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3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루카 4,21-30)
And he said, “Amen, I say to you,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native place.
When the people in the synagogue heard this, they were all filled with fury. They rose up, drove him out of the 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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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백성에 맞서 민족들의 예언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이제 민족들을 위해 두려움 없이 말씀을 전해야 한다(제1독서).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사를 값지게 쓸 수 있는 가장 뛰어난 비결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은사도 무의미하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파견하셨으며 당신을 통해 주님의 은혜로운 때가 왔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 은총이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을 당당히 밝히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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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어떤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일까요? 그 말씀이란 지난 주일인 연중 제3주일에 우리가 들었던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런데 오늘 복음을 가만히 살펴보면, 잡혀간 이들이 해방되거나 눈먼 이들이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무언가를 기대했다가 퇴짜를 맞고 그분을 죽이려는 분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는 가운데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에서여야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이라서, 이스라엘 민족이라서 은총을 더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듣는 사람이라면 비록 그가 이방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렙타의 과부도, 시리아의 나아만도 예언자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기적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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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가
-신대원신부-
연중 제4주일이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해 당신의 사명선언문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할 사명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루카 4,19)를 선포하시는 일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이 넘쳐나도록 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여 억울하게 잡혀가 영어(囹圄)의 삶을 사는 그들이 목 놓아 자유를 노래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또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똑똑하게 목도(目睹)하도록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면서 그 모든 일이 곧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에서 비롯됨을 온몸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예수님 사명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열성적 신앙인들이다. 예수께서 이사야 예언자 말씀을 낭독하실 때에도, 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말씀하실 때에도 그들은 열성신자답게 그 말씀을 하느님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적 열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돌연 무서운 집단적 패거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잘못되고 왜곡된 신앙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진실한 예수님 말씀에 불쾌감을 느끼고는 헐뜯기 시작했다. 급기야 모두 화를 내면서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루카 3,29-30)했다. 열성적 신앙인들이 삽시간에 흉악무도한 패거리로 돌변하는 순간이며, 그들이 자긍심을 지녔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됐음을 자인하는 순간이다.
왜곡된 믿음은 눈에 보이는 '기적(잿밥)'에 더 관심을 끌게 하고, 오로지 기적만을 강조하게 한다. 주님의 참된 말씀을 앞세워 살기보다는 자신들의 그릇된 욕심을 앞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기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일시적 영달을 채우려는 못된 마음 씀씀이가 문제다.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시고자 행하시는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갈라지고 다투며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인류를 바로잡으시려는 은총이요 은사다. 따라서 은총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당신 자비에 바탕을 둔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 방문이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임을 깨닫기보다는 고향이라는 것을 내세워 몇 배나 더 강한 기적을 행할 것을 주문하려 했다.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그들은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하느님이 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느님도 되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다인들의 선민의식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당신의 공동체를 세우셨다. 그러나 그분이 뽑아 세운 일꾼들은 또다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그분을 '감실(龕室)'에 가두고, 감실 안에 계시는 분만 세상에 소개하려 한다.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주님이 아니라 그들만의 주님으로 섬기려 하기에 그분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참뜻을 저버리는 신세로 전락하려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누리면서 살기를 일깨워주기는커녕 그분을 다시금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니 그 옛날 나자렛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는 교회의 몸이시며 머리이신 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고"(2티모 1,10), 또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라는 선언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입으로는 무엇인들 말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그분, 교회의 몸이시고 머리이신 분의 말씀을 듣고 화를 잔뜩 낸 적은 없는가.
잘못되어 돌아가는 정치에 일침을 가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작고 약한 이들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쥐꼬리만한 세속 권력에 기대려 하고, 교회의 안보를 내세워 불의와 타협하지는 않았는가. 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험담하고, 입만 열면 '십자가' 운운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교묘하고 해괴한 논리로 회피하지는 않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진리나 진실보다는 권력과 재물과 학력에 모든 것을 걸려는 삶의 행태야말로 예수님을 벼랑으로 끌고 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아닐까.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면 우리가 주님의 자녀나 일꾼이라고 감히 불릴 수 있을까.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주님 뜻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참된 믿음을 잃어버렸거나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혹은 훼손하고 있다면, 주저 없이 예수께로 돌아와 그분에 대한 참된 신앙을 재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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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택된 이유
-손희송신부-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선택을 받아 특별한 보살핌과 은총을 받습니다. 하느님이 여러 민족들 중에서 유독 이스라엘만 뽑아서 총애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들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전부 멸망시키기 위해서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그들을 통하여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창세12,3 참조)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별한 사랑을 베푸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에 상응한 응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 응답이란 하느님만을 섬기면서 그분 뜻대로 서로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다른 백성들을 참된 행복의 근원인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주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면서 불의와 폭력이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도 완고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들려주신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그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집안이 평범하다는 이유로 그분의 비범성을 인정하지 않고 기적을 원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백성의 완고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 ‘쓴소리’를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제쳐 놓고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았던 사건을 거론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장받았다고 생각한다. 착각하지 마라! 너희의 불신과 완고함 때문에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당당하게 전해야 하는 예언자의 소명(제1독서)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나자렛 사람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대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 때문에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아들, 딸로 선택을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특별한 은총과 보호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에 감사하면서 응답해야 합니다. 그 응답이란 ‘믿음과 희망과 사랑’(제2독서)의 삶을 사 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의심과 회의, 낙담과 절망, 무관심과 이기심이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괴로워하고 힘들어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을 굳건히 믿으면서 불굴의 희망을 간직하고 묵묵히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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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태환 수사-
시작기도
주님, 당신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1테살 2,13)
세밀한 독서 (Lectio)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를 읽으신 후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루카는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는 루카의 언급처럼(4,14) 그분은 하느님 은총의 능력으로 말씀하시는 분으로서 이사야서가 말하는 바로 그 카리스마적인 분입니다. 이 은총의 말씀에 사람들은 그분을 좋게 말하며, 놀라움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도 나타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는 이 애매모호한 군중의 태도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들 마음 안에 일어나는 것을 꿰뚫어 보시며 그들의 더욱 근본적인 내면을 밝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속담을 들면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신 말씀하십니다.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보아라.” 눈앞에서 행해진 놀라운 기적이 아니고서는 여기에 단지 요셉의 아들이 있을 뿐이라는 자신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속내가, 냉소와 비판이 가득한 반대가 이 말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부정적인 태도의 근본적인 성격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 구절을 예언자가 인정받는다는 긍정적 차원을 언급하는 병행구절인 마르코복음 6장 4절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과 비교하면 루카가 예수님에 대한 반대를 확연히 강조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반대의 문맥에서 볼 때 사람들의 기적 요구는 심지어 ‘네가 종말론적 구원자라고 자처하지만 네 자신이 누군지나 봐라!’라는 모욕으로까지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대 앞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운명을 반대받는 예언자들의 운명과 동일시하며 당신이 받으신 그 초라한 환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를 예로 드시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들도 불신으로 인해 예수님을 통해 내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와 적개심에 가득 차 예수님을 죽이려는 행동으로 하느님 은혜에서 벗어난 자신들의 처지를 도리어 더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반대는 당신의 생애 동안 지속될 것이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룰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께 했던 그 비슷한 모욕을 또다시 듣게 될 것입니다. “남들을 구했으니 자기도 구해 보라지.”(루카 23,35 참조) 나자렛에서처럼 거기서도 예수님은 별 볼 일 없는 가난한 모습으로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길, 하느님의 길을 가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라는 최상의 반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부활하신 분으로 여전히 우리와 함께 당신의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아멘.
묵상 (Meditatio) 진리의 사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예상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참된 선익을 위해 그들 마음속에 숨겨진 생각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된 일꾼으로서 그분만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하느님께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얼마나 그분의 모습에 일치해 있는지요? 또 너무나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을 일상에서 알아보고 있는지요?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지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아가는지요? 우리 형제들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엄을 발견하고 있는지요?
기도 (Oratio) 주님, 저희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어 저희와 함께 계시는 당신을 알아 뵙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소서!(루카 24,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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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인의 복음 선포"
-홍승모신부-
오늘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께서 하신 첫 연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포하신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루카 4,23).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는 이런 반응은 그들이 주님에게 원하는 바가 다름 아닌 기적과 같은 표징이라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차별화된 무엇인가를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내면에는 자신만을 우선시하는 마음, 더 나아가 자신만을 위해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편협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구미에 당기는 바람들을 들어줄 수 있다면 믿어 보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나타나엘이 처음 주님에 관한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과도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사람들의 이런 부정적 반응은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께서 하신 첫 복음 선포 연설이 실패한 듯이 보이게 합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나, 이방인이었던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 관한 주님 말씀은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을 극에 달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나서 주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주님의 공생활 시작과 같은 첫 데뷔 연설이 실패하고 만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더욱이 주님은 왜 이런 방법으로 첫 데뷔 연설을 시작하셨는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바를 주님께서 반드시 만족시켜주고 채워주셔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주님을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잘못된 바람과 기대는 자신의 생각 속에 주님을 설정하고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하게 합니다. 자신 감성에 맞는 하느님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유혹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실패를 무릅쓰고 복음 선포자가 진정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다고 봅니다. 복음 선포자는 사람들의 무조건적 기대와 필요에 따라 주님을 끼워 맞추는 유혹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독한 유혹은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내면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방해물입니다. 외적 성공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복음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7.19). 우리는 스스로 반드시 무엇인가 이뤄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집착 때문에 두려워하고 떨곤 합니다. 잘해야 한다는 욕망이 실패하는 것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들려주신 저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마음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입니다. 복음 선포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 체험을 통해 주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듯,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립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때의 것들을 그만둡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은 결코 실패한 복음 선포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신앙 성숙을 위해 실패한 듯이 비춰질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외적으로 무엇을 이루거나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주님 자유와 사랑에 함께 동참하기를 더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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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원조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손용환신부-
오드리 헵번과 2000년의 사랑
오드리 헵번(1929~1993)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우리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인형 같은 외모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깡마른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의 사진을 떠올립니다. 그녀는 두 번의 이혼으로 사랑의 배신을 경험했고, 말년에는 암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니세프 친선대사를 자청해서 20여 개국을 방문하며 도움이 필요한 굶주린 아이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들에게 남긴 글은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줍니다.
“매력적인 입술을 갖고 싶으냐? 그러면 친절하게 말하여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냐? 그러면 사람들 속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여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냐? 그러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으냐? 그러면 하루에 한 번이라도 아이들이 그 머릿결을 어루만지게 하여라. 균형 잡힌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싶으냐? 그러면 네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걸어라. 생기 있게 살고 싶으냐? 그러면 물건뿐 아니라 사람도 새로워져야 하고, 재발견해야한다. 존경받는 삶을 살고 싶으냐? 그러면 어떤 사람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생명 있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여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으냐? 그러면 너 역시 도울 수 있는 손을 갖고 있음을 기억하여라. 아들아, 나이를 먹으면 너도 알게 된단다. 우리가 두 개의 손을 가진 이유는 한 손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나머지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것임을.”
그렇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젊음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사랑의 마음으로 살았기에 그녀가 진정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부가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고향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왜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을까요? 사람들이 부분을 보고 전체를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듣고도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맞습니다. 그분은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입니다. 그분은 요셉의 아들이었지만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에게 최상의 기적을 원했습니다. 마치 자기 자녀들에게 나무랄 때에는 누구누구보다도 못한 가치 없는 아이로 만들어 놓고, 그 아이에게 바라기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원하는 부모들처럼 말입니다. 부분을 가지고 전부를 무너트린 사람이 최고의 결과를 바란다는 건 모순 아닐까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뜻한 대로 되지 않자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몹니다.
요즘도 예수님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랑이신 예수님을 거부할까요? 예수님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2000년 전의 모습으로 가둬놓지 마십시오. 그것이 그분을 부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분을 지금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십시오. 그분의 손길이 필요한 모든 이방인들에게 우리의 손을 내미십시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들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빵이 필요한 이에게 빵을 주고, 사랑이 필요한 이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그것이 그분을 온 세상에 완전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행하신 2000년의 사랑이 됩니다. 빵을 주고 싶어도 몇 개밖에 안 된다고요? 그러면 그것을 5000일 동안 매일같이 하십시오. 매일 100원의 기금을 5000일 동안 모아 기아 돕기를 하십시오. 그러면 5000일의 기적을 행할 수 있답니다. 한 번의 많은 헌금보다는 평생의 작은 헌금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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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 찾기
-안성철 신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도회에 들어와 살아온 지가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이러한 세월을 지내오는동안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과 신중함은 사라지고 이제는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새로운 것도 없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던 수사님들도 그냥 다 허물 많은 인간으로
보일 뿐입니다. 물론 저도 그 안에서 예외는 아니겠지요. 그래서 수도원에서 피정 강의할 때가 참 힘듭니다.저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제 삶을 훤히 다 아는 수사님들께 훈화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같은 울타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서로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기에 실망하고 그로 인해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를 하찮게 여길 때도 있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나하고 잘 맞지 않는 형제,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형제에 대해 어떤 사람은 그를 아주 좋아하고 칭찬을 합니다.아무리 요모조모 뜯어봐도 칭찬할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은 그 형제를 칭찬하고 좋아하니 참으로 희한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저는 그 형제를 잘 알지 못하나 봅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 형제의 참모습을 볼 눈이 없어 편견에 사로잡힌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탄복하면서도 그분이 자라온 환경과 배경을 알고있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님께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도 그저 좋은 말이라고 여길 뿐, 그 말씀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듣고 마음에 새기는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분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인성만 볼 수 있었지 그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성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완전한 하느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한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보여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볼 눈이 없고 깨달을수 있는 열린 마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겠지요.
예수님 이전에도 예언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는사람들에게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하느님께서는 기적을 허락하셨습니다.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미워하시거나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럴만한 믿음과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 내가 늘 보아왔고 인간적인면에서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들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내 가족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 안에서 존경과 사랑과 일치가 나올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가까이 있는 사람들 안에 숨겨져 있는 영적인 보화, 하느님께서 그들
에게 나누어주신 그분의 선물,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오늘은 내가 그토록 이해하지 못하고 하찮게 여겨왔던 사람들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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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 기도 하느님, 오늘 하느님의 자유로운 구원계획을 우리 삶 안에서, 이웃의 삶 안에서 식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열린 마음의 침묵을 주십시오.
독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과 심각하게 갈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예수님은 미래의 사명과 활동 계획을 소개하기 위해 이사 61, 1?2을 읽은 후, 바로 짧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에 놀랍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예수님이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아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고대해 온 메시아가 요셉의 아들일 수 없고, 절대로 요셉의 아들이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의 닫힌 마음과 편견 앞에서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당신 사명이 소외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잘 알려진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사용하십니다(루카 4, 25?27).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엘리야는 이방인인 사렙타 과부에게 보내졌고(1열왕 17, 8?16), 엘리사는 많은 이스라엘의 나병 환자에게 가는 대신 시리아의 한 이방인을 치유하도록 파견 되었습니다(2열왕 5, 14). 이 이야기는 앞서 예수님이 봉독한 이사야서 말씀(루카 4, 18?19)을 해석하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고 하신 예수님의 선포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여기서 루카가 말하려는 것은 동족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한 하느님의 약속에 이방인도 유다인도 마찬가지로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루카 4, 25?27에 소개된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방인을 향한 복음 선포의 시작은 바로 예수님 자신한테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루카가 나자렛 회당의 설교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점입니다. 루카복음서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한 계약의 약속을 성취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시작하여(1, 17; 1, 54?55, 72?75) 모든 민족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하라는 초대로 끝나는데(24, 47), 여기에는 유다인과 이방인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혈연이나 율법 준수가 아니라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될 것입니다(루카 8, 15).
복음의 수취자가 자신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라는 격분한 나자렛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 벼랑까지 끌고 가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4, 30). '떠나가셨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위급한 순간을 피해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거나 유다인들에게 거부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적대감에도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계속 가신다는 것,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파견된 분으로서 그 목적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갔다는 의미입니다(4, 43). '떠나가셨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된 그리스어 동사는 실제로는 이미 끝나버린 단 한 번의 과거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반복되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루카복음서 전체 안에서도 '떠나가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길, 결국은 그분을 운명의 도시 예루살렘에 이르게 하여 죽음에 넘겨지고, 승천하여 아버지에게 올라가 영광에 이르는 그 길, 그분을 위해 마련된 하느님의 계획과 연결되는 말입니다(4, 42;7, 6.11;9, 51.52.53.56.57;13, 33;17, 11;22, 22.39;사도 1, 10?11). 루카 안에서 이 동사는 자주 나오는데(51번) 루카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소개하는 중요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루카에게 예수님은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진 분입니다(루카 9, 51).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 33) 루카 4, 25?30에 나오는 유다인들의 복음 거부와 이방인들의 받아들임이라는 주제는 루카와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를 예고합니다.
성찰 오늘 본문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구원계획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폐쇄된 사고방식을 상징합니다.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성경 첫머리부터 설정된 하느님의 관점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세 12, 1?3)에 충실한 분이며,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이스라엘도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로마 9?11장).
기도 "주님, 당신은 저를 에워싼 방패, 저의 영광, 저의 머리를 들어 올려 주시는 분이십니다."(시편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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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30대 초반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허리가 좀 좋지 않았었지요. 병원에 가면 별다른 증세는 없다고 하는데, 허리의 통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의사는 아니지만, 진맥을 잘 보신다는 어떤 형제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형제님께서는 저의 진맥을 봐주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이 상태라면 나이 40이 채 되기 전에 풍(중풍(中風)) 맞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형제님께서는 저의 증세에 대해 조목조목 이야기하시면서 풍을 맞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저의 집안 중에서 풍 맞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거든요. 더군다나 나이 들어서도 아니라 이렇게 젊은 나이에 풍을 맞는다고 하니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이 형제님의 직업도 의학과는 상관없는 태권도 관장이라는 점도 저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계속해서 몸에 이상한 징조가 보이면 ‘혹시 풍이 오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나이 40이 넘어간 상태에서도 아주 튼튼한 것을 보면, 그 형제님의 말씀이 확실히 틀린 말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 형제님의 말을 잊지 못하고 몇 년 동안 신경 쓰며 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말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눈에 확 들어오는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는 분명해집니다.
다른 이들에게 힘을 빼는 말이 아니라 힘이 되어주는 말을,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끔 만드는 말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미움과 질투의 말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해야 하며, 슬픔과 절망의 말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힘이 되어주고, 긍정적이며,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사랑의 말만을 하셨습니다. 그에 반해서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어떻게든 흠집 내는 말에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오늘 복음만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렇게 잘못된 말을 하는 사람들의 결과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지요. 즉, 부정적인 말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 가장 으뜸이며,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이 사랑을 말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지혜는 지식을 능가한다(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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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늘 함께하시도록
-조명연-
어느 교도소에 교화를 담당하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죄수들을 매일 찾아가면서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늘 반갑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자 한 죄수가 “아니 맨날 얼굴 보면서 왜 인사는 또 하고, 또 하는 거요? 짜증나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는 “어제 내가 본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고, 오늘 본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오늘의 당신입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당신이 반가워서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하는 것입니다” 라고 답변하셨다고 하네요. 신부님은 이렇게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바라보았기에 매순간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시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던 병자, 세리, 창녀들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품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따르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소외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폐쇄적인 사람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시도록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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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세웠다
-김찬선신부-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미야를 사람들 앞에 세우듯이 나를 세우셨다고 하십니다. 주저앉아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안주하던 나를 일으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두렵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안주하고 싶은 나를 일으키시는 것이 싫은 것은 물론이고 얼마나 싫은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일으키시는 주님의 힘이 웬만하며 버팅기고 싶지만 워낙 감당할 수 없어 주님의 힘에 의지하여 일어섭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삼으셨듯이 나를 예언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주장밖에 발설하지 못하던 나를 주님의 예언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싫고 그런 말을 하면 벼랑까지 몰고 가 거기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두려워 도망치고 싶지만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도 지엄하여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어섭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너를 세웠다.” 주님은 나를 예레미야처럼 민족들의 예언자로 삼으신답니다. 나의 방이 너무 좋아 방 밖으로 나가기도 싫고,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은 더더욱 싫은 나를 민족들에게(ad Gentes) 가라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나를 시돈 지방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 엘리야를 파견하시고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사랑이 좌우되는 나를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도 사랑을 실천한 엘리사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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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판 불변의 법칙(?)
-전삼용신부-
몇 년 전에 한 번 술을 끊은 적이 있었는데 전화해서 아버지께 술을 끊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믿지 않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술 끊었으면 나도 끊겠다.”
아버지께서도 술을 끊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너는 절대 못 끊는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8개월 정도 끊었다가 못 참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판단이 옳으셨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들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결국 사람은 안 바뀐다는 조금은 비관적인 목소리입니다. 이는 아마도 바뀌기를 기대했던 어떤 사람이 끝끝내 자신을 바꾸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아서 실망하였고 또 그런 실망들이 반복되어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는 또 “난 그렇게 생겨먹었어!” 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바꾸는데 주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한 번 소년원에 가서 학생들 고해성사를 준 일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중학생이었는데 때려서 친구를 죽게 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소년원에 들어와서 종교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예상대로 그 아이들 대부분은 가정환경이 안 좋게 성장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부모중 한 분이 안 계시거나 두 분 다 안 계셔서 사랑해주고 돌봐줄 사람이 없이 컸던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이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환경이 그래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자랐으니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판 불변의 법칙은 어쩌면 매우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원판 불변의 법칙을 거슬렀던 많은 예들이 나옵니다.
창녀였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든 죄인이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뵙는 성녀 중의 성녀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몸을 파는 사람들도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판도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처음에 그리스도교 사람들을 잡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악독한 사람이 이방인의 최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빈 라덴이 비오 성인이나 마더 데레사와 같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오로가 변화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님을 받음으로써 가능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바오로의 원판도 하느님을 만나면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난 예수님이 뜬금없이 당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시는 것을 듣고 '목수 요셉의 아들이 미쳤나?' 생각합니다.
몇 달간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동네 총각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십 년 동안 멀쩡히 살았는데 갑자기 집 뛰쳐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이상한 말만 해 대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자렛 사람들은 원판 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수의 아들 예수가 예언자나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믿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엘리야와 나아만의 예를 들며 예언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하느님의 예언자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삼년 반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하셨는데 그 때 엘리야는 시돈지방, 즉 이방인 지방 어느 과붓집에 피해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장수였는데 문둥병에 걸렸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녀의 말을 듣고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를 찾아왔었습니다. 엘리사는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고 나아만에게 사람을 보내어 요르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처음엔 기분 나빠하다가 나중엔 요르단 강에 들어가 문둥병을 깨끗이 고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한 분 뿐임을 깨닫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서 환영받지 못하였고 이방인들에게 복이 돌아갔듯이 지금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똑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분이 치민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뚫고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예언자는 비수 같은 말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사랑하는 상대가 변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언자는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언자가 떠나면 그들은 복을 스스로 차버렸다는 것을 떠난 뒤에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주신 두 예언자는 비유를 넘어서 하나의 예언이 됩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예언자였지만 이사라엘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엘리야까지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니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에 있을 수 없었고 이방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죽이려 하지만 조금 있다가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엘리야가 이방 마을로 갔던 것처럼, 또 지금처럼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떠나시던 것처럼, 예수님의 교회는 이스라엘을 떠나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결과는 무엇입니까? 삼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았듯이 예수님께서 떠나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에는 성령의 생명수가 떨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있던 과부의 집에서는 빵,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 또 기름, 즉 성령님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나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일 보던 요르단 강에 그것도 일곱 번이나 자신을 담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나아만은 결국 예언자가 보낸 이의 말을 믿고 문둥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요르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는다는 이야기는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일곱 가지 방법인 칠성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 그 은총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였지만 이방인들은 마치 엘리사가 보낸 사람만 보고도 나아만이 그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파견자들의 말만 듣고도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갔던 시돈, 즉 사렙다 마을이 바로 바티칸이고 나아만이 들어갔던 요르단 강 물이 바로 칠성사가 행해지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풀무 불에서 방금 나온 시뻘건 쇳덩어리와 같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머리까지도 물컹물컹하다고 합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혼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기 때의 교육이 평생을 갑니다. 그 때 낫을 만들 것인지 호미를 만들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 굽혀놓으면 점점 굳어져서 다시 그 모양을 바꾸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 모양이 잘 못 잡힌 아이들은 커가면서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크게 바뀔 수가 없게 됩니다. 점점 열기가 식어가면서 겉만을 더 날카롭게 혹은 덜 날카롭게 다듬는 것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라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바오로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뜨거운 불로 제자들에게 내려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180도 바꾸어서 용맹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만드셨습니다. 낫이 호미가 되고 호미가 삽이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다시 녹여서 처음부터 새로 만들면 됩니다. 우리 자신이 확 바뀔 수 있으려면 성령의 불 안에 들어가 꼼짝 말고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가 회개를 한 것도, 막달레나가 회개를 한 것도, 소년원의 아이들이 고해성사를 눈물로써 보는 것도 이 변화를 믿지 못한다면 나자렛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남고 말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어!', '난 원래 그래!'. 이런 말들은 이제 천주교 신자라면 하면 안 됩니다. 정해져서 못 바꾸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성령의 풀무 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얼마든지 새로 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변화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대장장이이십니다. 성령의 불로 우리를 녹여서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 전엔 어떤 모양이었든지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의지입니다.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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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도소에 교화를 담당하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많은 죄수들을 선교하는 데 일생을 비치셨죠. 그런데 이 신부님은 죄수들을 매일 찾아가면서도 매일 처음 본 사람처럼 반갑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고, 늘 그 사람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죄수 중 한 명이 물었습니다.
“아니 맨 날 얼굴 보면서 왜 인사는 또 하고, 또 하는 거요? 짜증나게....”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어제 내가 본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고, 오늘 본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오늘의 당신입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당신이 반가워서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바라보는 신부님이기에 매순간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거든요. 그래서 당시의 부정적이라고 지칭되었던 사람들인 병자, 세리, 창녀 들을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과 직접 대화하셨고, 그들의 손을 직접 잡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이러한 모습을 따르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소외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나와 상관있는 사람,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베푸는 마치 2,000년 전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폐쇄적인 모습이 가득한 곳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자신들과 똑같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모습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고 복음서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직접 사람들 한가운데로 오셨지만,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그 가운데에 도저히 있을 수가 없으셨던 것이지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는 복음말씀. 이 말씀이 지금 우리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즉, 주님께서 계실 자리를 우리가 없앰으로써 주님을 쫓아내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땅에는 아직도 소외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 우리 본당 공동체 안에서도 얼마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들을 위한 조그마한 관심, 작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몰아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쫓아내면 정말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으로 떠나십니다.
주님께서 한가운데를 걸어 나가시는 그런 곳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이 시대에 소외받는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기도하면서 오늘도 힘차게 생활합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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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전함>
- 양승국신부-
오늘 저녁 선배 신부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편이 애매해서 택시를 탔습니다. 개인 택시였는데, 기사님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셨습니다.
꽤 무료하셨던지 제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요즘 통 매상이 안 오른다는 말씀, 오늘 나온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는데, 6,000원밖에 못 벌었다는 말씀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업택시가 아니기에 사납금에 쫒기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는 말씀에 제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이런 요지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최근 막내딸이 취직을 하게 되서 자식 농사를 다 끝냈다. 아들 하나 딸 둘 다 대학 나오고, 다들 일류 기업체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월급 받는 회사에 다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막내딸이 마지막으로 취직하고 나서, 섭섭한 일이 한 가지 생겼는데, 가족들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인도 가게를 운영하다보니 거기에 매여서 정신이 없고, 아들딸들도 다 이제 월급타고 제 몫을 하니 기쁘긴 한데, “아빠, 용돈 좀 올려줘요”, “아버지, 신발이 다 떨어졌는데요.” 이런 말을 못 들으니 마음이 너무도 허전하다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다들 바쁜 관계로 자신은 완전히 왕따 취급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아직까지는 가장 노릇을 하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뭔가 역할을 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것이 그렇게 슬프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별 도움이 안 된다”, “왕따 당했다”는 말처럼 섭섭하고 슬픈 말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왕따 당한다는 것은 필설로 표현 못할 서러움과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오늘 루가 복음사가는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는 예수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성장한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서 당한 따돌림과 거절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소외감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저지른 과오 중에 가장 큰 과오는 가장 값진 보물이 자신들 손 안으로 굴러들어왔음에도 그 보물을 절벽 밑으로 멀리 던져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해왔던 메시아, 자신들을 죄와 악에서 구해줄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코앞에 나타났음에도 그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들이 바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식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들 각자 마음에 존재하고 있던 거짓 메시아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유다인들은 자신들 입맛에 맞는 가짜 메시아를 각자 안에 간직하고 있었기에 참 메시아 예수님께서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몰라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극히 현실적 욕구나 사리사욕만을 끊임없이 충족시켜주는 해결사 메시아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 앞에 나타난 메시아는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아니었기에 모두들 예수님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제 안에도 역시 마음 깊은 곳에 참 메시아를 몰라보게 시야를 가로막는 거짓 메시아가 존재함을 깨닫습니다.
서원을 통해 이제 오직 하느님 영광만을 위해 살기로 서약한 수도자이면서도 2000년 전 유다 백성들과 별반 다름없이 나만의 만사형통과 나만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시는 가짜 메시아를 따라가고 있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이웃들 고통 그 한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비정함을 깊이 반성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탄생을 통해 이미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와있지만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아둔함을 깊이 반성합니다.
법정 스님 말씀처럼 “모든 종교의 핵심은 깨어있는 맑은 영혼”입니다. 언제나 깨어있는 마음, 맑은 영혼 상태로 지금 이 시대 어디에 예수님이 현존하시는지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이번 한주가 되길 바랍니다.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부수적인지를 식별하면서 언제나 겸손하게 새 출발하는 갓 출가한 수행자 마음으로 세상 앞에 서는 우리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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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사명과 그 증거
- 조욱현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언자의 사명과 그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당신의 예언적 사명을 천명하신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예언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구태의연한 삶을, 즉 안일주의에 빠져있는 삶을 들쑤셔 피곤하게도 다른 삶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길로 방향전환을 시키러 오는 ‘불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것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항상 박해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고 침묵을 강요받기도 한다. 참된 예언자는 항상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나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변화되어야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어렵다고들 한다. 때문에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를 제거하거나 침묵케 함으로써 이미 자신 안에 일어나기 시작한 자신의 의식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다고 여긴다.
제1독서: 예레 1,4-5.17-19: 나는 너를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예언자는 항상 ‘불편한 존재’이다. 항상 하느님의 새롭고도 어려운 요구를 사람들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에게 폭력을 가하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예언자는 이러한 종교적 사회적 한계성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과 함께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아가 그런 경우이다. 하느님께 소명을 받고 그는 심리적으로 약화되고 불안하여 처음부터 그 소명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용기를 주신다.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나의 백성에게 일러주어라. 내가 시키는 말을 모두 전하여라. 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다가 그들 앞에서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리라.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사제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담처럼 세우리니,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17-19절).
복음: 루카 4,21-30: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 오신 분이시다
이렇게 예언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에 나오는 나자렛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그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자렛의 이야기에서 우선 조금 전까지도 별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던 한 사람, 예수가 너무나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된다는 것에 질투심 같은 것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두 가지 사실, 즉 예수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비천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자신을 이사야서 61,1-2의 말씀을 실현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21절)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눈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과 또 당신의 생활과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 이상의 어떤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게된다. 인간이시면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 신비 앞에 혼란을 거듭할 것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께 적개심을 갖는 것이 지방색을 드러내는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 같다.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23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나자렛에서는 하지 않으시고 가파르나움에서 행하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있는 듯 하다. 그러나 기적은 무슨 광고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신앙을 갖고 있거나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하나의 표징으로 보여주시는 절대로 자유로운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다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다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며, 더 이상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1고린 12,31-13,13: 사랑의 찬가
바로 이 예언적 증거가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에서 말하고 있듯이 모든 은총 중의 가장 위대한 은총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은총인 ‘사랑’을 통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12,31)라고 하면서 사랑의 찬가를 노래하신다(13,1-13).
우리들이 세상에 선포해야할 사명이 있는 그 ‘불편한’ 예언적 사명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사랑이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불 속에 우리 몸을 던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투쟁과 묵상은 다만 하나의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기도를 한다면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당신이 착취당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투쟁한다면 그것도 역시 사랑 때문이다”(1974. 8. 30. 떼제의 둘째 편지).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분의 변화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해야할 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힘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힘과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단단히 방비된 놋담 처럼’ 우리 자신을 세울 힘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용기를 갖고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은폐될 위기에 처해있는 가치들을 재확인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예언적’ 능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법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태아의 생명에 관한 권리, 혼인의 비신성화, 외설 문학, 보편화된 폭력, 쾌락과 돈에 대한 발작적인 추구로 생명을 경시하는 세태를 생각하며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항상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이루어 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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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자
- 배광하 신부-
▶ 루카 4, 21~30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 사랑, 그 영원한 약속
서른 살에 이미 독일 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었던 슈바이처 박사는 그때 철학과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던 학자였습니다. 또한 바흐 음악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세상의 잘나가던 모든 명예를 등지고 뒤늦게 의학을 공부해 아프리카 밀림의 원주민들을 돕기 위해 봉사의 삶을 선택합니다.
그는 인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고 살리는데 앞장섰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 밀림에서 생명과 사랑에 대하여 이같이 썼습니다.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의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지녔기에 존중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보호하고 높이는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나는 살아갈 때 하나의 나뭇잎이라도 공연히 따버리지 않으려 하였다. 한 떨기의 들꽃도 그냥은 꺾지 않는다. 기어 다니는 벌레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여름밤 등불 아래에서 일할 때 많은 날벌레들이 불꽃에 날아들다가 떨어져 책상 위에 뒹구는 것을 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무덥더라도 창문을 닫고 방안에 앉아 있는 쪽을 택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하여 한 마디로 논하시기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 1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오늘 사랑의 찬가를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약속인 사랑을 가장 높은 가치 위에 두고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의 선물인 사도직분, 예언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위에 더 큰 은총의 선물을 열심히 구하라고 하면서(1코린 12, 28~31 참조) 가장 뛰어난 길로 사랑의 길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같은 사랑의 길은 천사의 언어나 모든 신비와 지식을 뛰어 넘으며, 산을 옮길 큰 믿음은 물론, 자신의 몸을 모두 내어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힘주어 가르칩니다.(1코린 13, 1~3 참조) 그리고 지고한 사랑의 자세에 대하여 강조한 뒤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 13)
▶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
사랑은 결코 이기적이거나 편협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구원관이셨습니다. 그것이 이 지상 공생활 동안 끊임없이 추구하셨던 예수님 삶의 목표이셨습니다.
세상은 넓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리 넓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주 나만 알아주어야 하고, 나만 돋보여야 하고, 내 가족, 내 친척, 내 고장, 내 나라, 내 종교만을 강조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편협함에 맞서 싸우십니다. 이방인 여인 사렙타 과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경우를 들어가시며 구원은 이미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그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작고 편협된 마음에는 구원이 없으며, 그러할 때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는 분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폭력 운동의 선구자인 인도 독립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도 자신들을 괴롭히던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자신은 힌두교인 이었지만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온 몸으로 살았던 성인이었습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빛이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리스도를 믿는 박해자들인 백인 형제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대들이 나를 투옥해도 나는 그대들을 사랑합니다.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아이들을 위협해도 그대들을 사랑합니다. … 우리의 스승님은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깃발은 하느님이시니 결국 어느 날엔가 사랑이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우리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세계에서 차별받고 사는 모든 민중의 승리이므로 우리는 두 배의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시작부터 넓은, 보편된 마음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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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지켜야할 변치않는 권위
-이기양 신부-
교구 사제 인사에 지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출신지 본당으로는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성당 사정도 잘 알고 많은 신자들과도 친분이 있어서 출신지 성당이 사목을 하기에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좋은 시절에는 누구나 잘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과 사목자 간에 의견이 대립되고 갈등이 빚어질 때 인간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바로 그 점이 장애요소로 작용합니다. 사목자로서의 전문적 안목과 고민을 거듭한 숙고에 의해 결정된 사항도 인간적 경험과 친분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출신지 본당으로는 사제를 보내지 않는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겪었던 일 같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고 그 권위에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금의환향하듯이 오랜만에 고향 나자렛을 찾으셨습니다.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권위있는 말씀에 탄복을 하면서도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나자렛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청년의 가르침을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처럼 속된 사람들의 눈엔 구원자 예수님에게서도 그저 인간 예수만이 보일뿐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런 배타적 행동을 보시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발길을 돌리시지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시대나 사제의 출신지 본당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성당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녀는 인간적 능력에 따라 그 직분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계셨기에 지금의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는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고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뽑아 세우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해서 또 출중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또 그 부르심에 모든 것을 다 놓고 응답했을 때 비로소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제는 개인 능력이나 판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과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이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삶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성직자와 수도자인 것이지요.
흔히 우리 시대를 권위 부재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랜 독재정권 시절을 겪은 사람들은 그 후유증으로 권위 자체에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권위는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의 권위가 없으면 그 가정은 흔들리고 집안이 무너집니다. 선생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교육이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의사선생님의 권위를 환자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병 치료는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위를 국민들이 우습게 안다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권위는 반드시 지켜지고 존중돼야 하는 것입니다. 지켜지고 존중돼야 할 권위를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권위자 자신임은 물론입니다.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권위가 없는 성당은 신자들이 불행합니다. 물론 성직자의 권위는 복음적 삶에서 비롯돼야 하지요. 참으로 좋은 공동체는 신자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고 믿으며 그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를 깊은 뜻으로 마음에 담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이뤄집니다. 그 때 신자들은 행복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 또한 그런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에 성화해 더욱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우리는 복음적 공동체라고 이야기하고 바로 이런 공동체에서 기적은 이뤄집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뤄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이 그들에게 있었다면 나자렛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넘쳤을 것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사셨던 축복된 나자렛이었지만 속된 경험과 편견으로 길이 지속될 은총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 어떤 것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읽을 줄 아는 믿음과 혜안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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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 함세웅 신부-
지난 주일의 복음(루가 1,1-4: 4,14-21)은 루가가 기록한 성경(루가 복음과 사도행전)가운데 제 1편의 서두로 시작해서 예수님 안에 이루어진 구약 예언서의 완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복음(루가 4,21-30)은, 그 구세주 예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자연적인 반발 또는 무시당하는 과정을 그려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저것으로 변명하지 않으시며, 또다시 구약의 예를 들어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선민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다', ‘유태인이다'하는 자연적 기원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착한 뜻'과 ‘믿음'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유명한 격언이 된 말씀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구원사와 인간사에 있어서의 공통점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루가가 기록한 성경의 특징은 고대 희랍의 서간체 형식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당시 로마 제국의 고관이었던 테오필로에게 ‘기쁜 소식'을 그대로 알려 주어 그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신앙을 가지고 구원의 길로 들어오라는 초청의 내용입니다.
똑같은 문체의 서두가 루가복음의 제 2편인 ‘사도 행전'에 기술되어있습니다. 테오필로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공통적 견해입니다. 이러한 서두가 끝난 다음, 즉시 루가는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의 요한 세자에 대하여 언급하며 예수의 탄생 내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간 과정을 뛰어넘어 4장 후반이 우리가 묵상해야 할 내용입니다. 즉 ‘기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기쁜 소식'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모양으로 이루어졌고 이루어질 것인지를 말해 주려 합니다. ‘기쁜 소식'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약속되었고(창세기 3,15),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선포된 것입니다. (이사야 61, 1-12)
사실 창세기로부터 구약 47권의 모든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 모든 역사적인 사건, 인물, 예언을 언급하고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구원사의 주인공인 ‘예수' 즉 ‘메시아'를 그리기 위해서 열거된 것입니다. 그 구약의 기다림의 주인공이 이제는 실현된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 주인공은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무대를 위해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관중, 즉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은총과 사랑을 받는 기준은 이제는 더 이상 혈통적, 종족이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하느님이 사람으로 되신 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탄생이, 인간의 생애가, 인간의 고통이, 삶의 과정이, 인간의 죽음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고 실증하기 위해서 ‘내가 걷고, 우리 모두가 걷는 이 모든 어려운 인생살이의 과정'을 거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하느님의 놀라우신 계획, 교육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즉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실제로 보는 것이 더 낫다', 또는 ‘백 번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한 번 모범으로 실천해주는 것이 더 낫다'라는 이 진리를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는 왜 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하느님, 나는 왜 가난해야 합니까? 하느님, 어찌할 수 없는 이 인간사의 부조리는 무엇입니까? 하느님, 왜 나는 무시와 천대를 당해야 합니까? 하느님, 사랑하는 우리들은 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또 갈라지며 그리고 죽어야만 합니까?"하는 물음표가 달린 원성은 무한히 계속됩니다.
그것은 우리만의 원성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 사막과 광야에서 고통받았던 이스라엘, 바빌론으로 유배갔던 이스라엘,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원성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사랑하고 뽑았던 선민 이 었습니다.
그 원성에 하느님은 해답을 주겼습니다. 예수를 보냈습니다. 그 예수는 갓난아기로 탄생되어, 우리와 똑같은 어려운 생활을 하였고, 결국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매어 달린 예수! 그 예수는 우리의 모든 원성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고통을, 어려움을 그대로 수락하여 이겨낼 때, 그 예수는 부활의 예수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스라엘 백성은 미처 깨닫지 못했고, 신앙인인 나도 가끔은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 ‘이웃을 사랑해라', ‘기도를 잘 바쳐라' 등등, 웃어른들의 올바른 가르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웃어른들이 착한 사람이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기도조차 바치지 않을 때, 자녀들은 오히려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로써 신앙이 무엇인지를 제 3자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신앙 때문에 어리석은 이들의 비웃음을 받는다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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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받는 예언자
-강길웅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용기있게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언자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부패되어 있으면 부패된 것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진리를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고통이 여기에 있었으며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예레미야가 소명받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BC 600년대에 활약했던 이스라엘의 대 예언자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 나라는 멸망되어 가고 있었고 사회는 썩어 부정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가 걸어야 할 길은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백성을 회개시키고자 하는 예레미야의 노력이 오히려 비난과 오해를 받아서 감옥에도 갇혔으며 도망도 다녔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절까지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는 핑계도 변명 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박해와 고난 속에서 평생 을 외롭게 걸어가야 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의 길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모세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으며 아모스나 호세아도 그랬고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걷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신 자들만이 그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예언자가 된 다는 것은 고달픈 길이면서도 또한 은혜로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와 꿈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마저도 고향과 동족들로부터 배척받았다는 사실이 예언자 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빵을 좋아하며 기적을 좋아하고 명예와 권력을 좋아합니다. 자기들 동네에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나왔다 하면 환영을 합니다. 하다못해 고시에 합격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해도 동네의 자부심이 세워집니다.
사람들이 대체로 환영하는 것은 예수님이 광야의 유혹에서 다 배척하셨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빵을 약속하지 않으며 명예와 권력 을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것이면 그것이 사람들 가슴에 쓰든지 시든지, 용기있게 전파해야 하는 것이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언자들은 백성들의 반대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지난 주일 복음 내용의 연장입니다. 사람들 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감동되었으며 하느님의 성령이 그분 위에 내리신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자기들 고향에서 그만한 인물이 나왔다는 것에 큰 자랑과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한 인간의 조건을 봤을 땐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또한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구름을 타고 내려온 '사람의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곧 잘 하시던 기적도 자기 고향에서만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혜택 이 자기들 동네에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불만을 가졌으며 예수를 잘 안다는 자들이 예수님을 더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 의 빈정거림이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느님을 저버리고 벌을 받았는지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큰 모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들고일어나 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분을 벼랑으로 끌고가기까지 했습니다.
세상이 그 모양입니다. 올바른 소리를 싫어합니다. 사회가 썩어 있으면 더 그렇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 독재정권 시대를 경험하면서 시대의 예언자들의 용기가 얼마나 훌륭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독재자의 말로가 또한 어떠했는지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언의 직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교회가 가진 사명 중에 첫째 가는 것이 예언직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외치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부정에 물들지 않는 깨끗하고 양심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서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실로 배척의 연속이었습니다. 헤로데의 칼부림으로부터 십자가의 창끝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백성과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희생을 통해서 세상을 건지셨습니다. 당신을 죽인 그 세상과 백성을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희생, 용기를 배워서 예언의 직무에 참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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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받지 못한 예수님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
1. 복음이야기(루가 4,21-30)
예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셨습니다(루가 4,16-21).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신 것은 물론이거니와 친척들과 고향사람들 심지어 제자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은총의 말씀에 고향사람들 모두가 놀라면서도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고작 요셉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 “의사여, 네 자신부터 고쳐라”라는 속담을 들이대면서 가파르나움에서 하신 기적들을 나자렛에서도 행하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라는 속담을 말씀하시면서 이적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고향사람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마르 6,6).
기원전 9세기에 예언자 엘리야는 많은 이스라엘 과부들을 제쳐두고 오직 이방인 과부를 돌보았습니다(1열왕 18,7-16). 그 제자 엘리사 역시 많은 이스라엘 나병환자들을 제쳐두고 이방인 나병환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이렇듯 예수께서도 복음을 전하셨지만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배척한데 비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향과(24절) 동족을(25-27절) 경시하는 말씀을 하시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분을 도시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는 복음서 작가 루가의 구원사관이 담겨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 작가는 자신이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썼습니다. 본디 예루살렘에서 탄생한 원시교회의 신도들은 모두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먼저 유다인들을 상대로 전도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와 사도 바울로의 개심을 계기로 이방인들을 상대로 한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했지만 이방인들은 잘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족과 고향사람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으셨으나 이방인들과 타향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루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 안에서 교회의 미래를 올바로 바라보는 예언자적인 슬기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적인 예언의 정신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함께 수용해야 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것에 치우쳐 믿음 없이 교회를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충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오늘 복음에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맞고 있습니다. 과거의 부흥에 안주하지 말고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많은 지성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늘 새롭게 태어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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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어느 집 앞마당만 비추지 않는다.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 인간은 누구나 '내 것'을 갖기를 고집한다. 이것은 가끔 배타주의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나자렛 회당에서 야훼 하느님은 모든 인류의 하느님임을 말씀하신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곤경에 처한다. 나의 신앙자세는 어떤가?
1. 우리 신부님은 바람둥이야.
여자 신자들이 모여 앉아 부임해 온 지 1년도 안 되는 본당 신부님의 품평회를 한다. 제 나름대로 신부에 대한 견해를 거침없이 쏟아 놓는다. 그런데 어떤 신자가 "우리 신부님은 아무래도 바람둥이 같아!"라고 했다. 신자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는 신부에게는 치명타가 아닐 수 없는 말이었다. 거기엔 신학생 어머니도 함께 있었다. "이거 큰일이다." 槁底?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다그쳤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우리 신부님은 이 여자도 좋다, 저 여자도 좋다고 하시니 그렇지요."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신학생 모친은 "그야 본당신부님은 모든 본당신자들의 신부님이 신데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시고 다 잘해 주시는 것이 당연하지. 어떤 사람에게만 특별히 잘해주는 것이 문제지! 안 그런가?"하였다. 그랬더니 본당신부를 바람둥이라고 한 그 신자는 "그래도 그러니까 나는 싫던데요!" 하며 시무룩해졌다. 신학생 모친은 가만 있지 않았다. " '태양은 어느 집 앞마당만 비추지는 않는다'는 말도 몰라?" 그러자 모두 의논이라도 한 듯이 "맞아, 맞아, 그 말이 맞아!"하며 입을 모았다.
2. 예수님의 고향에서의 봉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에서 봉변을 당하신다. '목수 요셉의 아들인 예수'의 밑천을 훤히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파르나움에서 하셨다는 기적의 소문을 들었지만 긴가 민가 하였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어디 한 번 기적을 해보라고 요구하였다. 믿음은 없으면서 눈요기를 하겠다는 호기심의 발동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신다.
예수님은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적을 말하시면서,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방인 과부댁 뒤주의 밀가루를 많게 하고, 수많은 나병환자 중에 이방인 장군 나아만 만을 치유하신 기적들을 상기시키신다. 이 기적들은 불충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행한 것들이다. 이것은,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면 신분과 언어와 피부색을 뛰어넘어 누구나 거두어들이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고향 나자렛 사람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들은 모두 들고일어났고,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루가4,29)
3. 구원의 보편성(모든 사람들을 구원에로 부르신다)
구원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엔 야훼 하느님이 자기들만의 하느님인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중엔 이스라엘이 잘못을 저지르면 이방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벌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배를 경험하면서 이러한 깨달음은 더욱 깊어졌다. 후기 예언자 시대로 내려오면서 하느님이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라는 '보편주의'가 강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선포되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에도 "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 1,5)고 말씀하신다.
군에 있을 때, 대위 4명이 항상 함께 다녔다. 나는 하도 이상해서 "저 사람들은 왜 항상 함께 다니는데요?"하고 모시고 있던 신부님께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저 사람들은 사관학교 출신이라고 다른 사람들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고 저희들끼리만 다닌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부터 그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너희들과는 다르다."를 강조하며 못난 자존심을 내 세우는 그들에 대해 '삼가 조의(弔意)를' 표하고 싶었다.
같은 성(姓)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은 다른 동네보다는 항상 더 배타적이기 쉽다. 그리고 그런 곳은 늘 발전의 대열에서 밀려나고 후진 곳으로 남아있게 마련이다. 네 본당 내 본당을 살벌할 정도로 따지는 것이나, 교파간의 장벽, 지방색, 지역 감정 등 이 모든 것은 비뚤어진 특권의식이나 선민의식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옹졸하고 미성숙한 못난 짓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교회는 이미 제 2차 바디칸 공의회를 통해서 타 교파는 물론, "자기 탓이 없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은 우리들만의 하느님인양 착각하는 때가 많다. 2차 대전 때에 독일과 프랑스 교회는 모두 자기들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함으로 하느님을 난처하게 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가톨릭 신자라면 참으로 가톨릭(catholic)적인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확 트인 시야와 사고를 지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옹졸한 편가르기로 하느님을 욕되게 한 적은 없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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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약자로, 또 실패자로 죽어 가셨습니다. -서공석 신부-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서 몇 구절을 읽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서 행하신 은혜로운 일들을 요약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말씀들에 이어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탄복하였지만, 그들은 즉시 예수님의 출신에 대해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율사도 제관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은혜로운 일을 보았지만, 그것을 하느님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출신과 신분만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과 더불어 구약성서 열왕기에 나오는 고사(故事)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를 기근에서 구해준 이야기(1열왕 18,7-16)와, 엘리사 예언자가 시리아 사람 나만의 나병을 고쳐 준 이야기(2열왕 5,1-14)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이 예언자를 통하여 은혜로운 일을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에 사람들은 모두 분통을 터뜨리고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는 말로 오늘 복음은 끝났습니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분개한 것은 그가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예언서를 자유롭게 인용하고, 그들이 존경하는 엘리야와 엘리사 두 예언자를 거명하여 자기 자신과 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하고, 옛날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실천한 그 은혜로우심을 상기시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그런 예언자적 역할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분을 미워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분노에 괘념치 않고 당신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고을의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고을은 산 위에 있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무대는 나자렛이고 그 고을은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에 있습니다. 지리적 실제 여건을 무시하면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죽을 위험에 처한 무대를 산 위로 잡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의 골고타 산 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언자적 말씀과 행위를 처음부터 거부하였고, 그들의 분노와 증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가셨으며, 그 길은 결국 예루살렘 밖 골고타 산 위의 십자가에서 끝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소외되고 차별 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알리는 데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잘 지키면 상주고, 못 지키면 벌을 주는, 의로운 분이라고만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어온 하느님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교가 믿어온 하느님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버리고, 힘의 논리를 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면서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을 터인데”(마르 15,3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힘을 한 번 발휘해보라는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의지하여 살아 온 힘의 논리입니다. 하느님은 강한 자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온 인류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약자로, 또 실패자로 죽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발췌하여 나열하신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는 모두 약자이며 실패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약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죽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약자들과 함께 계신다고 믿으셨고, 하느님이 그들에게 하실 일, 곧 불쌍히 여기고 살리는 일을 실천하다가 강자인 유대교 기득권자들의 손에 잡혀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약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을 부르는 일뿐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하느님은 과연 약자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강자와 함께 계시지 않고 약자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느님은 힘으로, 이기고 빼앗고 사로잡고 억압하는 강자 안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가난하고, 사로잡히고, 억압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살리는 일을 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같은 실천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그분의 도움으로 강한 자가 되어 남을 억압하며 잘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강하고 부요하고 화려한 것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찾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외면하면서, 더 부요하게, 더 강하게, 더 화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마르 8,33 참조)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약자의 길입니다. 사랑은 강자로 군림하지 않고 약자가 되어 은혜로운 일을 행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고린토서는 사랑은 너그럽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시는 하느님,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혜택 받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작은 노력으로 큰 결실 얻기를 좋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유산으로 받아서 실천하는 자녀로 살겠다는 약속이 담긴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신앙인은 세례에서 이 세상의 허례허식을 모두 끊어버리고, 사랑하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생명을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우리의 사랑 안에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으뜸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비롯한 여러 어른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자랍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 주변의 약하고 실패한 이웃들을 사랑하여 그들이 살고 자라게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숨 쉬시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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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과 증오가 공존하는 거울
-박상대신부-
우리는 지난주일(연중 제3주일)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본격적인 연중주일의 시작이 연중 제3주일부터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실은 연중 제3주일에 봉독되는 복음들(가해: 마태 4,12-23/ 나해: 마르 1,14-20/ 다해: 루가 1,1-4; 4,14-21)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었다. 공관복음에 속하는 이 복음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보도하고 있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으로 말미암아 그의 공적 활동이 강제적으로 종료되자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에서 개시(開始)한 예수님의 공생활을 보도하고 있으며, 루가는 예수께서 자라나신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회당에서 행하신 설교를 복음의 서문과 함께 보도하였다. 아울러 루가는 ’지금 그리고 여기’ 라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과 공간개념을 도입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시점을 초시공화(超時空化)함으로써 서술적인 시공(時空)에 매어두지 않았음을 보았다.
오늘 연중 제4주일의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설교의 후반부를 들려준다. 후반부는 예수님의 설교(전반부)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을 시사하고 있다. 복음의 서두는 편의상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는 지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반복하였다. 이 반복은 이사야의 예언말씀이 예수에게 있어서 그만큼 중요함을 의미한다. 예수의 시대로부터 약 5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하여 선포된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58,6-7; 61,2)는 예언의 말씀이 이제 예수를 통하여 예수께서 계신 바로 ’이 시간과 이 장소’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언 속의 ’나’를 자신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이 성취는 과거의 실현(實現)이며 미래의 선취(先取)를 의미한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가 이 복음을 선포한다면, 이 또한 2,000년 전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성취된 것을 말하며,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성취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즉각적인 반응은 예수와 예수의 말씀에 대한 칭찬과 탄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반응은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반감(反感)으로 돌변한다. 예수께서 이사야의 예언 속의 주인공인 ’나’를 당신으로 자처하셨기에 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탄복했으나 곧 그들의 눈에 예수는 한낱 목수 요셉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반감에 예수께서 선수(先手)를 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운명이 구약의 엘리야(1열왕 17,7-16)와 엘리사(2열왕 5,1-14)의 처지와 비슷함을 시시하신다.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어 생활고에 허덕이던 많은 과부들을 제쳐두고 시돈 지방의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돌보았고,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환자를 제쳐두고 이스라엘을 찾아온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고쳐주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람’인 예언자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자렛 사람들도 이와 똑같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끝나자 사람들의 반감은 화를 동반한 행동으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예수를 동네 밖 산 벼랑으로 끌고 가서 밀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서 스스로 그들을 피해 자신의 길을 가셨다. 메시아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수께 대한 고향 사람들의 푸대접은 루가복음에서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 더 큰 호소력을 보인다. 루가복음이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시점에서 이 대목을 다루고 있는 점에 비해, 마르코와 마태오는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에서 개시한 공생활이 어느 정도 경과한 후에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여 푸대접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마르 6,1-6; 마태 13,53-58) 뿐만 아니라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아직 다른 곳에서 활동하신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23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 서술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복음의 서술이 모순적일수록 저자의 의도를 읽어야 함을 숙제로 생각해야 한다. 루가가 원전(原典)의 순서를 바꾸어 ’나자렛 설교’를 공생활 개시로 선택한 이유를 말이다. 하마터면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갈 뻔했던 나자렛 설교는 루가복음공동체의 초기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유다인들을 겨냥한 루가의 복음선교가 처음부터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 결과 이방인선교를 염두에 두고 복음을 저술해야 했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나자렛 설교’의 전반부에서 루가 고유의 ’시공개념’을 얻었다. 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예언자적 운명을 예감하면서 하느님나라의 복음에 대한 청자(聽者)의 호응과 반감, 열광과 증오가 공존함을 보았다. 오늘은 이 공존의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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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