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모음 76)
봄을 본다 /김대원(瑞耕)
봄을 본다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신성을
갉아먹기 그 이전
자연은 저렇게 신비 했다오
새로움에 감미로운 사연 담고
춤추는 웨딩드레스
나비 선명한 황홀경에
금빛 나래 팔락이며
신선한 향기를 머금고
평화와 사랑의 청초한 심결
머문 가지마다
봄새 놀아
연두잎 분홍 꽃송이
터뜨리며
선의(善意)로운 노래 남긴다
포근한 온정이 담긴
신 생명 연두잎 사이로
아스러히 스치는 미풍은
자지러히 꽃무리 이루어
웃음 짖는 꽃잎을 날려
소녀의 가슴 위에
하얀 사연 심고
미련으로 가슴 애태우는
첫사랑의
그리움을 남긴 다오
이 신비한 봄의 운치 속애
정이 얽힌 푸른 꿈의 사연은
현실적 감투를 벗어버리게 하는
원시적 본능에 불 타
저 요염한 봄의 화신을
머금게 합니다.
오 자연은 태초부터
저렇게
신비가 차 있었다오.
봄을 맞는 산마을 /세영 박광호
메마른 대지에
쌓인 눈 녹아들고
안개 자욱한 산마을엔
봄볕이 든다
희망의 봄맞이가 자연만은 아니어서
사과나무 전지하는
사람의 손끝에도 삶의 꽃은 피어나고
머잖아
감자심고 모판 짜고
밭갈이 논갈이 농기계장단에
땅속 아지랑이도 잠깨어나겠지
겨울이 있어 봄이 오듯
우리네 삶도
늘 겨울만은 아닐것이네
산마을에 깃든 봄볕이
진정 은혜롭구나
하얀 봄 /가영심
-천경자님 그림엽서
보랏빛 등꽃을 흰 면사포처럼
너울 쓰고
목이 긴 여인으로 꿈꾸는 꽃의 여인.
그대 그리움의 모습이어라.
어스름 초저녁 유년시절에
꽃전차 지나갈 때 얼핏 보았던
그 황홀함을 잊지 못하여
해마다
가슴 가득 꽃불 켜면 살아온
기나긴 세월의 강가에 섰다.
아픈 사랑처럼
눈물 젖은 영혼의 문을 열고 오던
순백의 아름다운 그대여.
어쩌면 나도
넘치는 그대 향기처럼.
꽃피우는 그대 그리움처럼.
봄이 피는 계절 /현곡 곽종철
개구리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
먼 산에 눈들도
마지막 자리마저 비켜주니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 크게 하며
잔뜩 웅크렸던 몸 활짝 펴고
봄을 끌어안아
봄 냄새 흠뻑 들이마신다.
폭신한 하얀 버들강아지도
아지랑이 손짓 따라
사랑 찾아 헤매고
벌 나비도 분주히 날갯짓하며
임 찾아 헤매 돌다
이름 모를 야생화에 안기어
다짜고짜 입맞춤하는구나.
사랑은 무슨 맛일까?
아마도 새콤달콤한 맛이겠지
무슨 향기 전해 줄까?
물씬 풍기는 페로몬 향기에
사랑 타령 흥얼거리며
임 찾아가는데
내 반쪽은 보이질 않네.
한때 우리 사랑도
아름다운 무지개 같지 않았으랴
들키고 싶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사랑을 위해
고결(高潔)하고 야릇한 사랑을
사계절이 일백 번 변하더라도
변치 않는 사랑 찾아 헤맨다.
가려운 봄 /김기리
산골마을 복사꽃 잔치에 다녀오고 난 후
나는 한 동안 가려움증으로 몸살을 앓는다.
이 늦은 독수 공방에
잠들지 않는 가려움과 한 이불을 덮는 호사
긁적이는 새벽, 온 몸으로 깨어 있어본 날의 아득한 기억이
피부 여기저기에서 붉게 일어난다.
봄날의 버릇,
가려움은 봄날의 손버릇일까
철철 넘치던 꽃들이 웃는 듯 내 눈 안으로 날아들던
연분홍빛 복사꽃들, 산마을 누추한 봄을
온통 무릉도원으로 끌어 들였던 복숭아밭
지금쯤은 바람에 뿔뿔이 흩어지고
연분홍꽃잎향내마저 그 옛날처럼 날아갔을 것이다.
고개를 살짝 돌렸을 뿐인데
그 사이 다 날아간 꽃피던 시절
꽃잎 짓이겨 홍조를 만들었을 뿐인데
며칠 몸에서 떠나지 않는 간질거리는 봄날
꽃피는 한철은 모두 착각이라는 자조가 분분하다
천천히 꽃 지는 몸 여기저기에 흰 분가루 같은 흔적
접분의 시절은 어림도 없고
그저 꽃가지 하나 숨겨두고 싶었는데
풍선처럼 둥둥 떠 있던 며칠이
줄 끊고 날아가 버렸다
도화 꽃놀이는 내년에도 계속되겠지
그전에 나는 이 가려움증을 되돌려 주어야겠다
지금 막 하얗게, 볼그족족하게, 고운 눈매로 분바르는
복숭아꽃 열매에게 다녀와야 되겠다.
봄과 봄 사이 /박승민
한 사람이 떠났을 뿐인데
수평선 너머로 금니처럼 반짝, 했을 뿐인데
그를 생각하다가 만 서쪽 창으로
생생한 명함판 사진 한 장 떨어지고 없다
피가 하얗던 한 여자가 졌을 뿐인데
운동장에 혼자 서 있는 이 기분
산의 아랫도리만 봄이었다가 겨울이었다가
몸의 내륙으로 이동하는 찬 저기압
잊는 힘과 잊지 않으려는 힘 사이에서
콧물과 프리지어 향기 사이에서
곧 눈물 마르고 향내 지워지리라
잊고 잊히는 일은 여기서 또 얼마나 잘 훈련된 관습인가
그러니 어느 동고서저(東高西低)의 기압골로 꽃 단청 오를 때
화전 부치는 냄새 거기까지 요란할 때
네가 먼저 문병 와다오
이번 독감은 오래가는 고독에 가깝네
봄의 레퀴엠 /채선
움터 오르는 살의殺意를 비집고
아기가 운다.
신생아실 앞 아기를 보러 온 사람들이
흡반처럼 웃고 있다.
붉은 리본에 묶인 꽃다발 흔들린다.
삼키지 못하는 저 울음과 웃음은
서로 닮아 있다.
흔들리는 꽃다발처럼
밑도 끝도 없이 수척해지는 풍경을
병상에서 오래도록 듣는다.
못 견디게 나른한 수액의 속도는
불길한 문장처럼
멈칫멈칫 가느다란 혈관을 통과한다.
이를테면, 컴컴한 대낮 같은
진통이 발가락 끝까지 뻗칠 때면
나는, 배지 않은 아이를 사산하고
아이가 터뜨리지 못한, 붉은 리본에 묶인 울음
이 불룩해진 쪽으로 돌아눕는다.
온데간데없는 뜨거운 것들의 이름
그림자가 너무 길다.
봄을 기다리며 /김영준
누구나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찬 목구멍을 헤집는 하늘과
골목의 라면봉지 같은 호흡과
다시 눈물나는 구토와
포크레인보다 얇은 우리들 어깨와
표백제로 시작되는 아침과
빛바랜 우리들 살갗과
담벼락의 오줌을 지우고
젖어가는 옷자락을 지우고
다시 신호등의 낯선 기억과 다투며
보이지 않는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나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골목을 생각하고
골목이 바람을 생각하며
6월보다 차가운 폭우처럼 날아다니며
불렀던 노래와 노래의 끝에 불려지는
이름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겨우내
물은 마셔도 다시 떠오르고
떠올라 부유하는 한끝으로
저녁 연기가 몰려가고 있다
봄의 눈물 /탁영 김병근
냉랭한 들녘 초우 젖어 들썩이고
계약 같은 연둣빛 초목 기지개 힘차련만
분망 한 바람 불어 허무 마음 격한 탈춤을 춘다
그랬어라 코로나 19 온 누리 창궐하니
경자년 맹춘 시끌벅적 한숨소리 세상에 진동하네
강산은 봄꽃 피워 아지랑이 눈물 실버들 맺히려니
상춘객 애끓는 탄식 납덩이만 양 무겁고 애달파라
어쩌나 분명 봄이건만 봄 같지 않으니
입마개 타령 코로나 19 타고 전 세계 달리노라
아흐야 아흐야 이제나 저제나 어디 갈까
근심찬 풋풋한 봄노래 언제쯤 목청 높여 불려나 볼꼬
봄·봄 /나병춘
'봄'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몸'에 싹이 돋아 있다
뿔 같기도 하고
꽃송이 같은 것이
마늘촉마냥 촉.촉.촉.
만셀 부르고 있다
긴 겨울
건너 왔으면서도
저러코롬 팔팔하게
이제 봄이 되었으니
이 몸에도 문득 꽃이 피겠구나
그 향내 맡으러
어디선가 배고픈 벌나비
날아들겠구나
어부바
남실바람 아지랑아지랑
건듯 부는 날이면
봄이 왔어요 /구분옥
고랭지에
봄이 온 줄도 모르고
긴긴 기다림에 가슴앓이
참 많이도 했습니다
꽃이 피어야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어요
얼음장 밑에서도
새봄이 온다는 걸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땅이 힘찬 태동을 하고
산곡에서 들려오는
명징한 소리가 잠자던 감성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숨이 머질듯
기쁨에 눈물이 봇 물처럼
왈칵 쏟아져
온통 가슴이 젖고 말았지요
자연은 늘 이렇듯
따뜻한 어머니 품속처럼
조건 없이 내어주고
살뜰하게 품어줍니다
봄 내음 /김정숙
뜨락에 앉은 봄 내음
저만치
가물거리는 땅끝
아지랑이
더딘 걸음 재촉하며
요만큼 왔다고
애교스런 몸짓이란다
실바람에
살랑거리는 날갯짓
수줍은 연둣빛 새순
풀빛에 익은 미소 지으며
겨우내 못다 한
연정의 울타리 그리움
자락마다
사위는 옷고름
땅 기운 품은 흙냄새
차디찬 가슴 뜨거운 여정
사랑이 물든다.
봄의 만찬 /김하인
흰 접시마다 햇살과 강에서 잘라온 맑은 물, 철쭉 꽃송이와 클로버잎과 강아지풀들,
숲을 지나온 바람 한 줄기를 잡아 가득 차려놓은 식탁에서 그대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먹고 우리가 다시 어른에서 아이로 클 수 있다면
순수와 맑음의 살과 뼈 다시 길러낼 수만 있기를.
사랑을 하기에 앞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만찬을 그대와 즐깁니다.
우리들 사랑이 당신 가슴과 제 마음을 무럭무럭 맑고 착하게 키웠으면 합니다.
첫봄갈이 /고재종
논두렁 산수유꽃 사태난 것은
며칠째 불어오는 동부새의 짓이다
꽃 피는 그 앞에서 무슨 공을 다투랴
탈탈탈탈, 경운기 몰아댈 때마다
세섯덩이 넘어가고 넘어가면
고비고비 사람도 참 많이 넘어야겠다
이곳 저곳의 쥐불연기 보아라
고구려고구려 오르는 저 모습이
땅의 기도 아닌들 어찌 그리 간절하랴
아른아른 일렁이는 산수유꽃 너머로
부르르 진저리치는 뒷산이 있어
목청에 기름을 칠한 동박새도 짖어댄다
사람은 참 많이도 절망하지만
아랫마을의 대숲은 어느 때나 푸르다
동부새 그 짓거리에 또 몸살을 앓겠지
훈김 오른다. 쟁깃발에 넘어가는 논
훈김 없으면 어떻게 씨를 품으랴
오늘 밤 두엄자리도 몸을 뒤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