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9일 오늘의역사
오늘의 탄생화와 꽃말 4/9일 [ 4월 9일 탄생화] 벚나무(Oriental Cherry)
4월 9일 오늘의 역사 1196 (고려 명종 26) 최충헌, 이의민 죽이고 권력 잡음 1855 한말의 의병장 손영각 출생 1898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1904 경영인 김용완(金容完) 출생 1906 한국 시인·영문학자 이하윤(異河潤) 출생 1908 독립운동가 윤창하(尹敞夏) 출생 1949 캐나다 한국 승인 1954 흥사단 금요강좌 개강 1961 서울 창신동 화재로 230동 소실 1962 한국-이스라엘 국교 수립 1964 최두선 총리 맥아더 원수 사망 장레식 참석차 존슨 미국 대통령과 회담 1973 한국 여자탁구 유고 사라예보에서 세계 제패 1983 해저유물단 충남 태안군 태안반도 앞 해저에서 1000여점의 자기류 발견 1987 한국-과테말라 경제기술협력협정 체결 1993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국내 첫 개발 1993 북한 최고인민회의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추대 1993 청와대 앞길 개방해 관광코스로 1994 국민 고충처리 위원회 (위원장 김광일)출범 1994 우루과이 라운드(UR)비준반대 집회 -전국 3만여명 가두행진 1999 80년전 임시정부 요인 130여명 사진 첫 공개 1999 호스니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방한 2004 <한국판 화이트데이>는 오늘 “하얀 닭고기 먹자” 2007 뉴스위크 “한국, 기후변화 취약성 100개국 중 20위” 2007 유엔, FAO 이어 UNEP도 ‘일본해’ 단독표기 2008 제18대 국회위원 총선 실시 2008 한국 첫 우주인 태운 소유스호 지구 돌며 순항중 2009 애국지사 장희순 선생 별세 2009 1차원과 2차원 구분하는 기준 찾았다 2010 패티김 ‘박춘석 추모’ 순회공연 해 외 1626 영국의 사상가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 세상 떠남 1882 영국 생물학자 다윈 사망, 1905 미국 정치가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 출생, 1915 디프테리아균을 발견한 독일 세균학자 뢰플러 사망 1917 1차대전 비미 능선 전투(캐나다 국가 탄생 전쟁) 1918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설게한 우그손 출생 1919 세계최초 컴퓨터 에니악 을 개발한 프레스터 에커트 출생 1927 최악의 사법살인 사코와 반제티 사형선고 1942 미군과 필리핀 전쟁포로, 바탄 죽음의 행진 1952 일본 여객기 추락 -37명 사망 1953 폴란드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 뵈치에호프스키 사망 1959 NASA가 머큐리 계획 우주 비행사 명단을 발표하다. 1960 페르부르트 남아공 총리 피격 1972 우간다. 이스라엘과 단교 1973 네덜란드 베트남과 국교수립 1985 일본 대외시장개방정책 발표 1992 알바니아 첫 비공산계 대통령 살리 베리샤 피선 2002 애도물결 속 영 여왕 모후 장례식 2003 이라크 바그다드 사실상함락 2003 전직 미국 FBI 요원 내연의 관계에 있는 이중 스파이에게 국가 기밀 누설한 혐의로 체포 2005 영국 찰스 왕세자 카밀라 파커볼스와 재혼 2007 佛 비미전투(Battle of Vimy Ridge) 90주년 행사 - 英 여왕 등 1만5000여명 참석 2007 유엔, FAO 이어 UNEP도 ‘일본해’ 단독표기 2008 홍콩의 저가 항공사인 오아시스 홍콩 항공이 파산했다 . 2009 알제리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가 90% 이상의 득표율로 세 번째로 당선되었다. 2010 中, 日 마약사범 3명 사형 집행
2010 - 패티김 ‘박춘석 추모’ 순회공연 ‘가시나무새’ ‘못잊어’ 등 고인이 만든 레퍼토리로 외국 음악인들의 내한공연이 쏟아지는 요즘,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 패티김이 자존심 지키기에 나선다. 다음달 9일부터 전국 20개 도시 순회공연에 들어간다. 패티김의 이번 공연은 지난 14일 별세한 고 박춘석 작곡가에게 바치는 의미도 있다. 공연 준비로 한창 바쁜 와중에 비보를 접한 그는 만사 제치고 빈소로 달려갔으며, 발인식 때는 고인이 작곡한 ‘초우’를 추모가로 부르기도 했다. 평생의 음악 스승이자 가족처럼 이끌고 따랐던 사이여서 슬픔과 아픔이 한층 더했다. 그는 이번 무대 레퍼토리에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가시나무새’ ‘못잊어’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 고인이 만든 곡을 대거 포함시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부르겠다고 밝혔다. 이번 전국투어는 4월9~11일 서울 충무아트홀을 시작으로, 16~17일 고양 아람누리극장, 24일 대구 수성아트피아, 5월1일 마산 3·15아트센터, 7~8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15일 춘천 백령문화관, 29일 원주 백운아트홀 등으로 이어진다. 올 하반기에도 다른 도시에서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02)518-8586. 서정민 기자 /한겨레 2010-03-30 오후 07:52:49
2010 - 中, 日 마약사범 3명 사형 집행 중국 인민대법원은 성명을 통해 일본인 마약 사범 3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9일 실시됐다고 밝혔다.
2009 - 1차원과 2차원 구분하는 기준 찾았다 ‘300나노미터’서 선-평면 갈려 국내연구팀 ‘네이처’에 첫 발표 나노기술의 발달로 전자소자의 크기(선폭)가 급속히 작아지고 있다. 1991년에 견줘 100분의 1 수준인 5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로까지 작아졌다. 이에 따라 2차원이던 ‘평면’ 소자는 1차원인 ‘선’ 소자로 바뀌었다. 그런데 어디까지 2차원(평면)이고 어디부터 1차원(선)일까? 최석봉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와 이현우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전자소자가 나노 크기로 점점 작아지다 보면 물성(물질의 성질)도 변해 ‘다른 차원’의 특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처음 관찰해, 국제 학술지 <네이처> 9일치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독자 개발한 측정 장비인 ‘주사식 자성 현미경’을 통해 4.2㎛(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부터 159㎚에 이르는 여러 크기의 소자들이 외부 자기장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했다. 그랬더니 자기장 변화에 따라 정보 저장 단위(‘자기구역 벽’)에 나타나는 변화가 어느 순간부터 ‘다른 차원’의 함수관계를 나타냈다. 이런 변화는 대체로 300㎚ 크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 교수는 “300㎚ 크기 부근에서 평면이라는 2차원 특성이 선이라는 1차원 특성으로 바뀐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또한 2차원과 1차원의 성질이 공존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처음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물질이 나노 크기로 작아지면 물성도 바뀐다는 것은 과학계에서 널리 예측됐으나, 변화가 실제 어느 크기부터 일어나는지 직접 관찰한 것은 처음이다. 최 교수는 “이 연구가 여러 분야의 나노소자 개발·응용에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연구논문의 제1저자는 20대 대학원생 김갑진(27·서울대)씨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2009-04-09 오전 02:09:55
2009 - 알제리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가 90% 이상의 득표율로 세 번째로 당선되었다.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아랍어: زيز بوتفليقة, IPA: [abdəlazɪz butəflika], 1937년 3월 2일 ~ )는 알제리의 정치인이다. 1999년부터 대통령으로 재직중이다. 현재 모로코에 속하는 우지다에서 태어났다. 모로코 지역에서 성장하여 교육받은 후,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62년 알제리가 프랑스에서 독립한 후, 그는 부친의 고향이 포함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몇몇 부처의 장관을 지냈고, 당시 알제리의 유일한 정당이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의 간부로 일했다. 1965년 쿠데타에서 우아리 부메디엔을 지지하였고, 우아리 부메디엔 정권에서 외무장관을 지내며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고, 국제 연합 총회 의장을 맡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했다. 1978년 부메디엔이 사망한 후, 정계를 떠났고, 후에 들어선 정권에서 탄압을 받아 공금횡령 혐의로 투옥되었다. 1983년 사면된 후 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89년 귀국했다. 1989년 귀국 이후 알제리에도 복수정당제가 도입되었으나,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99년 리아민 제루알 국가원수가 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했고, 군부의 지지를 받은 부테플리카가 74%의 득표율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후 그는 적극적인 경제 발전 정책을 취하고, 서방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중동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 2004년에는 80% 이상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그는 알제리의 국가 수반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과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2003년 북아프리카 국가의 국가 수반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2006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하였다. 2008년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다. /위키백과
2009년] 애국지사 장희순 선생 별세
2008 - 한국 첫 우주인 태운 소유스호 지구 돌며 순항중 10일 오후 10시께 ISS와 도킹 예정 한국 첫 우주인 이소연(29)씨를 태운 러시아 소유스 우주선이 발사 이틀째인 9일 국제우주정거장(ISS)과의 도킹을 위해 지구를 회전하며 순항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씨가 탑승한 소유스 TMA-12호가 90분에 한바퀴씩 지구를 돌면서 자체 엔진으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고 있다며 이 씨도 우주에서의 첫 밤을 무사히 보냈다고 밝혔다. 소유스 우주선은 8일 오후 8시 16분 39초에 발사됐으며 발사 5분 48초 만인 8시 26분 27초에 발사 성공을 가늠하는 240㎞ 높이의 지구 회전궤도에 진입했다. 소유스호는 현재 자동프로그램과 모스크바 임무통제센터(MCC)의 통제, 세르케이 볼코프 선장의 조종으로 비행하고 있으며 라디오주파수로 MCC와 제한적인 의사소통도 가능한 상태다. 소유스호는 이틀 동안 지구를 33~34회 돌며 궤도 높이를 ISS가 있는 350㎞까지 높인 뒤 10일 오후 10시께 ISS와 도킹할 예정이며 11일 오전 0시 50분께 해치가 열려 이씨가 ISS에 탑승하게 된다. ISS 탑승 후 이씨와 볼코프 선장, 올레그 코노넨코 (43) 비행 엔지니어 등 3명에 대한 환영식이 있을 예정이며 이때 이씨의 모습이 처음으로 생방송을 통해 지구로 전해질 것으로 보인다. 임무통제센터(MCC)는 우주인 환영식 및 ISS 탑승 우주인 6명에 대한 인터뷰를 실시할 예정이며 이 장면은 11일 오전 1시 20분께 생중계 된다. 이때 MCC에서 대기한 한국측 대표가 이씨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씨는 11일 오전 2시 20분께 우주에서의 첫 점심식사를 하고 러시아 우주인 유리 말렌첸코의 안내로 러시아 즈베즈다 모듈과 미국 데스티니 모듈을 둘러보며 우주장비들에 대한 설명을 듣는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또 이씨는 ISS 탑승 첫날 식물생장실험과 미세 중력환경에서 세포배양 실험, 초파리의 중력반응과 노화 유전자 탐색 실험 등 3가지 우주과학실험을 시작한다. 이씨는 ISS에 있는 노트북 컴퓨터에 과학실험을 위한 소프트웨어와 측정데이터, 우주인을 위한 음악 등이 담겨 있는 하드디스크를 설치하고 이 하드디스크에 과학실험임무 진행과정과 사진자료를 저장해 지상으로 가져오게 된다. 이씨는 ISS에 8일간 머물면서 18가지 우주과학실험 등 우주임무를 수행하고 19일 미국 여성우주인 페기 윗슨, 러시아 우주인 유리 말렌첸코와 함께 카자흐스탄 초원지대로 귀환하게 된다. 이주영 기자 scitech@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8-04-09 오전 10:37:27
2008 - 대한민국 제18대 총선이 실시되다. 제18대 총선은 2008년 5월 30일부터 4년 임기의 제18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이다. 선거는 2008년 4월 9일 수요일에 치러졌다. 투표율 제18대 총선은 궂은 날씨와 젊은 유권자층의 투표에 대한 무관심 등의 영향으로 대한민국 정규 총선거 뿐 아니라 대선과 지방선거를 포함한 역대 전국 동시 선거 가운데 역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 전국 투표율 : 46.1% (17대 총선 60.6%) * 투표자 수 17,415,667명 / 유권자 수 37,796,035명 선거 결과 /위키백과
한나라 `안정 과반`-민주당 `개헌저지선` 확보 주목 한국 제18대 총선 실시 한국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가 9일(한국시간) 오전 6시부터 전국 1만3,246개 투표소에서 일제히 시작돼 오후 6시(LA시간 9일 새벽 2시)에 끝났다. 개표작업은 전국 249개 개표소에 투표함이 도착하는대로 곧바로 개시됐다. <전용태 기자> /코리아타운 데일리 Apr 9, 2008 07:12:23 PM
2008 - 홍콩의 저가 항공사인 오아시스 홍콩 항공이 파산했다. 오아시스 홍콩 항공(Oasis Hong Kong Airlines)은 홍콩의 장거리노선 전용 저가 항공사이다. 오아시스 홍콩항공은 캐세이패시픽 항공과 드래곤에어, 홍콩 익스프레스, 씨알 에어웨이즈, 화물전용 항공사인 에어 홍콩과 함께 홍콩의 6대 항공사 중의 하나이며 2005년에 설립되었다. 현재 보유 항공기는 보잉 747이며, B747-400 기종만 5대를 보유하고 있다. 취항노선은 영국의 런던 개트윅 국제공항과 밴쿠버 등 2개 도시만 운항하고 있다. 허브공항은 홍콩 국제공항이다. 그러나 오아시스 홍콩항공은 고유가에 따른 채산성에 맞지 않아 4월 9일부로 운항이 잠정 중지되었다. /위키백과
2007 - 유엔, FAO 이어 UNEP도 ‘일본해’ 단독표기 유엔 본부 산하 식량농업기구(FAO)에 이어 유엔환경계획(UNEP)이 동해를 '일본해'로 단독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9일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에 따르면 세계 환경분야에 있어서 국제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유엔 산하에 설치된 환경관련 종합조정기관인 UNEP 사이트(www.unep.org)를 방문해 검색창에서 'korea'를 클릭하거나 국가정보 코너에서 한국을 클릭하면 '일본해'로 단독 표기한 지도를 발견할 수 있다. 유엔은 세계 초.중.고 교사와 학생에게 유엔이 하는 일을 홍보하기 위해 공식 운영하는 국가 정보 웹사이트 '사이버 스쿨버스'(cyberschoolbus.un.org)에서도 동해를 '일본해'로 단독 표기했다. 박기태 반크 단장은 "지구 온난화 등으로 환경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UNEP의 일본해 표기를 방치한다면 동해를 지키는데 큰 위험이 따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유엔의 이같은 표기는 올해 동해와 일본해 표기 싸움에 중대한 분수령이 되는 5월 국제수로기구회의, 9월 유엔전문가회의를 앞두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반크는 이날 유엔을 대상으로 일본해 표기 시정운동에 들어갔다. 희망자는 항의서한 발송 웹사이트 (prkorea.com/textbook/sendinvoice01-1.htm)를 방문하면 된다. 왕길환 기자 ghwang@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7-04-09 오전 09:26:23 유엔 산하기구 ‘일본해’ 단독표기…왜? 5월 국제수로기구회의 등 앞두고 일본로비 치열 사이버 스쿨버스(cyberschoolbus.un.org)와 식량농업기구(www.fao.org), 유엔환경계획(www.unep.org) 등 유엔 산하기구가 최근 잇따라 동해를 '일본해'로 단독표기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부에서는 인터넷 사이트 담당자들의 실수라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일본 정부의 치열한 로비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의 박기태 단장은 "유엔아동기금(UNICEF)의 경우 '일본해'로 단독 표기했지만 시정요구를 받고 즉시 '관리자의 실수'라며 시정했다"며 "사이버 스쿨버스와 FAO는 지속적으로 시정을 요구받고 있지만 사이버 스쿨버스는 대답이 없으며 FAO는 한국판에서는 해명 없이 아예 표기를 삭제했지만 일본판에서는 그대로 놔두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9일 세계 환경분야에서의 국제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유엔 산하에 설치된 환경관련 종합조정기관인 UNEP가 다시 동해를 '일본해'로 단독 표기했다. 유엔은 1977년 지명표준화회의에서 2개국 이상의 주권하에 있거나 2개국 이상에 분할돼 있는 지형물에 대해 당사국 간 단일 지명에 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각 당사국에 의해 사용되는 지명을 모두 수용하는 것을 국제지도 제작의 일반 원칙으로 권고하고 있다. 박 단장은 "유엔 스스로 국제적 규범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일본해' 표기를 하는 것은 일본이 유엔을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펼치고 있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일본은 올해 동해와 일본해 표기 싸움에 중대한 분수령이 되는 5월 국제수로기구회의와 9월 유엔전문가회의를 앞두고 유엔이 단독표기를 하도록 한 후 이를 근거로 회의에서 유리한 입장을 이끌어 내려고 산하기구들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해외홍보원 관계자는 "3-4년 전까지만해도 유엔 특별기구와 전문기구 등 각종 인터넷 사이트 200여 곳 모두가 '일본해'로 표기돼 있었다"며 "해외홍보원과 외교부, 동북아재단 등이 10-20여 차례 요구해 현재는 20% 정도가 일본해 표기를 삭제한 상태"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일본은 오랫동안 로비를 벌여왔지만 최근에는 로비하는 것 같지는 않다"며 "일본해를 삭제하는 산하기구들이 그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싶어하지 않아 지금까지 발표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일본의 로비로 이미 '일본해' 단독 표기를 하고 있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유엔 산하기구들이 세계지도를 그대로 게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독도본부의 김봉우 의장은 "민간 단체의 항의.시정운동에만 의존하지 말고 정부가 직접 나서서 유엔에 항의하고 5월과 9월 국제회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촉구했다. 왕길환 기자 ghwang@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7-04-09 오전 10:19:57
2007 - 뉴스위크 “한국, 기후변화 취약성 100개국 중 20위” 한국이 물리적 조건과 국가별 기후변화 대처 역량 등을 종합해 매긴 기후변화 취약성 순위에서 조사대상 100개국 가운데 20위를 기록했다고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컬럼비아대학 부설 국제지구과학정보네트워크센터(CIESIN)의 연구 결과를 인용해 9일 인터넷판에서 보도했다. CIESIN이 유엔 정부간 기후변화위원회(IPCC)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이번 조사에서 지구 온난화에 가장 취약한 국가로는 노르웨이가 선정됐고 핀란드, 스웨덴, 스위스, 캐나다가 뒤를 이었다. 일본과 오스트리아, 프랑스, 미국, 덴마크는 6~10위를 기록했고 이탈리아와 네덜란드가 각각 12위와 14위로 나타났으며 19위에는 아이슬란드가, 21위에는 불가리아가 지명됐다. 중국은 중위권인 52위에 이름을 올렸고 인도는 74위로 비교적 기후 변화에 잘 적응할 것이라는 평가를 얻었으며 조사대상 국가들 중 기후변화 영향을 가장 덜 받을 나라로는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시에라리온이 꼽혔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CIESIN이 고려한 물리적 여건에는 해수면 상승시 해안선이 긴 국가일수록 취약해진다는 점 등이 포함돼 있다. 김세진 기자 smile@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7-04-09 오후 03:49:56
2007 - 佛 비미전투(Battle of Vimy Ridge) 90주년 행사 - 英 여왕 등 1만5000여명 참석
佛 비미전투(Battle of Vimy Ridge) 90주년 행사 - 英 여왕 등 1만5000여명 참석 캐나다 군인 3600여 명이 전사한 제1차 세계대전 격전지 중 하나인 프랑스 북부 비미에서 9일 전투 90주년 행사(사진)가 열렸다. <연합뉴스> /국방일보 2007-4-10 1차 대전 비미고지전투(비미능선전투) 90주년 기념식 90년 전의 '기억' 4월 9일 프랑스 북부에 있는 비미 고지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프랑스의 드 빌팽 총리, 캐나다의 하퍼 총리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바로 그 날 이 자리에서 있었던 ‘비미 고지’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기념식에는 학생 5천여명을 포함해 7천여명이 캐나다에서 오는 등 모두 1만 5천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참호와 기관총 1차 대전은 흔히 ‘참호‘와 ’기관총‘으로 대표됩니다. 전투 양상은 참호전이 주를 이뤘고, 기관총이 본격적으로 전쟁에서 사용되면서 상당수의 전사자들이 기관총에 희생됐습니다. 그래서 1차 대전은 솜므 전투나 마른 강 전투 처럼 한 지역에서 수십만명 씩 전사자가 나온 전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비미 고지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1915년부터 17년 까지 이 지역에서는 지리한 참호전이 이어졌습니다. 고도 145미터에 불과한 고지를 놓고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2년 간 독일군과 공방전을 벌였지만 번번히 패했습니다. 비미 고지 전투는 크게 보아 아라스 전투의 일환이었는 데 아라스 전투에서는 연합군 15만명, 독일군은 10만명이 전사했습니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을 뚫어야 독일 까지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미 고지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9일 부터 12일 까지 여기에 1917년 4월 캐나다군이 투입됩니다. 당시 캐나다는 아직 영국의 자치령에 불과했습니다. 정식으로 국가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캐나다군은 10만명을 파병했습니다. 그리고 4월 9일 새벽 5시 반 공격을 시작해서 단 나흘 만인 12일-90년 전 바로 오늘입니다- ‘힌덴부르크 라인’이라는 막강한 방어선을 구축한 독일군을 패퇴시켰습니다. 전사자 3,598명, 부상자 7천여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이 따랐지만 나흘 만에 캐나다군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2년 간이나 고전하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당연히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캐나다는 당시 전투에 임하면서 철저히 준비 했습니다. 사전에 비슷한 지형에서 훈련을 마쳤고, 전투 직전에는 보급망 부터 화력 까지 완비했습니다. 여기에 처음부터 각개전투 식이 아닌 4개 사단 전부가 하나가 되어 함께 공격에 참여했고, 단 한 명도 열외가 없었다고 캐나다의 전쟁 박물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 까지는 캐나다라는 ‘국가 의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4개 사단이 합동 작전을 편 것도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4개 사단 10만명의 병력이 혼연일체가 되어 3중으로 파인 참호와 철조망, 고지 위에서 아래로 쏘아 대는 독일군의 기관총과 대포를 돌파한 것입니다. 국가의 탄생
1922년 프랑스는 비미 고지 일대를 캐나다에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에는 고지에 비미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이 기념관은 올해 90주년을 맞이해 캐나다 측에서 174만 달러를 들여 개축한 뒤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9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프랑스는 캐나다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드 빌팽 프랑스 총리는 이런 말로 연설을 맺었습니다. “Merci au Canada." 김인기 기자의 블로그 - SBS뉴스
2005년 오늘, 영국 찰스 왕세자(Charles of Wales, Prince, 1948~ )와 오랜 연인 카밀라 파커 볼스(Camilla Parker Bowles, 1947~ )가 결혼했다. 당시 56세인 찰스 왕세자와 한 살 연상인 파커 볼스는 윈저시의 시청 대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35년만에 부부가 됐다. 이 결혼으로 카밀라는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으로 불리게 됐다. 카밀라는 비판적인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왕세자비의 공식 직함인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를 사양했다. 결혼식에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 사이에 난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 왕자 등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만이 참석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왕실 여성이 된 카밀라는 아이보리색 정장 차림에 모자를 쓰고 식장에 나타났다. 성혼 선언만 한 소박한 결혼식을 마친 찰스 내외는 성당을 걸어나와 도로변에 늘어선 13,000여명의 시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며 축복 예배가 열리는 윈저성으로 향했다. 축복 예배에서 찰스 내외는 불륜을 저질렀던 과거를 참회하고 사죄했다. 결혼과 파경을 경험한 뒤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 첫사랑과 결합한 찰스와 카밀라 커플에 대해 영국 국민들은 행복을 빌며 축하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비를 잊지 못하는 일부 시민들은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고인의 집앞에서 모이기도 했다. /YTN 영국 윈저시 대강당에서 결혼식을 마친 후 기념 촬영을 가진 찰스 왕세자와 그의 새 신부 카밀라 파커 볼스 콘월 공작부인의 모습. /조선 영국 찰스 왕세자, 카밀라 파커볼스와 재혼 영국 찰스 왕세자가 2005년 4월 9일(현지시간) 그의 첫사랑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했다. 이들은 말 많고 탈 많았던 35년간의 로맨스에 종지부를 찍고 합법적 부부가 됐다. 카밀라는 1947년 런던에서 평민의 딸로 태어나 런던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프랑스와 독일에 유학했다. 1970년 윈저성의 폴로 경기에서 찰스와 처음 만나게 됐다. 열렬한 연인이었던 찰스와 카밀라는 1971년 찰스가 해군에 입대하며 멀어졌다. 2년 후인 1973년 카밀라는 찰스의 친구인 앤드루 파커볼스와 결혼해 1975년 아들 톰을, 4년 뒤엔 딸 로라를 낳았다. 찰스도 1981년 11세 연하의 다이애나와 결혼해 1982년 윌리엄 왕자, 3년 뒤 해리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찰스와 카밀라는 과거를 잊지 못하고 다이애나와 삼각관계로 이어졌다. 1992년 내연관계를 암시하는 대화 테이프가 유출됐고, 이런 삼각관계는 결국 파탄을 낳았다. 1995년 카밀라가 이혼한 뒤 1996년 찰스와 다이애나가 파경을 맞았다. 1997년에는 다이애나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찰스와 카밀라 커플에 대한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하지만 카밀라는 찰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여왕마저 결혼을 허락하여 2005년 4월 9일 부부가 됐다. 찰스와 카밀라의 재혼은 언론 취재가 금지된 가운데 찰스와 다이애나비의 두 아들인 윌리엄과 해리 왕자를 비롯, 특별히 초대된 28명의 하객만이 참석했다. 이들은 결혼식에 이어 윈저궁 예배당 세인트 조지 채플로에서 축복 예배를 올렸다.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2세 여왕 내외와 토니 블레어 총리, 유럽 왕실 인사, 외교 사절 등 국내외 귀빈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축복 예배는 사실상의 결혼식이었다. 그 후 이들은 윈저궁 워터루홀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주재 피로연에 참석한 뒤 스코틀랜드 왕실 영지 밸모럴로 10일간의 신혼여행을 떠났다. 카밀라는 이번 결혼으로 ‘콘월 공작부인’이란 직함을 부여받았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왕실 여성이 됐다. /조선
2004 <한국판 화이트데이>는 오늘 “하얀 닭고기 먹자” *이날 흰 고기인 닭고기를 먹읍시다. ” 닭고기 소비 촉진을 위해 4월9일을 화이트데이로 정한 농촌진흥청 축산연구소가 대한양계협회, 한국계육협회와 공동으로 ‘우리식 화이트데이’ 알리기에 나섰다. 축산연구소가 4월9일을 화이트데이로 정한데는 장수를 의미하는 백수(白壽)에서 계산법을 빌려왔다. 일백 백(百)에서 하나 일(一)을 빼면 99가 되고 한자는 ‘白’자가 되는데서 유래한 백수는 망백(望百)과 같은 의미로 99세를 뜻한다. 축산연구소는 백수의 의미를 날짜에 적용시켜 1년중 99일째 되는 날인 4월9일을 우리식 백일(白日)로 지정하기로 했다. 백일에는 백색육(white meat)인 닭고기를 백숙(白熟)으로 먹는 날로 정해 닭고기 소비를 촉진시키자는 것. 축산연구소는 9일 충남 성환의 축산자원개발부에서 인근 주민들을 초청, 삼계탕무료 시식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닭고기 제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조류독감 여파로 아직까지 닭고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소비자가 있어 이번 화이트데이를 홍보하기로 했다”면서 “맛도 좋고 영양도 좋은 닭고기를 먹어 백수까지 장수하면 양계농가도 돕고 국민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포커스 THE DAILY FOCUS 2004-04-09 focus.co.kr)
2002 - 애도물결 속 영 여왕 모후 장례식 ⊙앵커: 왕실의 갖가지 스캔들 속에서도 영국민들의 존경을 잃지 않았던 영국 여왕 모후의 장례식이 우리 시간으로 조금 전에 거행됐습니다. /KBS뉴스 2002.04.09 (21:00) 영국 여왕모후 장례식 로라 부시 등 2000여명 조문 지난달 30일 숨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어머니의 장례식이 9일 오전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열렸다. 이날 장례식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부시 미국 대통령 부인 로라 부시 등 2000여명의 조문객이 참석했으며, 성당 주변에는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해 몇시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이날 장례식은, 오전 11시 30분(현지 시각) 192명으로 구성된 연주단을 앞세운 여왕 어머니의 관이 찰스 왕세자 등 9명의 왕족이 뒤를 따르는 가운데 성당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장례식 시작에 맞춰 영국 전역에선 2분 동안 묵념을 했으며, 방송들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장례식을 생중계했다. 이날 런던 등 주요 도시에서는 상당수 상점과 사무실이 문을 닫았다. 장례식 뒤에 고인의 관은 왕족의 묘지가 있는 윈저궁으로 옮겨져, 남편인 조지 6세 옆에 안치됐다. 런던/외신종합 /한겨레 2002-04-10 1999년 오늘, 호스니 무바라크(Mubarak, Hosni, 1928~ ) 이집트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다. 김일성 주석이 살아있는 한 남한과는 수교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북한과 가까웠던 무바라크 대통령. 그의 방한은 중동국가들뿐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됐다.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남한은 오직 북한과 협력하고 화해하기를 바란다며 우리의 대북정책을 북한 지도부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 같은 뜻을 북한에 전하겠으며 최선을 다해 남북한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방한 기간에 무바라크 대통령은 정계와 재계 지도자들을 만나 한국과 이집트 사이의 교역규모 확대와 이집트에 대한 투자를 요청했다. /YTN
1994년 4월 9일: 국민 고충처리 위원회 (위원장 김광일) 출범
국민고충처리위원회 현판식 모습. /조선 국민 고충처리 위원회 (위원장 김광일) 출범 행정에 대한 국민의 고충민원을 전담 처리할 `국민 고충처리 위원회`가 1994년 4월 9일 정부합동민원실에서 현판식을 갖고 공식 출범했다. 이날 출범에 앞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광일 위원장과 최종백 변호사, 허범 성대교수, 신대균 경실련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 사무처장, 손정 상임위원등 5명의 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했다. 1994년 1월 공포된 `행정규제 및 민원사무기본법`에 따라 국무총리 직속으로 발족된 고충처리위원회는 행정기관의 위법부당한 행정처분으로 인한 국민의 권익침해를 조사해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국민들이 위원회에 제기할 수 있는 고충민원은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행정행위를 비롯, 공사공단등 공공단체, 행정권한을 위임위탁받은 협회조합 등의 민원처리에 따른 불편 및 애로사항 등이다. 특히 민원접수거부, 처리지연 등 행정상의 잘못이나 불합리한 제도시책으로 인한 국민불편 및 애로사항도 접수대상에 포함된다. /조선
1993 -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국내 첫 개발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국내 첫 개발 연세대 부설 아식(ASIIC) 설계공동 연구소가 국내최초로 독자적인 설계기술에 의해 컴퓨터의 핵심소자인 32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했다고 1993년 4월 9일 발표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컴퓨터의 가장 핵심적인 부품으로 자동차의 엔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명령축소형(RISC)의 최신방식으로 설계됐다. 당시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국내 기술현황은 일부 연구소와 기업에서 8비트급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설계하고 있었으며 16비트급 이상에서는 외국기술에 의존하여 제작하고 있었다. 가로 세로 9㎜크기의 이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20메가헤르츠의 주파수에서 초당 2천만개의 명령어를 처리하는 기능을 가졌으며 14만개의 트랜지스터를 탑재하고 있다. /조선
1993 - 북한 최고인민회의,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추대
김정일 국방위원장. /조선 북한 최고인민회의,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추대 북한은 1993년 4월 9일 속개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자 군총사령관인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에 추대하고 공석이 된 제1부위원장에는 현 부위원장이자 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를 선출했다. 김정일은 1990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임된 후 1991년 12월 24일 군총사령관에 임명됐다가 1992년 3월 개정된 헌법에서 최고군사지도기관으로 격상된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추대됨으로써 전반적 무력의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북한헌법 1백13조는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일체 무력을 지휘 통솔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미 군최고사령관으로 군지휘권을 갖고 있던 김정일이 국가보위부, 사회안전부, 노동적위대, 청년근위대 등 정보기관, 경찰 및 예비병력까지 모두 장악했음을 의미했다. 북한헌법은 또 국방위원회의 권한으로 중요군사간부 임명 또는 해임, 유사시 전시 상태와 동원령 선포 등도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김정일은 인민무력부장 군총참모장 등 군관련 요직의 인사권을 갖게 됐다. /조선 1992 - 알바니아 첫 비공산계 대통령 살리 베리샤 피선
살리 베리샤. /조선 알바니아 첫 비공산계 대통령 살리 베리샤 피선 알바니아 민주당 지도자 살리 베리샤(47)가 1992년 4월 9일 의회에서 알바니아 사상 최초의 비공산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베리샤는 대중정치에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알바니아의 새로운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심장전문의인 베리샤는 알바니아 민주변혁의 시발점이 된 지난 1990년 12월의 학생시위 때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자생적인 학생시위를 전면적인 반정부운동으로 탈바꿈시킨 그는 이어 최초의 야당인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다. 그가 이끌고 있는 민주당은 3월 22일과 29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사회당에 압승, 라미즈 알리아(67)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1991년 9월 민주당 당수로 선출된 뒤 연립내각에서 탈퇴를 결정하며 총선을 이끌어내는 등 정치력을 과시했다. 이슬람계로 농촌출신인 그는 뛰어난 선동력과 검소한 생활로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다소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면 추종세력들로부터는 국자로 칭송받으며 격동기의 지도자에게 필수적인 정확한 판단력과 뛰어난 대중정치적 감각을 겸비한 `정직한`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조선
1991년 4월 9일: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 정식 출범 연합당(약칭 신민당)이라는 새로운 당명으로 공식 출범했다. 이로써 지난 1987년 11월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후보출마를 위해 창당됐던 평민당은 3년 5개월 만에 간판을 내리고 신민당이 원내의석 69석의 제 1야당이 되었다.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신민주연합당(가칭) 이우정 창단 준비 위원장(오른쪽)이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신민당의 출범 선언을 하고 있다. /조선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 정식 출범 평민당과 재야의 신민주연합당(가칭)이 1991년 4월 9일 서울 삼성동 한국 종합 전시장에서 통합출범 전당대회를 갖고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이라는 새로운 당명으로 공식 출범했다. 이로써 지난 1987년 11월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후보출마를 위해 창당됐던 평민당은 3년5개월 만에 간판을 내리고, 신민당이 원내의석 69석의 제1야당이 됐다. 이날 대회에서 신민당 총재에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선출됐으며 수석최고위원엔 이우정 신민주연합당창준위원장이, 최고위원 8인에는 최영근, 노승환, 박영숙, 이용희, 박영록(이상 평민측) 박일(전신민당 정책심의회 의장), 김말용(전노총위원장), 최성묵씨(목사)가 선출됐다. 신민당이라는 당명은 이날로 세 번째 사용됐다. 지난 1967년 신한당과 민중당이 합쳐 1980년 5월 17 까지 이어진 신민당, 1985년 5공의 12대 총선을 앞두고 탄생한 제2의 신민당, 그리고 이날 제3의 신민당이 출범한 것이다. /조선 ←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 합의체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를 포함한 민청학련 관련 피고인 38명에게 판결을 내리고 있다.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1975년 4월 9일 새벽 긴급조치 1호-4호,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8명은 여정남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우흥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이다. 이들은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이란 이유로 1974년 체포되어 동년 6월 15일 비상군법회의 1심 재판을 거쳐, 1974년 9월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상고 기각 판결을 내린 지 만 19시간 만인 이날 새벽 집행됐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 법학자 회의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으로 의혹받는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건은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북한 노동당의 강령을 토대로 한 대규모 지하조직을 구성, 활동한 혐의로 인혁당계 4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함으로 전모가 드러난 인혁당 사건은,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로부터 넘겨받은 공안부 검사들마저 피의자들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는 항명 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사건 자체가 조작 혐의가 짙었다. 재판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임이 밝혀져 관련자 대부분이 무죄를 선고 받고 일단락되었던 이 사건의 망령이 10년 후 다시 살아나 젊은 운동가들이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결국 이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조선 2007년 대법원 재심에서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한 날조사건이라는 사실을 들어 피의자에게 무죄평결이 내려짐에 따라서 명예가 회복되었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된 8명의 피고들이 사형 선고를 받은지 20시간만에 모두 사형당하다. 인민혁명당 사건(人民革命黨 事件) 또는 인혁당 사건(人革黨 事件)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에 의해 사회주의 성향이 있는 도예종 등의 인물들이 기소되어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날조사건이다. 1964년의 제1차 사건에서는 반공법, 1974년의 제2차 사건에서는 국가보안법·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에 따라 기소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해,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인혁당 사건은 국가가 법으로 무고한 국민을 죽인 사법 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에 일어난 인권 탄압의 사례로서 알려져 있다. 2005년 12월 27일 재판부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소를 받아들였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21일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서울 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배척하면서 시국사건상 최대의 배상액수 637억여 원(원금 245여억 원+이자 392여억 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사건 개요 제1차 인혁당 사건 제1차 사건은 1964년 8월 14일에 발생했다. 그 날 김형욱 중앙정보부 부장은 도예종, 양춘우 등 혁신계 인사, 언론인, 학생 4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해, 사건의 ‘전모’를 공표했다. 정보부는 “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반(反) 대한민국정부 조직 인민혁명당(인혁당)을 조직해, 각계에서 인사(人士)를 모으면서 국가 사변(事變)을 기획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검찰이 재판소에 기소된 인원수는 13명으로, 도예종와 양춘우 이외의 11명에게는 일단 무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예종(都禮鐘), 양춘우(楊春遇)와 박현채는 징역 6년의 유죄판결을 받아, 다른 사람들은 징역 1년 집행 유예 3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제2차 인혁당 사건 1975년 4월 9일에 발생한 제2차 인혁당 사건은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12월에 있었던 유신 체제 발족과 1973년 8월 8일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반발심을 환기하였으며, 1973년 10월부터 데모 등을 통한 박정희 정부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 반대 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25일에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240명을 체포했다. 그들의 죄상은, “인혁당 재건위원회”를 설립해 인혁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다수가 1975년 2월 15일에 사면, 복권되었으며, 나머지 38명에 대해서는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는데 이들 중 도예종, 하재완 등 피고인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나경일 등 피고인 9명에게는 무기징역, 김종대, 황인성 등 피고인 12명에게는 징역 20년, 전재권, 임구호 등 피고인 8명에게는 징역 15년의 유죄 판결을 선고하였다.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인 8명의 사형 집행은 판결이 내려진 지 불과 18시간 후에 집행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내외적으로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연루자들의 사형이 집행된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는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사건 관련자 /위키백과 1973년 4월 유고 사라예보(Sarajevo). 19세 소녀 이에리사(1954~ )는 이상할 만큼 가라앉은 기분으로 테이블에 섰다. 상대는 아무도 넘볼 수 없었던 중국. 그러나 자신이 있었다. 이에리사에겐 드라이브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파워 드라이브를 여성들도 배우는 시기였고 이에리사는 그 선봉이었다. 이에리사가 중국선수 2명을 잇달아 꺾어 종합스코어 3대 1. 한국은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1973년 4월 8일 만리장성을 넘었다. 이어 벌어진 헝가리와 준결승, 이튿날 일본과 가진 결승서도 파죽지세. 여자탁구팀은 1973년 4월 9일 세계탁구선수권 여자 단체전에서 건국 이후 첫 구기종목 우승의 쾌거를 이루며 영광의 코르비용컵을 안았다. 가난에 찌든 국민들은 밤새 지직거리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고, 현장 취재기자는 국제전화로 낭보를 전하다 끝내 목이 메고 말았다. 귀국한 공항엔 30만 시민이 선수단을 환영 나왔고 오색 꽃종이로 덮인 하늘 아래 선수단은 오픈카로 시내를 누볐다. 동네 탁구장은 제2의 이에리사, 제2의 정현숙을 꿈꾸는 코흘리개들로 넘쳤다. 전국은 탁구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가히 탁구는 국기가 되었다. 사라예보는 아직도 살아숨쉬는 한국탁구의 신화이다. /조선 4월 9일: 한국 여자탁구 유고 사라예보서 세계 제패 을 차지했다. 1973년 4월 9일 여자대표팀은 건국 이후 첫 구기 종목 우승 쾌거를 이루며 영광의 코르비용컵을 받았다. 당시 선 수단이었던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 등은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특히 19살 소녀였던 이에리사는 순식간에 스타로 떠올랐 다. 귀국한 공항엔 30만 여명의 시민들이 선수단을 환영했고 선수단은 오픈카로 시내를 누볐다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서 우승 후 돌아온 여자탁구 선수들이 환영받고 있다. /조선 1973 - 탁구 여자선수들, 세계 제패 1973년 오늘은 한국 여자 탁구가 세계를 제패한 날이다.
1967 진해 제4비료공장 준공 비료에는 깻묵[油粕] ·어비(魚肥) 등 유기질비료와 황산암모늄 ·요소 ·용과인 등의 화학비료가 있는데, 주로 화학비료를 제조 ·생산하는 분야를 비료공업이라고 한다. 1906년 프랑크 -카로법에 의한 석회질소, 1913년 하버-보쉬법에 의한 암모니아 합성공정의 확립을 통한 비료제조 공업화의 성공을 계기로 20세기 전반에 비료화학공업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국에서 화학비료를 처음 생산한 것은 부산에서 1910년경 인분뇨에서 얻은 암모니아를 황산에 흡수시켜 황산암모늄을 연간 130M/T 규모로 제조한 것이다. 1930년에 황산암모늄(연간 48만 M/T )과 황산인산암모늄(硫燐安:연간 17만 M/T)을 처음으로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였다(흥남 ·겸이포 등). 또한 1936년 석회질소를 연간 2만 4000M/T, 1941년에는 염화암모늄을 연간 2만 M/T 생산하였다. 현재 한국에서 생산하는 비료는 비료의 3요소 중 질소와 인산을 중심으로 한 질소질 비료와 인산질 비료들이 주축을 이루며, 칼륨 비료는 외국에서 수입한 것을 복합비료에 첨가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약간의 양을 단비(單肥)로서 사용하고 있다. 질소계 비료 중에서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소(尿素)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에서 질소 비료를 제조하기 위하여 연간 4,000M/T급의 충주비료공장 건설계약을 체결한 것이 1955년 5월이었다. 1958년 4월 준공 예정이었으나 건설을 담당한 맥그로하드로카본사(社)와의 분규(紛糾)로 1959년 10월 시운전 단계에 들어가 1961년 4월 준공하였다. 1963년부터는 요소 연산 8만 5000M/T 을 초과생산하는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요소공장은 호남비료공장으로 1954년 10월 건설계약을 체결하고 준공한 것은 1962년 12월이었다. 이 공장의 특색은 충주비료공장이 중유를 사용하는 데 대하여 무연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스화용탄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나프타가스화 시설을 추가한 것이 1968년이었다. 이 두 공장만으로는 국내 질소비료 수요량에 미치지 못하므로 1968년 이후 국내 비료의 자급화를 목적으로 제3 ·제4 ·제5공장을 계획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제3공장은 요소 8만 4100M/T과 복합비료 18만 600M/T 능력의 공장으로 경남 울산에서 1967년 3월 준공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남화학(주)의 발족이다. 제4공장은 제3공장과 같은 능력의 공장으로서 경남 진해에서 준공식을 거행한 것이 1967년 4월이었다. 이것이 진해화학(주)의 발족이다. 1968년 정상 가동 이후 시설용량을 웃도는 실적으로 매년 목표량을 초과달성하였고, 1975년 설계용량의 148%라는 기록을 돌파하기도 하였다. 제5공장은 요소를 연간 33만 M/T을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이다. 이것이 경남 울산에 소재한 한국비료공업(주)인데, 삼성물산과 일본의 미쓰이(三井)물산 사이의 차관계약에 의해 1965년 12월 5일 착공해서 1967년 4월 20일 준공하였다. 이 공장에서도 설계용량 이상의 생산실적을 나타냈고 특히 1967년부터 요소비료 2만 M/T 수출을 시작함으로써 비료수입국에서 비료수출국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였다. 1973년 4월 발족한 한국종합화학공업(주)은 충주비료와 호남비료를 합병한 것이다. 충주공장에 대단위 요소 공장과 산업용 암모니아를 공급할 수 있는 암모니아 센터(제6비)를 1973년 10월 준공하였다. 종합화학은 비료공업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 관여하여 한국중화학공업 발전의 모체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밖에 남해화학(주)이 있는데, 이 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의 비료공장이다. 1977년 8월 준공식을 가진 남해화학은 요소 66만 M/T, 복합비료 70만 M/T 비료생산능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여천공업단지에 있는 제2석유화학계열 공장들에 기초원료 전량을 공급하게 됨으로써 기초화학제품 공장으로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질소비료를 부산물로 생산할 수 있는 공장으로 한국카프로락탐공업(주)과 포항종합제철(주)이 건설되었다. 전자는 1974년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생산능력은 14만 2000M/T에 이른다. 후자는 1973년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생산능력은 2만 2000M/T 에 이른다. 석회질소공장도 질소비료공장에 포함되지만 강원 삼척(三陟)의 북삼화학공사(北三化學公社)는 1973년부터 생산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인산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1966년부터 용성(熔成)인산비료를 생산하는 경기화학공업(주), 1967년부터 같은 용성인산비료를 생산하는 풍농비료공업(주)이 있다. 용성인산비료는 인산분 외에도 석회 ·마그네슘 ·규산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 경작지의 지력증진에 효과적인 비료이다. 한국 경작지는 화강암 및 화강편마암을 모암으로 한 광질토양으로서 양이온인 석회 및 산화마그네슘의 성분이 부족한 데다 여름철 집중강우로 양이온들이 용탈되어 산성화되므로 척박(瘠薄)한 경작지가 많이 분포한다. 이러한 토양 특성에 적합한 비료가 용성인산비료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생산 초기에는 그 특성이 인식되지 않아 시비량이 증가되지 않았으나, 1971년부터 벼의 다수확 품종이 보급됨에 따라 용성인산비료 중의 규산의 효과가 인정을 받게 되었다. 또 야산 개발경작지에서 용성인산비료의 효과가 크게 나타남으로써 토양개량제로서 빛을 보게 되었으며, 밭작물 ·원예작물의 재배면적이 증가됨에 따라 용성인산비료의 수요량이 증가되어 1972년 19만 M/T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지효성비료(遲效性肥料)인 용성인산비료보다는 속효성비료(速效性肥料)를 원하는 것이 농가의 일반적인 경향이므로 경기화학에서는 용과인공장을 1974년 12월 준공하여 1975년 13만 5187M/T 을 생산하였다. 용과인은 용성인비(지효성비료)에 인적석회(속효성비료)를 혼합한 것으로서 1988년 국내소비가 10만 M/T 이었다. 용과인은 혼합하면 좋지 않은 불용성 물질이 생성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화학원리로 볼 때는 무리한 방법이다. 끝으로 조선비료공업(주)은 복합비료 전문공장인데, 연초용(煙草用:10-15-20) ·수도용(水稻用:1-15-15)을 계속 생산하고 있다. 종전에는 상전전용(桑田專用:17-7-9) ·산림전용(山林專用:9-12-3) ·초지전용(草地專用:10-11-12)을 제조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비료공업은 1970년대 초반 한국의 주곡(主穀) 자급을 위한 녹색혁명의 달성과 세계적인 식량부족 현상으로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나,1980년대 국내외 여건 변화와 1990년대 무역자유화(貿易自由化)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92년 총비료생산은 170만 8111M/T 이고, 수입은 75만 9690M/T 이다.
1962 한국-이스라엘 국교 수립 이스라엘은 국토가 한반도의 약 10분의 1인 20,770㎢밖에 되지 않으나 다양한 윤리적·종교적·문화적 배경을 지닌, 세계 각국에서 이주한 유대인과 아랍인, 그밖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회가 역동적이다. 한국과 1962년 4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1964년 8월 주한 이스라엘 상주 대사관을 개설하였다가 1978년 2월 폐쇄한 뒤 1992년 1월 재개설하고, 한국도 1993년 12월 이스라엘 한국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양국은 과학기술협력협정·항공협정·문화협력협정(1994), 세관협력협정(1996), 이중과세방지협정(1997), 민간산업기술협력협정(1998), 투자보장협정(1999) 등을 체결하였다. 이스라엘과 북한은 수교하지 않고 있다. 1997년 11월 농림부장관 이효계, 1998년 11월 산업자원부장관 박태영, 1999년 2월 국무총리 김종필이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이스라엘에서는 1997년 4월 산업통상부장관 샤라나스키(Sharanasky), 1997년 8월 총리 네타냐후(Netanyahu), 1999년 11월 경찰청장 예후다 윌크(Yehuda Wilk) 등이 방한하였다. 상호 공관 설치 이후 양국간 교역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으나 1996년도부터 한국의 무역적자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1999년 현재 대한수입 4억 8600만 달러, 대한수출 5억 6200만 달러이며 주요 수출품은 디지털식 집적회로, 유기화학제품, 유선통신기기, 계측기 등이고 수입품은 승용차, 무선전화기, 합성수지, 편직물 등이다. 주요업무는 한국정부와의 유대강화와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협력, 외교·경제 정보 수집, 무역 증진, 외교정책 홍보, 문화·학술·체육 교류 협력, 한국 거주 이스라엘 국민의 보호·육성, 국적·호적·여권 업무 및 이스라엘 여행객에 대한 사증 발급 등이다. 업무시간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10시∼16시이고, 금요일은 10시∼14시이다. 토·일요일과 이스라엘 독립기념일인 5월 14일(1948년 당시 독립기념일로 유대력에 따라 매년 변동됨), 한국 국경일 등은 휴무이다.
1960 - 페르부르트 남아공 총리 피격
1959 - NASA가 머큐리 계획 우주 비행사 명단을 발표하다. 머큐리 계획(Project Mercury)은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 항공우주국에 의해 이루어진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탐사 계획이다. 머큐리 계획의 목표는 소련의 유인 우주비행을 앞지르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소련의 유인 우주비행을 앞지른 것은 머큐리 계획의 다음 단계인 제미니 계획 후반부터였다. 개요 머큐리 계획은 소비에트 연방이 1957년 10월 4일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에 대항해 1958년에 시작되었다. 미 육해공군으로부터 우주비행사 후보자를 선발해, 훈련을 실시하는 것과 동시에, 로켓의 개발, 머큐리 우주선의 개발을 진행시켰다. 이름은 로마 신화의 신 머큐리(수성)로부터 따왔다. 또, 모든 유인 머큐리 우주선명에 붙었던 "7"은, 우주비행사 후보자가 7명이었던 일에 연관된 것이다. 1958년 10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The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NASA)이 설립, 이후 군사 부문을 제외한 우주 개발을 육해공군으로부터 이어받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유인 우주비행을 추진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소련의 우주 개발 계획은 한층 더 진행되어, 유리 가가린에 의한 인류 첫 유인 우주비행(1961년 4월 12일)을 성공시켰다. 미국은 1961년 5월 5일, 앨런 셰퍼드가 탑승한 머큐리 3호(프리덤 7호)에 의한 약 16분간의 탄도 비행을 실시했지만, 궤도 비행은 소련에 10개월이나 늦는 1962년 2월 20일에 존 글렌이 탑승한 프렌드십 7호의 4시간 56분의 비행이 처음이었다. 이후 1963년의 페이스 7호까지의 총 6회의 유인 비행 이후 계획이 종료되었다. 우주선에는 한 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프리덤 7호의 발사 성공 직후인 1961년 5월 15일에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1960년대가 가기 전에 달에 유인 비행을 실시한다”라고 선언해, 머큐리 계획의 성과는 후의 제미니 계획과 아폴로 계획으로 인계되었다. 발사를 위한 준비 1959년 NASA는 머큐리 계획에 참가할 7명의 우주비행사를 모집했고 도널드 슬레이튼, 앨런 셰퍼드, 월터 시라, 버질 그리섬, 존 글렌, 리로이 쿠퍼, 스콧 카펜터가 선발 되었다. 이때 선발 기준은 테스트 파일럿(비행기를 개발했을 때 처음 시험하는 베테랑 비행사) 출신이어야 하고, 나이는 40세, 체중은 82 kg, 키는 178 cm 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발사 /위키백과
← 반 히틀러 운동을 벌였던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1906. 2. 4 ~ 1945. 4. 9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1945년 4월 9일 독일 출신의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이날 교수대에 올라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히 행동하는 신앙인이길 바랬다. 그는 20세기 후반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그리고 새로운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목자이자 전쟁의 광기에 희생된 어린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순교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교회 재건과정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의 학문적인 분위기의 한 가정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21세 때인 1927년 ‘성도의 교제’라는 학위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며 신학적 천재성을 발휘했다. 신학계에서 처음으로 책임윤리를 설파한 그는 몸소 신앙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과 교회의 역할을 일깨워줬다. 그러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후, 유대인들을 겨냥한 박해와 학살이 자행되자 본회퍼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1943년 4월 5일.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됐다. 그후 2년 동안의 강제수용소 시절 친구 베트게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사후 ‘옥중서간’이란 제목으로 출판돼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과 용기를 줬고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내는 단초를 제공했다. 사후 반세기가 넘는 1996년 8월 6일. 베를린의 한 법원이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한 나치법정의 사형선고를 공식적으로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복권됐다. /조선
1942년 4월 9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사로잡힌 7만 명의 미국인과 필리핀 전쟁포로들이 바탄 반도의 남쪽 끝 마리벨레스를 출발해 산페르난도까지 88km를 강제 행진했다. 이어 카파스까지는 열차를 이용한 뒤,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넬 수용소까지 마지막 13km를 행군했다. 이들은 행군과정에서 굶주림에 시달렸고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며, 낙오자는 총검에 찔려 죽음을 당하는 등 숱한 박해를 받았다. 결국 7,000~1만 명의 포로들이 행진 중에 사망하고 단지 5만 4,000명만이 수용소에 도착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행진의 책임을 물어 당시 필리핀 침공작전을 수행한 일본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 중장이 기소되어 1946년 4월 3일 처형되었다.
1940 - 2차대전중 독일, 노르웨이와 덴마크 침공 베저위붕 작전: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다. 베저위붕 작전(Unternehmen Weserübung) 또는 베저 작전은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칸디나비아의 중립국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작전의 독일어 암호명이다. 독일어로 "베저 강 훈련"을 뜻한다.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였다. 그 구실은 프랑스와 영국이 이들 국가를 점령하려 계획(이는 실제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하는 데 대한 자기방어였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두 나라 주재 독일 대사들이 양국 정부에 독일군이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양국의 중립을 보호하기위해 왔다고 통보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지리, 위치, 기후가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양국의 침공도 다르게 전개되었다. 독일의 덴마크 침공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스웨덴과 핀란드가 포위되다 /위키백과
1927 - 최악의 사법살인 사코와 반제티 사형선고
법정에 들어서는 사코(오른쪽)와 반제티. /조선 최악의 사법살인 사코와 반제티 사형선고 1920년 4월, 미국 보스턴 근교의 한 제화회사에서 경리직원과 경비가 살해되고 1만6000달러가 털리는 살인강도사건이 발생하자 제화공 니콜라 사코와 생선장수 바르톨로메오 반제티가 용의자로 체포된다. 경찰은 명확한 물적 증거도 없이 두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고 1차대전 참전을 거부했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는 사실에 주목,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갔다. 전후 불경기와 과격해진 노사분규, 이에따른 사회불안을 과격분자와 공산주의자에게 전가하려는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편승한 것이었다. 1921년 7월14일 두 사람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불공정한 재판에 분노를 표시했다. 파리에서는 미국 대사의 집이 파괴되고 구명운동을 벌이던 데모대에 폭탄이 터져 20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시인 아나톨 프랑스와 아인슈타인 등 세계 지성인들도 나서 ‘최악의 사법살인’이라며 항의하자 메사추세츠 주지사는 사형집행을 연기하고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위원회가 내린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1927년 4월9일, 두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전기의자에 앉아 죽음(8월23일)을 맞은 두 사람의 무죄가 공식 확인된 것은 1977년 메사추세츠 주지사가 이들의 무고를 인정하면서였다. 둘은 그림과 노래로도 명예가 회복됐다. 화가 벤 샨이 그린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1931∼1932)과 미국의 현실참여가수 훌리 니어가 부른 ‘누가 이들을 기억하랴?’가 그것이다. /조선
1924 백범 김구[白凡 金九, 임시정부 국무총리 직무대리에 취임, 1924 백범 김구[白凡 金九1876.7.11∼1949.6.26], 임시정부 국무총리 직무대리에 취임, *[백범 김구 白凡 金九] -본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1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49 백범 김구 白凡 金九1876.7.11∼1949.6.26] 안두희의 총에 피살, -1949년 6월 26일 낮 12시30분, 서울 경교장(현재의 강북 삼성의료원)에 갑자기 4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육군 소위 안두희가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에게 쏜 총소리였다. 73세 노혁명가의 목숨을 앗아간 안두희는 손에 권총을 쥔 채로 “선생은 내가 죽였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며 검거에 순순히 응했다. 범인이 확보되고 철저하게 준비된 암살이었음도 밝혀져 사건의 전모가 곧 드러날 것으로 예상됐으나 사건은 지금까지도 배후설만 난무할 뿐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신병을 확보한 헌병대가 범인을 감방에 가두기는커녕 의무실에 보호조치한 점, 임정계열인 헌병사령관을 이튿날 춘천지구로 전격 발령한 점 등이 의문이었다. 특무대로 넘겨진 안씨에게 김창룡이 “안의사, 수고했소”라고 격려하며 술·담배 등을 제공한 사실은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6·25 발발과 함께 특사조치로 석방돼 육군 중령으로 복귀한 점 역시 배후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었다. 배후에 대한 물증은 없고 심증만 구구한 채 54년의 세월이 흘렀다 ← 윤백남 1923년 4월 9일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알려진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세>가 경성 호텔에서 신문통신기자를 비롯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연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이 계몽극에는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출연했다.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영화는 신파극단 신극좌를 이끌었던 김도산의 <의리적 구투>로 연극 장면 가운데 필요한 대목을 영사 화면으로 만들어 공연 중에 비추는 활동사진 연쇄극이었다. 1923년 1월 23일 본격적인 활동사진의 틀을 갖춘 활극 <국경>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었고, 이어서 극영화의 형식을 띤 <월하의 맹세>가 상연되었다.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되면서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브리태니커 4월 9일: 저축 장려한 첫 극영화 '월하(月下)의 맹서(盟誓)' 상영.
‘월하(月下)의 맹서(盟誓)’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이월화. /조선 저축 장려한 첫 극영화 ‘월하(月下)의 맹서(盟誓)’ 상영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月下)의 맹서(盟誓)’가 1923년 4월9일, 서울 경성호텔에서 처음 상영됐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제작한 계몽영화다보니 스토리는 단순하다. 주색잡기에 빠져 파산직전에 놓인 약혼자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혼인을 앞둔 어느 달 밝은 밤에 미래를 다짐하며 저축할 것을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대도전’ ‘흑두건’ 등 역사소설을 남긴 작가 윤백남이 연출과 대본을 맡았고 그가 창단한 민중극단 단원 15명이 배우로 출연했다. 윤백남은 최초로 시나리오를 쓴 작가로도 족적을 남겼다. 영화가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처음으로 여배우를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여자가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지면 혀를 차고 눈을 흘길 때였지만 윤백남은 과감히 민중극단 단원이었던 이월하를 여주인공으로 출연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최초의 여배우 이월하는 짝사랑의 아픔을 겪어 일본에서 자살했다는 소문만 남기고 은막뒤로 사라졌다. 영화사 전문가들은 1919년 10월 단성사에서 상영된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를 한국 영화의 시발점으로 보고있지만, ‘의리적 구투’가 연극을 하면서 무대에서 처리하기 곤란한 야외장면들을 영화로 비춰주는 연쇄극용 영화였기 때문에 ‘월하의 맹서’를 기점으로 삼는 영화인들도 있다. /조선
1919년 4월 9일 태어남 / 1995년 6월 3일 죽음 "세계 최초의 전자 컴퓨터 에니악(ENIAC)·비낙(BINAC)·유니백(UNIVAC)의 설계 및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자동 컴퓨터 분야를 개척했고, 전자 컴퓨터 시스템 구축에 지속적인 공헌을 하고 있기에 이 상을 수여한다." - Harry M. Goode Memorial Award 수상 업적(1966) 에커트는 존 W. 모클리(Mauchly)와 함께 최초의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 에니악(ENIAC)을 발명한 미국의 공학자이다. 무게가 30t이나 되고 부피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컴퓨터인 에니악에는 약 1만 8,000개의 진공관, 7만 개의 저항기, 1만 개의 축전지가 사용되었다. 이 컴퓨터는 아주 빠른 속도로 서로 다른 종류의 계산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1945년 12월에 첫 번째 문제인 열핵폭탄에 대한 계산을 해냈다. 이렇게 탄생한 에니악은 1946년 2월 14일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탄도를 계산하거나 군사용 계산과 과학적인 계산을 하는 데 활용되었다. 에커트와 모클리는 1946년 독자적으로 컴퓨터 회사를 창설했고, 곧이어 천공(穿孔) 카드 대신 자기 테이프에 정보를 저장하는 비낙(BINAC)과 세계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 유니백(UNIVAC)을 내놓음으로써 현대 컴퓨터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17 - 1차대전 비미 능선 전투(캐나다 국가 탄생 전쟁) 佛 비미전투 90주년 행사 - 英 여왕 등 1만5000여명 참석 캐나다 군인 3600여 명이 전사한 제1차 세계대전 격전지 중 하나인 프랑스 북부 비미에서 9일 전투 90주년 행사(사진)가 열렸다. <연합뉴스> /국방일보 2007-4-10 참호와 기관총 1차 대전은 흔히 ‘참호‘와 ’기관총‘으로 대표됩니다. 전투 양상은 참호전이 주를 이뤘고, 기관총이 본격적으로 전쟁에서 사용되면서 상당수의 전사자들이 기관총에 희생됐습니다. 그래서 1차 대전은 솜므 전투나 마른 강 전투 처럼 한 지역에서 수십만명 씩 전사자가 나온 전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비미 고지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1915년부터 17년 까지 이 지역에서는 지리한 참호전이 이어졌습니다. 고도 145미터에 불과한 고지를 놓고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2년 간 독일군과 공방전을 벌였지만 번번히 패했습니다. 비미 고지 전투는 크게 보아 아라스 전투의 일환이었는 데 아라스 전투에서는 연합군 15만명, 독일군은 10만명이 전사했습니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을 뚫어야 독일 까지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미 고지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9일 부터 12일 까지 여기에 1917년 4월 캐나다군이 투입됩니다. 당시 캐나다는 아직 영국의 자치령에 불과했습니다. 정식으로 국가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캐나다군은 10만명을 파병했습니다. 그리고 4월 9일 새벽 5시 반 공격을 시작해서 단 나흘 만인 12일-90년 전 바로 오늘입니다- ‘힌덴부르크 라인’이라는 막강한 방어선을 구축한 독일군을 패퇴시켰습니다. 전사자 3,598명, 부상자 7천여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이 따랐지만 나흘 만에 캐나다군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2년 간이나 고전하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당연히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캐나다는 당시 전투에 임하면서 철저히 준비 했습니다. 사전에 비슷한 지형에서 훈련을 마쳤고, 전투 직전에는 보급망 부터 화력 까지 완비했습니다. 여기에 처음부터 각개전투 식이 아닌 4개 사단 전부가 하나가 되어 함께 공격에 참여했고, 단 한 명도 열외가 없었다고 캐나다의 전쟁 박물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 까지는 캐나다라는 ‘국가 의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4개 사단이 합동 작전을 편 것도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4개 사단 10만명의 병력이 혼연일체가 되어 3중으로 파인 참호와 철조망, 고지 위에서 아래로 쏘아 대는 독일군의 기관총과 대포를 돌파한 것입니다. 국가의 탄생 "Merci au Canada" 1922년 프랑스는 비미 고지 일대를 캐나다에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에는 고지에 비미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이 기념관은 올해 90주년을 맞이해 캐나다 측에서 174만 달러를 들여 개축한 뒤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9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프랑스는 캐나다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드 빌팽 프랑스 총리는 이런 말로 연설을 맺었습니다. “Merci au Canada." 김인기 기자의 블로그 - SBS뉴스
1915 디프테리아균 발견한 독일 세균학자 프리드리히 뢰플러 사망, 1915 디프테리아균 발견한 독일 세균학자 프리드리히 뢰플러[ Friedrich August Johannes Loffler, 1852 - 1915.4.9. ] 사망, *독일 세균학자.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 출생.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1874년에 학위를 받아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근무, 76년 위생장교로 임명되어 군의관이 되고, 79년에는 제국보건부에 들어가 R. 코흐의 지도 아래 세균학 연구에 종사했다. 여기에서 마비저균(馬鼻疽菌)을 발견하고(1883), 디프테리아균의 순수배양(1884) 등의 업적을 올렸으며, 89년에는 P. 프로슈와 함께 소의 구제역(口蹄疫)에서 병원바이러스를 분리했다. 88년에 그라이프스발트대학 위생학교수, 1913년 코흐전염병연구소장이 되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뢰플러증후군 -症候群, Loffler"s syndrome] -백혈구의 일종인 호산구(好酸球)의 혈중 증가를 수반하는 일과성(一過性) 폐침윤(肺浸潤). 뢰플레르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임상증상은 거의 없으나 있어도 가볍고, 2주에서 1개월 이내에 자연 치료된다. 1932년 스위스의 내과의사 W. 뢰플러에 의해 발표되어, 현재는 PIE증후군 중에서 단순성폐호산구증가증(單純性肺好酸球增加症)으로 분류되며 알레르기성 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포(肺胞)의 Ⅰ형 알레르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알레르겐으로는 기생충·진균·세균·약제·화분(花粉) 등이 있다. 증상으로는 헛기침이 가장 많으나 정도는 가벼우며, 가래가 나오는 증상에는 가래에서 호산구가 검출된다. 그밖의 증상으로는 전신의 권태감·두통·소양감(搔痒感)·재채기·상기도분비항진(上氣道分泌亢進)·흉통·혈관신경성부종·구각염(口角炎) 등이 나타날 때도 있다. 발열은 없는 것이 보통이지만 있어도 정도는 가볍다. 치료는 별로 필요치 않으나 증상이 심한 경우 부신피질호르몬제를 사용할 때도 있다. 알레르겐이 약제인 경우에는 약품 복용을 중지하고, 기생충일 경우에는 구충제 등으로 원인을 제거한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08. 4. 9 전남 해남~1984. 12. 29. 1928년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중 같은 학교 학생인 이경채(李景采)의 퇴학 처분에 대항해 일으킨 동맹휴학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나왔다. 1929년 6월 도쿄[東京]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이 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송동식(宋東植)·조길룡(曺吉龍) 등 광주시내 각 학교 학생지도자들과 함께 김기권(金基權)의 집에 모여서 구체적 활동 방안을 논의하고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할 때 강달모와 함께 재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회비징수 및 회계사무를 담당했다. 또한 김상환·김보섭 등 20여 명과 함께 광주고등보통학교 독서회를 조직하고 동회의 조사선전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장재성 및 본부 임원 학생들과 협의해 독서회원의 친목단결 및 재정활동 지원을 위해 같은 해 9월에 학생소비조합을 조직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광주학생운동에 관련해 1930년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4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으며, 독서회에 관련해서는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항소해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복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05 미국 정치가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 출생, 1905 미국 정치가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 James William Fulbright, 1905.4.9 - 1995 ] 출생, *미국의 정치가. 아칸소주 출생. 아칸소·옥스퍼드·조지워싱턴대학 등에서 배우고 1934년 법무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35년 사직하고 모교인 아칸소대학강사·39년 동대학총장을 지냈다. 한편 43년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45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73년까지 역임됐다. 54년 유엔총회 미국대표로 파견되고 59년 상원외교위원장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풀브라이트법의 제안자이며 베트남전쟁에는 비둘기파의 기수로서 활동했다. 74년의 중간선거의 예비선거에서 탈락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898 -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1898년에 여러 신문들이 창간되었다. 1898년 1월 1일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가 주간으로 발행한 ‘협성회회보’는 학생회의 기관지인 동시에 일반에 판매하는 신문이었는데, 제법 인기가 높아 3개월 후에는 발행 부수가 2천여 부를 넘어섰다. 이에 힘을 얻은 협성회는 이 신문을 일간으로 발전시키기로 결의하고, 4월 2일 제14호를 마지막으로, 4월 9일부터는 제호를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매일신문’은 ‘독립신문’의 일간 발행(1898년 7월 1일부터)을 촉진시켰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1882 영국 생물학자 다윈 사망, 1882 영국 생물학자 다윈 Darwin, Charles Robert, 1809.2.12 ∼1882.4.9]사망, *생물진화론의 정립에 공헌하였다. 슈루스베리의 의사 로버트 다윈의 아들이며, 에라스머스 다윈의 손자로 태어났다. 1825년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배웠으나 성격에 맞지 않아 중퇴하였다. 1828년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어릴 때부터 동식물에 관심을 가졌고, 케임브리지대학의 식물학 교수 J.헨슬로와 친교를 맺어 그 분야의 지도를 받았다. 1831년 22세 때 헨슬로의 권고로 해군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서 승선하여,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여러 섬(특히 갈라파고스제도)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두루 항해 ·탐사하고 1836년에 귀국하였다. 그 동안에 널리 동식물의 상(相)이나 지질(地質) 등을 조사하여 후에 진화론을 제창하는 데 기초가 되는 자료를 모았다. 특히 갈라파고스제도에서의 관찰, 즉 다른 환경의 섬과 거기에서 생활하는 같은 계통의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사소한 변이(變異)와의 관련은, 다윈으로 하여금 진화사상의 심증을 굳히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또, C.라이앨의 《지질학 원리》도 큰 영향을 주었다. 1839년 《비글호 항해기 Journal of the Voyage of the Beagle》를 출판하여, 여행 중의 관찰기록을 발표하면서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또한 지질학상의 문제, 산호초의 생성원인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1842년에는 건강 때문에 켄트주(州)에 은거하여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1856년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858년에 동남아시아에서 연구 중이던 A.R.월리스가 다윈과 같은 견해의 논문을 보내오자, 이에 놀란 그는 서둘러 논문을 정리하여 그 해 런던의 린네학회에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동시에 발표했고, 이듬해인 1859년 《종(種)의 기원(起原)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 in the Struggle for Life》(정식 명칭은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이라는 저작에 진화사상을 공표하였다. 진화론의 골자는 바로 그 저서의 표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자연선택설을 요인론(要因論)으로 한 것이다. 자연선택설은 생물의 어떤 종(種)의 개체 간에 변이가 생겼을 경우에, 그 생물이 생활하고 있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고, 부적합한 것은 멸망해 버린다는 견해이다. 곧, 개체 간에서 경쟁이 항상 일어나고 자연의 힘으로 선택이 반복되는 결과, 진화가 생긴다고 하는 설이다. 이 설에서는 개체간의 변이가 어떻게 생기느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라마르크가 제창한 환경의 영향에 따라 생긴 변이가 다음 대에 유전한다고 하는 획득형질유전론(獲得形質遺傳論)을 채용하고 있다. 또한, 개체 간에 경쟁이 일어난다고 하는 견해는 T.R.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시사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종의 기원》은 초판 1,250부가 발매 당일에 매진될 정도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켜, 후에 6판까지 출판되었다. 1860년 진화론에 관한 논쟁이 옥스퍼드에서 일어나 T.H.헉슬리와 J.D.후커 등의 지지로 다윈의 견해가 인정을 받았다. 1862∼1881년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진화론에 관한 저작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사육동식물(飼育動植物)의 변이 The Variation in Animals and Plants under Domestication》(1868)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性選擇)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1871)이 유명하다. 특히 후자는 《종의 기원》에서 뚜렷이 제시하지 못했던 인간의 진화에 대하여 그의 태도를 분명히 한 저술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는 진화론 외에도 생물학상의 몇 가지 연구를 하였다. 1880년의 《식물의 운동력》은 식물의 굴성(屈性)에 대한 선구적 연구인데, 식물학자인 아들 프랜시스 다윈(1848∼1925)과 공동으로 이룬 것이다. 또한, 《식물의 교배에 관한 연구》(1876)와 《지렁이의 작용에 의한 토양의 문제》(1881)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그는 1882년 켄트 다운에서 죽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물리학에서의 뉴턴 역학과 더불어 사상의 혁신을 가져와 그 후의 자연관 ·세계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두산백과) [종(種)의 기원[種-起原,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자연 도태와 진화의 이론을 다룬 <종의 기원>은 출판되자마자 1,250부 모두 매진되었다. 이 책의 원명은 "자연도태의 방법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였다. *[종의 기원] 은 영국의 생물학자 C.다윈(1809~1882)의 생물의 진화론에 관한 저서로 1859년 11월 런던의 존 머리사(John Murray社) 간행. 다윈은 1858년 7월 1일 린네 학회에서 A.R.월리스와 함께 진화론의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 요약 형식으로 이 책을 간행하였다. 전문 14장으로 구성되고, 변이(變異)의 법칙 ·생존경쟁 ·본능 ·잡종(雜種) ·화석(化石) ·지리적 분포 ·분류학 및 발생학 등의 여러 면에서 자연선택설을 전개하고 있다. W.페리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의 토대였던 적응의 현상에 자연적 설명을 부여하려는 것이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목표 중의 하나였다. 간행 직후부터 종교계의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약 10년 동안 생물학상 확고부동한 지위를 획득하고, 신앙에 대하여 사상 최대의 타격을 가한 저서로 알려져 있다. 1872년에 간행된 제6판이 최종판인데, 이때 과학적으로 제기된 여러 이론(異論)에 답한 새로운 한 장(章)이 제7장으로 추가되었다. (두산백과) *[비글호 항해기] -영국의 C.R.다윈의 저서로 1839년 비글호의 함장 R.피츠로이의 《항해담》(3권)으로 출판. 1845년 및 1860년에 개제출판(改題出版)하였다. 이 저서는 다윈이 1831년 12월부터 1836년 10월까지 영국의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남아메리카·태평양·인도양·남아프리카 방면을 항해할 때 견문한 자연현상·풍속 등을 정리하여 일지 형식으로 쓴 것이다. 지리학자 훔볼트의 《남아메리카 여행기》와 기술방식이 유사한 점이 있다. 다윈은 이 항해 중 갈라파고스제도와 다른 여러 지방의 동식물 및 지질을 관찰함으로써 생물진화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역사속의 인물] 존경받는 패장 리 장군 1865년 오늘, 미국 버지니아주 애포매턱스 군청 앞. 깔끔한 군복을 차려입은 노신사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남부동맹 총사령관 로버트 리(Robert E. Lee`1807~1870)장군이었다. 후줄근한 군복에 진흙투성이의 장화를 신은 장군이 뒤따랐다. 나중에 18대 대통령이 되는 북부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1822~1885)였다. 예전 동료였던 두 사람은 별말 없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리 장군이 자신의 말을 타고 떠나가자 북군 병사들은 '이겼다'며 환호했다. 4년간에 걸친 남북전쟁이 끝났다. 미국 곳곳에 리 장군의 동상과 흉상, 기념물이 있으니 그만큼 명성 높은 패장(敗將)이 어디 있겠는가. 책임감 있는 군인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전쟁 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서 총사령관직을 제의받았지만 고향 버지니아가 남부동맹에 가담하자 고향을 선택했다. 패전 후 죽을 때까지 버지니아의 워싱턴대학 총장을 맡아 유명한 대학으로 키웠다. 지고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4월 09일
1196 (고려 명종 26) 최충헌, 이의민 죽이고 권력 잡음 자기 뜻대로 세우는 등 왕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을 평정하고 국경을 넘보는 거란족을 물리 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벌였으나 독재 정치를 일삼아 비난을 받았다. 1198년 노비 만적 등이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되자 100여명을 강물에 던져 죽였다. 1196(고려명종26) 최충헌[崔忠獻, 1149(의종3) - 1219(고종6)] , 이의민 죽이고 권력 잡음, *고려 무신정권기의 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난(鸞).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에서 공을 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이 되었다. 96년 아우 충수(忠粹), 생질 박진재(朴晉材) 등과 함께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 폐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명종에게 올려 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다. 97년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으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자 평량공(平凉公) 민(旼;신종)을 왕에 추대, 최씨무신정권을 확립하였다. 같은해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는 동생 충수와 대립, 충수를 죽였다. 98년(신종 1) 만적(萬積)의 난을 평정하고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으며,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신변보호를 강화하였다. 1204년(신종 7) 신종을 폐하고 태자(희종)를 옹립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판병부어사대사 태자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判兵部御史臺事太子太師)가 되고, 왕은 그를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다. 또한 편복(便服)에 일산(日傘)을 받고 궁궐에 출입하였는데, 시종하는 문객이 3000여 명이나 되었다. 1209년(희종 5) 이규보(李奎報)를 발탁, 피폐해진 무신정권의 문운(文運)을 진흥하려 하였고,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장악하는 최씨정권의 최고기관으로 삼았다. 11년 왕준명(王濬明) 등의 음모를 겪고 난 뒤 왕을 폐하고 한남공(漢南公) 정(貞;강종)을 즉위시켰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반란이 있었으나 강경책과 회유책으로 진압하고, 기강확립과 풍속의 순화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경성(景成).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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