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는
늘 자신이 작이지지는 않는지 경계한다.
작아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
자동적인 에고 복구장치가 작용해
"나"라는 마음속 형상을 복구시킨다.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보자)
누군가게게 비난 받거나 비판을 받으면
(에고는 작아졌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자기 정당화,
방어,
맞비난에 나선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아진)손상된 자아를 복구하는 것이다.
에고의 관심은
진실보다는
자기 보존에 있다.
'나'라는 마음속 형상 보존이 더 중요하다.
(사례를 들여다 보면)
도로에서 다른 운전자에게
'멍청이'라는 말을 듣고서
되받아서 소리를 지르는 지극히 평범한 행동들도
사실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에고 복구 장치인 것이다.
가장 흔한 에고 복구 장치 중 하나는
화내는 일이다.
이는 일시적이지만
강력한 에고 확대 효과가 있다.
모든 에고 복구 장치는
에고에게는 완벽한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기능장애 행위이다.
이 기능장애 행위 중에서도
특히 극단적인 것은
물리적 폭력,
그리고
과대망상이라는 형태의 자기기만이다.
(따라서)
영적수행을 하기 위해서
강력히 실천해야 할 방법은
에고의 작아짐이 일어날 때
그것을 복구하려는 시도 없이
의식적으로 작아진체 두는 것이다.
때때로 실행해 볼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비판받거나
누군가에게 험담을 들었을 때
곧바로 반박과 자기방어를 시도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이미지가 축소되도록 놓아두고,
그때 자신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것에 깨어 있는 것이다.
몇초 동안은
자기 자신이 작아졌다는 불쾌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생명력으로 가득한 넓은 공간을 감지할 것이다.
당신은 전혀 작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확장되었다.
그때 당신은 놀라운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작아진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에 대해 외부적으로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내면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있으면
실제로 어떤 것도 작아지지 않았고
오히쳐 '작아짐'으로써 더 커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거나
자신의 형상을 강화하려고 하지 않으면
형상의 동일화
즉 자기 마음속 이미지로부터
걸어나올 수 있다.
에고이 관점에서 작아짐으로써
당신은 역으로 더 넓어지며,
순수한 있음이 앞으로 나올 여유 공간이 생긴다.
그 때 진정한 힘이,
형상을 초월한 진정한 당신이,
분명이 약해진 형상을 통해 빛을 발한다.
예수님이
너 자신을 부정하라,
너의 다른 쪽 밤을 내밀어라 라고 말한 것은 이 의미이다.
물론 이것은
학대를 감수하거나
무의식적인 사람들이 희싱자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방에게 단호하게
그만두라 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에고의 자기방어가 없을 때
당신의 말에는 힘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댕을과는 다르다.
필요하다면 단호하고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부정적 성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질적으로 수준 높은 거부'라고 내가 부르는 것이다.
자신이 특별히
아무 존재도 아님에 만족하고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주의 힘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에고에게 약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유일하게 진정한 힘이다.
이 영적 진리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가치관,
우리 시대가 사람들에게 조건 지우는 행동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산이 되기보다는
천하의 깊은 골짜기가 되라고
노자의 도덕경은 가리킨다.
그러면 당신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잇고,
모든 것이 너에게 흘러들어 올 것이이다.라고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비슷한 의미의 우화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초청을 받았을 때 차라리 가서 가장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에게
벗이여 올라와서 앉으라고 할것이다.
그때에는 함께 테이불에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존경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높이는 자는 누구나 낮아지고
자기를 낯추는 자는 높아지기 때문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