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을 얘기하자면 약간 당혹스럽다. 자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혁명은 끝없이 변해 가는 놀라운 한 편의 드라마이며, 아직도 우리를 매혹하고 전율케 하고 긴장시키는 이상한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원래 왕후나 정치가의 정치는 밀실이나 사실에 그 고향을 갖는 것으로 신비로운 분위기에잠겨 있다. 용의주도하게 둘러쳐진 장막이 온갖 죄악을 숨기고 있으며,은근한 밀씨는 꿈틀대는 야심과 욕망을 은폐하고 있었다. 이 같은 갈등이 전쟁을 부르고, 이러한 욕망과 야심 때문에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사지로 끌려가도 우리들 귀에는 그 같은 비열한 동기에 관한 얘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리혀 숭고한 이상이나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대의 명분 같은 것뿐이다.
그러나 혁명의 경우에는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혁명의 요람은 들판,거리,장터이며, 그 행동은 노골적이고 거칠다. 그것을 일으키는 것은 왕후나 경세가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말에는 흉악한 음모나 못된 계획을 근사하게 꾸미는 운치도 없으며 세련된 점도 없다. 그들 주변에는 아무런 신비도 없으며, 그들 마음의 움직임을 감추는 장막도 없을 뿐더러 몸뚱이를 제대로 감쌀 의복마저 거의 없었다. 혁명에서 정치는 이미 국왕이나 직업 정치가의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직접 부딪치는 거이며, 그 배후 있는 것은 그대로의 인간과 굶주려 텅 빈 위장뿐이다.
이 같은 이유로 1789년부터 1794년까지의 운명의 5년 동안 행동으로 나선 굶주린 인민이 등장한다. 우유부단한 정치가들의 손을 비틀어 군주제를 철폐하게 하고 봉건 제도와 교회의 특권을 없애게 만든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무시무시한 '길로틴 씨(Madame Guillotine)'에게 축사를 보내고, 예전에 인민을 짓밟던 자나 새로 얻은 자유를 위협하는 음모를 꾸민 혐의가 있던 자들을 잔혹하게 단죄한 것도 그들이었으며, 혁명을 지키기 위해 급히 군대를 조직해 전장으로 달려나가 유럽의 정규군을 격퇴한 것도 이 남루한 맨발들이었다. 프랑스 인민은 기적을 성취했다. 그러나 무서운 긴장과 투쟁의 몇 년을 보내는 동안 프랑스 혁명은 여력이 다해 스스로에게 창끝을 돌려 대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없애기 시작했다. 이어서 혁명을 헛되이 무너뜨리고 그처럼 분투하며 고난을 감당해 온 평민들을 다시 '우월' 계급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하려는 반혁명이 닥쳐왔다. 이 반혁명 속에서 황제이며 독재자인 나폴레옹이 나타났다. 그러나 반혁명도 나폴레옹도 인민을 옛날로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아무도 혁명의 주요 성과를 일소할 수는 없었으며, 또 아무도 프랑스 인민에게서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의 인민들에게서조차 다만 얼마 동안이나마 패자의 목이 날아가던 그 날의 감격스런 기억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혁명 초기에는 숱한 당파와 그룹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서로 싸우고 있었다. 루이 16세에 뒤이어 절대 군주를 받들려는 덧없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왕당파, 헌법을 만들어 왕을 제한 군주로 존속시키자는 온건 자유주의파, 그리고 지롱드(Gironde)당으로 일컬어진 공화주의파도 있었고, 또 자코뱅(Jacobin)수도원(도미니카 회의 성직자를 자코뱅이라고 한다)에 자주 모였다고 하여 자코뱅당이라 일컬어진 더욱 급진적인 광화파도 있었다. 이것이 두드러진 당파였으나 이들 내부와 주변에는 모험가들이 득실거렸다. 이들 모든 당파와 개인의 배후에는 프랑스의 대중이 있었으며, 특히 평민 계급 출신의 많은 무명 지도자 밑에서 활약한 파리의 인민이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여러 외국에서는 에미그레,즉 혁명을 피해 도망친 프랑스 귀족들이 여전히 반혁명 공작을 계속하고 있었고, 유럽 열강은 모두 혁명 프랑스에 대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의회제 국가이기는 하지만 귀족이 지배하던 영국도 대륙의 국왕과 황제나 마찬가지로 이 평민 세력의 이상한 폭발에 겁을 집어먹고 이를 쓰러뜨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왕당파와 국왕은 음모를 꾸몄지만 그것은 그들 자신의 파멸을 한층 앞당겼을 뿐이다. 국민 의회 초기에 큰 세력을 차지한 것은, 영국과 미국에 뒤이어 헌법의 확립을 주장한 온건 자유주의파였다. 그들의 총수는 미라보(Mirabeau)였다. 거의 2년 동안 그들은 의회 내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혁명 초기의 성공의 영예를 누리며 기세를 올렸다. 그들은 잇따라 용감한 선언을 발표하고, 몇 가지 중요한 개혁을 이루기도 했다. 바스티유 점령의 날부터 20일 뒤인 1789년 8월 4일, 의회에서는 극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의회에 상정된 그 날의 의제는 봉건적 권리와 특권의 폐지였다. 그 무렵 프랑스의 공기 속에는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그 무엇이 있었으며, 봉건 영주조차 때때로 자유라는 새로운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대귀족과 교회의 우두머리들은 자진해서 국민 의회에 나타나 봉건적인 권리와 특권의 폐지를 토론했다. 그것은 몇 년 동안은 별 효과가 없었으나 그래도 그들의 태도는 솔직하고 의젓해 보였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특권 계급이 이와 같은 관대한 충동에 움직일 때도 있다. 또는 어차피 특권 철폐가 임박했으므로 고결한 척 관대하게 구는 것이 회상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며칠 전 우리는 인도에서 바푸(간디)가 불가촉 천민(untouchability)의 차별 대우를 철폐하기 위해 단식을 했을때 힌두의 카스트가 이 같은 이상한 태도를 보여준 것을 보았다. 마치 마법사가 지팡이로 요술을 부린 것처럼 묘한 감정의 물결이 이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하여 힌두교가 수많은 동포를 오래도록 얽매어놓았던 쇠사슬을 어느 정도는 풀어 주고, 불가촉 천민들에게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그들에게 개방되었다.
이와 같이 열정의 섬광에 휩싸인 혁명 프랑스의 국민 의회는 적어도 결의상으로는 농노 제도와 여러 특권, 봉건 법정, 그리고 귀족,성직자의 조세 부담 면제, 그들의 칭호까지 잇따라 폐지해 나갔다. 국왕이 아직 재위하고 있는데 귀족의 칭호가 없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국민의회는 이어서 인권 선언 을 통과 시켰다. 이 유명한 선언의 사상은 아마도 미국 독립 선언에서 유래된 것이리라. 그러나 미국의 선언은 짧고 간단한 반면 프랑스의 것은 길고 복잡하다. 인권이란 인간의 평등과 자유와 행복을 보장한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이 선언은 과감하고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그 뒤 100년 가까이나 유럽의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의 헌장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이미 시대에 뒤진 것이 되어 현대의 아무런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저 법 앞의 평등과 투표권을 갖는다고 진정한 자유,평등,나아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변함없이 권력을 쥔 무리가 그들을 착취하는온갖 수단을 갖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정치 사상은 프랑스 혁명 시대 이후 상당히 발전하고 변화했으므로 아마 오늘날에는 아무리 보수주의자라 할지라도 대개는 그 고양된 영향을 지닌 인권 선언의 대원칙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쉽사리 지적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기꺼이 인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선언은 사실상 사유 재산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대귀족과 교회의 소유지는 봉건적 권리와 특권이라는 이유로 몰수당했다. 그러나 재산을 소유할 권리 자체는 신성하고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마 너도 알고 있겠지만, 오늘날 진보한 사상은 개인적 소유는 하나의 악이며, 가능한 한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권 선언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진부한 문서로 보일 것이다. 어제는 대담무쌍했던 사상이 오늘은 평범한 사상으로 보이는 예는 흔하다. 그러나 그 당시로서는 전 유럽을 전율시키며 고통받는 모든 짓밟힌 사람들에게 더욱 나은 시대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왕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이 불경함에 당황하며 결재를 거부했다. 그때 국왕은 아직 베르사유에 있었다. 파리의 반도들이 한 여성을 앞장세우고 베르사유로 들이닥쳐 국왕에게 '선언'을 결재시켰을 뿐 아니라, 그를 파리로 연행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바로 전에 보낸 편지 말미에서 언급한 기묘한 행렬이라는것이 바로 이것이다.
국민 의회는 이 밖에도 유익한 개혁을 많이 실시했다. 방대한 교회재산은 국가에 몰수 되었다. 프랑스를 80개 지역으로 구분하는 새로운 행정 구획이 결정되엇다. 이 행정 구획은 지금도 이용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예전의 봉건 법정 대신 더욱 훌륭한 재판소가 세워졌다. 이것은 모두 좋은 일이었으나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빵에 굶주린 도시의 서민과 토지에 주린 농민에게는 별로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 혁명은 가로막힌 것처럼 보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국민 의회에는 농민이나 도시의 서민을 대표할 자가 전혀 없었다. 국민 의회는 미라보가 지도하는 중간 계급에게 좌우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자 전력을 다해 혁명의 진행을 저지하려 했다. 그들은 국왕 루이와 결탁해서 지방 농민을 사살하는 문제를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 총수인 미라보는 사실상 국왕의 비밀 고문이 되었다. 바스티유로 몰려가 감옥을 점령하고, 그러써 억업의 쇠사슬을 끊어 버린 줄로만 알고 있던 평민들은 사태의 추이를 수상하게 여겼다. 자유는 여전히 머나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고, 국민 의회는 거의 옛날 영주와 다름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혁명의 심장이었던 파리 시민이 국민 의회에 배신당하자 그들의 혁명적 에너지는 다른 돌파구를 찾아 냈다. 이것이 파리 코뮨,즉 시 정부 였다. 코뮨뿐만 아니라 몇사람의 멤버를 코뮨에 파견한 시의 각 지구는 대중과 직접 접촉하는 하나의 살아 있는 조직이었다. 코뮨과 각 지구는 혁명의 기수가 되어 온건한 중간 계급의 국민 의회에 대항했다.
바스티유 점령 1주년 기념일이 돌아오자 파리 시민들은 7월 14일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 '연합제'라는 이름을 붙인 이 축제를 진정한 자기네 축제라고 느낀 파리 시민은 제각기 열심히 시가지를 정식했다.
1790년과 1791년의 혁명 과정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 국민 의회는 혁명적 정열을 완전히 상실하고 혁명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 시민은 여전히 혁명적 에너지에 넘쳤으며, 농민은 변함없이 토지를 갈망하고 있었다. 사태는 언제까지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었다. 혁명은 전진하든가 아니면 좌절하든가 둘 중의 하나로 끝나게 마련이다. 온건파의 총수 미라보는 1791년 초에 죽었다. 국왕과 은밀하게 거래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인민들에게 인기가 있어 인민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1791년 6월 21일 혁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왕 루이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변장하고 탈출한 것이다. 그들은 거의 국경에 닿기 직전 베르돵 근처에 있는 바렌 에서 몇몇 농부에게 붙들려 파리로 송환되었다.
국왕과 왕비의 이러한 행동은 파리 시민과 관계되는 일인 만큼 이들의 운명을 결정해 버렸다. 공화국의 이념이 급속히 발전했다. 하지만 이 무렵 매우 온건해져서 인민의 감정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던 국민 의회와 정부는 루이의 폐위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총살하고 있었다. 혁명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등장한 마라(Jean Paul Marat)는 도망치려던 국왕을 반역자로 탄핵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쫓겨다니고 있었다.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파리의 하수도 안에 숨어 있다가 지독한 피부병에 걸리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루이는 그로부터 1년 남짓, 이론상 여전히 국왕으로 앉아 있었다. 1791년 9월 국민의회는 문을 닫고 '입법의회'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하지만 이 또한 국민 의회와 마찬가지로 온건한 것으로서 상층 계급의 대표 기관에 불과했다. 그것은 고조되고 있는 프랑스 인민의 혁명적 열광을 대표하지 못했다. 이 열광은 인민 사이에 번져, 인민 속에 뿌리박은 자코뱅당의 세력을 증대시켰다.
이 동안 유렵 열강은 경악 속에서 이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동안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다른 방면에서 분할 점유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폴란드 왕국을 결딴낸 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태가 실로 급박하게 돌아가자 그들은 프랑스에 눈길을 돌렸다. 1792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그리고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지금 벨기에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의 지역을 영유했던 관계로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외국군대가 프랑스 영토에 침입해서 프랑스 군을 무찔렀다. 충분히 예상할수 있는 일이지만, 프랑스 국왕은 외국과 공모한 혐의를 받고 있었으며, 숱한 왕당파들이 내통 혐의을 받았다. 주위의 정세가 긴박해짐에 따라 프랑스 인민은 더욱 뜨겁게 열광하며 혼란 상태를 빚어 냈다. 그들은 도처에서 간첩이나 배반자를 목도했다. 파리의 혁명 코뮨이 이 위기 극복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들은 인민에게 왕실의 반역을 억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내렸음을 표현하려고 적기 (Red Flag)를 게양하고, 1792년 8월 10일에는 왕궁의 습격을 명령했다. 국왕은 휘하의 스위스 근위대를 시켜 총을 쏘게 했다. 그러나 승리는 인민에게 돌아가고 코뮨은 의회를 누르고 국왕을 폐위시켜 감옥에 가두었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적기는 여러 곳에서 노동자의 갓발로 통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표지로 쓰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인민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할 때 공식적인 깃발로 사용되는 것이 관례다. 혹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이 깃발이 인민측을 대표해 게양된 것은 파리 코뮨때가 최초였으며, 그 뒤 노동자의 깃발로 널리 발전했던 것으로 안다.
국왕의 폐위와 투옥만으로는 아직 모자랐다. 인민들은 자신들에게 총을 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인 스위스 근위대의 행동에 흥분했으먀, 간첩과 내통하는 자를 극도로 경계하던 그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모조리 체포했다. 감옥은 그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체포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물론 죄인도 많았지만, 무고한 사람들도 체포되고 투옥당했다. 며칠이 지나자 또다시 인민 속에 격렬한 정세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그들은 감옥에서 죄수들을 끌어내 약식 재판에 회부한 뒤 대다수 사람들을 죽였다. 이 사건은 '9월 학살'이라 일컬어졌다. 그 때 죽음을 당한 사람은 1000명 이상이나 되었다. 이것이 파리의 군중들이 피맛을 본 첫 번째 사건이었다. 더구나 이 피에 굶주린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또다시 엄청난 피가 흘러야 했다.
9월에는 또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침략군에 대해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발미의 소규모 전투에서 얻은 승리였으나, 그 의의와 결과는 크나큰 것이었다. 그 작은 승리가 혁명을 구했기 때문이다.
1792년 9월 21일에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이것은 입법 희회를 대신한 새로운 회의체였다. 그것은 선행한 두 의회에 비교하면 상당히 발전된 것이기는 했으나, 아직 코뮨에 비하면 뒤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국민 공회가 처음으로 한 일은 공화국 선언이었다. 바로 뒤이어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아 1793년 1월 21일 왕정이 저지를 갖가지 죄를 그릐 목으로 보상했다. - 그는 길로틴으로 목이 잘린 것이다. 이로써 프랑스 인민을 니 때 스스로 퇴로를 끊어 버렸다. 그들은 마지막 한 발자국마저 내디뎌 유럽의 국왕과 황제에 도전했다. 이미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왕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채 선혈로 젖어 있는 길로틴 위에서 혁명의 대지도자 당통(Danton)은 몰려든 군중을 향해 주변 국가들의 국왕들에게 도전하는 연설을 소리 높여 외쳤다. "유럽의 국왕들은 우리에게 도전해 올 것이다. 저들에게 국왕 루이의 목을 던져주자!"
첫댓글프랑스 혁명이 있었기에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를 수 있었고...나폴레옹이 있어서 프랑스식 혁명이 퍼지게 되었죠... 피는 피를 부르고 혁명은 혁명을 부른다.. 혁명의 악순환속에.. 갈망하던 강력한 카리스마의 지도자 나폴레옹.. 그 의지만으로 전유럽을 상대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물론 그도 한명의 정복자 일 뿐이었죠... 아이러니컬 하게도 프랑스 혁명으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전하면서 그 자신은 제국주의적 침략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첫댓글 프랑스 혁명이 있었기에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를 수 있었고...나폴레옹이 있어서 프랑스식 혁명이 퍼지게 되었죠... 피는 피를 부르고 혁명은 혁명을 부른다.. 혁명의 악순환속에.. 갈망하던 강력한 카리스마의 지도자 나폴레옹.. 그 의지만으로 전유럽을 상대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물론 그도 한명의 정복자 일 뿐이었죠... 아이러니컬 하게도 프랑스 혁명으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전하면서 그 자신은 제국주의적 침략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네 그렇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