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인류 역사에 많은 영웅 호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또는 불안해하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담대하게 직면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게 됐어요.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모함에 의해서 독배를 마실 때 내가 지금까지 이 법을 지키면서 왔는데 내게 불리하다고 해서 내가 이것을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마셨어요.
얼마나 멋집니까? 영웅다운 위인다운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적이 쏜 탄환을 맞았습니다.
아무에게도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러고는 장엄하게 죽었어요.
야 나 좀 살려 이 큰일 났네.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러고는 죽은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그는 영웅 호걸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님은 약하셨고 고민하셨고 슬퍼하셨고 불안해 하셨고 두려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7절 38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어라.
고민하고 슬퍼하사 매우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좀 있어줘.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걸맞지 않은 단어들이 나열되고 있어요. 마지막 그 순간을 예수님이 멋지게 장식할 수 없었을까 아쉬움이 남을 만큼 예수님은 인간의 약한 감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이 유약한 사실은 유약한 사람이어서 아니면은 겁이 많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고 하는 현실을 아셨어요.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주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난이라고 하는 그 잔인한 행위에 대해서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 주님이 고민하시고 불안해하셨던 두려워하셨던 이 죽음 이 부분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고난 앞에서 불안해하시고 두려워하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 불안과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이런 상황에서 옵니다. 내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평소에는 용기가 넘치고 야 정말 영웅 같다. 그런 사람도 병원에서 이상해가지고 가서 보니까 암이래요. 근데 암 말기래요 몇 달 못 산대요. 죽음이 눈앞에 왔을 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뜹니다. 부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실패를 경험했을 때, 질병의 고통이 왔을 때, 또 고문과 억압을 당할 때 불확실한 미래를 앞에 두고, 그리고 젊은이들이 불안해하고 방황하는 것은 내가 미래에 어떻게 살까 내 미래가 어떤 것이 펼쳐질까 그게 확실하지 않을 때 불안해하는 거예요.
또 나이 든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노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한 60-70에 죽으면 다행인데, 요즘은 재수 없으면 100살 산다는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게 합니다. 그게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공통적인 감정이에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도 그런 고민과 감정을 가지고 계셨어요. 고민하고 슬퍼하사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주님은 이제 이 기도를 마친 후에 체포돼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전개될 일들에 대해서 환히 보고 계셨어요.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인간이 당해야 되는 인간이 고문을 당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인간이 느껴야 되는 그 아픔을 그대로 느끼셔야만 한 거예요. 그것을 바라보면서 주님도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신 겁니다. 얼마나 그것이 힘든 길인가를 아셨기 때문이에요.
오죽하면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멀리하옵소서 떠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만큼 주님이 앞으로 체포돼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경험해야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잔인한 것인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죽음 인간이 당하는 고통 고난은 영웅심이나 남자의 호기로움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섭고 냉혹한 그리고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그것이 모든 인생 앞에 있고 이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어야 되고 또 살아가면서도 이 죽음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럴 때도 담대하죠. 당당하고 그러나 그것은 대개 무식하면 겁이 없는 것처럼 무식하면 용감한 것처럼 그 죽음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님은 구체적으로 주님을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한 것들이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고문입니다. 체포되면서부터 당하게 되는 그 고민 고문 로마의 군병들이 휘두르는 채찍 40대 이상 맞으면 죽는다 이거예요. 그만큼 무서운 겁니다. 우리는 채찍 그러면 무슨 가죽이 왔다 갔다 하는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 끝에 납덩어리가 달려 있거나 또 쇠 갈구리가 달려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한 대 후려치면 옷이 찢어지고 살갗이 찢어지고 심지어는 그 안에 있는 뼈가 드러날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 채찍이에요. 쫙 한 번 훑으면 뼈가 드러난다. 이거 그걸 수없이 맞아야 되는 거예요.
주님은 그것을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 우악스러운 로마 군인들의 발길에 차여야 됐습니다. 존귀하신 주님의 몸이 그 군인들의 발길에 차이는 거예요. 옛날에는 오늘날 같은 구난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먼 길을 가야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비교적 신발은 단단했을 거예요.
우리 군대에서도 매맞는 것보다 더 힘든 게 뭐냐면 고참이 이렇게 세워놓고 군 앞발로 차는 거예요. 그래서 이 촉대라고 그래서 여기 한 대 맞으면 썩습니다. 야 무시무시하게 아파요.
군대 갔다 왔어요. 맞아봤어요.
어 이게 진짜 군인이네.
오늘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세요. 야 수도 없이 그들의 그 발길에 채워야 됩니다. 그 군인들의 손이 얼마나 우리는 다 공부하고 한 사람들이니까 다 부들부들하지만 그 험하게 칼자루 쥐고 산 군인들의 주먹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겠어 그 우악스러운 주먹이 예수님의 몸에 닿을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죄의 자백을 받아냅니다. 죄 없는 사람도 그 고문 당하면 죄인이 돼요.
우리나라도 옛날 조선시대 사극에 보면 사도들이 뭐라고 그래요? 두들겨 패면서 내 죄를 내가 알겠다. 아니 죄를 내가 안 지었는데 내 죄를 어떻게 아냐 그런데 고문을 하면 자기 죄를 알게 됩니다. 내가 안 지은 죄도 지었다고 하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거예요.
그만큼 고문은 무서운 것입니다. 고문은 적대자를 고통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인간이 사악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나쁜 방식이에요. 이 고문 앞에서 견딜 사람이 없어요. 고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합니다. 세상을 비인간화시키고 고문하는 자나 고문받는 자가 비열해집니다.
이게 더 나쁜 거예요. 고문을 당하면 막 얻어맞으면서 물고문을 당하면서 몸에서 피가 튀면서 그 지체가 녹고 예수님 그 거룩하신 그분이 인간이니까 채찍이 날아올 때 발길이 날아올 때 움찔하고 자기도 모르게 자세가 흐트러질 수가 있어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것이 고문입니다.
인류 역사는 고문의 역사였어요. 그것이 예수님에게 절정에 달한 겁니다. 유럽은 19세기에 이 고문을 금지하는 규정을 도입했어요. 이건 안 된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이 고문을 하는 것은 이 비인간화시키는 거다. 비열한 일이다.
우리나라도 1995년 2월에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를 헌법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고문이 1995년이면 내가 96년에 파리에 왔으니까 그전에까지 있었다는 거예요. 이게 이 인간이 고문받지 않을 그 권리를 갖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 인류 역사에 참 잔혹한 일들이 많아요.
오늘 예수님이 이제 그 고문을 당하시는 거예요. 고통스럽고 비인간적인 고문 앞에서 주님은 두려워하셨고 불안해 하셨습니다. 인자로 오셨기 때문에 고문 당하실 때 예수님의 존귀함은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전쟁에서 적장을 죽일 때도요. 고문하지 않습니다. 진짜 적장을 죽일 때는 예의를 갖춰서 죽여 그래가지고 한 칼에 목을 베든지 스스로 자결하게 하든지 합니다.
그런데 고문은 죽이지도 않으면서 고통스럽게 만드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시간을 보내셔야만 했습니다. 모든 품위가 무너지는 시간 저희 말씀 준비하면서 그 예수님이 그 장시간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면서 그 고난을 당하실 때 그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두 번째는 십자가의 고통이죠. 십자가는 인류가 만들어내는 가장 잔혹한 사형 형식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는 기요틴이라는 사용 도구를 만들었죠. 얼마나 많이 사람이 죽었습니까? 근데 딱 칼이 이렇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확 떨어지면서 목이 한순간에 탁 잘리도록 하는 기요틴.
그런데 십자가와 비교해 보면 이것은 인권 보호형 사형 틀이라고 생각이 돼요. 한순간에 죽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달리셔야 되는 그 십자가는 못 박혀서 온몸에서 물과 피가 다 쏟아져 나온 후에 7시간, 8시간, 10시간 후에 운명하는 거예요. 모든 고통을 다 당해야 되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주님은 그것을 생각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이자를 내게서 떠나가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 앞에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었어요. 주님을 두렵게 하는 그것은 소외입니다. 소외. 여러분 소외라고 하는 말 아시죠? 소외감 소외 소외라고 하는 것은 사회경제학적인 용어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실현되지 못하고 무시되는 상황 우리가 일하고 기업을 만들고 거기가 노동을 하고 또 그런 경제 구조를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려고 그랬는데 어느 날 보니까 우리가 그 노예가 돼 있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는 상황 그걸 인간 소외라고 합니다. 심리학적 신학적인 용어로는 어떤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유대감을 상실한 상태 그게 소외입니다. 쉽게 말하면 왕따시키는 거예요. 언제 왕따시키냐? 가장 그들이 필요할 때 내가 그들이 내 생에서 가장 필요한 순간에 그들이 내게서 등을 돌리는 것 그게 소외입니다.
그 인간 소외는 우리를 아픔과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들이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가장 힘들 때 평소에 좋을 때야 뭐 사람이 많죠. 그런데 가장 힘든 순간 내가 그들이 꼭 있어야 되는 순간에 다 돌아서는 상황. 돌아설 뿐만 아니라 외면하고 원수처럼 조롱합니다. 무슨 원수진 것처럼 돌아서 가지고 말이 없는 말 있는 말 만들어내고 그게 소외예요. 그래서 나 혼자 남는 거예요. 무리로부터 이탈되는 거예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당하시게 됩니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셨어요?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서 자기 백성에게 왔는데 그들이 주님을 몰라봤어요. 그리고 그 주님을 지금 십자가에 내어준 겁니다. 제자들에게 3년 동안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 사람들 별로 잘난 것 없었는데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셔서 열두 사도로 삼으셨어요. 그들에게 마음을 쏟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 그들을 필요로 할 때 야 제발 잠시만 나하고 옆에 좀 있어줘 그랬더니 예수님 가서 막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데 옆에서 잡혀 자고 있는 곡을 면서 그게 인간입니다.
야 잠시도 그럴 수 나고 깨어 있을 수 없었더냐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셨어dy. 그것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죠. 정말 예수님이 필요로 할 때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우리가 정말 주님 곁에 있었는가?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다 떠났어요. 주님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드릴 것처럼 얘기했던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어요.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했어요. 한 목숨 구하겠다고 예수님에게 소외감이 밀려오는 순간입 연약했던 여인들만 그 밑을 지켰어요.
하늘을 쳐다보니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늘 아버지께서도 고개를 돌리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 그리고 십자가의 현장을 주님 아버지가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도 외면하신 것. 예수님의 소외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 순간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주님은 불안했고 두려웠고 심히 슬퍼서 고민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일을 당하셔야 됐습니까? 자명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일을 당할 이유가 없어요. 그분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도 없어요. 우리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죄와 사망,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에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그 존귀하신 주님이 이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잔혹한 고문과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시고, 개세만의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고 눈물이 번복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근심하시고 통곡하시면서 그 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하는 심리적인 고통,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을 그 귀하신 몸에 감당하신 거예요.
이사야서 53장 5절에
그가 찔림,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이 고난을 당하셔야 될 이유가 주님께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유가 하나 있다면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셨다는 거예요. 사랑하셔서 대신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에요.
그렇다면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의 공로가 어떻게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 앞에 나가서 내 두려움과 불안, 죄와 내 허물을 고백하는 거예요. 나 이런 사람이라고 고백해야 됩니다. 가면 쓰지 말고 막 안 그런 척 그러지 말고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나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는 불안합니다. 늘 두렵습니다. 괴로워요. 힘들어요. 내 속에 분노가 일어나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요. 왜 인생이 이렇지라고 주님 앞에 나가서 자백하셔야 돼요.
그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하셨던 그 고난의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어둠이 떠나가게 돼요. 힐링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요. 신앙생활은 그저 와서 종교 생활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영적 실제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시고 또 십자가 지기 전에 당하셨던 그 고난의 공로가 그대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 속에 역사하는 영적 사건이에요. 그걸 경험하셔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고백해야 돼요. 나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여러분 다윗은 진짜 용맹한 사람이었어요. 전사 전쟁터에 나가면 싸웠다 하면 이 사람은 싸움은 최고예요. 그래서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쿠테타를 일으켰을 때 압살롬을 따르던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했던 게 뭐냐 하면 다윗이 싸움을 너무 잘한다는 거 전쟁의 영웅입니다. 자기 나라를 세우고 그 지경을 넓히고 수많은 전쟁에 승리했어요. 누구나 인정하는 전사였어요.
그런데 다윗의 마음속에도 저와 여러분들이 가진 그 감정이 그대로 있었어요. 때로는 분노가 일어나고 때로는 슬픔도 있고 때로는 두려움도 있고 불안도 있고 그때마다 다윗이 뭘 했느냐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그 감정을 쏟아놨어요. 왕의 옷을 입고 장군이지만 품위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서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 너무 힘들어요. 내 일을 감당하기도 힘들어요. 나 저 원수들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아요.
그걸 시편에서 아주 그 시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했지만 어떤 시편은 보면 막 제가 좀 막말로 표현하면 저것들 막 망했으면 좋겠어요.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뒈졌으면 좋겠어요. 나 정말 저런 거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요.
막 그런 표현이 들어 있어요.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시편 시편의 대부분이 다윗의 시편인데 그중에 대부분이 비탄시 자기 마음에 아픈 감정을 쏟아넣는 시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가지고 우리를 나무라 하시지 않아요. 솔직하게 쏟아놓을 때 비로소 치유가 일어나요. 여러분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이 돼서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그 모든 고통을 당하시고 그 감정을 경험하신 것은 저와 여러분들을 이해하시고 체험적으로 이해하시고 도와주시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사람들은 대개 어떤 경지에 오르면 사람들을 우습게 합니다. 아이고 왜 그런 거 가지고 힘들어해? 이 바보같이 그러면 도움이 안 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 힘들어 죽겠는데 믿어 믿어 믿어 이러면 안 된다 이거야 그걸 이해해줘야 돼요.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에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입장에 와서 하나님 나 힘들어요. 그러면 그래 힘들지 나도 당해봤다 하시면서 우리를 만져주시는 거 저는 이제 목사니까 목사는 우리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들은 그런 감정이 없을까 솔직히 말하면 있어요. 누가 믿게 행동하면 미움이 생기고 막 억울하면 분노도 생기고 시험들지 마세요.
예수님도 그러셨어요. 다만 그걸 여러분들에게 표현을 안 할 뿐이지 하나님 앞에 가서 쏟아놓을 뿐이에요. 무슨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취급할 때가 가장 힘들어요. 목사는 감정도 없고 완전히 믿음이 충만해서 아무 걱정도 없고 이 목사님은 믿으면 하나님이 다 도와주시죠.
근데 똑같은 현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그런데 차이가 뭐가 있냐 하면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쏟아놓느냐 아니면 내가 그냥 짊어지고 고민하느냐 그 차이예요. 쏟아놓으면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두 번째로는 주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가서 다 쏟아놓기만 하고 그냥 오면 안 돼요.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내가 남을 얻고 주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공연히 당하신 게 아닙니다. 공연히 죽으신 게 아니에요. 우리를 위해서 그것을 받아들려야 돼요.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두려움이 떠나가고 불안이 떠나가요. 근심과 걱정, 불면증, 우울증들이 떠나갑니다.
치유가 무슨 기도해 주면 막 무슨 뭐가 번쩍하면서 뭐가 들어가면서 치유가 일어나는 게 아니고 이런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을 마음으로 탁 신뢰하고 받아들일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그냥 예수님 참 힘드셨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애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도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나 때문에 그러셨으니까 그러면 그다음에 뭘 해야 되느냐 나 때문에 주님이 당하셔서 이루어 놓으신 그것을 받아서 누리는 지혜가 있어야 돼요. 주님은 그걸 위해서 고난을 당하신 거예요. 믿음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과 깊은 친교로 들어가야 돼요.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역사가 일어났다가 그게 지속되지 않는 이유는 지속적인 친교가 없기 때문에 그래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고난당하신 주님과 깊은 친교를 한번 시작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찬송가에도 너 주님과 사귀어 살면 새 생명이 넘치리라 하는 찬양이 있어요. 한 번 반짝하고 마는 게 아닙니다. 하늘의 생명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넘치는 역사가 와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님과 사귀어야 됩니다. 주님과 깊은 친교로 들어가면 새 생명이 흘러들어오고 그 교재가 더 깊어지면 차고 넘치는 역사가 일어나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할 때 잠깐이라도 성령 주님이 보내신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멀리 멀리 전화 돌리고 그럴 거 없어요. 그냥 내 안에 계시니까 듣고 계십니다. 잠깐이라도 주님 오늘 하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이런 일이 있는데 주님 도와주시고 동행해 주시고 인도해 주세요. 길지도 않아요. 30초 1분이라도 그분께 하루를 맡겨드리면서 시작하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그걸 원하시는 거예요. 하늘의 평화가 하늘로부터 흘러들어와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역사가 일어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와 허물과 불안과 두려움을 위해서 고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만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늘 보자를 만지는 거룩한 터치의 시간이면서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또 터치의 시간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만지실 때 우리 속에 불안, 두려움, 근심, 걱정, 분노, 슬픔, 모든 어둠의 것들이 물러가고 천국이 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