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숙 시 모음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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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자 가는 길
강문숙
내 마음 저 편에 너를 세워 두고
혼자 가는 길, 자꾸만 발이 저리다
잡목 숲 고요한 능선 아래 조그만 마을
거기 성급한 초저녁별들 뛰어내리다 마는지
어느 창백한 손길이 들창을 여닫는지, 아득히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 그 끝을 따라간다
둥근 문고리에 찍혀 있는 지문들
낡은 문설주에 문패자국 선연하다
아직 네게 닿지 못한 마음 누르며
혼자 가는 이 길
누가 어둠을 탁, 탁, 치며 걸어오는지
내 마음의 둥근 문고리 잡아당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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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사표 그녀
강문숙
피아노는 거대한 한 그릇 밥이었다.
높은음자리표처럼
큰오빠 수술비와 조카의 학비는 올라가고,
착하다는 말을 밥처럼 먹고살지만 늘 허기가 졌다.
사랑했던 첫 남자 파혼선언하고 돌아설 때도
뜨거운 밥 한 끼 먹여보내려고 부엌에서 종일 서성거렸다.
도마질하다가 손끝을 베었을 때,
핏물보다 눈물을 먼저 흘리기도 했다.
피아노 건반은 그녀가 건너뛰어야 할
세상의 징검다리였는지도 모른다.
천사표 그녀가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래요?
울부짖는 그녀에게 의사는,
갓 태어난 아기가 죽을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둘러댔다.
시집을 엮는다는 핑계로 거의 한 달이 넘어서야 병 문 갔다.
밋밋해진 가슴을 여밀 생각도 않고,
살림하랴 글쓰랴 얼마나 힘들겠노?
잔이 넘치도록 인삼차를 부어준다.
염치없이 블라우스를 밀고 나오는 불룩한 내 젖가슴이
왜 이렇게 민망한지.
그녀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데
창 너머로 날아가는 하얀 나비 날갯짓,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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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분 속에 살다
강문숙
여자가 조심스레 문을 연다.
순간 커다란 눈동자 같은 내부가 번뜩인다.
침입자를 경계하듯 소요하는 먼지들.
먼지들의 입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엉거주춤 고분 속으로 들어선다.
고여 있던 시간들이 출렁이다가
토기의 빗금문양을 타고 흘러내린다.
무명 머릿수건을 탁탁, 털며
쌀 안치러 가는 여자의 뒤를 따라간다.
아궁이에서 매캐한 연기가 번지고
누군가 기침을 해댄다, 그 소리
고분 밖의 생애까지도 목메게 할 것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죽음과 함께 밥 먹고 숨쉬는 시간들
쭈그러드는 쌀자루가 안절부절못했겠지만,
고분 속은 무풍지대 최후의 안식처였을까.
고분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찬바람 불어 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철커덕, 누군가 고분의 입구를 막는다.
아직도 그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남겨둔 채, 서둘러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콘크리트고분 속으로 가는 뒷모습들
불빛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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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가 나를 펼친다
강문숙
그를 기다리는 동안 먼 산이 젖는다
젖은 산은 가까이 다가오다가
일정한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번 더 씻은 얼굴로 바라본다.
젖은 산을 바라보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그에게로 내가 가는 일.
그를 기다리는 동안 비에 젖는 것은
모두 그의 얼굴로 흐르고.
나뭇잎처럼 가슴은 두근거린다.
비상등 깜박이며 숲을 헤치고
그가 내 시야 속으로 들어온다.
먼 산은 비 그친 얼굴을 접는다.
숲릉 바라보지 않아도
그는 내게로 와서 이미 젖는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나무들이 걸어와
내 속에서 뿌리를 뻗는다.
꽃 피는 내가 그에게 우산을 내밀자
그가 접혀있던 나를 활짝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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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녀들
강문숙
마뜨료쉬까, 할머니 거기 계셨군요
둥그런 통치마 마름 펼쳐놓고
반짇고리 꺼내어 바느질하다가
잠깐, 배아파 니 엄니를 낳았니라.
한 사흘 베틀 위에 앉을 일 면해서
편할 줄 알았는데, 한밤중에도
철커덕, 탁, 탁, 베틀소리 잠깨셨다지요.
삼십촉 알전구가 하품을 해대는 새벽녘
어렴풋한 잠결 머리맡에, 물레를 돌리시는
할머니와 처녀 엄마,
사각사각 목소리도 닮으신 당신들은
밤을 새우실 요량이시군요.
무명 흰 치마 입으시고 할머니,
광화문에 계시는군요.
아침이면 마이니찌신문에 전송되는
사진 속에서, 소리없는 울음 혼자 우시겠지요.
밤새워 돌리시던 물레로 짠 그 치마
아직도 입고 계시는군요.
오늘은 행진하는 촛불 속에서
소녀들이 울고 있네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할머니를 열고
어머니를 꺼내니, 어쩌면 좋아요
그 속에 또 한다발의 할머니가
꾸역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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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난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강문숙
난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너무 화려한 불빛을 지나서
너무 근엄한 얼굴을 지나서
빛나는 어둠이 배경인
네 속에 반듯하게 박혔으면 해.
텅 빈 네 휘파람 소리
푸른 저녁을 감싸는 노래.
그러나 가끔씩은 울고 싶은
네 마음이었으면 해.
그리운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자주 설움 타는 네 잠 속
너무 눈부시게는 말고
너무 꽉 차게도 말고
네 죽을 때에야 가만히 눈감는
별이 되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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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한 무렵
강문숙
폭설이 끝나고, 몰아치는 바람
마당 귀퉁이부터 얼어붙는다.
감나무 꼭대기에 몇 알 남겨둔 까치 밥
참새, 까치들이 수시로 와서 쪼아먹고
가지들, 텅 빈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오늘 무슨 날일까.
못 보던 재비둘기 한 쌍이
빈가지 위에 앉아 두런거리고 있다.
반가운 마음뿐, 그냥 바라만 보는데
미안하다, 미안하다,
빈가지는 자꾸 흔들리고 있다.
(입 공양하자고 따먹은 사람 따로 있는데)
저 흔들리는 것들 때문에
봄은, 오고야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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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동점역에서
강문숙
눈꽃열차
문득, 나를 반올림하고 싶어진다.
얼어붙은 입도 모자라
눈꽃 보러 떠난다 하니, 누군가
헛웃음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큰거리는 발목을 이고 떠나는 여행이란
겨울나무처럼 제 속으로 내는 길일 터.
긴 여행의 쉼표처럼
동점,
태백선의 행간 속에 숨어 있구나.
가끔, 가만히 엎드려 기다리다
마른 김 다발처럼 사라지는 화물차 서너 칸.
눈 나라에서 추방당한 대역죄인처럼
뜨거운 팥죽에 코를 박는 사람들.
잿빛 새 한 마리, 끝내
저 적막의 간이역을 통과하지 못하고
날개를 접는다.
여전히 동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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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당가의 저 나무
강문숙
세상 모든 흔들리는 것들로부터 가을은 오네.
마당가의 저 나무 흔들리므로 아름답네.
제 몸 던지는 잎들이 저렇게 붉어지니
이제 지는 노을도 슬프지 않겠네.
- 그건 사랑이야. 꺼지지 않는 목숨이야
바람이 중얼중얼 경전을 외며 지나가네
흔들리자, 흔들리자
세차게 흔들릴수록 무성한 날이 오겠지
나무의 기쁨이 하늘을 덮네
오래된 저 나무 흔들리므로 더욱 아름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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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물먹는 하마
강문숙
어서, 하마를 치워야 할텐데
저 하마를 밖으로 끌어내야 할텐데
늦장마 끝나고 서늘한 바람 분다
커튼을 갈아끼우다 문득 떠올린
하마 사냥
장롱 속, 창문도 없는 독방에
켜켜로 쌓아놓은 이부자리, 베개들
햇살 대신 물먹는 하마 한마리 들여놓고
짐짓, 눈 감아버렸다
하루에 두어 번, 하마의 안부를 확인할 뿐
여름 늦장마 견디고 있었다
누군가의 속을 열어보면 저럴까
보이지 않게 젖어 있던 속내
눈물로 차올라 있구나
소리없이 일가를 이루던 곰팡이
지독한 슬픔의 감옥이었구나
제 몸 안에 늪을 가두고
물소리를 듣고 있던 하마
그래도.. 웃고 있구나
그래도 웃고 있구나.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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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별이 되었으면
강문숙
난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너무 화려한 불빛을 지나서
너무 근엄한 얼굴을 지나서
빛나는 어둠이 배경인
네 속에 반듯하게 박혔으면 해.
텅 빈 네 휘파람 소리
푸른 저녁을 감싸는 노래.
그러나 가끔씩은 울고 싶은
네 마음이었으면 해.
그리운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자주 설움 타는 네 잠 속
너무 눈부시게는 말고
너무 꽉 차게도 말고
네 죽을 때에야 가만히 눈감는
별이 되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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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안개
강문숙
1
초겨울 아침
안개가 풀리면서 길도
풀린다. 날마다
하늘은 미세한 그물을 깁고
안개는 사람들의 무딘 코끝에서
이끼처럼 자란다.
보이지 않는 [말]들이
안개 속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길 위에서의 싸움도 부쩍 늘었다.
저마다 얼굴을 가린 채
목소리만 버섯처럼 붉게 자란다.
서로 안개 탓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그들 탓에 안개가 낀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2
돌들이 하얗게 타오른다. 타면서
가늘게 휘파람소리를 내기도 한다.
빨간 가방을 멘
아이가 안개 속을 지나간다.
잠시 후, 낯익은 여자가
죽은 새를 안고 헤엄쳐 나온다.
수없이 분열하는 하얀
불꽃 사이를
벗은 나무와
얼굴 없는 사람들과
돌아앉은 집들이 떠다닌다. 때론
기운 하늘마저도 허우적거린다.
3
바람아
너의 여린 살갗이 터져 흐르는
피다. 피의 묘한 향기다.
내 가슴 맨 안쪽을 깨무는, 뜨거운
너의 혓바닥이다.
보이지 않는 사슬
허망한 늪 속에 깊이 잠겨있는
칼날 같은 빛이다.
곧 어둠이 닥치리라. 몸 속에
숨긴 수많은 가시
예리한 끝으로, 뚝
뚝 피 흘리며 일어서라.
안개여 일어서라.
4
어머니의 그 편안한 자궁
속,
끼워야 할 단추도 없는 알몸으로
내가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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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슬 꽃 피는 아침
강문숙
이슬로 맺히는 인연의 말
뜨거운 가슴속에 묻어 놓고
여윈 햇살의 마음
기도로 배를 채우며
빛살은 빛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아프게 가는 세월의 눈빛에
인연의 흔적 곱게 실어 올리며
허공에 찍힌 무상한 사랑의 발자국
겨울나무의 수액으로 거르고 걸러
신음 소리 한 쪽 들리지 않은 노랫말
환생하는 꿈 하나 까치 소리 몰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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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자루 속에서
강문숙
자루의 주둥이가 풀리면서
묵은 완두콩이 쏟아졌다.
쪼그라든 껍질, 낱알마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채
견딜 수 없이 가벼워진 목숨.
아직도 구멍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바구미들.
수많은 낮 밤을 완두콩과, 완두콩을 갉아먹는
벌레들로, 자루의 속은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푸른 떡잎과 싱싱한 넝쿨손을 갉아 먹히면서
완두콩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벌레를 껴안고 사방으로 굴러가는 완두콩
자루가 해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무한천공을 떠다니는 지구 덩어리
거대한 자루 속, 함께 들썩거리며
나도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완두콩과 벌레와 자루가 서로 껴안고 구를 때
삶은 굴렁쇠처럼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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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착하게 사는 사람들에겐
참는것이 일상화 그것이
결국은 병이 되어 인생을
무너뜨리곤 해요
착하다는것이
좋은것을 아니란 얘기
천사표 그녀
이젠 내 표현도 하면서
당당히 살으라는 얘기
해 주고 싶어요
물먹는 하마
저희 장롱속에서도
배가 두둑이 하고 있지요
늘 배부른 모습
운동 좀 하지 그래
혼자 가는 길
강문숙
내 마음 저 편에 너를 세워 두고
혼자 가는 길, 자꾸만 발이 저리다
잡목 숲 고요한 능선 아래 조그만 마을
거기 성급한 초저녁별들 뛰어내리다 마는지
어느 창백한 손길이 들창을 여닫는지, 아득히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 그 끝을 따라간다
둥근 문고리에 찍혀 있는 지문들
낡은 문설주에 문패자국 선연하다
아직 네게 닿지 못한 마음 누르며
혼자 가는 이 길
누가 어둠을 탁, 탁, 치며 걸어오는지
내 마음의 둥근 문고리 잡아당기는지
김용호 시인님
감사드려요
시간이 바빠서
나중에 찬찬히
볼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