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失踪)
정영우
오래된 여인이 있다
아내이었는지 애인이었는지 동거인이었는지 헷갈리는
낡은 액자 속 사진 같은
여인이 있다
그녀가 내게 대상인지 모형인지 헷갈린다
중앙시장 지하 주점에서 소주잔을 털다가 목에 걸렸을 때
그녀가 등을 두들겨준 것이고 내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그녀는 소주잔 속에서 웃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내게 웃음인지 울음인지 헷갈린다
술에 취해 계단난간에 기대어 토악질을 하다가 겨우 시장 밖을 나서니
그녀가 날 부축해 택시에 태운 것이고 시트에 파묻혀가던 내가 부르자
그녀는 거리의 전조등빛에 실려서 차창에 부딪치는 것이다
그녀가 내게 만남인지 헤어짐인지 헷갈린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을 못 찾은 택시는 동네를 몇 바퀴나 돌고 도는
애먼짓을 하다가 운전기사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올 때쯤
그녀가 골목에서 나타나 차를 세우고 택시비를 치루는 것이고
그녀에게 이끌려 들어가 내 집엔 링거 팩에 꽂힌 내가
침대에 쓰러져 있는 것이다
내가 그녀의 가족이었는지 세대원이었는지 헷갈린다
분명한 건 십 수 년 전부터 그녀는 나의 실종이었고
십 수 년 전부터 그녀는 내 그림자였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거나 아니거나 그녀는 늘 내 주변이었다는 것이다
# 정영우 시인은 1955년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2006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에 '아까시나무의 집' 외 4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2009년 1월 세상을 떠나 갔습니다. 前 풀밭 동인입니다.
첫댓글 그것이 우리네 삶인것을.....ㅉㅉ
이제야 오셨군요. 자주 자주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