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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신부
아버지의 집
-민경철 신부-
어린 시절 동네 형들과 친형을 따라 야구장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것을 뭣하러 데리고 갔는지…. 혹시 요셉의 형들처럼 나를 버리려고?
아무튼 형들이 표를 사러 갔던 것인지, 음식거리를 사러갔는지는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잠시 한 곳에 기다리라고 했는데 기다려도 오지를 않자 찾아 나섰지요.
멍청한 놈이 있으라면 있어야 하는데 뭣이 잘났다고 찾아 나섰는지 그 복잡한
곳에서 형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무서워서 얼마나 울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렇다치고 형들은 저를 잃고서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동생 잃어버렸다고 어머니한테 맞아 터질 생각이 앞섰겠지요. 아무튼 저는
한 아저씨의 도움으로 집에 용케도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정말 포근하고 따뜻했습니다. 그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소년 시절 예수님은 아들을 잃어버려 애간장이 타는 어머니께
오히려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몰랐느냐고 야단치는 듯
되묻습니다. 아버지와 하나 됨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우리 삶이 그리고 우리 가정이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권리보다 의무를
-박용식 신부-
한 직장에 근무하는 김씨와 이씨가 함께 바지를 샀다. 그런데 김씨와 이씨는 둘 다 키가 작아 바지 길이를 줄여야 했다.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각각 아내에게 바지를 줄여 달라고 맡겼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려고 옷을 입던 김씨는 깜짝 놀랐다. 밤새 긴 바지가 반바지가 되어 있었다. 가족들이 서로 김씨의 바지를 줄였던 것이다. 큰딸·작은딸·막내아들 모두 엄마를 위해 아버지의 바지를 몰래 줄였던 것이다.
한편 이씨도 간밤에 사 온 바지를 입었다. 하지만 이씨의 바지는 어제 산 바지 길이 그대로였다. 부인은 큰딸에게, 큰딸은 작은딸에게 그렇게 서로에게 미루다 결국은 아무도 바지를 줄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났다.
김씨의 가족들은 남편과 아버지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래서 바지는 비록 못쓰게 되었지만 가족간의 돈독한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더 화목한 가정이 되었고, 이씨의 아내와 자녀들은 서로 미루기만 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그 바지로 인해 가정불화가 생겼던 것이다.
가정의 평화는 받아야 할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는 데 있다. 혹시 못다 한 의무가 있을 때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가족에게 솔직하게 용서를 빌어야 불화가 생기지 않고 평화로울 수 있다.
오늘은 성가정 주일이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성가정 식구들은 받을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주는 의무에 충실했다. 우리의 가정도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화목한 성가정을 이루자. ●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이기락 신부-
요즈음 길을 걷다보면 땅이 매우 차갑고 딱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차가운 대기와 얼어붙은 대지. 겨울은 우리에게 가진 것 모두를 내려놓고 빈 몸으로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서라고 자꾸 재촉하는 듯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가정 축일은 겨울나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 요셉이라는 큰 나
무 아래서 아기 예수님이 자라시고 '세상'이라는 거센 바람 틈새에서 성모님이 안식처를 찾
습니다. 거친 항해에서 항구에 돌아온 배처럼 성 요셉은 조용히, 따뜻하게 모자(母子)를 감
쌉니다.
하지만 '성가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상적인 모습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처럼 부모가 이해할 수 없었던 아기의 신원. 가장인 요셉은 아이가 장성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요. 하나밖에 없는 아드님은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십
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성모님.
가족이 화목하셨겠지만 세상이 말하는 '부(富)'와 '귀(貴)는 없었습니다. '부'와 '귀'가 없으니
어디서 세상의 '영화'를 누리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가정이라니! 보통 사람들은 당연히 행
복을 전제로 한 다음에 성가정을 생각하겠지요. 그 '행복한 가정'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전
도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성모님과 성 요셉, 아기 예수님께서 사시던 그때 나자렛의 가족은
성가정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로 잉태된 아기지만 남편은 아내의 부정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인물이기 전에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이
가 참으로 머리 숙여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진실하고 의로운 사람이 계시다니!
이런 성 요셉의 그늘 아래 가족은 극진히 사랑하고 아껴주며 존경하면서 서로에게 순종하
며 사셨겠지요. 성가정을 이끌어 온 동인은 사려 깊은 배려가 깔린 가장(家長) 요셉의 침묵
과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루카 2,51)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깊은 명상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의 울타리가 없었다면 복음서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따뜻하고 다정한 성품 또한 없었
을 것입니다.
나자렛의 작고 소박한 집에서 성경에는 드러나지 않은 세 식구가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평화가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바람처럼 흘러갑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 평범한 가정의 나날들 안에서였겠지요. 나자
렛의 하루하루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당신 사명을 이루시는 그 위업의 토대
가 되었겠지요. 집을 지을 때 하나하나 쌓여지는 벽돌처럼 말입니다.
성가정을 바라보면 가족이 함께 한 시간이 길던 짧던 간에 그 구성원은 결코 해체될 수 없
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은 이미 가족이라는 말로 완전하게 묶여져 있으니까요. 세월도, 병
고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이 유대를 풀 수는 없겠지요. '죽음'이라는 좀 긴 이별은 차라리
생전의 시간을 더 투명하게 보여주겠지요. 말로 못 다한 그 마음까지도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살아갈까요. 지극한 마음이, 하물며 부모가 자식
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어떻게 말로 다 표현되고 드러나겠습니까. 문득 스치는 바람처럼
자식은 그렇게밖에 느낄 수 없는 것이겠지요.
이런 성가정을 그려보니 "다이야몬드 더스트(diamond dust)"가 생각납니다. 아주 추운 겨
울날, 시베리아와 같은 극지에서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붙어 그 미세한 입자들이 마치
다이야몬드가 산산이 부숴져 점점이 빛나며 떠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
던 우리가 존재조차 잊고 살았던 것들이 혹한에 홀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자렛에서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 요셉과 성모님의 눈길이 이렇게 빛나는 다이야몬드
더스트 같았겠지요.
성가정의 소박한 사랑을 바라보며 한 해의 마지막 날 우리 모두를 존재하게 하는 가장 근원
적인 그 무엇인 가족과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
우리 가정도 사랑의 보금자리와 학교, 작은 성당이 되기 위해서는 성 요셉과 성모님처럼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루카 2,51)하는 침묵과 명상,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려 깊은 배
려가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가정생활
- 조욱현 신부 -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교회가 이 축일을 제정하여 거행하는 것은 그 ‘성가정’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주님의 공생활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고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기까지 겪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우리도 알고 그 성가정을 본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가정은 교회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서로 간에 항상 사랑의 막을 쳐야 한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정교회가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또한 생명과 인간 품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1979.1.28. 멕시코 푸에블라에서)라고 하셨으며 그 때문에 가정사목에 중점을 두라는 말씀을 하셨다.
제1독서: 집회 3,3-7.14-17: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버이를 공경한다
두 남녀가 사랑으로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이 외적으로는 단순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어려움, 긴장감, 몰이해, 고통 등도 느끼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아파하면서도 다시 시작하는 삶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 같다. 여기서 성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의 가족관계가 사랑이라는 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1독서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출애 20,12)는 계명을 말하고 있다. “아비를 공경하는 것은 자기 죄를 벗는 것이며 어미를 공경하는 것은 보화를 쌓아올리는 것이다.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구하는 것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리라.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오래 살 것이며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어미를 평안케 한다”(3-6절).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서 가정을 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자녀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의 교류의 법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자기 아비를 저버리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어미를 노엽게 하는 것은 주님의 저주를 부르는 것이다”(16절).
부모와 자녀는 누구도 변경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하느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성서는 가정을 더 풍요로운 역량을 갖추도록 초대하고 있다.
복음: 루카 2,41-52: 부모는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을 드러내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의 관계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이고,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루가 24,26.46-47).
예수님의 성가정은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것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관습에 따른 것이지만, 어린 예수님을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였다. 성전에서는 교사들이 회당에서 성서를 봉독할 수 있는 자격과 아울러 신앙으로 성인(成人)으로 인정받아야 했던 어린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그 가정은 종교의 행위에 개방된 가정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가 필요 없는 듯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나 기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등의 종교행위가 우리 가정이 티 없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향기를 부여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는 우리를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나자렛 가정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분위기는 마리아가 걱정하며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였을 때, “얘야, 왜 우리를 이렇게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48절)라고 하신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보는 가정은 모두가 아무런 번민, 즉 몰이해, 갈등, 오류, 실패, 질병, 또는 죽음 등으로 인한 문제가 없을 만큼 이상적인 가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가정은 모두 이럴 수 있다. 여기서 신앙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고 가족들을 더 가깝게 일치시켜 주고 밝은 희망을 줄 수 있다. 괴로움과 고통이 생활을 멈출 수는 없다. 하느님을 통해 보이는 괴로움과 고통은 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해 준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51-52절)이라고 복음을 맺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일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우리의 사고를 요하는 대목이 있다.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50절)고 한다. 아들의 태도와 말속에는 어떤 신비가 들어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일 것이다. 이 신비는 그의 부모들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장과정에 있는 인간존재 안에는 ‘신비’가 들어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자녀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자녀들의 길은 부모들이 원하거나 생각하는 길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존중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제2독서: 골로 3,12-21: 주님과 함께 사는 가정생활
2독서에서도 가정의 원천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각자는 형제자매로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 새로워진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 규범이라면, 이 법은 이미 자연적 유대관계를 전제로 하는 가정에서도 유효한 것은 당연하다. 즉 가정에서 보다 비옥한 경작지를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내용에 비추어 가정적 의무의 어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내 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분입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들을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18-21절). 자신의 고유한 역할 때문에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20절)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오늘날 퇴폐하고 파탄에 이를 지경에 놓이게 되는 이 자연적 가정에도 새로운 힘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자렛 가정은 자녀들에 대해서 부모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가정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임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2천년 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정’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하느님의 마음, 부모의 마음
- 김우정 신부-
얼마 전 “괴물”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다 봤다니 별생각 없이 보게 되었는데, 그 중에 마음을 관통하는 대사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새끼 잃은 부모 속 냄새를 맡아본 적 있어? 부모 속이 한 번 썩어 문드러지면 그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하는 거여” 그 대사를 들으면서 ‘부모님 마음이 저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종종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떠올려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을 잃고 찾아 헤매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안타까웠는지는 모든 부모님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일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물건을 하나 잃어버려도 그토록 애를 태웁니다. 복음의 비유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남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내버려두고,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들춰내고 쓸고 닦습니다. 양 한 마리, 은전 하나도 그토록 귀한데, 하물며 자녀를 잃어버린 부모님의 마음이 어떤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부분입니다.
마침내 주님을 성전에서 찾아냈을 때, 그 부모님은 뛰었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들에게 다가섭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녀를 찾을 때의 그 안도감이 성모님의 말씀을 통해 전해집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대림 시기 동안 하느님께 돌아온 많은 자녀들을 기억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을 거쳐 돌아온 이도 있고,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돌아선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돌아오지 못한 많은 가족들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잠시 동안만 자녀들이 보이지 않아도 불안해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녀들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고 간절한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는 사흘 만에 아들을 찾았고, 우리는 때때로 잃어버린 것을 금방 찾아내고 안도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당신 자녀들을 찾아다니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 집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간절히 찾고 계시는 자녀들, 아직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가족들을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은 먼 옛날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을 찾아다니던 것보다 훨씬 간절한 심정으로 우리를 찾아다니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붉은 등이 켜진 성당의 감실에서 한숨도 잠들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의 마음을 봅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떠나간 가족을 그분께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히 떠나간 아들을 맞아주시는 아버지처럼(루카 15장) 당신의 자녀들을 반갑게 품에 안아주실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행복도 사라진다
- 유영봉 신부-
묵상 길잡이; 사회의 급격한 변화, 이혼의 급증, 가정와해로 인한 청소년문제 노인문제 등이 심각한 현실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정 사목을 위한 교회의 관심과 대책이 아쉬운 때이다.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가정을 지키기는 힘들다. 그래서 가정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1. 언제나 갈 데까지 가 보는 국민성?
뭔가 시작을 하면 죽기 살기로 힘을 모아 해 내고야 마는 저력, 어떤 새로운 일이 시작되면 끝간 데 없이 한없이 내 닫는 행태(行態)가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어떤 외국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뜻이 모이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폭발적임 힘을 발휘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 국민의 냄비 같은 약점이기도 하지만, 또한 무서운 저력이란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비단 어떤 행사를 치르거나 공사를 하는 데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사회흐름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혼 문제만 해도 그렇다. 1990년 한 해에 399,300건의 혼인에, 45,700건의 이혼이니 그 정도가 11.4%에 불과했다. 그런데 2001년도엔 320,100건의 결혼에 135,000건의 이혼이니 무려 42.1%로 대폭 늘었다. 2002년도엔 43.7%이니, 이제 영국을 제치고 미국 다음으로 이혼율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이다. 우리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혼의 급증에는 청소년문제와 노인문제도 함께 얽혀있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 말하는 탈선 청소년, 문제 청소년은 바로 문제의 어른들이 만든 문제가정에서 양산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등 따뜻하고 배부르다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정서적인 존재이다. 서로에 대한 진한 관심과 사람으로 서로를 감싸고 아끼는 가정이야말로 경쟁 치열한 사회에서 받은 모든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힘을 축적해주는 유일한 곳이다. 그래서 가정을 '보금자리' 또는 '안식처'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그 가정마저 붕괴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어디서 인간다움을 지키며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인가?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2. 참 사랑은 무엇인가?
부부로 살면서 얼마만큼만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얼마쯤은 숨기고 살수가 없다. 서로의 모든 면을 그 약점과 함께 열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혼생활을 5-10년 하다보면 "내 남편(아내)의 이런 저런 점은 그래도 참을 수 있지만, 이 한가지만은 꼭 고쳐주었으면 좋겠다." 싶은 결점이 누구에게나 발견된다. 그러나 그 사람(남편이나 아내)은 죽었다 다시 깨어난다 해도 결코 그 결점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있는 한계이다.
"사랑은 '너'가 '나'와 다를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물론 가정을 이루고 사는 부부이기에 아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그러나 큰 문제가 아닐 때 서로의 자기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사람은 대선 때 부부간에 서로 지지하는 후보가 달라 그 때문에 옥신각신하다 헤어졌다고 한다. 아무리 부부라 하더라도 매사에 100% 나와 꼭 같기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예속이고, 상대를 한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숨막히게 하는 것이다. 사고방식이나 생활 습성 그리고 가치관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한다.
사랑은 배려이다. 서로를 맞추어가려는 지속저인 노력이 필요하다. 보다 나은 아내, 보다 좋은 남편이 되고자 하는 노력, 자기 성장과 발전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을 포기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나는 성격이 급해서' '그럴 수도 있지 뭐' '나는 그렇게는 못살아' 하는 자세로 자신을 무조건 정당화하려고 할 때 신뢰는 급격히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일찍이 사회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누구와 결혼하느냐 보다 어떤 마음 자세로 결혼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누구나 깊이 음미해 볼 말이 아닐 수 없다.
3. 가정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이혼의 증가와 함께 동거와 재혼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동거의 천국이라고 하는 프랑스나 구라파의 여러 나라엔, 결혼은 하지 않고 일생에 3-4회 '동거'와 '갈라섬'을 되풀이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엄마와 아빠가 서로 다른 이상한 가정에서 심리적인 혼란 속에 자라나는 아이들의 문제도 큰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중년 이후 갈라선 이들은 대부분이 새로운 동거의 대상을 찾지 못한 채 고독하고 궁상맞기 이를 데 없고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젊은 날에 누린 자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사목자는 물론 모든 신자들이 가정의 '하숙화'를 막고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교회의 ME교육의 활성화, 가정기도의 정착, 부부클리닉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때이다. 서로를 참아주고 감싸줄 수 있는 힘은 기도에서 나온다.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가장(家長)은 가정교회의 주교이다."고 하셨다. 가장들이 가정기도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 서공석 신부-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0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없었던 축일입니다. 20세기 말부터 유럽에 시작된 산업 사회는 인류의 기본 공동체인 가정의 가치를 훼손하였습니다. 산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가정 중심의 생활을 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생명과 사랑의 온상으로서의 가정의 가치는 점차 사라지고, 생산과 삶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 환경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낀 교회는 성가정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한 가정 안에서 자랐습니다. 생명이 태어나 자라는 곳이 가정이고, 사랑과 봉사가 실천으로 전수되는 곳이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가 열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아들을 잃어버린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그 아들을 찾아 사흘을 헤맨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되찾았습니다. 소년 예수는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나무라는 부모에게 예수는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토론하는 예수, 그들이 경탄하는 예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는 예수, 소년 예수의 이런 모습은 그분을 주님이라 믿는 신앙 공동체가 상상하여 그린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율법 학자들을 상대할 만큼 현명하였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으며,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일컬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는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 사회에서 통념적으로 생각하던 하느님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율법 준수를 원하시는 하느님, 사두가이파는 전통을 철저히 따를 것을 원하시는 하느님, 혁명당이라는 과격파는 무력으로라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에쎄네파는 금욕적 수도생활을 원하시는 하느님이라고 믿었습니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심판하실 무서운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율법과 전통 안에 있고, 그것을 어긴 자는 무섭게 심판받을 것이라는 데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의로운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그 하느님은 유대교의 하느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가차 없이 처벌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 용서하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믿은 대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에게 하느님은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자녀의 잘못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부모와 같은 아버지이십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녀에게로 흘러들어서 자녀가 성장합니다. 부모에게서 배운 사랑이 있어 자녀도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은 예수님이 실천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흘러들게 하여, 자기도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삽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에서 들은 콜로새서는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자비를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하였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고...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준다...사랑을 실천한다...항상 감사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실천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보여 주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2006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또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우리 모두 가슴에 안고 있습니다. 고통스런 일도, 후회스런 일도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내가 잘못 해서 부끄러운 회한(悔恨)으로 남은 일도 있고, 나와 관계없이 닥친 불행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은혜로운 일들도 우리 각자에게 많았습니다. 그 일들 안에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나에게 상처로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묵시 21,5 참조)에게 맡겨 드립시다. “죄가 많아진 거기에 은총이 넘쳐흘렀다.”(로마 5,20)고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고치고 새롭게 하십니다. 내가 이웃에게 준 상처와 내 마음에 남은 미움의 앙금들을 하느님에게 보여 드리고, 그분이 당신의 자비를 불어넣으셔서 모두를 새롭게 하시도록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 안에 일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는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5,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좋은 일들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한 해가 과거라는 망각 안으로 흘러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회상에서 붙들어 간직해야 할 것은 은혜로웠던 일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 순간들입니다. 그 은혜로우신 손길을 전달한 분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와 가까이 있었거나 잠시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 이들입니다. 은혜로운 눈길, 은혜로운 손길을 남기고 지나간 이들입니다. 그 은혜로움이 있어서 나의 삶은 보람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빴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그 눈길과 그 손길을 예사로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가 은혜롭게 회상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그런 눈길과 그런 손길들입니다. 세월도 가고, 우리도 가지만 그런 눈길과 손길들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하느님이 아버지 되시도록 살아야 하는 우리의 가정입니다. 오늘의 가정은 가족 모두가 잠시 쉬고 나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자녀들도 학생이 되면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각자가 해야 하는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해가지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기도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의식하며 삽니다. 선입견이나 이해관계 없이 서로 들어주고 말하면서 삽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처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류의 횡포는 동물세계에서 받은 유산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비를 실천하는 마음이 살아있게 해야 하는 가정입니다. 그것을 위한 훈화가 들리는 가정이 아니라 그런 실천이 보이는 가정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가다듬어 새해를 맞이합시다.
복음 : 루카 2,41-52
- 김윤복 신부-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대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있던 율법교사들은 이스라엘에서 최고라고 여겨지던 학자들이었습니다. 복음은 율법교사들과 예수님이 서로 묻고 답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율법교사들을 경탄하게 만든 열두 살 예수님의 답변은 과연 어떤 답변이었을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성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던 것일까요? 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을까요?
성서는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슬기는 사물의 이치를 밝혀 시비를 가리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해 내는 재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슬기는 어떤 방대한 지식이나 학식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밝은 이성과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열두 살 아이였던 예수님은 열두 살 나이에 맞는 지식을 가지고 계셨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달랐던 점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할 줄 알았던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하느님의 능력을 쓰지 않으시고 인간의 기준에 맞춰 우리와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음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또한 우리에게 하느님의 진리는 방대한 지식이나 학식에서 나오는 것, 일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열두 살 어린이조차 알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태오 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의 뜻과 진리는 어려운 학문이나 지식,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우리 곁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처럼 우리 스스로 우리의 눈을 가려서 하느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다가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지식에 통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올바로 보는 슬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슬기롭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사흘 만에 성전에서 자신을 찾아낸 성요셉과 성모님이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 집에 있는 줄 몰랐냐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부모 같았으면 회초리를 들고 종아리를 때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신 성모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마주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으니 그냥 마음에 묻어두고 잊어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기도하고 고민하며 하느님께 맡기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매달리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며 만용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느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겸손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할 일을 다 하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의지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삶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2006년 달력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지막 날의 저녁은 가족과 함께 지난 일년을 돌아보며 우리가 슬기롭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만드신 나자렛 성가정
-경규봉신부-
예수님께서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하느님을 아버지로 깊이 느끼면서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말씀하셨다. 12살의 어린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느끼며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고, 자신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두 말할 것도 없이 가정교육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남다르게 깊은 신심을 가지실 수 있었던 것은 신심 깊은 요셉 성인과 성모님으로부터 깊은 신심을 본받으며 자라나셨기 때문이다. 두 분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의인이었으며 하느님의 천사를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신심을 가지신 분이었다. 또한 두 분은 극히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어린 예수님을 데리고 해마다 예루살렘에 순례할 정도로 예수님을 신앙으로 무장시키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성모님을 가리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신 분이시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2,50).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물론 하느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지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의 가정교육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가정이 정말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가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키우는 가정이 되도록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야 한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살펴보면, 가장인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스승이었다.
가정은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이며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스승이다. 특히 가장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성경 안에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나오지 않지만, 마태오 복음(2,18이하)을 보면 가장인 요셉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했지만,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남모르게 그녀와 파혼하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리아를 혼인의 계약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주고, 마리아가 원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자신으로 하여금 마리아의 남편이 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가정을 꾸려 가는 삶을 선택했다.
가정을 유지하고 이끌어 가는 것은 가장이다. 가장은 가정을 이끌어가고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가장은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가정을 이끌어가야 한다. 가정은 기초공동체로서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가정을 소중히 여기신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정을 꾸미도록 하셨고,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로 하여금 가정 안에서 자라나도록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많은 부부들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가정을 꾸미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이내 가정을 파괴시키곤 한다. 특히 물질이 풍요로워진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정말 이 시대에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가정을 꾸려 나가려는 노력이 너무 아쉽다.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정을 꾸려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전과 달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을 깨트리며 살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1998년도부터 우리나라 이혼율이 아시아 국가 가운데 1위라고 한다. 한 해에 두 쌍이 결혼하고 한 쌍이 이혼할 정도로 이혼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에게 많은 문제가 생긴다. 소년범죄로 수감된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어린 시절 편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약물중독치료병원에 입원한 청소년의 75%(아틀란타주 질병통제소) 어린이 다섯 중 한 명이 가족구성원의 변화로 인해 학습, 정서 혹은 행동장애를 보이고 있으며(국립건강통계원) 자살자의 63%, 10대 임신부의 75%(경제개발위원회: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가 편부모 슬하에서 자란 사람들이라고 한다.
요셉은 가정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충실히 이끌어간 가장이었다. 그는 한 생명의 탄생은 하느님의 뜻이며 축복이고, 가장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한 생명을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끌고 양육하는 첫 번째 스승이라는 점을 잘 아는 착한 사람이었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가정은 가장 기초적 사회이며 공동체이다. 가정 안에서 갓 태어난 생명은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감으로써 삶을 배우기 시작한다. 가정 안에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배우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기초 지식을 배운다. 사람이 가정 안에서 이러한 기초지식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 때, 그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거나 낙오자가 되기 쉽다. 가정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사람이 되게 하는 스승이요, 가장 기초적 공동체임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가정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고 기쁨과 슬픔까지도 나누는 작은 교회이다.
성모님은 가족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성모님은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으며, 예수님의 십자가상 고통까지도 함께 나누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누리신 그 영광도 함께 누리셨다. 이처럼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 수난과 영광까지도 함께 나누는 모습이 곧 교회의 모습이며 가정의 모습이다.
초대 교회는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는”(사도 2,44-45)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내어놓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곧 가정이다. 그래서 지금도 수도원과 같은 공동체에서는 회원들을 가족 또는 식구라고 표현하곤 한다.
가정은 작은 교회이다. 작은 수도원이고 작은 신학교이다. 가정 안에서 기도를 배우고 하느님을 배우기 시작한다. 가정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기도를 배웠을 때, 그는 큰 죄를 짓지 않는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착하고, 죄를 덜 짓는 이유는 일찍부터 하느님을 알고 기도를 배우기 때문이다. 가정은 작은 교회임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교회임을 생각하고 우리의 가정이 그러한 가정이 되도록 하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순종하는 모습을 배워야 한다. 루카복음(2,51)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을 사람의 가정에서 자라도록 하시며,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으며, 아버지의 뜻이 당신 자신의 뜻이 되도록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는 삶을 사셨는데 이 모든 것이 가정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올바르게 양육해야 마땅한 것처럼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의 시대는 순종의 미덕이 점점 사라져 가는 듯하다. 가정 안에서 자녀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교회 안에서 신도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아니한다. 아무리 가르쳐도 듣지 않는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헌신짝처럼 팽개치려고 한다. 개화를 좋아하기보다는 개혁을, 변화보다는 변혁을, 점진적 발전보다는 급격한 성장을 좋아한다. 전통과 권위에 순종함으로써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장함으로써 역사의 발전과 변화를 가져오려 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혁신을 좋아한다.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 풍토가 그렇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도, 가정 안에서도 순종의 미덕이 점점 사라져 가는 듯하다.
하느님의 뜻은 장상들을 통해서, 어른들을 통해서 나온다. 그리고 그 어른들의 뜻을 받들고 성숙했을 때, 보다 높으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부모님께 순종하시며 자라셨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자녀들은 순종하는 미덕을 가정에서 배워야 하고, 부모는 자녀들로 하여금 순종하는 자세를 가르치도록 해야 한다.
성가정이란 어느 날 갑자기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가정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해야하고, 서로 일치하려고 노력해야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도록 해야만 한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과연 우리 가정이 사회의 기초 공동체로서 한 생명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고,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도록 하자. 우리 가정이 기도하는 작은 교회로서 살고, 하느님의 뜻과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살아가도록 하자. 우리 모두의 가정이 사랑과 일치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에서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를 양육하도록 하자.
가정의 행복은 빨래줄
-박상대신부-
예수성탄 팔일축제 넷째 날인 12월 28일 오늘, 일요일이 아니라면 교회는 "무죄한 아이들의 순교 축일"을 지낸다. "유다인의 왕"으로 태어난 예수의 존재를 두려워 한 나머지 헤로데 대왕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2살 이하의 아무 죄가 없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기 때문이다.(마태 2,2.16-18)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교회는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낸다. 예수아기가 탄생함으로써 요셉과 마리아가 이루는 하나의 가정! 단지 몇 사람의 눈을 제외하고는 겉으로 보기에 이 가정은 다른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이 가정은 성가정(聖家庭)이다. 그렇다고 마리아와 요셉이 스스로 자신의 가정을 성가정으로 선포한 적은 없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이 성가정인 이유는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아기의 잉태와 탄생을 놀라움과 기쁨, 순명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이루는 가정 안에 스며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헤아리며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정이 없으면 사회도 국가도 없고 인류도 없으며, 문화도 문명도 종교도 없다. 사람의 모든 것은 가정을 뿌리로 성립된다. 가정은 분명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인간적 제도이지만, 동시에 거룩한 천륜(天倫)을 따라 이루어진 신적(神的) 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가정은 인간적 사랑과 신적 질서로 표현된다. 질서 없는 사랑은 쾌락이 될 뿐이며, 사랑이 없는 질서는 잔인할 뿐이다. 사랑과 질서는 마치 빨래 줄을 팽팽하게 유지시키는 양쪽 기둥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가정이 추구하는 행복을 이 빨래 줄에 비긴다면 줄이 팽팽해야 빨래를 걸어 말릴 수 있듯이 행복의 구체적인 요소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이 행복해야 사회가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오늘 미사의 독서가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집회 3,3-17; 골로 3,12-21)
그런데 우리 사회는 참으로 암담하다. 그 이유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분명히 각각의 가정에도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2003년 올해 국민들의 양적인 삶은 개선됐지만 질적 수준은 양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출산율이 현저하게 저하되고 수명연장으로 인한 고령화 추세 속에서 2003년 7월 한국의 전체인구는 4792만 5000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65세 이상 노년층은 8.3%로 2002년보다 0.7% 증가했다. 생산가능연령층(15∼64세) 대비 노인층 비율은 11.6%로 인구 100명이 노인 11.6명을 부양하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출산율은 2002년 1.17명으로 2001년보다 0.13명 줄어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02년 기준 1만 13달러(약 1192만원), 소비지출은 753만2000원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2001년에 비하여 소득은 11.2%, 소비는 9.3%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소비구조를 보면 60%가 서비스부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서비스 부분의 지출이 총지출의 반을 넘는다는 사실은 사회의 기본이 되는 가정이 개인중심주의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가정이 그에 속한 구성원 개인의 소비력을 감당하지 못하면 쉽게 파산될 수 있다는 말이다. 2002년 한해 동안 우리나라에는 30만 6000쌍이 결혼하여 그 절반에 이르는 14만 5000쌍이 이혼했다고 한다. 결혼이 있으며 이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절반이 넘는다면 모든 가정이 위험 수위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혼사유로 1992년 1,9%에 불과했던 경제문제가 10년만에 13.7%로 급증했다는 것은 돈 때문에 두 가정 중 한 가정이 이혼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가정의 본질과 의미가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심하게 무너지는 책임소지를 따지기보다 우리 가정이 먼저 가정의 본질과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한다. 가정의 행복을 지켜주는 질서와 사랑을 다시금 점검해보아야 한다. 가정의 행복이 물질의 풍요에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먼저 가정이 신적 질서에 의해 거룩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인간적 사랑 때문에 아픔과 갈등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은 우리가 비록 가난하고 구차한 가정이었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각자가 서로를 위해 오직 존재한다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보고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