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분 | 개인 | 단체 |
---|---|---|
어른 | 3,500 | 3,500 |
학생 | 1,800 | 1,600 |
어린이 | 1,300 | 1,000 |
천은사
이 사찰은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지리산일주도로 입구에 위치한 절로서 828년(신라 흥덕왕 3년) 덕운조사와 인도의 중 「스루」가 터를 닦고 절을 지어 처음에는 절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 지었다 한다.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10년(조선 광해군 2년)에 혜정 선사가 다시 지었으나 숙종 2년(1676)에 불에 타고 그 이듬해 또 절을 지었으나 영조 49년(1773년)에 화재를 당해, 영조 51년(1775년)에 혜암선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일주문의 왼쪽에 부도밭이 있는데 소나무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못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일주문 현판에는 '지리산 천은사'글씨가 석자씩 세로 두줄로 씌어 있는데, 그 글씨가 구불구불 흐르는 물줄기 같기도 하고 지리산 속에 부는 바람 같기도 하여 눈길을 끈다. 천은사의 본래 이름은 828년 인도 승려 스루 선사가 '감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었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 하여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천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 제일 사찰'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조선 숙종 4년(1677년)부터 천은사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후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도 절의 수기를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는 일주문 현판 글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일주문은 절의 귀중한 내력을 담고 있는 셈이다.
구분 | 개인 | 단체 |
---|---|---|
어른 | 1,600 | 1,600 |
학생 | 700 | 600 |
어린이 | 400 | 300 |
연곡사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는 연곡사는 543년(백제 성왕 21년)에 화엄사종주 연기조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경내에는 동부도, 북부도를 비롯 하여 국보 2점과 보물 4점이 보존되어 있다.
1981년 3월 1일부터 당시 주지인 장숭부 스님이 정부지원과 시주로 옛날 법당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화강석과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새 법당을 신축한 이후 복원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사찰 이름을 연곡사라고 한 것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 지리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
한편 연곡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의병 고광순 순절비인데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는데 호남지방에서도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담양 출신 의병장 고광순. 그는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때 기습을 받아 패전하고 순절하였다, 이때 절도 불탔다. 이를 기리는 비석이 경내에 세워진 것이다.
구분 | 개인 | 단체 |
---|---|---|
어른 | 2,000 | 1,800 |
학생 | 1,000 | 800 |
어린이 | 700 | 500 |
문수사
좌청룡 우백호의 기운이 뚜렷한 구례군 지리산 문수사는 백제성왕 25년 (547년) 연기조사께서 창건하였다.
그 뒤 저자거리에서 불법을 선양한 원효대사, 해동 화엄의 종조가 된 의상법사을 비롯하여 윤필, 서산, 소요, 부유, 사명대사 등 여러 고승 대덕께서 수행정진한 제일의 문수도량이다.
고승 청허당 스님의 젊은 시절 수행처이기도 했는데 이때의 한 고사가 전해져 내려온다.
불법을 깨우치기 위해 용맹정진하던 중 걸승이 찾아와 함께 수행하기를 청했다. 처음에는 식량이 모자라 거절하기도 했지만 노승의 청이 너무 간절해 같이 수행하게 되었다. 밤잠을 자지않고 수행에 전념하던 어느 날 수행하던 노승이 새벽녁에 주장자를 앞산으로 날려 황룡으로 만들더니 그 룡을 타고 안개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문수사는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는 수행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의 난입으로 일부가 파괴된 뒤 불당을 조성하지 못한채 6.25를 맞아 전소되었고, 그 후 1984년 요사채를 세우고 1988년 옛 대웅전 터에 지금의 고금당선원을 건립하고 진입도로를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문수전, 삼성각, 고봉선원, 방장굴, 설선당 등을 건립, 석축을 쌓고 3층 법당 대웅전(목탑)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사성암
오산은 문척면 죽마리에 위치해 있는 해발 531미터의 호젓한 산으로 자라모양을 하고 있으며, 높지도 험하지도 않고 비경이 많아 가족등반이나 단체소풍코스로 사랑받는 정취어린 산이다.
죽연마을에서부터 지그재그로 산길을 돌아 오르다보면 발아래로 감아도는 섬진강물에 눈이 부시고 더 높이 오르면 지리산 줄기를 배경으로한 구례 일대의 전경이 한 폭의 그럼처럼 펼쳐진다.
바위사이에 자리한 사성암을 중심으로 풍월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12비경 앞에서 누구든 선인의 경지를 맛보지 않고서는 내려올 수 없는 산, 오르지 않으면 후회하고 두 번 다시 가지 않으면 후회하는 산이 바로 이 산이다.
사성암은 백제 성황 22년(544년)에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기록이 없다.
오산 주변에는 기이하고 괴상하게 생긴 돌(기암괴석)이 많아 소금강이라 부르고 있으며 암벽에는 서 있는 부처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를 마애여래입상이라 한다.
원래는 오산암이라 불리다가 이곳에서 4명의 높으신 승려인 의상대사,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선사가 수도하였다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지리산
지리산은 태백산맥이 서남으로 갈라지면서 소백산맥을 이루고 추풍령에서 일어섰다가 다시 한려수도로 흘러나가는 중턱에 굽이치며 우뚝 솟은 천하의 웅산으로 남한 제2의 고봉 천왕봉으로부터 서쪽의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만도 반야봉, 토끼봉 등 고산 준봉이 10여개나 줄지어 버티고 있어 웅산 중의 웅산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자(1967년), 최대면적의 육상공원(471.75㎢)으로서 우리나라 산악의 대표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을 고루 갖춰 흔히 민족의 영산으로 불릴만큼 우리의 정서속에 깊이 새겨진 자연유산인 지리산(智異山)은 산이 넓은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두류(頭流), 방장(方丈), 지리(地理또는地利), 불복(不伏), 반역(反逆), 적구산(赤拘山)으로 불려온 산 이름에서 벌써 지리산의 속내와 아픔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추었다 해서 두류(頭流)로 한다 라고 썼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산세가 멀리 넓게 둘러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순 우리말 '둘러' '두루' '두리' 에서 음을 따와 한문으로 쓰다보니 '두류'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불교적 용어로 대지문수사리보살의 지자와 리자를 따와서 지리산으로 불리다가 '지혜로운 이인이 많은 산' 이라는 뜻으로 변형돼 현재는 지리산으로 쓰인다고도 하며, 일부에서는 지리산이 크고 웅장해 「지루하다」의 남녘 사투리 「지리하다」에서 자연스럽게 변형된 말이라고도 한다. 방장산은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중국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지리산을 지칭하는 이름인 동시에 불교적인 의미로도 쓰이는 산이름이다.『삼국사기』는 지리산(地利山)으로 표기 했다가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고쳐 썼다. '지리산(地利山)'은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 하여 문수사리(文殊師利)의 글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며, '불복(不伏)'과 '반역(反逆)'은 태조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에서만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유로 태조에 등극한 뒤에 지리산을 불복산, 반역산이라 하고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고」라는 서산대사의 비유가 있듯 지리산은 날카롭고 빼어남은 부족하나 웅장하고 두리뭉실한 기운이 돋보인다.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이 대표적이며, 천왕봉에서 노고단을 잇는 100리 능선에는 1천 5백미터가 넘는 고봉이 10개, 1천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나 있을 정도로 높고 크다. 평평한 고원지대도 많이 발달해 야생화나 철쭉 등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 자연해설프로그램이란?
국립공원의 자연생태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직접자연속에서 느끼고 배우는 자연학습입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공원별 특성에 맞게 자연해설, 갯벌생태해설, 역사문화해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국립공원에서는 노고단, 화엄계곡 자연학습탐방로에서 자연해설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노고단 자연탐방은 이렇게
- 정해진 탐방로만 이용합니다.
- 큰소리를 내거나 뛰지 않습니다.
- 주류 및 음식물을 드시지 않습니다.
- 동식물들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 노고단에는 발자국도 남기지 않습니다.
지리산 10경 천왕일출
회색빛 구름바다 저멀리 동녘 지평선 위에 서기(瑞氣)가 어리기 시작하여 붉은 광채가 길게 번져나 가고 극광(極光)이 퍼지면 원시의 개벽을 보는 것 같아 장엄하기만 하다.
역광으로 반사되는 은빛 구름에 봉우리만 까만선을 그리며 자태를 드러내고 세상은 천연 커튼이 열리면서 지리산의 환타지는 시작된다.
노고운해
자연의 조화가 이뤄 낸 신비의 절경이다. 남쪽으로부터 구름과 안개가 파도처럼 밀려와 노고단을 감싸 안을 때 지리산은 홀연히 바다가 되어 버린다.
구름 만리 바다가 되면 높은 산봉우리는 점점이 섬이 되어 다도해의 절경을 이룬다. 그 구름 아래서 천둥번개가 치고 먹장구름이 비를 몰아 억수같은비를 쏟아 낼 때 구름위에는 밝은 태양이 산아래 구름을 비춘다. 구름위는 신선의 세계가 되고 구름아래는 세속이 되는 기가 막힌 장관이 연출된다.
반야낙조
해발 1,751m로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은 노고단에서 바라보면 마치 여인네의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있는 봉우리다. 노고단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3시간 30분 가량의 산행 코스인 반야봉은 사방이 절벽 지대로 고산(高山)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때로는 구름 바다를 검붉게 물들이며, 때로는 마지막 정염(情焰)을 불사르듯 선홍(鮮紅)의 알몸으로 서서히 스러지는 태양과 마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아득히 먼 시원(始原)의 날에 시작된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가 끝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뉘 가는 길이 저토록 눈시리게아름다우랴.
벽소명월
「어두운 밤, 숲 뒤의 봉우리 위에 만월이 떠오르면 그 극한의 달빛이 천지에 부스러지는 찬란한 고요는 벽소령(碧宵嶺)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심산유곡 고사목과 밀림속에서 허공에 걸린 달을 쳐다보면 여기가 바로 선경이 아닌가 싶다.
연하선경
고색 창연하게 이끼 낀 기암괴석 사이에 향기높은 기화요초(琪花搖草)가 철따라 피어나는 선경으로 위에는 자연고사목 지대가 펼쳐져 있고 아래로는 수백 년이 지나도 푸르름을 자랑하는 원시림이 가득 하다.
불일현폭
금강산을 방불케 하는 청학봉(淸鶴峰과) 백학봉(白鶴峰) 사이의 험준한 골짜기속의 깊은 낭떠러지 폭포로 오색 무지개가 걸리고 백옥같은 물방울이 서린다.
60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장쾌한 폭포 소리가 온몸을 파고드는 냉기는 몸과 마음이 얼어 붙는 긴장감을 느낀다.
피아골단풍
구례 읍내를 거쳐 하동쪽으로 난 길을 달리는 기분은 어느 때고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 섬진강의 투명한 물결이 시샘하듯 함께 달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읍내에서 출발해 10여분을 달리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인 외곡리에 이르면 소담스런 소나무 숲이 보인다.
이곳 역시 여름철이면 인파가 몰리는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피아골 상류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계곡물이 섬진강에 다다르기 직전에 잠시 머무르는 곳이다.
세석철쭉
봄이면 난만(爛漫)히 피어나는 철쭉으로 온통 꽃사태를 이루는 세석평전은 30리가 넘는 드넓은 평원으로 남녘 최대의 고원이다.
이름 그대로 잔돌(細石)이 많고, 시원한 샘물도 콸콸 쏟아지는 세석평전에는 수십만 그루의 철쭉이 5월초부터 6월말까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며 한바탕 흐트러진 잔치가 벌어진다
칠선계곡
천왕봉에 뿌리를 둔 급류가 절벽을 뚫고 깊은 계곡을 이루는 우리나라 3대계곡 중의 하나로 (七仙洞)에서부터 계곡은 오를수록 선경으로 장관을 이룬다.
섬진청류
산이 높으면 물도 맑다.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남해에 이르는 섬진강(蟾津江)은 그 물이 맑고 푸르러 한 폭의 파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강 양쪽에 펼쳐진 백사장도 하얀 명주천을 깐 듯 아름답다.
급류를 타고 오르내리며 은어떼를 낚는 어부의 모습도 아름답기만 하다.
섬진강
섬진강은 노령산맥의 동쪽 경사면과 소백산맥의 서쪽 경사면인 전북 진안군 마이산에서 발원한다. 섬진강은 노령산맥의 동쪽 경사면과 소백산맥의 서쪽 경사면인 전북 진안군 마이산에서 발원한다.
남해의 광양만에 도달하기까지 212.3㎞를 흘러오면서 순창군 적성면의 오수천과 만나고 남원시의 요천과 합류하는가하면 보성강과 물길을 섞어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 부터 경상도와 전라도의 도 경계선을 이룬다. 본디 섬진강은 모래가람, 다사강, 사천, 기문화, 두치강으로 불릴 만큼 고운 모래로 유명하다.
1385년 고려 우왕 11년에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하였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쪽으로 피해 갔다는 전설이 있어 이때부터 두꺼비 “섬”자를 붙여 섬진강이라고 불렀다.
남한 5대강 중 공해가 없는 최후의 청류로 꼽히는 섬진강은 구례에 이르러 더더욱 푸르고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뽑낸다.
하류로 접어들면서 지리산과 백운산이 맞절하는 듯한 80리 협곡, 하얀 백사장등 숱한 풍치를 만들어 낸다. 섬진강은 어느 특정지역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강의 구비 구비가 휴양지로서 알맞은 곳이라 할만큼 물 맑고 공해 없고 넓은 백사장이 곳곳에 전개돼 있다.
더욱이 여울과 작은 호수가 또한 산재해 있어 강변놀이의 흥취를 더해주고 있다. 새벽 안개의 신비스러움에 싸인 청류 섬진강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은어를 비롯하여 참게 등 30여 종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다. 섬진강 주변의 식당에서는 은어회와 은어구이를 맛볼 수 있으며 참게의 시원한 맛을 곁들인 민물매운탕은 여행객의 쌓인 피로를 순간에 녹이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전남 곡성군 압록유원지에서 부터 시작하여 경남 하동까지 50km의 섬진강을 끼고 달리는 우리나라 제일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때로는 급한 물살로, 때로는 멈춘 듯이 흐르는 섬진강의 물줄기를 즐기며 달리노라면 머리속이 티 하나 없이 맑아진다.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유명한 천년고찰과 계곡, 문화유적들을 둘러볼 수 도 있고 마음 닿는 강변 백사장에 주저앉아 피서나, 망중한을 즐겨도 부담이 없다. 특히 교통량이 거의 없어 드라이브 코스로는 최적지라 할 수 있다.
간전면 하천리에서는 잠시 차를 세워두고 삐걱삐걱 나룻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너가 화개장터를 둘러보고 오는 것도 멋진 추억이 된다.
또 섬진강을 따라 100여개의 횟집과 전망좋은 식당이 즐비해 입도 즐겁다.
피아골계곡
연곡사에서 4km쯤 산길을 오르면 천고의 울창한 원시림 골짜기가 시작돼 반야봉, 임걸령, 불무장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골짜기가 피아골이다. 지리산중에 있는 계곡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의 하나로 꼽힌다.
이 계곡은 맑고 풍부한 계곡물과 함께 봄이면 진달래, 여름에는 녹음,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으로 사시사철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10월 하순의 단풍은 온산을 불태우듯 불게 물들인다. 계곡입구부터 삼홍소가지 물들인 단풍과 붉은 빛에 젖은 계곡과 삼홍소 바닥의 바위까지 붉어 장관을 이룬다.
수락폭포
산동면 소재지인 원촌마을에서 4km 거리인 수기리에 위치한 수락폭포는 하늘에서 은가루가 쏟아지는 듯한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는 높이 15m의 폭포로 여름철이면 많은 부녀자들이 낙수를 맞으며 더위를 식히는데 신경통, 근육통, 산후통에 효험이 있다하여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화엄사 계곡
화엄사 계곡은 일찍부터 지리산을 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길로서, 특히 노고단을 찾는 등산객과 화엄사를 찾는 관광객들이 수시로 찾아드는 곳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길이 약 8km의 계곡으로 오르는데 4시간 정도 소요된다. 계곡은 계류(시내)를 따라 오르므로 울창한 수림아래 시원한 물소리를 마냥 들으며 갈 수 있다. 도중에 용소며 크고 작은 폭포가 어울려 멋진 광경을 자아낸다.
용지동계곡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마주본 백운산의 계곡 가운데 하나이다.
간전면 금산리 용지동 마을에서 효곡저수지에 이르는 3km의 계곡으로 수량도 풍부하고 곳곳에 용소가 즐비해 가족단위 휴양지로 적격이다.
용수동 마을 앞에 있는 백룡폭포는 높이 10m로 급하게 떨어지는 폭포수가 일품이다.
녹음이 울울이 쳐진 사이로 폭포가 시작되는 곳만 하늘이 열려 시원하기 그지없다. 계곡 곳곳에 야영터가 있어 야영을 하기에도 편리하다.
문수골계곡
지리산(1,915m)의 길상봉(吉祥峰)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의 서쪽에 있다. 지리산의 계곡 가운데 유일하게 개발되지 않아 오염되지 않은 물과 원시림, 알려지지 않은 노고단 등산로 등이 있어 오지형 청정 휴양지로 알려진 곳이다. 물이 차가워 여름철 피서를 즐기기에 좋으며, 메기 낚시도 할 수 있다. 문수원의 중앙 통로를 거쳐 형제봉까지 간이등반로(대략 왕복 1시간)가 개설되어 있고, 문수원의 정면으로 노고단을 지나 천왕봉까지 무료 등산로가 있어 한적한 등산을 즐길 수 있다.
주변에 화엄사·연곡사·쌍계사·천은사·문수사 등 사찰이 많고, 대규모의 지리산온천랜드가 30분 거리에 있다. 봄철이면 고로쇠나무의 수액이 채취된다.
매천황현선생은 조선말기 절의를 지킨 우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입니다.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나 34세에 생원회시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그러나 벼슬을 마다하고 구례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쳤고 개화 운동에 일찍 눈을 떠 근대식 학교를 세우는 등 서양을 이기기 위해서는 서양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껴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나이 56세인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습니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립니다. 생전에 살았던 곳에 그의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1955년에 세운 이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입니다.
현재 선생의 유품과 고서 등이 매천사당 부지 내에 위치한 매천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 중 《매천집》《매천야록》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제1권으로 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송만갑은 일곱살이 되던 해부터 부친 송우룡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동편제의 법통을 이은 집안으로서 당연히 송만갑도 동편제 소리를 익혔다. 당시 판소리는 명창들의 출신지나 노래하는 방법에 따라 동편제와 서편제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송흥록의 법제를 이어받은 동편제는 창법이 웅장하면서 맑고 깨끗하며 비교적 젊잖토록 부른다. 구례, 남원, 순창 등지에서 주로불리워지는 소리다. 그에 반해 서편제는 광주, 나주, 보성, 해남, 강진 등지에서 불려진 것으로 박유전의 법제를 이어 받았다.
부드럽고 애절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서편제 창법의 특징이다. 동편제의 거두인 만갑의 부친은 가문의 법제를 최고로 여기는 예술가였다. 그러나 송만갑은“창은 어떤 틀에 얽매어 부르는 것보다 자유로운 감정을 나타낼 수있어야 하는것”이란 생각을 가진 자유로운 예술가였기 때문에 집안과 양립할 수 없었다.
어느날 서편제의 선배 정창업의 소리를 듣고 동편제에 새롭고 통속적인 소리조를 가미하여 창을 했다. 이일이 화근이 되어 송만갑은 집을 떠나게 되고 이때부터 동편제 개혁을 위한 송만갑의 법통개혁이 시작되었다. 동편의 체질에 서편의맛을 가미해 이를 다시 동편화 시켜 판소리의 창법을 개척하는데 성공하였다. 세인들은 이것을 송만갑제라고찬양했다.
송만갑에 대한 평판은 온나라 안에 퍼져 그가 판소리를 하는 곳에는 언제나 인산인해를이뤘고 불원천리 마다 않고 달려오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의 전라감사는 송만갑에게 참봉의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송만갑에 대한 소문은 어느 덧 고종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고종은 어전에서 판소리를 하도록 했다. 송만갑의 판소리를 듣고난 고종은 크게 감복한 나머지 감찰 벼슬을 내리고‘궁내부 별순검’에 임명, 대궐에서 살도록 했다. 그 후에도 고종은 송만갑을 불러 그의 판소리를듣는것을 커다란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성량은 아무리 긴 창을 하더라도 목이 쉬지 않았으며가성은 지척에서 보다 멀리서 더욱 뛰어났다.
그의 창조는 마치 높은 절벽에서 내리지르는 폭포수와같이 한없이 길고 긴 한숨을 담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끝없는 감흥에 취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많은명창들이 그의 사사(師事)를 받기 위해 구례로 이주해 왔고 그로 인해 구례는 가향(哥鄕)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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