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조씨 형제 순교자 묘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배씨(裵氏) 가문의 선산에는 배씨가 아닌 조씨(曹氏) 성을 가진 형제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증거하고 죽음을 택한 조석빈(曺錫賓, 1825-1872년?)과 조석증(曺錫曾, 1834-1872년?) 형제 순교자의 유해가 문중의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선산을 앞에 둔 배씨 문중 선산에 묻혀 있는 것이다.
경상남도 김해 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이다.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인들을 징계하기 위해 떠나보낸 귀양길이 오히려 유배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해의 서슬에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은 이학규에 의해 김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밀양 박씨 문중의 순교자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 가정의 선대(先代)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박대식의 부친 박만혁(?-1810년)이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詩禮里)에서 이학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의 아들 대붕 · 대흥 · 대식 3형제가 모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막내인 박대식이 1868년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했다.
형제 순교자 조석빈과 조석증 묘와 제대를 겸한 묘비.어찌 되었든 이들의 입교 이후 진례, 녹산, 노루목 등에 신자촌이 형성됐고,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밀양 단장(丹場)의 가물리와 법흥리 등의 신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지방의 신자촌들이 더욱 번성했다.
원래 뼈대 있는 유교 집안이었던 창녕(昌寧) 조씨 김해파의 30대 손으로, 부친 조대연의 5형제 중 셋째와 넷째로 태어난 석빈과 석증은 천주교로 개종한 뒤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조씨 형제는 모습과 나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다 같이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상자를 매고 주로 양반들을 찾아다니면서 천주학 연구와 전교에 앞장섰다. 생곡의 배씨 사랑방에도 자주 들러 유학(儒學)과 서학(西學)의 비교 연구에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김해읍 왜장대에서 순교했다.
1997년 형제 순교자 묘소 뒤 바위 위에 건립한 십자가에서 본 묘역과 마을 모습.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지만 결국 조씨 형제는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관헌은 먼저 형 석빈을 가차 없이 참수하고 나서 다시 동생 석증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형님의 목에 십자가 꽃이 피었다.”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도 속히 참수해 주기를 간청함으로써 마침내 그 역시 참수되어 형제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갈대에 싸여 온 형의 거구와 이엉에 덮여 온 동생의 왜소한 알몸은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 하여 조씨 문중의 반대로 선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의 고(故) 배문한(裵文漢) 신부의 3대조(祖)인 배정문(裵禎紋) 공에 의해 집 뒤 언덕 밭에 암장되었으며, 그 후 배문한 신부 본가에서 4대에 걸쳐 순교자 조씨 형제의 묘를 보호 · 관리해 왔다.
형 석빈은 손(孫)이 없었고 동생 석증은 아들이 있었으나 그나마 아들 대(代)에서 후손이 끊겼다고 한다. 그 후 이들 형제의 순교 사실에 관한 구전이 배씨 집안을 통해 대대로 전해오다가 1989년 6월 19-20일 부산교구에 의해 묘지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형제 순교자 묘소 입구 고 배문한 신부 생가에 건립된 기념비. 고 배문한 신부는 1994년 바다에 빠진 신자들을 구하고 선종했다.1995년 5월 29일 교구장 이갑수 주교의 집전으로 순교자 형제 묘소 단장미사를 봉헌하였다. 형제 순교자 묘소 앞에는 묘비를 겸한 돌 제대를 세웠고, 1997년 11월 12일에는 부산교구 교회사연구소 ·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 배문한 사제 사랑 기념사업회에 의해 묘소 주변에 십자가의 길 14처(최봉자 레지나 수녀 조각)를 설치하고 묘소 뒤 바위 위에 대형 돌 십자가를 세웠다. 또한 1998년 8월에 형제 순교자 묘 바로 아래에 있는 고 배문한 신부(1994년 8월 5일 강원도 삼척시 인근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신자들을 구하고 선종했다)의 생가(生家)를 개수하여 순례자들이 쉬었다 갈 수 있게 강당과 방도 마련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4월 24일)]
'순교자 조석빈 조석증에 관한 증언의 고찰' 주제 간담회 계기로
순교자로 추정되는 조석빈, 조석증 형제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추적작업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12월 11일, 이들 형제의 묘가 있는 고(故) 배문한 신부(전 수원가톨릭대 학장)의 생가(生家)에서 '순교자 조석빈(曺錫賓) 조석증(曺錫曾)에 관한 증언의 고찰'을 주제로 열린 간담회는 이들 형제의 순교흔적을 사료를 통해 추적해보려는 교회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날 간담회 성격의 토론회에서는 부산교회사연구소장 송기인 신부가 '순교행적의 고증(考證)과정' 을 주제로 발표한데 이어 고 배문한 신부의 형이자 대한농업과학연구소장인 배대한 박사가 '배씨문중의 증언고찰', 배달순씨가 '조씨문중의 증언고찰' , 교회사연구가인 마백락씨가 '천주교계의 사료고찰'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배달순씨와 마백락씨는 각종 증언과 사료연구를 토대로 조씨 형제가문의 입교과정과 조석빈.석증 형제의 순교 사실을 비교적 소상하게 공개했다. 특히 배달순씨는 조씨 형제 가문의 방계 후손들에 의해 지금의 김해본당의 모체인 '삼방공소 (활천공소)'가 세워졌다고 주장, 관심을 끌었다. 참석자들은 그러나 이들 형제에 관한 증언이 사료로서 남겨진 것이 없다는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한건 신부는 "조석빈, 석증 형제에 대한 교회사적 연구는 지금부터 사실 시작이라고 봐야할 것"이라면서 "궁극 목적은 시복시성 이지만 사료부족이라는 현실이 걸림돌"이라고 밝혔다.
[가톨릭신문, 2000년 12월 3일, 전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