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대로 / 강나무
웃음이 웃습니다
울음이 웁니다
바람이 붑니다
믹서기에 어제를 넣고 돌돌 갑니다
꺼끌한 앙금이 가라앉고 맨얼굴이 거품으로 뜹니다
당근을 먹은 달팽이는 오렌지색 똥을 눕니다
팬지꽃 먹은 나는 노란 꿈을 꿉니다
'다 좋다'처럼 거꾸로 읽어도 기분 좋은
문장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 아내"처럼 거꾸로 읽어도 포슬포슬한
문장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별에 대해 쓰려고 반짝, 애를 쓰다가 관둡니다
나무이름, 들꽃 이름 같은 건 모릅니다
이런 내가 시를 씁니다
개망초와는 이제 서로 알아가는 사이입니다
중고나라 / 강나무
2인용 식탁 있나요? 묻는 말이
누군가와 마주 앉아 있고 싶어요, 라고 들릴까 조심스러워요
냄비처럼 끓던 연인들이 검게 탄 둥근 자국을 남기고 떠났어요
사랑도 오래 쓰면 망가져서 나사를 조이고
삐걱거리는 틈새에 기름을 떨어뜨려 달래 줘요
살림을 차리는 건 서로의 묵은 손때가 섞여
같은 향기를 풍기는 나라 하나가 생기는 거죠
이곳의 냉장고는 서리가 가득해요
사계절 내내 겨울인 마음이 오죽하겠어요
얼음벽들이 점점 자라 좁아지는 세상에서는
웅웅, 소리 내어 우는 일이 잦아져요
깜박이는 반딧불이는 없어요
자연풍 버튼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는 적막이 있어요
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으로 떠나는 사람처럼
먼지 날리는 시간이 있어요
낡은 책꽂이에서 후드득, 은행잎 책갈피 같은
바삭한 낭만이 집까지 따라와요
그런 날은 단출하게 차린 밥상에 바싹 다가앉게 돼요
형광등 아래 당신 맨얼굴이 자꾸 만져 보고 싶어서요
내일 또 중고나라에 갈 거예요
서랍 속 마른 벌레나 깊게 새겨진 누군가의 이름을 살 수도 있어요
쓸 만한 기억들을 찾느라 오랫동안 머물지도 몰라요
강나무: 전북 군산 출생
김유정신인문학상 수상
시집<긴 문장을 읽고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