의 실체를 밝히는데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다.
익룡은 온혈동물?
학술지 ‘사이언스’ 10월 11일자에는 수억 년 전 살았던 생물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단백질 분석법을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미국 예일대의 고생물학자 데렉 브리그스 교수와 박사과정 학생인 자스미나 위만이 고안한 방법으로, 라만 분광법으로 시료에 남은 단백질의 패턴을 분석해 정보를 얻는다.
보존 상태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DNA는 수십만 년, 단백질은 수백만 년이 지나면 염기나 아미노산의 서열을 분석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다. 따라서 수천만 년도 아니고 수억 년 전의 화석에 남은 단백질의 정보를 얻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위만은 공룡알에 남아있는 푸른 색소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시료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갈색의 침전물을 발견했다. 그는 이게 유기물, 즉 단백질 찌꺼기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이를 입증하는 연구를 박사과정의 주제로 삼았다.
그 결과 공룡알뿐 아니라 다양한 화석에 단백질이 변형된 상태로 남아있음을 확인했다. 즉 생물이 죽은 뒤 단백질이 주변 당이나 지질 분자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안정한 고분자가 만들어지면 수억 년이 지나도 분해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레이저를 쪼이면 분자구조에 따라 흡수 패턴이 다르고 이를 분석하면 변형된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변형된 패턴이 비슷할 경우 원형도 비슷할 거라는 데 주목했다. 즉 시료의 변형된 정보를 비교해 원래 상태를 추측하는 기법이다.
이 방법을 써서 연구자들은 2억 년 전 살았던 거북이의 조상이 악어나 뱀, 도마뱀의 조상보다는 공룡(새의 조상)과 더 가깝다는 결과를 얻었다. 또 익룡이 온혈(정온)동물임을 시사하는 데이터도 얻었다. 온혈동물은 냉혈(변온)동물에 비해 대사가 활발해 단백질 변형 과정에서 특정 패턴이 나타나는데 익룡 화석에서 그걸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아미노산 서열을 해독하는 질량분석법에 비해 확실성은 많이 떨어지지만 생체분자에 대해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시료에 적용하는 것이므로 ‘믿져야 본전’이다. 게다가 분석을 위해 시료를 소모할 필요가 없는 비파괴 분석법이기 때문에 귀한 시료도 얼마든지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예일대 브리그스 교수팀은 라만 분광법으로 화석에 남이 있는 단백질 변형체의 데이터를 얻어 분석하면 화석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도움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래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이 다르면(왼쪽) 변형체의 구조도 달라(가운데) 여기서 얻은 스펙트럼 패턴(오른쪽)도 다르기 때문이다. 최근 호주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이들은 이 방법으로 익룡이 온혈동물임을 보여준 결과를 발표했다. / 사이언스 제공
중국 척추고생물고인류학연구소의 고생물학자 징마이 오코노는 “이전에는 화학이 거의 적용되지 않던 분야에 이들이 화학을 적용해 새로운 돌파구를 열며 이 분야를 혁신시키는 모습이 경이롭다”며 감탄했다. 수 년 뒤 고생물학과 고인류학에 기여한 방법을 개발한 과학자들이 노벨화학상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