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이어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겐키(원구) 원년(서기 1571년), 무로마치 막부의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는 마침내 오다 노부나가 토벌령을 내리게 됩니다. 세계사적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에스파냐의 레판토 해전이 있었던 바로 그 해지요. 세계사 문제야 어떻든 다케다 신겐은 이를 구실로 상경을 개시하면서 노부나가의 협력 세력인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 미카와(三河)와 도토미를 공격하지요.
더군다나 이 해의 말에 대영주들 중 하나인 호조 우지야스(北條氏康)가 죽으면서 신겐을 견제하던 힘이 대폭 약해집니다. 그렇게 되어 다케다와 호조의 동맹이 새로 체결되면서 도쿠가와 가문은 위기에 빠지게 되지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호조는 그나마라도 다케다를 견제해주고 있었는데 대영주였던 호조 우지야스가 죽으면서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다케다 견제가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우지야스의 아들인 호조 우지마사는 역량부족으로 신겐과 겨룰 입장이 못되었습니다.
신겐의 교토 상경 소식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기 족했습니다. 가장 먼저 신겐과 싸워야 하는 이에야스는 물론 적들에게 포위된 노부나가 역시 절박한 상태였지요. 여하간 신겐은 미야코(수도 경(京)자로 보통 표기됩니다)라 불렸던 교토를 향해 총 3만 군사로 진군을 개시했습니다. 노부나가로서는 대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 이후 다른 대영주의 침입을 받는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이전에 신겐과 요시모토가 서로 처남, 매부 사이기는 했습니다만.
서기 1572년(한국사에서는 대유학자 남명 조식이 죽고 선조의 망나니 장남인 임해군이 태어난 해), 신겐은 부하 장수인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와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에게 5천씩을 주어 각각 미카와와 오다 가문의 영지인 미노(美濃)를 침략하였습니다. 신겐 자신은 본대 2만 2천을 이끌고 진군하면서 후타마타 성으로 향했지요. 그는 또 다른 부하 장수인 바바 노부후사(馬場信春)의 5천 별동대를 편성해 도토미 서쪽의 다다라이 성을 공략하게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되신다면 쉽게 말해 신겐이 군대를 나누어 이에야스를 공격했다고 파악하시면 되실 듯합니다. 신겐이 약 3~4만이나 되는 대군을 파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칸토(관동)의 호조 우지마사와는 동맹을 맺었고, 신겐의 라이벌이자 숙적인 에치고(越後)의 영주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은 엣추(越中)라는 지역의 일향종(불교의 한 종파) 신도들이 막아 주겠다는 밀서를 전에 보내왔기 때문이었지요. 간단히 말해 배후를 공격당할 염려가 없어졌다는 말이지요.
그나마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를 도와 신겐을 견제해줄 세력인 우에스기 겐신도 발목이 잡혔다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만전을 기한 후 전력으로 군대를 몰고 오니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상당히 위험한 지경에 빠졌지요. 서기 1572년 12월, 신겐은 후타마타 성을 낙성시켜 도토미 북부의 지배권을 차지하였습니다. 후타마타 성 함락 직후 노부나가가 파견한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와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의 3천이 도착했지요.
그러나 시나노 정벌 과정에서 단련된 다케다의 카이 군을 상대하기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양과 질이 모두 부족했지요. 이에야스는 본성(수도)인 하마마쓰에서 농성을 하였습니다. 다케다 군이 3만에 육박하는 반면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1만 1천 정도에 불과했으니까요. 이에 신겐은 하마마쓰 성을 무시하고 호리에를 향해 서진하는 시늉을 합니다. 이는 명백히 이에야스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위였지요.
그러자 이에야스는 서진하는 신겐의 배후를 치고자 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미카타가하라로 출진하였습니다. 정면대결이 아니라면 맞서볼만하다는 판단을 내린 듯합니다. 토토우미 토착 호족들에게 힘을 보여주어야 할 이유도 있었고요. 그런데 신겐은 미카타가하라 평원에 어린진(魚鱗陣)을 치고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 오다 연합군도 이에 맞서 학익진(鶴翼陣)을 선택하여 포위섬멸을 시도하였지요. 사실 양군 모두 진법을 펼치면서 상당히 상식과는 벗어난 행동을 합니다.
이에야스는 학익진을 선택했는데 상식과는 판이하게 달랐지요. 학익진은 '다수가 소수를 상대하기 적합한 형태로 적보다 많은 군세로 적을 포위하여 섬멸할 때' 씁니다. 그런데 현재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다케다 군에 비해 소수인데도 학익진을 쓴 것이지요. 학익진은 적을 포위할 목적이라 대열이 얇아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측면이 뚫리면 적에게 후방이 노출되어 매우 불리해지게 되므로 측면에도 예비대를 일일이 배치해야 하지요.
게다가 학익진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전술 훈련과 병사들의 숙련도도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숫자가 많으면서도 정예병력이 있어야 칠 수 있는 행동이지요. 한편 어린진의 어린은 물고기의 비늘이라는 뜻입니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진형을 만들어 전투에 임하는 것이지요. 어린진은 보통 아군보다 적군의 병력이 많을 때 사용하면 좋은 진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겐은 자기편의 군사가 연합군보다 많음에도 오히려 어린진으로 공격한 것이지요.
어린진을 이용하여 진형을 갖추면 사방에서 오는 적군에게 아군의 약점을 방어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소수의 군사들이 잘 쓰는 진법입니다. 그런데 신겐은 다수의 군사로 어린진을 쓴 것이지요. 그야 어떻든 포진부터 불리하였던 데다, 다케다 군에 대해 병력·전술 면에서 떨어지는 도쿠가와 군에게 승산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결국 병력의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연합군의 진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이에야스는 유능한 가신들과 2천의 군사를 잃게 됩니다.
도쿠가와 군은 단 2시간여의 전투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다케다군 사상자는 겨우 2백 정도였지요. 이렇게 신겐은 도쿠가와 군을 유인하여 야전으로 끌어들인 것을 포함하여 전투는 대부분 다케다 군의 계산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다만 전투 개시 시각이 늦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군을 궤멸시키지 못하고 이에야스도 놓치고 말았지요. 도쿠가와 군의 일방적인 패배로 이에야스는 전사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에야스는 목숨만 겨우 보존하여 겨우 본거지(수도)인 하마마쓰 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신겐의 추격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패주하면서 말 위에서 X를 지렸다고 하지요. 이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 평생을 살펴보아도 인생 최대의 위기로 꼽힌 전투입니다. 영화 한산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는 학익진을 폈던 이순신 장군을 이에야스에, 어린진을 편 자신을 신겐에 감정이입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으니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보고 웃음을 지었겠지요. 하지만 와키자카도 신겐도 최후에 웃는 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와키자카는 영화 한산을 보시거나 역사책을 보시면 그 결말을 아실 수 있거니와 신겐의 결말은 전혀 뜻밖의 상황이었지요. 미카타가하라 전투만 본다면 그야말로 오다-도쿠가와군의 사망 플래그였습니다. 참고로 사망 플래그는 등장인물이 죽기 전에 흔히 하는 행동 혹은 대사를 말합니다. 넓게 본다면 이순신 장군도 그런 축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공교롭게도 이순신 장군 관련 뮤지컬 제목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을 격파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겐 자신이 병으로 쓰러지면서 다케다군의 상경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상 오다-도쿠가와 연합의 붕괴가 눈 앞에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행운이 따르는 인물들이라 하겠지요.
다소 뜬금없는 말이겠지만 역시 건강이 재산이자 보배인 듯합니다. 이때 노부나가는 신겐의 침공이 임박할 것으로 판단해 한동안 잠을 못 이루다가 신겐의 죽음을 듣고 3일 밤낮을 잠만 잤다고 하지요. 그 정도로 노부나가에게 위협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영화 한산에서 와키자카가 떠올린 미카타가하라 전투를 보고 나름 아이디어가 생겨 이 글을 써보았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댓글 풍림화산(風林火山) - 다케다 신켄의 용병술을 가리키는 말이었죠.
제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원전은 손자병법 군쟁편에서 용병술의 원칙을 설명한 구절입니다.
기질여풍 기서여림 침략여화 부동여산
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기습은 바람과 같이 신속하게
이동은 숲과 갈이 고요하게
공격은 불과 같이 맹렬하게
수비는 산과 같이 묵직하게
앗! 문학사님! 역시 『손자병법』 「군쟁편」의 풍림화산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 시대(일본전국시대) 군담 소설을 읽어보셨으니 더욱 잘 아실 듯요. 영화 한산을 보니 절로 떠오르게 되어서요. 여하간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