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절도 땅도 없는 한국의 30대 여성에게)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2007년, 미국 뉴욕시
공부하러 미국으로 간다는 아버지를 따라서 갔다. 미국이란 나라는 자본주의 최전선에 있다고 알고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번화했다는 뉴욕시였음에도 집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큰 공원과 바다가 있었다. 큰 나무들이 살고 있는 언덕과 작은 연못, 그곳에 살고 있는 야생 칠면조와 반딧불이 가득한 그곳에서 매일 같이 자전거를 타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로써는 열여섯 평생 누려 본 적 없는 생태 감수성이라는 것을 길러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학교로 가면 매 점심 거대한 쓰레기통에 무지막지한 양의 일회용품이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시내에 나갈 때마다 도시의 화려한 반짝임, 막대한 상품들과 더러운 지하철, 그리고 노숙인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누릴 수 있는 자연은 더 많았지만, 더 많은 파괴도 할 수밖에 없는 그곳. 자연에 대한 더 큰 낭만과 소유, 그리고 착취가 일어나는 곳에서 묘하게 한국이 그리우면서도 그립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이 아버지의 책장에 꽂혀있는 것을 보았다.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면서 한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구원받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당시, 삼키듯이 그 책도 읽어버렸다. (당시 인근 도서관에는 책장 한 줄이 한국 책이었는데, 그걸 거의 다 빌려서 읽었다. 생에 가장 책을 많이 읽은 해일 것이다.)
책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노동의 굴레로는 조화로운 삶(good life, 더 정확한 번역으로는 좋은 삶일 테다.)을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시골로 들어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더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에 4시간의 자급 노동, 최소한의 임금노동 그리고 나머지 시간을 여가에 보낸다고 했다. 자연을 억압도 착취도 향유도 하지 않으면서 시스템 밖에서 자연과 관계 맺는 삶을 가능하다는 비전을 보여주는 그 책은 마침 요상한 미국 생활에서 얻게 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되어주었다. 언젠가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자급자족’의 삶을 살리라 하는 막연한 꿈과 함께.
“우리는 사람의 탐욕으로 움직여가며, 남을 착취하여 얻은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부를 쌓으려고만 드는 이런 사회 구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그런 사회의 미래는 영 가망 없이 보였다....이런 형편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서구 문명 속에 남아있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문명을 대신할 확실한 대안을 찾지 않고서는 우리가 바라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조화로운 삶 16, 17)
#2012년, 서울 하자센터
그리하여 한국으로 돌아오고는 도시에 있는 대신 시골에 있는 대안학교로 진학했다. 생태적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그러나 3년 동안 모내기와 수확을 하고, 농사 수업을 들었지만, 자급의 기술을 체득했을 리 만무했다. 농사짓고 자급하는 삶은 여전히 머나먼 날의 일로 남았다. 그럼에도 도시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도시에서의 삶의 굴레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서울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장치 혹은 괴물로 보였다. 그것에 나라는 나사 하나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지역에서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나부터 지역에서 살기 시작하면 무언가 바뀌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젊고 잘 훈련된 사람들이 다시 시골에 살고자 하고, 그들이 시골에서 일을 찾을 수 있을 때, 농촌은 다시 매력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나 자연에 대한 개념은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문화와 자연, 혹은 도시와 시골 사이의 관계를 지금처럼 식민주의적이고 위계적이며 이분법적으로 구조화된 관계로서가 아니라, 상호성에 기반한 평등하고 다원적이며 풍부한 관계로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265p)
막상 지역에서 대안적인 삶을 살고 싶어도, 이곳에 함께 할 사람들, 살 공간, 만남을 이어갈 장소가 없었다. ‘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재미난 꿍꿍이를 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지역도 살 만하다는 감각이 피어나기를 바랐다.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니니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여기저기 오라는 곳도 생겼다. 어떻게든 소소하게나마 무언가 해보고 있었던 중에 ‘후지무라 야스유키’라는 철학자이자 발명가가 내한해서 하는 강연을 소개받게 되었다. 그길로 서울에 갔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시간 일을 합니다. 수입이 늘어날수록 여유 시간은 줄어들고, 그만큼 지출은 늘어나죠. 지출이 늘면 다시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고요. 결국 수입이 늘수록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제 적게 벌지만, 자신도, 이웃도 모두 행복해지는 착한 일을 시작하면 어떨까요.” (후지무라 야스유키 2012)
3만엔 비즈니스라는 이론을 만드는 그는, 공동체를 통해서 (식량, 주거, 의료, 문화 등등 9가지 분야의) 자급의 비율을 높이고, 한 달에 30만 원 정도의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수익구조를 2~3개 만들면 지구를 파괴하지도 않으면서도 풍요로운 개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비전을 보여주었다. 몇 년 전 조화로운 삶을 읽고 반짝였던 것처럼 다시 한번 희망을 발견했다. 이런 삶이라면 지역에서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자급자족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더니, 왜 지금 할 생각은 안 하냐고 묻던, 대안학교 선생님을 그만두고 농사짓던 이의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이야말로 농사, 자급자족, 그런 꿈들을 실현할 때가 아닌가!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에너지를 자본주의의 바퀴를 굴리는 데 쓰기보다는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가는 데 쓰고 싶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게 아닐까. 집도 절도 없지만 땅을 찾는다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더니 어느 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카톨릭 농민회라는 단체였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쓰지 않고 있는 폐교와 논농사 지을 땅, 그리고 밭이 조금 있다고 했다. ‘건천리’라는 마을이라고 했다. 거의 무상으로 빌려주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으리라.
#2016년, 충남 금산 건천리
건천리의 폐교와 3,000여 평의 땅에서 산 지도 벌써 4년이 되었다. 4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제법 시골살이에 인이 박이기도 했다. 봄이면 목련꽃과 생강나무꽃을 따서 차를 만들었다. 냉이와 달래, 각종 풀을 뜯어서 된장국을 끓이고 전을 부쳤다. 가을이면 감을 따서 말렸다. 텃밭은 번번이 실패하긴 했지만, 한 마지기 반 정도 되는 논이 있어 한해 먹을 쌀은 걱정도 없었다. 마을에 귀촌한 농부님께 도움을 받아서 벼의 싹을 틔웠고, 모내기와 벼 베기 행사를 열어 사람들을 모아 큰 노동을 해치웠다. 홀태와 수동 탈곡기를 빌려 쌀을 털고, 매일 아침 도로에 쌀을 열어 말리고, 밤이 되면 접고 - 정미소에 다녀와서 나락을 벗기고.. 벼의 생애를 몇 번이나 경험했다.
지난 3년간 군에서 지원사업으로 연 2500만 원 정도 받았다. 그걸로 단창이었던 창문도 샷시로 고치고, 방마다 화목 난로도 들여놓고,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작은 건물도 지었다. 각종 주방용품 및 생활용품, 공구도 샀다. 그것들로 구축된 삶의 양식은 나름대로 지속 가능한 듯 보였다. 우리는 당시 우리 스스로를 ‘청년 생태공동체’라고 불렀다. 지역 TV에서 취재를 오기도 하고, 잡지 등에 인터뷰도 하면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거치니 네이버 지도에서 우리를 자발적으로? 표시해 주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생태 마을’이 뜻하는 것은 생태적으로 유기적인 정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위한 생활과 일의 모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형태를 개발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자급의 삶을 가능한가 207p)
공동체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1년 동안 필요한 전기세, 운영비, 자급하지 못하는 식자재비를 벌었다. 공동체원들은 인근 대안학교에서 소소하게 수업하거나 다른 알바를 하며 현금을 벌었다. 식비, 공과금, 월세가 들지 않으니 2-30만 원 정도의 임금노동이면 한 달을 지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이가 어려 경조사비가 들지 않는 이유도 있었지만) 공동체원들은 지금 우리의 삶이 안정적으로 자급하는 삶이라 자축했다. 몇 년간의 노력을 들인 덕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공간이 안정적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삶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땅의 계약 기간을 10년으로 늘리자는 안을 가지고 카톨릭 농민회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그런데 카톨릭 농민회 소속의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과잉 진압에 쓰러지셨다. 그가 병상에 누워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우리는 대통령 탄핵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 버스 종점 마을에서도 부지런히 서울에 올라갔다. 가서 노래를 부르고 단식했다. 어찌할 바는 딱히 없었다. 카톨릭 농민회에 새로 부임한 대표는 (절대 팔지 않을 거라고 했던 유서 깊은) 건천리 폐교를 팔고 싶다고 했다. 결국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시고 대통령이 탄핵되었던 해 겨울, 그곳을 정리했다.
자급 관점은 자연스럽게 “현재 존재하는 것과 연결하기, 실천적 저항을 강화하고 확장하기, 그리고 유토피아를 발명하지 않기”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자급의 삶을 가능한가 339p)
#2021년, 의정부 수락 텃밭
건천리 폐교를 정리하고 나서는 한국에 있고 싶은 공간이 별로 없었다. 사회에서 동떨어져서 하는 자급자족은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건설된 유토피아는 사회가 함께 바뀌지 않는 이상 오래갈 수 없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일궈놓은 땅을 빼앗기는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지,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하는 건지 배우고 싶어 몇 년을 떠돌았다. 그런데도 땅과 관계 맺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의정부에 있는 수락 텃밭에 다녀왔다. 원불교에서 땅을 빌려주었다고 했다. 퍼머컬쳐 숲밭의 실현지도 만들겠다는 포부를 들었다. 30여 명의 모여서 한뜻으로 자급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고무적이었다. 나도 같이하겠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 며칠 동안 삽질을 해서 밭을 만들었다. 1,000평 정도 되는 땅을 하루 종일 삽질하고 나면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한번 밭에 다녀오면 며칠을 알았는데, 땅과 밭을 만들 때 고생해 놓으면 앞으로가 편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고생은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었다. ㅎ) 커다란 곤포 사일리지(일명 마시멜로)를 몇 개나 뜯어서 두둑에 두툼하게 덮어주었다. 그거 하나 뜯을 때마다 모두가 지푸라기투성이 녹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풀은 무지막지하게 올라왔다. 첫해의 수확량은 역시 형편없었다. 열심히 심어놓은 다년생 허브들이 풀에 치여서 죽었다.
처절한 수확량은 때로는 내가, 우리가 이 일을 취미로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매년 공동체 공간과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30만 원의 가입비를 내었고, 왕복 2시간이 넘는 이동시간과, 교통비, 모종값과 한 달에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임금노동을 하지 않고 텃밭에 갈 시간이 있다는 것이 종종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을 때는 자주 빠졌다. 덕분에 수확량은 더욱 낮아지고;) 그런데도 2년이나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중요한 것은 함께 일군다는 감각이지 수확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모여서 같이 노동하고, 밥을 나누어 먹고, 씨앗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퍼머컬쳐라는 가치를 지켜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정치는 일상생활, 자급과 분리되지 않는다. 당신은 일하는 동안 정치를 한다. 여성은 특별한 공간,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임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395p)
둘째 해에는 산에서 멧돼지들이 텃밭으로 찾아왔다. 안 그래도 얼마 되지도 않는 수확량인데, 남은 것마저도 멧돼지가 파헤치고, 그것도 몇 번을 파헤치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 같은 야매 텃밭러 말고, 이곳에서 자급을 실천하고자 하는 데 진심이었던 몇몇 동료들은 대책을 심각하게 강구했다.온갖 방법은 다 썼다. 멧돼지가 싫어한다는 향을 피우고 작물도 심었다. 마지막으로는 구청에 동시다발적으로 전화를 거는 액션을 하기로 했다. 일이 주쯤 지나니 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엽사들이 와서 멧돼지를 죽였다고 했다. 우리는 당시 충분하게 이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여력이 없었는데, 당시 원불교와의 갈등으로 공동체 공간의 존폐가 불투명한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멧돼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수락 텃밭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자급의 현실에서 대해서 고민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4년, 행신 영숙씨네
150만 원. 엄마에게 생활비 및 집세 명목으로 조금, 각종 경조사에 돈을 보내고, 일하러 지역을 오가는 교통비와 식비, 그 외에 병원비 등 계산했을 때 대략 한 달에 지출하는 금액. 10년 전 건천리에 살 때의 5배 정도. 그때와 비교해서 물가도 오르고, 임금노동의 강도도 오르고, 삶의 질은 낮아져 가고 있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그렇다. 바쁘다는 이유로 생활에서 자급 노동의 비율은 낮아져만 갔다. 옷을 지은 적도 없고, 빵도 구운 적도 없고, 벼농사를 지은 적도 없다. 한때 장도 담그고, 차도 덖고, 침도 놓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지. 여전히 자급을 꿈꾸는가?
수십 평 남짓의 작은 땅에서의 텃밭은 한번도 쉬운적이 없었다. 생태 화장실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텃밭에 들어가는 퇴비를 전부 사야 한다. 처음에는 퇴비로 쓸 오줌을 나부터 모아보기로 했다. 그릇에 오줌을 받아서 말 통에 담아서 발효해서 뿌려주었다. 혼자서 모으니 말 통 하나가 귀찮데, 몇 개월이 걸렸다다. 그 사이에 작물들은 목말라했다. 길에서 컴프리를 잔뜩 가져가다 퇴비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을 꾹 참고 열심히 뿌려주었다. 온몸에서 퇴비 냄새가 나는데, 도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그 냄새가 한참 빠지지 않아서 고생했다. 음식물 쓰레기도 잘 모아서 퇴비로 만들었다. 그래도 텃밭의 양분은 형편없이 모자랐다. 다리를 다치고 음식물 쓰레기 뒤집는 일이 쉽지 않아지자 퇴비를 구매해서 쓰기로 했다.
씨앗을 받아서 모종을 갈려보려고 했는데, 첫해에는 흙을 퍼다가 모종을 내다가 실패했다. 다음 해에는 상토를 사다가 씨앗을 뿌렸다. 겨우겨우 잘 자라던 새싹들은 어느 따듯한 날 덮어놓은 비닐을 걷는 것을 놓친 날 다 죽어버렸다. 마땅히 온실이나 비닐하우스가 없는 곳에서 모종을 기르는 것은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그리고 불안정한 임금노동으로 매일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없는 나로서는 더욱더. 그다음 해부터는 그냥 모종을 사다가 심기로 했다. 모종을 사다가 심고 나니 채종이 의미가 없어졌다. 씨앗을 받고 갈무리하는 것을 안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모종은 시장에 가서 사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각종 농약과 성장촉진제에 절어있는 일반 모종들은 노지, 그것도 비닐과 비료가 없는 곳에서 잘 자라지 못했다. 많은 오이가 노균병에 걸리고, 고추들은 탄저병에 걸렸다. 친구들이 정성스레 기른 토종종자 씨앗들은 수확량이 적거나 잘 자라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격이 5배 정도 되었다. 작은 땅이 아니어서 그런지 토종종자로 채워넣은 해는 모종값으로 20만 원 가까이 사용했다.
모종값, 퇴비값, 장비값을 다 계산해 본 적 없다. 계산하기 무섭다. 노동력과 시간을 차치하고서도 사 먹는 게 더 저렴하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는 것도. 그렇기에 작은 외면은 계속된다. 자급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방식으로 삶이 계속되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면서.
세계 자본주의 심장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사건에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자본의 법칙은 지속적인 지구화를 통해 전체주의적 성격을 조금도 잃지 않았으며 점점 더 전체주의적인 체제로 되어가고 있다. 여기에서 임금 노동 체제는 권력의 잔인한 도구가 되고 있다.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334p)
자급의 삶을 가능하지 않았다. 적어도 도시에서 태어나, 집도 없고, 땅도 없고, 요령도 없는 나에게는. 그렇지만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임금 노동 체제는 더더욱 가능하지 않다. 더 나은 삶이라는 걸 다른 선택지 속에서 상상할 수는 없다. 어차피 처절한 삶이라면 적어도 흙을 만지면서 처절하게 사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다. 흙을 만지는 사람은 겸손하다. 흙을 만지고 있으면 매 순간, 삶이 어디서 왔는지 직시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노동을 - 햇볕, 미생물과 식물, 동물들의 노동 속에서만이 우리의 삶은 유지될 수 있다. 기계만 만지는 손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흙에는 있다. 그리고 나는 감히 그 겸손한 배움과 계절이 흐르며 매번 달라지는 텃밭의 풍경, 수확물이 주는 풍요, 그것을 나누면서 생기는 기쁨들은 인스타그램의 돋보기나 쇼핑보다 그 중독성이 강하다고 말해볼 참이다.
말도 안 되는 농사를 계속 짓고, 꿈을 꾸고, 절망하고, 화를 내고, 다시 꿈을 꾸고, 또 절망하면서 점점 확고해져 가는 것은,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정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능하지도 않은 자급의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