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1:15-22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리스도는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컴음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이 하시는 일과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분노하였습니다”(마21:15)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에 가장 적극적이어야 할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가장 앞장서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전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성전의 참된 주인으로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자들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위를 가졌다는 증거로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다면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오히려 내심으로 초조해 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의 영광을 시샘했습니다. 그레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품은 적의와 시샘이 “예수의 하시는 놀라운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아들을 보고 분하여”(마21:15)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아이들이 공공연히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치며 외치는 것을 듣자 더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규정, 즉 장로의 유전이 백성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탁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람들로부터 높여지고 영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을 포함한 대중들로부터 메시야라는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돌려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할 수 없는 영광이 그리스도에게 돌려지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더욱 분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시샘과 분노는 헛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말을 어떻게 반박하였습니까?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21:16)
이 말씀은 시편 8:2의 인용입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2)
이 말씀은 주의 대적들 때문에 하나님이 어린아이와 젖먹이들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삼는다는 내용입니다. 다윗의 이 말씀은 주님의 대적들 때문에 모두가 침묵을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젖을 빠는 유아들까지도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하실 것이기 때문에 다른 대변자가 필요없다는 말씀입니다. 젖먹이들은 스스로는 벙어리입니다. 그러나 젖먹이들이 산모의 배속에서 어떻게 형성됩니까? 우리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신비를 아직도 정확히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모의 배속에서 한 생명체가 잉태되어 약 9개월(혹은 10개월)간 산모의 배속에서 양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출산하자마자 갓 태어난 유아에게 먹을 것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를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해와 달에게는 언어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울려퍼지는 노래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널려 편다고 시편 19:2-4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세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와 말씀의 해설자로 세워서 백성들이 그들의 입술에서 율법에 대한 지식을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말2:7)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분노하며 대적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죄악은 진리의 불꽃을 꺼버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지향하고, 율법이 마침이 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가르침을 숨기고 없애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의 진리를 꺼버리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하나님이 젖먹이들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선포되게 하신다고 다윗이 선포하는 것처럼(시8:2) 하나님은 돌들에게라도 소리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눅19:40). 어린아아들과 젖먹이들에게라도 메시야의 강림과 입성을 찬양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을 찬양하는 첫 음성이 무지한 군중들과 어린아이들로부터 들려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진리에 대한 정당한 증인이 되어야 할 제사장들로부터 진리가 탄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당한 증인이 되어야 할 제사장들에게 수치스럽게 어린아이들을 선택하셔서 메시야를 찬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8:2의 말씀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있는 지금 현재의 상황에 맞는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위대한 일들은 어린아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약한 도구들의 찬양을 통해서 그의 독생자를 메시야로 보내신 그의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들의 찬양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나라의 증인이 모자르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의 아들의 나라의 증인이 모자르게 두시느니 차라리 돌에게 입과 혀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떠나 성 밖 베다니에 가서 하룻밤을 묵으시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그때 그리스도는 배가 고프셨습니다(18) 마침 그리스도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무화과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시고 무화과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곧 “무화과 나무가 말랐습니다”(19) 본문에서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고 입사귀만 있었던 것은 열매를 맺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는 철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화과 나무에는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는 열매가 없는 시기라는 것을 아시면서 죄 없는 나무에게 저주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또한 그리스도는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아시면서 일부러 무화과나무에 접근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배가 고프신데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화가 나셔서 저주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즉 못된 성미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육신의 배고픔을,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방향으로 극복하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주님은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눈을 돌려서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시는 데에서 그의 양식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배고픔을 통해서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계기로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무화과 나무가 마른 기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권능과 공의에 대한 실례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저주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힘을 보게 됩니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적을 배푸실 때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저주를 내리는 그의 권능을 무화과 나무에게서 입증하시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저주의 말씀은 하나의 본보기였습니다. 주님이 그의 권능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지금이 열매를 맺는 때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 상관 없이 무화과 나무로부터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열매를 요구하십니다.(마21:34참조)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부터 성령의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외식자들(위선자)은 무치 본문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와 같습니다. 물론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는 먼저는 유대인들의 상태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의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가 자신을 기쁘게 할 열매를 요구하시지만, 열매는 고사하고 무화과 나무 잎만 있는 무화과 나무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은 빼앗길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한 후로는 그들은 점점 강퍅하여 갔습니다. 유대의 왕국 자체는 더 이상 교회가 되지 못하고 악하고 파리하여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나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라고 말한 이후로 그들은 빨리 말라 버렸습니다. 비록 유대인들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자들은 계속 있어왔지만 유대왕국 전체로는 “영원토록 말라버린 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도록 명령하시는 것은 축복의 말씀이지만 반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우리에게 위선자들의 종말이 얼마나 뼈아픈 것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20-22절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신뢰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22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앙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즉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요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신앙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본문 21절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잡아 누리도록 할 것입니다. 신앙은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21) 신앙은 의심을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확실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후하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참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참으로 믿는 신자라면 하나님에게 기도로 매어달려야 합니다. 신앙의 진정한 테스트는 우리의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는 표현은 우리의 변덕에 따라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신앙 다음(21)에 기도(22)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기도는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물론 성령이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4)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주님은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2)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의 말씀의 격려가 없이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내용을 읽을 때 우리는 신뢰를 가지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지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다면 우리는 기도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 믿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기도는 올바른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권고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서 요란을 떨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 시간에 십일조를 내라고 강권합니까? 예배 시간에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칩시다. 왜 전화를 걸어서 십일조 내라고 하소연 합니까? 왜 여기 저기 찾아가서 조르고 부탁합니까?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