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희 때문에 하체가 뻐근해 왔다.
지난밤에 그녀의 희고 뽀얀 육체를 그냥 두고 소파에서 잔 것이 후회되었다.
“누가 그냥 자랬나?
왜 그냥 잤어요?”
조윤희가 탄력 있는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망할 놈의 가시내, 어쩌자고 나를 자극하는 거야?
나는 그녀의 탱탱한 나신을 생각하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에 만날 때는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랬어.”
“재미없어. 어떻게 여자를 두고 그냥 자는 남자가 있어요?”
물론 그런 남자 놈은 벼락을 맞아 죽을 놈이다.
나는 조윤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밥을 사달라고 말했다.
조윤희가 나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윤희의 접근이 싫지 않았다.
젊은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은 내가 항상 바라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조윤희에게는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소장님, 이혜원씨라는 분에게서 전화왔어요.”
이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내가
사무실로 돌아왔다가 퇴근하려고 했을 때였다.
이미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웠으나 비가 오려는지 공기가 눅눅했다.
“일은 시작하셨어요?”
“예.”
“오늘 회사에서 신인 탤런트가 매를 맞고
룸살롱으로 끌려가서 접대하는 것 같아요.
왜 매를 맞았는지 알아보세요.
제가 문자로 그 탤런트 전화번호와 이름을 넣어 드릴게요.”
이혜원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기획사 사장이 무엇인가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소장님, 혹시 탤런트 이혜원이에요?”
미스 주가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스 주도 연예인에게 관심이 많다.
“어머, 무슨 일이래요?
이혜원씨가 왜 소장님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미스 주가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나는 이혜원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주고
절대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미스 주는 죽어도 비밀을 지키겠다고 했으나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기획사 사장에 대해서 천천히 생각했다.
신인 탤런트가 매를 맞고 접대하기 위해 끌려갔는데
누구를 접대하려는 것일까.
그때 이혜원에게서 문자가 왔다.
신인 탤런트의 이름 양희와 그녀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룸살롱 이름도 적혀 있었다.
양희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신인인 모양이었다.
이혜원은 그들이 논현동의 룸살롱으로 양희를 데리고 갔다고 했다.
나는 사무실을 나와 김용호 등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달려갔다.
“현관으로 내려 와라.”
나는 호텔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김용호 등에게 지시했다.
김용호 등이 일제히 호텔 현관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들을 차에 태우고 논현동의 룸살롱으로 달려갔다.
차창으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글:이고운그림:김선학 <291>
나는 차창으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어서인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운전할 줄 알아?”
룸살롱 앞에 이르자 차에서 내리면서 물었다.
“저희들 다 할 줄 압니다.”
김용호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한 사람은 남아 있고 나머지는 따라와.”
나는 김용호 등을 데리고 룸살롱으로 들어갔다.
룸살롱 입구는 조용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자 상당히 고급 룸살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룸살롱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웨이터들이 일제히 인사를 하고 마담이 달려왔다.
“VIP실로 안내해라.”
김용호가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웨이터와 마담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VIP실로 안내했다.
룸은 넓으면서도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신인 탤런트 양희는 어느 룸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술과 안주는 알아서 들여보내.”
나는 웨이터에게 지시했다.
웨이터가 물러가자 마담이 아가씨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들어와 앉아.
나머지는 돌아가고….”
나는 아가씨들 네 명을 자리에 앉게 했다.
즐기려고 온 것이 아니라서 아가씨들을 굳이 고르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들이 차례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내 술과 안주가 들어오고 아가씨들이 술을 따랐다.
“동생들 한 잔 하지.
서울까지 오느라고 고생했어.”
나는 위스키 잔을 들고 김용호 등에게 말했다.
신경은 바깥쪽에 기울였다.
“감사합니다.”
김용호 등이 일제히 잔을 들었다.
나는 스트레이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사장님, 미스 한이에요. 예쁘게 봐주세요.”
내 옆에 앉은 아가씨가 눈웃음을 쳤다.
브래지어나 다름없는 흰색 셔츠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래. 너도 한 잔 해라.”
나는 미스 한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김용호를 비롯하여 행동대원들은 긴장을 풀지 않고
조심스럽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강두칠에게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여기에 조폭들 있냐?”
나는 취기가 오르자 미스 한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물었다.
“조폭이요? 저희는 잘 몰라요.”
미스 한이 눈웃음을 쳤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혜원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혜원의 기획사 사장은 조폭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동근이파의 보스 동근이가 배후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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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동근이파를 무력화시켜야 이혜원의 기획사 사장을 연예계에서 몰아낼 수 있다.
‘일단 양희의 일부터 해결하자.’
나는 양희가 취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못하면 룸살롱의 비어 있는 룸에서도 일이 벌어질 수가 있다. 최근의 룸살롱들은 아가씨를 2차로 데리고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룸에서 즉석으로 일을 치르게 하는 곳도 적지 않다.
‘아가씨를 도와주려는 사람이야. 5분 후에 룸에서 나와 화장실로 와.’
나는 양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행히 양희에게서 알았다는 답신이 왔다. 나는 다시 술 한 잔을 마신 뒤에 룸에서 나왔다. 룸살롱 복도에 양희는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는데 예쁘장한 아가씨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양희?”
나는 그 아가씨가 양희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네.”
양희가 나에게 다가왔다. 멀리서 웨이터가 양희를 살피고 있었다.
“도와줄 테니까 사촌 오빠라고 해라. 여기서 술 마시는 거 싫지?”
나는 양희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양희는 진하게 화장을 했으나 얼굴이 앳되었다. 어쩌면 고등학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
양희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불안해하지 마. 탤런트 이혜원씨 알지? 이혜원씨가 도와주라고 부탁했어.”
“정말이요?”
양희가 그때서야 반색을 했다. 무명의 신인 탤런트인 양희에게는 이혜원이 하늘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나를 따라와.”
나는 양희의 손을 잡고 내가 술을 마시던 룸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웨이터가 황급히 달려왔다.
“손님, 이분은 술집 아가씨가 아닙니다.”
웨이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도 알아. 아무려면 내 사촌동생이 술 따르고 있을 줄 알았어?”
나는 눈을 부릅뜨고 웨이터를 윽박질렀다. 웨이터가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웨이터를 밀치고 양희를 데리고 룸으로 들어왔다. 아가씨들과 김용호 등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가씨들은 나가고 지배인이나 상무 오라고 해.”
나는 아가씨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아가씨들이 웅성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고등학생이지?”
나는 양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양희가 얼굴이 앳되었기 때문에 학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네.”
양희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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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의 목덜미가 뽀얗게 희다.
“몇 학년?”
“2학년이에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창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에 연예인이 되겠다고 기획사에 뛰어들었으니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때 기획사 사장을 따라다니던 사내들이 룸에 나타났다.
“우리 아가씨를 데리러 왔습니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나와 김용호 등을 살핀 뒤에 말했다. 그의 뒤에는 기획사 사장까지 서 있었다.
“누가 너희들 아가씨야? 얘는 내 사촌동생이야.”
“그런 건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사장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학생을 보호해라.”
나는 김용호에게 지시하고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밀치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복도에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놓은 40대 사내가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뭘 하는 겁니까?”
플래시가 터지자 기획사 사장이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넥타이를 맨 사장도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휴대폰 뺏아!”
넥타이를 맨 사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왼쪽에서 달려드는 사내의 무릎팍을 발로 찼다. 놈이 어이쿠 하는 신음을 내지르면서 고개를 숙이자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했다. 놈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나뒹굴었다.
오른쪽에서 달려드는 놈에게는 정권으로 복부를 내지른 뒤에 구둣발로 턱을 돌려 찼다. 놈의 입에서 피가 확 뿜어지면서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너… 이 새끼… 여기가 어딘지 알고….”
기획사 사장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을 쳤다. 놈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넌 뭐야?”
나는 기획사 사장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여기는 동근이 형님 구역이야.”
기획사 사장이 우물쭈물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이게 미쳤나? 고등학생을 데리고 술집에 와서는 동근이 형님을 찾아?”
나는 기획사 사장의 복부에 주먹을 내질렀다.
“당신들은 누구야? 너희들 죽을줄 알아!”
기획사 사장이 복부를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동근이가 어떤 새끼인지 몰라도 한 번 와서 낯짝이나 보이라고 해라.”
나는 코웃음을 치고 룸으로 들어갔다. 김용호 등은 일어서 있었고 양희는 공포에 질려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손수 위스키를 따라 마셨다.
놈들에게 도발을 했으니 반드시 그냥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이고운그림:김선학 <294>
나는 문을 열어 놓은 채 룸으로 들어왔다. 벌써 옆에 있는 룸에서 아가씨들이 내다보고 웨이터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김용호가 나를 쳐다보았다.
“뭘 어떻게 해?”
“때려 부수고 접수할까요?”
김용호는 명령만 내리면 룸살롱을 박살낼 기세였다. 그러나 나는 손을 저어 만류했다. 그때 30대 후반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러자 아가씨들과 웨이터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
“무슨 일입니까?”
사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별일 아니야. 술 좀 마시는데 애들이 귀찮게 굴어서 말이야.”
나는 사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여기는 동근이 형님 나와바리입니다.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사내는 나를 짓누르듯이 위압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동근이가 뉘집 똥개야? 개새끼나 소변으로 영역 표시를 하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김용호 등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사내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휴대폰 주십시오.”
“내 휴대폰을 왜 줘?”
“사진만 지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알 필요 없어.”
“아가씨는 우리에게 넘겨주십시오.”
“내 사촌동생이라니까. 사촌동생을 넘겨 달란 말이야? 뭐 이런 개새끼가 있어?”
나는 안주접시를 놈의 머리에 던졌다. 놈이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의도적으로 놈들에게 도발한 것이다.
“집에 데려다 줄까?”
나는 무서워서 떨고 있는 양희에게 물었다.
“저… 숙소에 있어요.”
“숙소라니 무슨 숙소?”
“연예인이 되려는 아이들하고 회사 숙소에 있어요.”
“회사에서 관리하는 숙소야?”
“네.”
“그럼 숙소에 들어가지 마.”
나는 적당하게 시간을 끈 뒤에 양희를 데리고 룸살롱을 나오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기획사 사장과 넥타이를 맨 사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글:이고운그림:김선학 <295>
양희는 그들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룸살롱을 나오기도 전에 우락부락한 사내 7, 8명이 각목을 들고 들이닥쳤다.
“형님,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김용호 등이 일제히 뛰어나갔다.
“피는 보지 마라.”
나는 김용호 등에게 지시했다. 룸살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룸살롱 패거리와 김용호 등이 맞붙어 육박전이 벌어졌다. 김용호 등은 강두칠이 선발하여 보낸 만큼 상당한 주먹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룸살롱 패거리에는 운동을 한 떡대가 끼어 있어 시간이 흐르자 그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양희야, 옷 좀 갖고 있어라.”
나는 상의를 벗어 양희에게 건네주고 떡대에게 다가갔다. 한때 서울 시내에서 내 이름만 들어도 똘마니들이 벌벌 떨었었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떡대가 나를 쏘아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말하는 것 좀 보게. 동근이도 나에게는 그렇게 말 못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을 날려 떡대의 명치에 이단옆차기로 구둣발을 꽂았다. 놈이 그 충격으로 휘청하자 이번에는 돌려차기로 턱을 날렸다. 놈은 콰당 소리와 함께 복도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똘마니들이 일제히 각목을 휘두르면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놈들의 각목을 피하면서 빠르게 제압했다.
“동근이한테 전해라. 옛날의 태수 형님이 돌아왔다고….”
나는 손을 탁탁 털고 양희를 데리고 룸살롱을 나왔다. 밖에는 어느 사이에 함박눈이 자욱하게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라. 자세한 것은 내일 얘기하자.”
나는 양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양정희와 아줌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양희에게 밥을 먹게 하고 재우라고 말했다. 나는 거실에서 정원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지금쯤 동근이파는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일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김용호에게 지시하여 동근이파가 장악하고 있는 논현동의 술집 명단을 작성하게 했다. 이혜원에게는 전화를 걸어 양희를 구출하여 집에 데리고 있다고 문자를 보내주었다.
“소장님, 멋있어요. 양희에게 들었어요.”
이혜원이 탄성을 지르면서 기뻐했다. 양정희가 커피쟁반을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양희가 전화를 했습니까?”
양희는 그새 이혜원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네.”
나는 내일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눈이 많이 와요.”
양정희가 무릎에 앉으면서 말했다. 나는 한 손으로 양정희의 허리를 안았다. 정원이 눈으로 하얗게 덮이고 있었다. 사방이 아늑하고 조용했다.
“누구예요?”
양정희가 키스를 하고 물었다. 양정희의 머리에도 눈이 하얗게 떨어져 있었다.
글:이고운그림:김선학 <296>
천지사방이 흰 눈으로 덮여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런 날은 한없이 눈을 맞으면서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은 살기에 바빠서 낭만을 잊고 산다. 나는 양정희를 데리고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 속을 걷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서 그만두고 양정희와 함께 거실로 들어갔다.
“과일 드세요.”
아이들과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조옥선이 나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예.”
나는 아이들 옆에 털썩 앉아서 포크로 과일을 찍어 먹었다. 양희는 이혜원과 또 다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전화 통화를 끝내자 부모님에게도 전화를 하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옥선은 때때로 그런 나를 눈이 부신 듯이 쳐다보고는 했다. 조옥선은 묘하게 육감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나는 애써 조옥선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이들은 거실 창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좋아했다. 아이들의 표정은 비교적 밝아 보였다. 나는 아이들의 어머니들을 생각하고 가슴 한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들 중에 한 사람은 차가운 시체가 되었고 한 사람은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교도소에 있는 이지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눈이 내리는 창 밖을 보면서 그녀도 잠을 이루지 못할까. 그녀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시간이 오래 되어서 아저씨 먼저 잔다. 너희들도 일찍 자라.”
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일어섰다. 양희와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눈이 오고 있어서인지 잠을 자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양정희는 30분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양정희는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불을 끄자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눈은 마치 하얀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내리고 있었다.
“요즘 바쁘신 것 같아요. 작은마누라도 돌보지 않고….”
양정희가 내 품속을 파고들면서 속삭였다. 나는 슈미즈를 걸치고 있는 양정희의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속옷의 감촉이 살이 떨리게 좋았다.
“조금 바빴어.”
나는 양정희를 가슴에 안고 말했다.
“호호호. 작은마누라가 많으니까 바쁘죠. 어련하시겠어요?”
양정희의 손이 내 하체로 와서 부드럽게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같이 사는 것은 정희뿐이잖아?”
나는 양정희의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서 몸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양정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헐헐. 그러니 인생이 살 만하지. 여자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나는 양정희를 바짝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렇다고 면죄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죄가 뭔지 아세요?”
“뭔데?”
“여자를 외롭게 하는 거래요.”
양정희의 입술이 내 입술에 얹혀졌다.
글:이고운그림:김선학 <297>
양정희의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럴듯하네.”
나는 낄낄대고 웃었다.
“그보다 더 나쁜 죄도 있어요.”
“그건 또 뭔데?”
“젊은 여자를 외롭게 하는 거요. 그 죄를 지으면 맑은 하늘에서도 날벼락을 맞는대요.”
“그럼 내가 날벼락을 맞는다는 말인가?”
“그러니 벼락 맞지 않으려면 알아서 하세요.”
양정희가 깔깔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아무렴 그런 일로 벼락을 맞을 수야 없지.”
나는 낄낄대고 웃으면서 양정희를 눕히고 위로 올라갔다. 멀쩡한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양정희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부드러우면서도 탱탱하게 탄력이 있는 가슴이었다.
“좋아요?”
양정희는 내 손길이 닿자 기꺼워하면서 물었다. 그야 당연한 말씀이다.
“사랑스러워.”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었으나 양정희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오래만의 일이었다. 양정희가 자신의 가슴을 내 얼굴로 가져왔다. 나는 양정희의 가슴을 입속에 넣었다.
“아이.”
양정희가 콧소리를 내며 허리를 비틀었다. 어쩌면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 있는가. 달고 향기로운 과육처럼 그녀의 가슴이 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녀의 몸속 깊숙이 헤집고 들어갔다. 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방안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그러나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굴었다. 맹수가 포효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피가 튈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태풍이 몰아치듯이 어떤 곳을 향해 돌진하면서 때때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고양이의 눈처럼 강렬한 요기를 뿜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움직임에 따라 신음소리로 화답했다. 나의 움직임이 빨라지면 신음소리도 잦아지면서 커졌다.
나는 잠시 가쁜 호흡을 몰아쉬었다. 격렬한 스포츠게임에서도 쉬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우리 서방님, 보약 먹어야 하겠네.”
양정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보약은 무슨….”
“그럼 다른 마누라한테 힘을 빼셨나?
양정희가 웃으면서 야실댔다. 에그 오늘 작정을 하고 야실대는구나.
양정희가 내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내 가슴을 뒤덮고 부드러운 혀가 내 가슴 위에서 둥글게 원을 그렸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녀의 애무를 음미했다. 문득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쾌감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에 섞여 교태가 가득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방안이 점점 열기로 가득 채워졌다. 양정희는 빠르게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커지고 격렬한 율동이 이어졌다. 폭포수가 나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글:이고운그림:김선학 <298>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눕히려고 했다.
“그냥 있어요.”
양정희가 격렬하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엄마아.”
양정희가 입을 잔뜩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에그 이 순간에 엄마는 왜 찾누. 함께 절정을 향해 달리다가 나는 멈칫했다. 양정희가 후드득 내 위로 떨어졌다.
‘이런… 먼저 가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나는 양정희의 등을 바짝 껴안았다. 양정희가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을 것 같았어.”
양정희가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면서 속삭였다.
“나도 느낄 수 있었어.”
“아이 좋아.”
양정희가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에 짓눌렀다. 그녀의 입에서 달디 단 외 냄새가 풍겼다.
“왜 이렇게 좋은가 몰라.”
양정희가 만족하여 떨어져 누웠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흰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방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다. 조옥선은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왜 양정희와 나란히 누워있는데 그녀가 떠오르는 것일까. 나는 양정희의 위로 올라갔다. 양정희가 두 팔을 벌려 나를 껴안았다.
“서방님, 나 죽여줄 수 있어?”
양정희가 콧소리를 섞어 교태를 부렸다.
“흐흐… 얼마든지 죽여줄 수 있지. 죽고 싶어?”
“아잉.”
양정희가 허리를 비틀며 앙탈을 했다. 나는 부드럽게 돌진했다. 때로는 깊게, 때로는 얕게 템포를 조절하면서 돌진했다. 이미 절정에 이르렀던 양정희였다. 그녀를 또다시 격정에 휩싸이게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바짝 매달려 울음을 터트렸다.
여자는 좋으면 운다.
나는 그 순간에 여자들이 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김용호를 불러 양희를 학교에 데려가게 했다. 학교가 끝날 때도 데려오게 했다. 양희 주위에 동근이파의 조폭들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새 눈이 내렸으나 아침이 되자 맑게 개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준 뒤에 사무실로 출근했다. 눈이 내린 탓에 햇살이 눈이 부셔도 찬 기운이 느껴졌다.
“좋은 아침.”
나는 사무실에 먼저 출근해 있는 사무장 김칠복과 미스 주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미스 주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김칠복이 목례를 했다.
“다방 커피 드릴까요?”
미스 주가 웃음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글:이고운
그림:김선학 <299>
나는 미스 주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머리도 예쁘게 한 것 같고 옷차림도 산뜻하게 달라져 있었다.
“좋지. 우리 미스 주 시집가나?”
나는 상의를 옷걸이에 걸고 소파에 앉았다.
“소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소장님, 미스 주, 어제 약혼식 했답니다.”
김칠복이 옆에 있다가 웃으면서 참견을 했다.
“그래? 그렇게 좋은 일을 나한테 이야기도 안 해?”
“결혼식이 3개월밖에 안 남았다네요.”
“정말이야?”
“네.”
미스 주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늦었지만 축하해. 우리 미스 주를 데려가는 사람은 복 받은 거야.”
나는 마땅히 축하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너스레를 떨었다. 김칠복이 조아라 미행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보고했다. 나는 조아라가 만난 인물들을 양식에 맞게 보고서에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미스 주가 커피를 타서 내 앞에 갖다가 놓았다. 미스 주도 시집을 가는구나. 스물다섯 살이 넘었으니까 시집을 가는 것은 당연하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조사를 의뢰했으면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이은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보고서를 만들고 있어.”
나는 이은미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사가 다 끝난 거야?”
“끝난 것은 아니지만 더 위험해지기 전에 손을 보는 게 좋을 거야.”
“한 시간 후에 만나. 지하철 역 앞에 있을게.”
“알았어.”
나는 김칠복에게 보고서를 빨리 작성하게 했다. 이은미와 만나기로 약속한 지하철역에 도착한 것은 약속한 시간보다 15분이나 늦어서였다. 도로에 쌓인 눈이 녹기는 했으나 차들이 서행을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이은미가 짜증을 부렸다. 이은미는 산뜻한 정장 차림이었다. 검은색의 정장이라 안에 있는 흰 블라우스가 더욱 단정해 보였다.
“차가 밀려서 그런 걸 어떻게 해? 어디로 모실까?”
나는 보고서 봉투를 이은미에게 건네주었다.
“그냥 교외로 나가.”
이은미가 봉투를 받으면서 말했다. 나는 미사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서울 도심을 빠져 나오자 곳곳에 눈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뭐야? 그러니까 미루증권 사장이 회사를 상도은행에 넘기는 거야?”
이은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글:이고운
그림:김선학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