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애 관한 시모음 7)
봄밤 /오성일
지금도 산지기라는 직업이 있는지
있다면 그거나 좀 해봤으면
그런 생각이 밀려오는 저녁
내가 산지기였다면
산막(山幕)에 흐릿한 남폿불을 걸어놓고
검푸른 침엽의 숲 위로 떠오르는 붉은 달을
아주 잘 지켰을 텐데, 생각하면서
제 맘 하나도 못 지키는 내가
달 지킬 생각을 하는
이런 우스웁고 황홀한 밤
봄밤 /박숙경
목련가지 끝에 백열등 여럿 내걸렸다
오리온자리와 초승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저 비행기의 순간은 얼마나 먼가 밤의 색깔이 짙어질수록 탄생의 속도가 빨라지는 저 별빛의 향기는 또 얼마나 아득한가 이소라의 노래를 흥얼거리면 나는 왜 서러워지는가 이 쓸쓸함은 어디에서부터 밀려오는가
나를 에워싼 너에게 마음을 허락하노니
저 깊고 푸른 어둠 속으로 사라져도 괜찮겠다, 봄눈처럼 그렇게 당신이 왔으면 좋겠다
봄밤의 연인들 /박은정
월식이 얼마나 길어질까요
가난한 애정 앞의 원숭이들처럼
사랑은 무기력하고 기교는 칼날처럼 빛나던 시간들
오늘의 잠은 더없이 단조로울 거예요
절반만 완성된 불행에 광을 내는 이들의 이름을 연인이라 부르자 꽃잎을 수의처럼 입고 뛰어가는 아이들
모든 것들이 몸을 감춘다 누군가는 사랑의 주기를 꽃으로 피우고 누군가는 이별의 주기를 꽃말로 지우기에
우리는 하나의 부레만으로도 너무 많이 울었다
바람도 없이
날아오르는 봄밤의 음성들
어디서 흘러들어 이렇게 뜨거운 귀가 되었나
꽃이 어둠을 통과하고 어둠이 꽃이 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들 온몸에 꽃을 그려넣던 혼백들이 늦은 사랑을 나눈다
봄밤 /백복현
세탁기가 초저녁을 돌리는 동안
새들 날개도 꽃그늘 속에서 돌아간다
잘 익혀진 바람이 창문을 기웃거리는 부엌의 시간
뭉쳐 있던 꽃물이
세탁기 날개를 타고
하얀 소창에서 풀리어 간다
그녀는 검은 창틀에 저녁을 세워 놓고
봄의 머리카락을 빗질한다
하루의 지문을 한 올 한 올 들추어낸다
지문 속 고기압과 저기압은
오늘도 팽팽한 줄을 놓지 않는다
어느 쪽을 잘라야 하는 걸까
겨울처럼 무딘 가윗날이
저녁의 바깥쪽을 가위질하기 시작한다
개짐의 핏물이 번지는 안뜰은
회전의 날갯소리에 어지럽기만 하다
빨랫줄을 타고 출처 없는 비밀이 뭉턱뭉턱
봄밤으로 흘러간다
건조기 속에서 돌아가는 잠꼬대도
잘 마른 입술을 타고 뜨락으로 풀리어 가는 밤
가위질한 저녁 모아 거울 앞에 세운다
단발한 봄밤, 풍문의 손톱으로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봄밤 /류경무
당신 생각나기는 할까
뭐니뭐니해도 그 봄밤
노릇하게 데워진 바람의 무릎이
세상 모든 창을 타넘는 봄밤
당신 이 언약 알기나 할까
막 뛰어내리고 싶은 망루에 서서
가끔 당신을 읽다가
가끔 당신을 덮다가
나 아직 한 번도 가지지 못한 당신
내 코끝을 지나갈 때
당신을 넘기는 내 손가락
자꾸 바스러지던
점점 녹슬어가던 봄밤
낡은 피아노의 봄밤 /문인수
피아노 속이 환한가, 때로 궁금하다. 지금
콩나물 대가리가 다시 수북하게 자란 저녁일까.
아이들이 자라 스무살이 훨씬 넘는 동안 또 몇년
뚜껑 한번 열린 적 없을 것이다.
무겁게 내려앉은 피아노는 저도 컴컴한 헌집이다.
문턱처럼 걸린 불화와 저녁노을처럼 걸린 쓸쓸한 날들,
묻지 마라. 어두워진 것처럼 꽉 다문 입, 속은 구린내 나겠지만
흉금이란 노후에도 노후해도 썩지 않고 영롱하게 글썽이는 것.
뚜껑 밤하늘엔 별 총총 수심도 많겠다. 명멸, 명멸,
사소하게 일일이 다 접으며 또 그렇게
겨울 보냈으리. 기나긴 눈보라 주먹만한 눈발,
저 목련 폭발 환한 야음이다. 야반도주처럼 훨훨
봄날은 또 사정없이 날 새누나. 두 팔 벌려 무너지듯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봄 밤 /김정숙
겉늙은 누렁이
바람피우러 나간 사이
왕 촛대 양손에 들고
봄 마중
가는 목련
덩달아 열사흘 달이
뒷짐 지고
나선다
봄밤 /김현재
들키면 아침이라고 검침원이 말해 주었다 검침원은 서명을 요구했다 들키지만 않으면 계속해서 밤이었다
물어온 것들을 문 앞에 쌓아두고 일을 했다 밤조차 행간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식전에는 개똥을 치우고 개밥을 주었다 개에게 산책을 시켜주겠다고 말을 걸었다 개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시 검침원이 왔다 최소의 예의를 갖추어 귀만 내보냈다 검침원이 나의 부재를 눈감아주었다
턱밑까지 밤을 끌어올리고 전등을 켜두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이 검침원을 기다렸다
봄 밤 /황지우
광주천 따라
고향의 봄밤을 걸으면
공기 속에 무슨 스펀지 같은 것이 들어 있다
푸욱 파묻히는
파묻히고 싶은
육신이, 물컹물컹한 육신이
눌려진다
천변 수양버들 아래
간지럼을 멕이는
이 아리아리한 봄밤
아, 뭐라고 말해야지
肉欲的적인 봄밤
수은燈 아래
사직공원 사쿠라꽃잎 다 지고
이 스펀지 같은 봄밤
사람들은 세상에 와서
한낱 착각 같은
아름다움을 보고 갈 뿐인가
봄밤 /류성훈
누구나 봄밤 하나씩은 갖고 있었지만
봄은 아무도 데리고 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나이가 많고 별을 탓하기엔 어린 시
대, 아직 추운 밤들만 먹이는 봄이 물을 끓인다 결국 재
개발이 결정된 판자촌에 화재가 나고 주님의 은총으로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목회 앞에서 종교와 사람이
서로를 버리던
아직도 그런 곳이 있어?
그런 곳이 있다 집이란 있을 곳이 아니듯 봄은 내게도
있을 계절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짧아지는 밤들과 유통기
한 지난 평온이 생살을 저밀 때 조심성 없는 하늘이 봄을
가스 불처럼 켜면 발진처럼 돋는 꽃눈들을 솎아 내면서
수없이 펼쳐진 흉터들이 모두 분홍빛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살았다
봄밤 /김석규
봄날 저녁 어스름은 비누거품보다 더 부드럽게 풀립니다.
들에 나가 저물도록 씨를 뿌리고 돌아와
과녁배기 집 부엌에 불이 켜질 때
산기슭으로 밀리는 밤안개 치마끈을 풀고
능금꽃 복숭아꽃 살구꽃 배꽃 앵두꽃 환하게
더 나즈막하게 열려오는 길로 밟히는 꽃그늘
치렁 치렁한 머리채의 마을 큰애기들 떼 지어 갑니다.
웃음소리 까르르 까르르 와자하니 몰려 갑니다.
얼었던 땅 녹아 축축한 공동묘지 주변
한 줌 흙으로 삭아내린 백골이 다시 깨어나
춥게 지상에 떠돌던 영혼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시간
오래 전에 풍화해버리 이름 아직도 맑아라.
푸르게 젖어 오는 음성으로 밤마다 잠을 설치며
길게 돌아눕는 무덤 위로 또 별이 내리는지
그리운 사람 곁에 향기로 머무는지
안개 속에 풀리는 어스럼 비누거품보다 더 부드럽습니다.
봄밤 /권순자
복사뼈 사이로 꽃대를 밀어 올리는 바람
겨우내 고독한 시간을 참고 견디어
분노보다 뜨거운 걸음이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번갈아 이 세상에 생을 의탁하러 오네
물렁한 꿈이 헐거워진 몸속에 스며들고
흐느끼던 겨울은 독한 바람에 소리치다가
앙상한 울음을 피우네
악몽이 구름처럼 뭉글거리며 피는 밤
허공에 번지는
붉은 노래
가지마다
기억이 붉어질 때까지
단맛이 나무의 등뼈를 지나
푸른 눈동자를 지나
간절해진 손끝에
제 생을 펼치네
허공의 목숨을 먹이는
단맛
붉은 혀 수천 개
하늘을 향해
붉은 노래 부르네
후미진 언덕
얼어붙은 가슴마다 불을 놓은
향긋한 침략자
이 불편한 세상에
한밤중 어둠을 헤치고 잠을 깨우는,
슬픔을 재우고 고통을 희석하는
수많은 날개들
지친 발마다 향유를 바르는
수천 개의 붉은 손들
불안한 시간이 타올라
가장 뜨거운 입술로
가장 차가운 음성으로
봄밤 언덕에 한없이 부른 노래
뿌리를 달래어서
줄기를 흔들어서
잠을 깨운 노래들이 언덕마다 하얗게 피네
복사꽃 피네.
봄밤 /이기철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라기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려 왔다
봄밤 2 /김명인
봄밤에는 몸 속에 적힌 불륜들이 슬그머니 눈뜬다
이 가등과 저 가등 사이
수천의 빗줄기가 소문의 꼬리를 끊고 진상을
가려놓지만
불빛 가장자리로는 여전히 기웃대는 시선들로 붐벼
속내는 좀처럼 길바닥 아래로 흘러 넘치지 않는다
잔등을 보이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밤새도록
더듬어왔던 그 한 번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가등들만 불쌍한 외눈으로 서로의 알몸을 마주 비추며
제 속의 둥근 욕망을 지척대는 빗줄기로
간신히 식히고 있다
봄밤 /천양희
서쪽을 향해 자란다는
측백나무를 생각하다가
북쪽을 향해 봉오리가 솟는다는
목련나무를 생각하다가
안뜰에 심으면 큰 인물이 난다는
회화나무를 생각하다가
새들이 좋아하는
아가위나무를 생각하다가
새가 아니면서 날아다니는
입술박쥐를 생각하다가
새이면서 날지 못하는 거위를 생각하는 봄밤
눈물을 찍어 새를 그린
화가 이징을 생각하다가
한 곡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 신발에 던져
신이 모래로 가득 차야 노래를 그쳤다는 명창 학산수를 생각하다가
일생 동안 먹을 갈아 구멍낸 벼루가 열 개도 넘었다는
명필 이삼만을 생각하다가
노래를 잘 듣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른
악사 사광을 생각하는 봄밤
나, 그만 무서록(無序綠)을 읽고 말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