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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31주간 토요일(2010-11-06) |
어느 때보다 재물의 힘이 강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돈을 벌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우리 가운데에서도 하느님보다 돈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 없이는 상관없어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돈 없이도 하느님을 믿고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을 ‘맹신자’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라면 우리 가운데 맹신자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이 돈보다 강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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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추천성가] : 시작성가 34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봉헌성가 216번 십자가에 제헌되신 340번 봉헌 511번 미약하온 우리 제물 성체성가 156번 한 말씀만 하소서 158번 구세주예수 그리스도 178번 성체 앞에 파견성가 248번 한 생을 주님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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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31주간 토요일(2010-11-06) | 미사 전례 |
[입당송] : 시편 25(24),16.18 참조
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저의 비참한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본기도] :
하느님, 구원의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모두 물리쳐 주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말씀의 초대] :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게 살 줄을 알라고 한다. 만족하는 삶이야말로 믿는 이들의 필수 항목이다. 믿는 이들은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성실해야 한다고 하신다.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하면 큰일을 할 수 없다. 성실하지 못하면 아무도 그에게 참된 것을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제1독서] :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4,10-19 형제 여러분, 10 여러분이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을 마침내 다시 한 번 보여 주었기에,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사실 여러분은 줄곧 나를 생각해 주었지만 그것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11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15 필리피 신자 여러분, 복음 선포를 시작할 무렵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 여러분 외에는 나와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음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16 내가 테살로니카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두어 번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17 물론 내가 선물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많은 이익이 돌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18 나는 모든 것을 다 받아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에파프로디토스 편에 보낸 것을 받아 풍족합니다. 그것은 향기로운 예물이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제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시편 112(111),1-2.5-6.8ㄱ과 9(◎ 1ㄱ)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 ○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 ○ 그 마음 굳세어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 ◎
[복음환호송] : 2코린 8,9 참조
◎ 알렐루야. ○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네.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졌네. ◎ 알렐루야.
[복 음] :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9ㄴ-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
주님, 저희가 주님의 사랑을 믿고 거룩한 제단에 제물을 봉헌하고자 모였으니,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제사가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영성체송] : 시편 17(16),6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영성체 후 묵상] :
주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곧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고 하십니다. 재물은 우리가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 정도면 충분합니다. 먹고도 남아 쌓아 놓을 만큼의 재물은 이미 일용할 양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섬김의 대상이 됩니다. 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을 넘어설 정도로 쌓여 가는 재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친구들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 마침내 서로가 하느님 나라의 동반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재물을 섬기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니 나눌 줄도 모르고, 친구도 없습니다. 친구가 없다면 사랑의 행위, 평화와 정의를 일구는 행위, 곧 믿음의 삶은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우리가 박사 학위를 받고, 회장 자리에 취임하고,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앞에서 높이 평가되어도, 주님 앞에서는 아주 낮은 자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를 성자의 살과 피로 길러 주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저희가 말보다는 행동으로 진실하게 주님을 찬미하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우리 주…….
[파견] : |
[다해] 연중 제31주간 토요일(2010-11-06) | 미사 강론 [Lectio Divina & Comtemplation] * 독서 : 필리 4,10-19 / 복음 : 루카 16,9-15 * |
<미사강론-1> :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청지기
어제 우리는 약삭빠른 청지기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에 덧붙여 우리가 또 알아야만 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선 첫 번째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집안일, 하느님 나라의 일을 맡아 담당하는 하늘나라의 관리자 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보화들을 맡아 하늘나라를 위해 그 보화들을 제대로 사용해야하는 청지기요, 관리자들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보화란 현세의 재물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생업, 맡겨진 책임과 의무들, 우리들이 돌봐야하는 사람들과 사업들, 심지어 우리들의 휴식과 여가시간까지 전부입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된 모든 사람과 일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재물이란 단지 돈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이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세속의 제물을 가지고라도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돈으로 친구를 사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게 맡겨진 그 하늘나라의 보화들을 잘 사용하여 하늘나라의 백성들을 모으라는 뜻입니다.
재물은 사실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재물 자체가 우리를 악으로 끌고 들어가는 나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의 마음이 악으로 향할 때, 재물도 거기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마음이 선으로 향한다면, 그 재물도 선을 향한 일에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칫 큰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했다고 복음서는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많은 재산을 지니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선한 일을 많이 한 자기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요 선물이다.
부유함은 선행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이요, 가난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다. 돈과 명예 같은 재물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선행에 대한 보상이 절대 아닙니다. 게다가 그 선물은 우리 청지기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제물은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이 아닙니다. 가장 작은 선물일 뿐입니다.
가장 큰 선물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은총이며 새롭고 영원한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선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큰 선물도 주어질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을, 내게 맡기신 보화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아예 내겐 너무 형편없는 걸 주셨다고 내동댕이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혹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나는 이만큼이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며 교만으로 우쭐대거나 다른 사람들이 받은 선물과 보화들을 무시하지는 않는지 반성합시다.
오늘은 일주일을 정리하는 마지막 날입니다. 한 주간을 잘 정리해서 더 힘차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행복하십시오.............◆
[말씀자료 : 김지현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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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2> : 돈보스코의 의미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한 장애우들 시설에 미사를 봉헌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미사 끝에 한 형제가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살레시오회에서 왔다고 하니 당신도 세례명이 ‘돈보스코’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셨습니다.
왜 세례명을 돈보스코로 정하셨냐고 여쭈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돈’자가 들어가서 선택하셨답니다. 돈을 좀 많이 벌고 싶어서. 돈 많이 벌면 어려운 사람들 많이 도와주고 싶어서.
사실 ‘돈’(Don)이란 말은 이태리어에서 존칭에 해당됩니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분들, 신부님 같은 분들의 이름 앞에 붙이는 존칭입니다. 따라서 ‘돈보스코(Don Bosco)’라는 의미는 다름 아닌 ‘보스코 신부님’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인 돈보스코께서는 살아생전 돈(錢)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 같은 경우 “주님, 제발 저에게 돈이 쌓이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비오니 아무도 제게 유산을 물려주지 말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셨답니다.
왜냐하면 착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이자 사심이나 욕심이라곤 조금도 없으셨던 필립보 네리 신부님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막대한 재산의 기부를 원했고 유산을 남기려고 줄을 섰었답니다. 복잡한 절차, 계속 쌓이는 돈이 너무 귀찮았던 성인께서는 그런 기도까지 바치셨답니다.
그러나 돈보스코는 정반대였습니다. 누군가가 유산이라도 당신 앞으로 남겨주면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어디 ‘눈먼 돈’ 없는가 하고 주변을 둘러보셨습니다. 돈 냄새 나는 곳을 찾아다니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보호 아래 있었던 수많은 청소년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돈보스코의 두 손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의 생계가 달려 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한평생 아슬아슬했던 통장잔고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습니다. 때로 수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내일 아침 먹을 빵이 없어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돈보스코는 천부적으로 대단했던 자존심까지 꺾어가며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정말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손을 벌렸습니다.
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 당시 지도층 인사들이었던 바리사이들 역시 얼마나 돈을 좋아하고 밝혔던지 루가 복음사가는 이런 사실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바리사이들이 돈을 좋아하고 찾아다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돈보스코처럼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자기 한 몸 잘 챙겨보려고,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려고 그리도 혈안이 되어 돈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봅니다.
사실 재물이란 것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도 갖춥니다. 사람 노릇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생활도 누립니다. 봉사도 하고 자선도 베풀 수 있습니다.
늘 지나침이 문제입니다.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 재물의 노예에로 전락, 재물을 하느님 섬기듯 하는 모습이 문제입니다.
열심히, 그리고 정직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척하는 일은 우리가 이 땅에 온 중차대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성실하고 건전한 부자는 개인의 노력에 하느님 축복이 더해진 결과입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재물에 모든 것을 걸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먹고살만하면 시선을 이웃들에게 돌리라는 것입니다. 재물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것들도 많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 사람, 우정, 의리, 신의, 그리고 하느님.◆
[말씀자료 : 양승국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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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3> : 재물에 대한 성실성과 확실성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을 들여다보면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말들 대부분 예전에 사용하던 말보다 새로운 말들이 많이 만들어져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새 말들은 어른보다 아이들부터 먼저 사용해서 확산됩니다.
이렇게 최근에 만들어진 말 중에 물신주의, 황금만능주의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물신주의야 맑스의 상품물신주의라는 말에서부터 이미 사용되어 왔고 황금만능주의 역시 이미 서양에서는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말을 넘어서 경제지상주의라는 말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모든 가치를 넘어서 절대적 가치에 이제는 神이 아니라 경제가 모든 것의 가치 척도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Lk 16, 9)’ 이 말은 바로 자선으로 친구들을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11절에서 다시 반복해서 나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을 필두로 해서 재물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Lk 16, 10-12)’ 재산을 성실히 관리할 줄 아는 사람만이 ‘큰일’, ‘참된 것’, ‘ 너희의 몫’, 즉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도직을 맡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Lk 16, 13).’ 하느님과 재물은 제각기 사람의 성전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시기하는 神이시라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느님만을 받들어 섬겨야 하고, 재물은 받들어 섬길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이용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루카는 가난한 이들의 복음사가이기에 재산에 관한 사회적 의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언급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행 재산을 모으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죽음으로 끝나는 인간 삶의 신비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 실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보물을 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느님 앞에 부유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느님 앞에 부유해지는 것과 동시에 물질적인 재산을 관리함에 있어 성실함 역시 중요합니다. 현세의 선물을 관리하는 일에서의 성실성과 확실성은 사람이 하느님의 정신적인 선물을 잘 관리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의향대로 슬기롭게 성실성을 가지고 잘 사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루카 복음사가께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자료 : 이상윤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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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4> :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살자
오빠부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위 특정 대중스타를 연모하여 하나의 팬 단체가 된 것을 말하는데, 요즘은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 맞게 인터넷상에서 잘 조직화되여 자기들끼리 연대의식을 지니며 인터넷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연예인들의 성공의 열쇠 혹은 잣대는 바로 자신의 인터넷 팬카페에 등록된 회원수와 그 활동이 좌우하는게 요즘의 세태입니다. 이 연대성과 충성도는 상당히 강한 것으로 온라인 상에서 혹시라도 팬들끼리 서로 어떤 민감한 문제로 논쟁이 일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팬들끼리의 설왕설래가 화제거리가 될 정도입니다.
이제 이것은 우리나라를 넘어서 외국에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소위 한류라고 하는 것인데... 하나의 유행처럼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아는 어떤 대학생도 해외의 학생들과 영어 펜팔을 하는데 아시아지역의 학생들의 우리나라 가수나 배우에 대한 관심은 우리상상을 초월한다고 나에게 이야기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꼭 한번 한국에 와서 그들이 좋아하는 한국스타를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엄청난 열정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몇 달 전에는 신문에서 모 한국배우를 좋아하는 일본 중년 여성팬들이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실은 언론사에 어찌나 많은 전화로 그런 기사를 쓰지 말라고 하소연 하는지 업무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팬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은 인간에게서 흔히 들어나는 이상현상입니다. 누군가에게 빠져 있으면 정확한 사리판단은 사라지고 그 사람만을 바라 볼 수 있는 이런 현상은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요? 만일 하느님의 가치와 내가 좋아하고 따르는 가치가 충돌했을 때 과연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설까요? 혹시 신자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와우! 예수님께서 편 가르기에 나섰습니다. 자 여러분은 누구의 팬입니까? 솔직히 바람둥이가 아니라면 누군가를 동시에 한명 이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재물과 하느님 중에 어느 편을 선택할까요?
하느님께 충성을 다 할 것인가? 아니면 재물에 편에 서서 그 재물이 주는 행복을 놓지 않으시련가? 만일 이런 양자택일의 상황이 된다면 참으로 곤란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 이후의 상황도 한번 살펴보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말씀에 대해서 비웃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분명 왜 돈과 하느님을 분리하는가? 하느님도 섬기고 돈도 추구하는게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그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그들에게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서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라고 말이죠.
한마디로 돈 욕심에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허위의식에 스스로 도취되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가증스럽게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매서운 말씀입니까? 어쩌면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여유를 가지고 풍요롭게 살고자 하며 역시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교회도 잘 돌아가고 신자들 수준도 교양 있고 말입니다. 성직자도 다 나름대로 품위에 맞게 취미생활하고 좋은 생활환경도 있어야 하고, 또 돈 벌고 성공하도록 도와주고 축복해주고 또 서로가 상부상조하면서 서로 이끌어 주면서 좋은게 좋은거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오늘 말씀은 매섭게도 그 상황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이 따끔하게 딱 들어맞는 말씀을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증스럽게 보인다는 것은 정말 끔직한 일입니다. 돈을 좋아한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들은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었다가 바로 이런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 것이며 가증스럽지 않을 종교지도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의 편가르기에 살아 날을 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이 말씀도 현대의 현실에 적용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우의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무리에도 자금을 맡아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필요한 물품이나 성경에 나오는 데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처는 예수님의 치유은사나 말씀을 듣고 회개한 많은 사람들의 기부였을 것이고요. 이 사항만 봐도 예수님께서는 제물 자체를 죄악시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말씀을 봐도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부자의 헌금을 비교하면서 정말 모든 것을 내놓는 정신을 가지고 판단하십니다. 또한 어떤 부자의 창고 이야기에서도 자신을 위해 창고를 짓고 거기에다 재물을 쌓은 생각만을 하는 부자를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제물을 어떻게 쓰느냐, 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다시 돌려 드리느냐의 문제가 더 큰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 말씀은 단순히 재물을 죄악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만을 바라보며 그것만이 최고인양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인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그 수단 중에 이 재물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천은 명확합니다. 돈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어떤 일을 하던 이것은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하는 것임을 명확히 알고 그 정신만은 잃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제물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홀가분하게 쥐고 있는 제물을 놓을 수 있는 마음자세로 살아간다면 될 것입니다...............◆
[말씀자료 : 차공명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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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5> :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의 복음은 어제의 복음 ‘약은 청지기’ 비유의 뒷부분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9절).
이 구절의 의미는 아주 묘합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세속의 재물’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재물을 공박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물도 ‘친구들’을 사귀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즉 보통 불의, 사기, 그리고 타협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 셈족 언어로는 ‘부정한 돈’이라고 표현되는 그 세속의 재물로 우리가 죽었을 때에 성부 곁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바로 그런 친구들을 사귀는데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그렇게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집’ 이라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표현은 구원의 자리 즉 ‘천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친구들’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막연하여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가 복음 사도의 전체적인 신학사상에서 미루어 볼 수는 있습니다 :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헤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하느님 곁에서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들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행위 및 선행으로서, 여기서는 의인화되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재물은 다른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사랑과 우정의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든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사용되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시를 받거나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야기 시키는 구실을 합니다. 이와 같은 양 극단적인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는 재물을 대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로써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입니다.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또는 소유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 하더라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재물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또한 옛 교부들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성 바실리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네게 관리하라고 맡겨진 재물을 마치 네 것인 체하는 너는 도둑이 아니냐?… 네가 가지고 있는 빵은 배고픈 이들의 것이고, 네 가방 속에 넣어 두고 있는 외투는 헐벗은 이들의 것이며, 네 집에서 썩어가고 있는 신발들은 신을 신지 못한 이들의 것이며, 네가 감추어 둔 돈은 궁핍한 이들의 것이니라. 네가 베풀어 줄 수 있는 이들이 많으면 많은 만큼 그만큼 너는 불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성바실리오).
오늘날의 교회도 똑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69항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나누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재화의 거의 대부분이 인류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여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복음을 들으면서 나 자신도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또한 재물을 모음에 있어서 나만, 내 가족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재물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아멘..........◆
[말씀자료 : 이영창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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