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혈육로를 거친 대원들은 양대와 음대 중 한 군데를 택일(擇一
)할 권리가 주어진다..
그때부터 또 다른 수련이 시작된다.
양대는 제일 먼저 미산(米山)으로 이동한다. 새로 편입된 비수
당원뿐만이 아니라 기존 비수당원, 부대주와 대주까지 모두 수
련에 동참한다.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행낭을 짊어지고. 처음
부터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한다는 게 비수당의 전통이다.
미산에서는 벌거벗은 몸으로 암벽(岩壁)을 등반하기도 하고,
하강(下降)도 숙달시킨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소득은 하나라
는 일체감이었다. 산림의 특수성을 응용한 진법(陣法)을 수련
하다 보면, 가슴에 털이 수북한 사내들이 서로를 껴안고 낄낄
거린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미산을 벗어난 양대원들은 남만(南蠻)으로 향한다.
밀림에서의 생존(生存)과 가상 임무 달성은 필수적이다. 그 외
에도 중원과는 상이한 지형, 기후, 풍토병, 독충들을 이겨내야
한다.
양대는 산전(山戰)에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수하들이 이제
삼십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음대는 양대와 다른 수련을 한다.
침투(浸透), 암살(暗殺), 납치(拉致), 교란(攪亂) 등 특수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유영(遊泳) 같
은 작은 것에서부터 당문(唐門)의 암기술(暗器術)까지 고루 익
혀야 한다.
음대도 이십여 명이 죽었다.
단 하룻밤의 격전이 사십여 명의 사상자를 만들었다.
'이럴수가!'
조중은 연신 눈을 끔뻑거렸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격한 감정이 치밀어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피붙이같이 아끼고 사랑하던 수하들이
핏속에 드러누웠다. 즉사(卽死)를 면하고 부상을 당한 수하들
도 그까짓 비수당의 명예가 무엇이라고 신음 한마디 마음껏 내
뱉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놈들의 살공은 잔인하기가 극에 달했다.
동귀어진(同歸於盡).
철저하게 죽이고 죽자는 무공이었다. 그렇기에 찌르는 검법이
일절 없고, 베는 검법뿐이었다. 노리는 곳도 평범한 비무에서
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곳들. 일검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반
드시 죽게 되는 니즉사( 卽死) 아즉사(我卽死) 검법.
원한이 하늘에 닿지 않는 한 펼칠 수 없는 검법이었다.
"이제는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음대주 파가자 황보청이 거친 목소리로 물어왔다.
능공십자 학구도 묵묵히 앉아 있지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것이 황보청과 같은 마음이 분명했다.
"무슨 일인지조차 모르면서 비수당 절반이 죽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조용히 해라."
여간해서는 거친 소리를 하지 않는 조중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역시 자초지정을 알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는 않았다.
"당주님! 답답합니다. 수하들이 죽는 마당입니다. 무슨 소리라
도 좋으니까 아무 소리나 해보세요."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렇게 못합니다. 죽음이 겁나는 것은 아닙니다. 검을 잡았으
니 언제고 죽어야겠죠.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영문도
모르는 싸움에 끌려들어 귀신놀음이나 하다가 목숨을 버리기는
싫습니다."
"싫으면? 음대주 자리를 내놓고 물러가기라도 하겠다는 말이
냐?"
"당주님!"
"조용히 해라.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 장기를 둘 적에는 말일세. '내 기물(器物)은 하나도 안 죽이
겠다'하는 생각을 가지면 지게 되지. 얼마나 기물을 적절하게
운용...
'기물...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 또한 기물 중 하나일지도..."
조중은 답답한 마음에 검을 들고 일어섰다. 그의 검에도 방금
묻은 선혈이 짙은 냄새를 풍겨 냈다.
"아는 것만 말해 주겠다."
그러자 황보청과 학구의 고개가 번쩍 들려졌다.
"죽음도 같이, 삶도 같이.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격한 감정이 가득 배어 칼칼하게 터져 나온 목소리였다. 대주
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당주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
실을...
* * *
두두두두...!
일행은 어둠을 뚫고 쾌속하게 질주해 나갔다.
선두는 우모우 진육이 맡았다. 그는 조그만 마치를 몰았는데,
마차를 끄는 말 두 필은 비루먹은 것처럼 깡말랐지만 실은 보
기 드문 명마라 앞을 이끄는 데는 더없이 적격이었다.
그 뒤를 동종관이 탄 마차가 따랐다.
어자석에 앉은 사람은 환제갈 함상이었다.
그는 일행의 중심을 맡았다. 머리 역할이었다. 기습을 가해 오
는 무리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철칙이었다. 그럴 경우
일행 모두는 환제갈의 명을 받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천애사시 동목은 후미(後尾)를 맡았다.
그들은 질주하는 마차 뒤를 바짝 따라오면서 사위를 예리하게
훑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공격이닷! 피해랏!"
천둥처럼 커다란 고함이 어둠을 찢어발겼다. 그리고 소름이 오
싹돋는 파공음이 뒤를 받쳤다.
슈슈슉...! 탁탁탁...! 두두두두....!
혼탁한 소리가 어우러졌다.
동종관과 사공은 불의의 기습을 당했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
았다. 벌떼처럼 날아오는 화살도 달리는 마차를 멈추지 못했
다. 아니, 오히려 달리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부채질한 꼴이었
다.
"허허허! 화살로는 안 되지."
동종관의 말이 맞았다.
우모우 진육은 왼손으로 말고삐를 바짝 잡아당기고, 또 한 손
으로는 말채찍을 연신 휘두르며 화살을 퉁겨 냈다. 그의 편법
(鞭法)은 환상적일 만큼 정교해서 정확히 화살대를 때려 냈다.
천애사시 동목은 대부(大斧) 두 자루를 사용했다. 무게가 족히
삼십 근은 나갈 것 같은 대부를 나뭇가지처럼 휘둘러대는 모습
은 가히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槪世)였다.
정건 석수는 은창(銀槍)을 팔랑개비처럼 돌렸다. 그의 주위에
펼쳐진 엄밀한 창막(槍幕)을 비집고 들어서는 화살은 단 한 대
도 없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병기를 사용했으되 공법(功法)은 한결같았
다.
쾌(快).
동종관은 날아오는 화살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
지 흑의인들은 암습을 주로 했다. 하지만 언제나 검 대 검이었
지 화살이나 암기를 동원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로 집약된다. 비수당을 공격한 무리와 이들은 다르다는 것.
어느 쪽이 강할까? 속단은 금물이었다. 비수당이 꼼짝없이 당
한것처럼 자신들도 그렇게 당할 것이다. 상대는 어둠 속에 숨
어 있고, 자신들은 백주대낮에 발가벗고 서 있는 형상이니까.
파앗!
날카로운 파공음이 전면(前面)에서 터져 나왔다.
진육은 소리없이 다가온 암경(暗勁)을 접하는 순간 화들짝놀라
고 말았다. 한겨울에 설산에서 눈사태를 만난 듯 항거할 수 없
는 거력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지 않은가.
"따앗!"
황급히 어자석을 박차고 솟구친 진육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퍽! 퍼억! 히히힝...!
처절한 말울음 소리와 함께 마차는 길 옆 도랑을 향해 곤두박
질 쳤다. 하지만 그때는 마차 인으로 들어갔던 진육이 행낭 두
개를 좌우에 걸머진 채 뛰쳐 나온 후였다.
"후후후! 곽가장의 사공도 별게 아니군, 그저 몸 사리기에 급
급한 쥐새끼에 불과했어."
땅바닥으로 내려선 진육은 어둠속을 향해 매서운 눈길을 던졌
다. 드디어 나타난 흑의인. 그의 손에는 반월처럼 날이 부드럽
게 휘어진 용형도(龍形刀)가 들려 있었다. 검이 아니었다. 말
두 마리의 목을 단숨에 베어낸 용형도는 핏물 한 방울 묻어 있
지 않았다. 그의 도초(刀超) 역시 쾌(快)라는 증거였다.
"진육, 오늘 너는 죽을 거야."
흑의인의 음성은 지저(地底)에서 흘러 나오는 듯 음침했다.
"나를 알다니?"
진육은 깜짝 놀랐다. 정대원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
것은 공의 칭호를 받은 네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언제든지
임무(任務)를 받을 수 있도록 신분은 은폐시켜야 했다. 그런데
앞에 나타난 흑의인은 정확히 이름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게 무에 그리 대수롭다고..."
쉬익!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흑의인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니, 날
았다 싶었는데 어느새 날카로운 도기(刀氣)가 목젖을 베어 왔
다. 병기도, 공격하는 부위도 모두 틀리다. 여태까지 나타난
흑의인들은 집중적으로 단 네 곳만 노렸다.
파라락!
공기 결을 흔드는 소리가 들리며 진육의 손에서 강환(剛環)이
터져나갔다. 빨랫줄처럼 쭉 늘어진 강환의 물결. 강호(江湖)에
진육이라는 사람이 있음을 알려준 십이강환술(十二剛環術)이었
다.
그뿐 아니었다.
강환을 던진 후, 곧바로 행낭에 손을 집어 넣은 진육은 제비
모양의 암기, 철원앙(鐵鴛鴦) 열 개를 꺼내 던졌다.
행낭은 온갖 암기로 가득했다.
진육은 검객이라기보다 암기의 달인이라는 편이 어울렸다. 그
러나 강호인들은 진육에게 십이강환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암
기가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기에.
까까강...!
용형도로 십이강환과 철원앙을 장난하듯이 쳐낸 흑의인은 진육
의 두 자 앞으로 다가들었다. 강환을 날릴 수도 암기를 꺼낼
틈도 없었다. 위기였다. 그때,
"삼환진(三幻陣)!"
환제갈이 다급한 외침을 토해 냈다.
진육 혼자서 흑의인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실력차가
너무 뚜렷했다. 공격을 하면서도 계속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진육. 흑의인 상대할 방법은 오직 하나, 삼인연수(三人聯手)
뿐이었다. 그것도 빨리 끝내야 한다. 아직도 주위에는 화살을
쏘아낸 흑의인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한사람으로 충분하다
는 생각일까?
"타아앗!"
우렁찬 외침과 함께 동목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대부를 휘둘렀
다. 진육을 벨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네 목도 달라는 기세였
다.
석수도 날아올랐다. 그의 은창은 영활한 뱀처럼 용형도를 따라
붙었다. 진육, 그는 황급히 뒤로 신형을 물리면서도 행낭에서
우모침(牛毛針) 한 무더기를 꺼내 날렸다. 일체의 파공음도 나
지 않는 음공(陰功)이었다.
촤르륵...! 창창!
병장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흑의인은 진육을 베지 못했고, 진육 일행
또한 흑의인을 곤란하게 하지 못했다.
"천격(天擊)! 지방(地防)! 인참(人斬)!"
환제갈은 지체 없이 일갈을 토해 냈다.
그러자 동목이 진기(眞氣)를 고르지도 못한 채 다시 공격해 들
어갔다. 그가 공격한 곳은 전처럼 머리 부분이었다. 진육은 우
모침 한 무더기를 다시 흩뿌렸고, 석수는 더없이 가공할 속도
로 은창을 찔러냈다. 완벽한 합격진(合擊陣)이었다.
까강! 깡...!
이번에는 전보다 조금 거센 소리가 울렸다. 그만큼 전력을 다
한 격돌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달랐다.
석수는 창대가 잘려 나가 손잡이만 잡은 채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입가에 가는 핏줄기가 흐르는 모습으로 미루어 내상
(內傷)을 입었음이 분명했다.
동목 또한 대부 한 개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손아귀가 찢어진
것 같았다. 진육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암기를 사용한
덕에 피해를 가장 적게 받았다. 하지만 그도 행낭 한 개는 헐
거워 보였다.
"도(刀)는 양병(陽兵), 무공은 음공(陰功). 음양(陰陽)의 조화
(造化)라. 하지만 근본은 음(陰). 빠름은 이해하겠는데 강(强)
까지 곁들여 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군."
환제갈은 대주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퍼뜩 깨닫는 바가 있
었다. 그렇다. 흑의인은 대부를 날려 버리고 은창을 잘라 버릴
만큼 강한 도기(刀氣)를 펼친다. 그러면서도 정교한 도법이다.
단 한 개의 우모침도 맞지 않는 가공할 쾌도 선보였다. 철벽
(鐵壁)인 것이다.
그러나 대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유(天遊), 지회(地回), 인시(人視)!"
동목은 즉각 움직였다. 하나 남은 대부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노리는 곳은 역시 흑의인의 머리. 진육은
양손에 유엽도(柳葉刀) 다섯 자루를 나눠 들고 흑의인의 주위
를 맴돌았다. 조그만 틈이라도 발견되면 가차없이 달려들 기세
였다. 반면에 석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멀거니 구경만 했
다. 하기는 반쯤 잘려져 버린 은창으로는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게다.
"밤은 짧을수록 좋지. 동종관, 애완견들이 목숨을 다하는데 고
개도 내밀지 않을 텐가?"
흑의인은 용형도를 들어 동목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내며 말을
흘려왔다.
순간이었다.
"인참(人斬)!"
환제갈의 입에서 다급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수수방관
하고 있던 석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부러진
은창을 마치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노리는 곳은 목과 어깨의 경계선인 견근혈(肩根穴)로 팔을 잠
시 마비시키는 혈(穴)이었다.
"허엇!"
흑의인은 뜻밖에도 당황했다.
도법의 조문( 門:약점)은 견근혈이었다. 음공과 양병의 기가
만나고 조화되는 곳. 견근혈에서 증폭된 진기는 양병의 기운을
최대한으로 살려 주고, 원래의 무공을 지속시킨다. 쾌와 강이
어우러진 원인이었다.
파앗! 팍!
동목의 대부가 왼쪽 견근혈을 찍었다. 동시에 진육이 기해혈
(氣海穴)을 노리고 유엽도 열 자루를 날렸다.
차창! 퍼억...!
또 한 번의 격돌이 있고 난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흑의
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옅은 피비린내가 그자리를 대신했
다.
동목등 삼 인의 모습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석수의 앞가슴은 넓고 깊게 찢어져 붉은 피가 뭉클 솟아났으
며, 동목의 대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한 손
마저 찢어진 것으로 보아 병장기 부딪치는 거센 소리는 그와
흑의인 사이에서 터진 것 같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대로 물러갈 리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함상의 안색이 절망으로 까맣게 죽어갔
다. 마차를 에워싸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는 흑의인들. 그들
의 수는 못 잡아도 백여 명에 이르렀다.
"대주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 인가?"
동종관의 안색도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이렇게 빨리 종말이 다가올 줄은 미처 몰랐다. 곽가장으로 가
는 밀마가 차단당했을 때부터 예감이 불길했지만, 공격을 가해
오지 않기에 조금은 안심했다. 적어도 비수당과 합류할 때까지
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번 일에 승산을 얼마나 점쳤습니까?"
"허허허! 함상, 승산을 점치다니 자네답지 않군."
"압니다. 그래도 여줍고 싶었습니다."
"흠! 생각해 보세나. 그러니까... 장을 나올 때는 십 할이었
지. 탈명화검을 죽인 솜씨가 놀랍기는 했지만 일심각이 나선다
면 필승이지 않은가?"
"그런데요?"
"비수당이 합류하면서 승산이 떨어졌다네. 팔 할로."
"하하하! 대주님답지 않으시군요."
그랬다.정대는 언제나 완벽한 계획 아래서 움직였다. 십 할의
승산에서 단 일 푼만 빠져도 계획을 수정했다. 그 모든 것을
지휘, 감독한 사람이 대주 동종관이었다.
"비수당원이 죽었을 때...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현빙검의 시
신을 보았을 때 승률은 오 할로 감소되었다네."
"반반으로 생각하셨군요. 거기까지는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
다."
흑의인들은 극히 절제된 행동으로 다가왔다.
인원이 많다고 방심하지도, 교만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
로지 검 끝에 인생을 걸고 목숨을 이슬같이 여기는 절절함이
먼 거리를 격해서도 확연히 전달되었다.
진육은 이제 다섯 개밖에 남지 않은 강환을 들고 전의(戰意)를
불살랐다. 그런데 장렬해야 할 모습이 왜 초라하게 보일까?
석수는 창대만 남은 은창을 손에 꼭 쥐고 있지만 어깨에는 힘
이 빠졌다. 동목은 멀리 날아가 버린 대부 대신 썩은 나뭇가지
를 들고 서 있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누가 더 빨리 죽느냐
하는 시합일 뿐이다.
"홍금신을 만나고, 곽가장으로 보낸 밀마가 차단된 것을 알았
을 때에는... 허허허! 무슨 생각이 들었는 줄 아는가? 무림태
두(武林泰斗) 소림사와 단신으로 맞선 기분이었다네. 승산은
이 할, 그것도 각주가 암중으로 조력해 준다는 전제하에서 말
일세."
"그렇군요."
"허허허! 여보게, 석수. 상처는 좀 어떤가?"
"참을 만합니다."
말은 그렇지만 워낙 중상(中傷)이라 몸을 움직일 기력이 없을
게다. 하지만 요양(療養)이라는 말처럼 정대원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었다.
"엇! 저, 저들은!"
여간해서는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동목이 얼굴 가득 놀람을
떠올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석수, 진육, 함상, 동종관까지.
아! 지옥에서 살아온 기분이랄까.
나타난 사람들, 그들은 비수당원들이었다. 피에 절은 혈의가
워낙 어두운 밤인지라 흑의로 보인 것이다.
"누구냐?"
냉랭한 음성!
싸늘하기로 쇄심파와 버금간다는 능공십자 학구의 음성이 틀림
없었다. 쇠가 부딪치는 듯한 날카로운 음성이 이토록 따뜻할
줄이야.
"허허허! 날세, 동어구천 동종관."
다가오던 사내들이 주춤거렸다. 그들 또한 놀란 표정이 역력했
다.
"정대주? 정대주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시오?"
능공십자의 뒤에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건네 온 사람은
혈향봉 조중이었다.
"당주께서 직접! 음대까지!"
동종관은 깜짝 놀랐다.
비수당주와 음대까지 가세한 사실은 전혀 몰랐다. 곽가장에 웅
크리고 있었다면 누구보다 먼저 알았을 사실이지만 밖으로 나
도는 입장인지라 정보 수집이 늦은 까닭이다.
그러나 그런 점보다 더욱 동종관을 놀라게 하는 사실은 조중의
혈의가 감물로 물들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진짜 피로 얼룩졌
다는 사실이다. 옷매무새가 헝클어지고, 눈빛이 날카롭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전까지만해도 호된 격전을 치른 듯했
다.
"정말 정대주구려. 여긴 어쩐 일이오?"
"그러시는 당주께서는...?"
곽가장은 상하관계가 엄격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직분이
낮으면 깍듯이 예를 표해야 한다, 그렇지만 단 몇 사람만은 예
외였고, 정대주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곽가장과 더불어 살아
온 사람들. 그들이 비록 낮은 직위에 있으나 혈향봉은 그들의
경륜을 존중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저희는 방금 전, 화살 공세를 받았습
니다. 지금 주위에 적들이 많으니 우선 자리를 옮기시는
게..."
"함상, 곽가장이 그리 좋던가?"
조중은 함상을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아! 하하하! 그렇군요. 편한 곳에 있다 보니 머리가 녹슬었습
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흑의인의 무공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이
리라. 흑의인들이 암습에 천재라면, 비수당 음대도 그에 못지
않다. 아니, 암습으로 논하자면 중원 제일의 살귀들이다. 그들
이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역공(力攻)을 생각하
지 못했다. 양대가 정공(正攻)만 고집하기에 잠시나마 머리가
굳어졌다.
"일심각주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장주께서는 암중으로 따르
라 하셨지만 희생이 너무 큽니다. 대주께서는?"
"잘 생각하셨습니다. 허허! 저는 양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
죠."
동종관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듯 마음이 든든했다.
잘 됐다. 잘 된 일이다.
천애사시 동목은 흑의인들의 뒤를 캐러 가야 하고, 정건 석수
는 반여량의 곁에 머물러 있으려 했다. 비수당을 만남으로 해
서 모든 고민이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정건은 자연스럽게 반여량에게 접근할수 있으리라. 천애사시는
홀가분하게 혼자 몸만 건수하면 되리라. 그리고 혼자 몸이라면
지옥에서도 살아 올 사람이다. 공(公)이란 칭호는 아무나 듣는
게 아니니까.
"밤길을 재촉해야 합니다. 지금도 죽음은 이어지고 있죠. 음대
와 흑의 살수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을 겁니다. 되도록 빨
리 일심각주가 있는 건교루(乾橋樓)로 가야 합니다. 그게 음대
의 희생을 줄이는 길이죠. 이야기는 가면서 합시다."
"그럼 어서 갑시다."
동종관은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며, 앞서가는 혈향봉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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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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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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