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모음 75)
그 봄 /이남일
산 너머 또 봄은 오는가.
고개 길 그 붉던 꽃
그 향기 그대로 피어나던가.
추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등 뒤에 숨는 것
그리운 사람에게 묻는다.
그 때 그 사랑
지금도 곁에서 웃고 있는가.
봄의 저자거리 /은파 오애숙
봄은 봄인데
새봄의 환희 맛보지 못하고 있어
하현달의 서글픔이런가
사윈 들녘에선
너도 나도 달빛 가슴에 담아
윤슬에 피어올라 앞 다퉈 옹알거리며
날이 가고 달 차 올라 삭망 회도는 하현달이
상현달 되어 싱그럼에 웃음짓는 들판
들판은 봄동산인데
하현달의 서글픔 고랑에 파고들어
심연엔 새봄의 환희 맛보지 못하고 있을 때
화상으로 보는 소식통에 화들짝 놀라 동면에서
눈 비비고 깨어 맘의 창문 활짝 연다
왕벚꽃의 향그럼
한 통의 화상에 피어난 향기롬인가
여기저기 피어나는 벚꽃의 화사한 꽃망울 속에
새봄 활짝 열며 날 보러오라 손짓 하는 메시지
이역만리까지 휘날려 깨우고 있다
봄의 거리 용광로구나
사윈달 뜨겁게 달궈낸 상현달의 눈부심에
생명참의 환희 앞 다퉈 피어난다
가는 봄 /고명
꽃잎이 날린다
꽃이 죽어
꽃의 영혼들이 하얗게
하얗게 손수건을 흔들어댄다
나 죽으면 화장을 하리라
흰 뼛가루로
한번만 더 이 세상 뒤돌아보고
하늘길 가벼이
꽃가루 되어 떠가리라
봄 A /김춘수
강아지 귀밑털에 나비가 앉아 본다
실낱 같은 바람이 활활 감아들고
히히이 한 울음 모가지를 뽑아 보니
구름은 내려와
산허리에 늘어졌다
타는 아지랑이 그 바닥은
새푸른 잔디밭이 아리아리
꿈 속같이 멀어라
봄 향기 /한광구
오시고 게십니다.
시간을 지우고
공간을 뛰어넘어
바람처럼
햇살처럼
불어오는 바람에
쏟아지는 햇살에
후끈하게 전해집니다.
산에 앉은 바위 하나
조용히 엎드렸습니다.
오시고 계십니다.
따스한 입김을 불어주십니다.
연두 빛 산하(山河)가
눈을 뜨고 있는 중입니다.
이 땅엔
눈과 비가 섞여 오는 길을
사람들이 갑니다.
봄산 /정경진
산이 봄풍선을 불어 모은다
언젠가는 터져 폭죽될
어슴프레한 기억
오기로 버티다
산새 부리에 찔려
나뭇가지 끝에
질퍽하니 누웠다
해마다 게워내는 꺼지지 않는 불씨
그때마다 새로운 양
어깨 추스려
어색한 애교 떤다
눈 먼 봄 /김태수
온통 연둣빛이었다
뒷산 삘기 장딴지도 한창 알이 배었고
청솔 가지 진물도 가득했다 겉껍질 한 물 벗기고
하모니카 불 듯 이빨 곧추세워 훑으면
입안 가득 들어오는 송기 냄새, 찔레순도 제법 자랐다
온통 초록빛이었던 환장하게 배고픈 보릿고개의
그 때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까짓 학교쯤
구어 삶아도 그만이었던 아침 솔숲에서
지나가는 동무들의 자전거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보리밭, 보리밭, 보리밭, 연둣빛 보리밭을 배경으로
길게 날리는 까만 머리끄덩이, 까만 교복의
계집애들도 지나갔다, 용숙이도 거기 있었고 금새
작은 산길을 지나고 있었다 조팝나무
하얀 꽃 질질질 흘리는 산길을
아침 출근길, 황사 자욱한 들, 드문 보리밭
보리 누름은 저만치, 철 덜 든 조팝나무 하나
그 때처럼 하얀 꽃 질 질 질 흘리는데
학교 쪽으로 꺾인 길, 지방도로 노란 팻말 스쳐 지나며
문득 까만 교복의 용숙이 생각, 부질없이
먼 지난날을 더듬는다 낙동강변
자전거 두어 대 겨우 지나가던 작은 길
때론 송홧가루 흩날려 눈을 어지럽히거나
소리개 한 마리 빙빙 돌며 어지럽히거나
긴 머리채 풀풀 날리던 용숙이, 열 여섯 살쯤
어느 눈 먼 봄날에.
꽃 피는 봄이 오면 /이채
꽃 피는 봄이 오면
미움과 불신의 계곡에서
화해의 물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반목과 분열의 숲에서
화합의 새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질투와 험담보다
내면의 종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원망과 불만의 표정에서
환한 웃음이 넘치는 기쁨으로
지혜의 강과 포용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나무와 풀처럼
산 내들 수많은 물줄기처럼
하나 되어 흐르는 희망이었으면 좋겠다
모난 마음은 둥글게 다듬고
생각의 먼지를 털어내면
어느새 열리는 파아란 하늘
겹겹이 불어오는 향긋한 꽃 바람
사람마다 가슴마다
봄꽃이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
봄이 오는 풍경 /이승익
바람이 봄을 몰고 오나 보다
야위어진 봄 바람 돌담에게
살짝 달려가 그대로 돌담이 된다
길가 잡초들 꽃망울이 초롱하다
배추 동이올라 노오란 웃음 터뜨린다
살포시 웃는 배추꽃 부끄러운 듯 수줍어 한다
이슬 머금은 유채나물들 저마다
물이올라 노오란 빛 치겨울 날
기다림으로 살랑 거린다
차가운 하뉘바람 맞아 겨우내
쟂빛으로 웅성거리든 바다 빛은
봄바람 달겨들어 옥빛으로 변해간다
봄이 바람을 몰고 오나 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대안 박장락
봄을 기다리다 지쳐버린 채
하늘을 빗질하고 내리는
순백의 수정체가
온 대지를 뒤 덥으니
겨울의 의미는 차가운 한기로
미몽 속에 잠들어 버리고
그리움으로 지새우던
삭풍의 긴 세월을 반추하면서
보내온 동백 꽃잎은
피지도 못하고
각혈을 토해 놓으니
하염없이 순백의 흰 눈이 지금도
내 머리와 네 머리위에
시새움 하며 내리는데
어느 날까지 향기 가득한 천지에
순수함을 이고 져야 하는가
솔가지에 내린 눈꽃은
햇살에 반사되어 대지를 누비며
모래 언덕 버들강아지 살며시
계절을 유혹하는데
매화는 어느 날에 고운 꽃술로
봄을 기다려야 하는가.
봄사리 /안희선
세상엔 온통 파릇한 함성,
먹은 귀가 따갑다
꽃시샘 윙윙 바람 부는 대로
피(血) 어리는, 꽃송이
질질 끄는 낡은 신발이 무거워,
아직도 추운 내 그늘
그래도 무심(無心)한 봄볕 한 점 들어
반짝이는 뼈, 부끄럽다
아무도 몰래,
박제된 눈물
봄의 코르셋 /이정원
분꽃 씨를 묻으며 씨앗의 발아점이 궁금해졌다
마른 잠의 바닥
지극한 침묵의 절기를 지나
고요가 제 속의 자궁을 엿볼 때
잔뜩 부푼 입덧으로 소스라치는
그때 너의 생각은 분홍
그때 너의 꿈은 노랑
그때 너의 표정은 빨강
까맣게 굴린 어둠으로부터 튀어나올 색깔들이
팝콘을 굽는다 부푼 내일이 있다는 듯
늘 거기 있었다고
언젠가 다녀간 적 있다고
봄밤이 씨앗의 사생활을 엿보는 시간
흙이 연금술로 은하를 꽉 쥐고 놓지 않는다
하얗게 불타는 백야
프리다 칼로의 철제 코르셋처럼
그러안았던 관계의 코르셋을 벗어던질 때
씨앗의 발아점이 보였다
후두를 앓는 봄밤에겐 간절한 일
지각변동의 순간
내게 간절하던 발화지점이 거기 있었다
씨앗이 씨앗 밖으로 발을 뻗는다
봄동 /박희홍
겨우내
추위에 움츠렸던 몸이
다른 몸을 깨우기에는
겉절이 무침 일품이라더니
한 잎 펼쳐 지진 부침개 속에
봄이 살아 숨 쉬고
펑퍼짐한 제 몸 사르는
아삭아삭 고소한 맛
나른한 봄날의 밥도둑
식욕을 돋우어주네
막무가내 봄, /박목철
뉴스를 보면
온통 살어름 판
어디를 봐도 春來不似春인데
눈치 없이
꽃망울 터졌다는 봄소식
막무가내
나, 봄이야!
봄은 도착의 계절이다 /이재봉
기별도 없이 도착한 산수유가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서서
툭 튀어나온 눈방울을 되록거린다
뒤따라온 매화가 그 옆에서 살랑거리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한 개나리가
나비까지 불러들여 시샘을 한다
혼자서 외롭게 도착한 하얀 목련이
개나리 곁에 함초롬히 서 있고
샐쭉거리며 느짓느짓 도착한 진달래는
얼굴에 분홍 미소를 띠며 앉아있다
마침내 벚꽃이 나를 향해 손짓하자
연둣빛 산자락이 희부옇게 출렁인다
먼데서 사랑을 몰고 오는 저것들
울긋불긋 내 마음에 불을 놓는다
봄은 그렇게 /김정순
한풍에 나신 되어
천진한 웃음소리
살아진 놀이터에는
철새들이 그네를 타고
옹알이를 풀어 놓는다
훈풍에 민낯으로
그리움 잉태한 너
양지바른 곳 따라
해맑은 얼굴로
살포시 눈망울 터뜨릴 때
초롱초롱한 눈빛 하나둘
아기 손 꼼지락 거리듯
찬란한 봄은 그렇게
오고 있을 것이다.
봄에게 /나태주
오려거든
곱게 올 일이지,
눈썹 그리고
곤지 찍고
가마 타고 올 일이지,
벗은 몸 찬비로 얼리고
그것도 모자라
흙바람 먼지꽃으로
해를 가리고
산을 뭉개고
강을 흐리며 오는
봄이여,
진문둥이 눈썹으로 오는
봄이여,
오려거든 예쁘게
꽃 족두리 받들어 쓰고
춤추며 올 일이지,
노래 부르며 올 일이지,
답답한 가슴
헛기침하며
벙어리 마른 입술로 오는
봄이여,
우리 나라의
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