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번째 편지 - 족쇄
지난주부터 회사 사무실을 재배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사무실 전체를 이사하려 하였는데 사정이 생겨 2년간 더 있게 되었습니다. 이사 가려고 몇 달간 이사 갈 사무실도 보는 등 엉덩이를 들썩한 터라 그냥 주저앉으려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실을 재배치하기로 하였습니다. 남향인 제 사무실을 북향 쪽으로 옮기고 연쇄적으로 임직원 사무실을 재배치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먼저 제 사무실을 옮겨 주어야 했습니다.
저는 이 이사 계획 속에 <물건 버리기>를 끼워 넣었습니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로 재구성된 <물건 버리기>는 이제는 시대의 한 사조가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 번 <물건 버리기>를 시도하였지만, 그 효과는 한 달을 가지 못하였습니다. 과감하고 대대적으로 <물건 버리기>를 하고 이제 완벽하게 물건 버리기에 성공하였다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자축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건 버리기>는 힘을 잃고 <물건 사기와 쌓기>가 예전 위력을 발휘하여 사무실과 집을 차지해 버리고 맙니다. 2017.5.22 월요편지는 카터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정체성이 [하는 일]로 정의되지 않고 [가진 물건]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으로는 목적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 주제에 천착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도 이 <물건>의 늪을 헤매고 있을까요. 저는 사무실의 잡동사니를 정리하면서 <과감하게> <단호하게> <두 번 생각하지 않기>를 모토로 삼고 정말 과감하게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검찰 근무 당시부터 가지고 있던 책들, 그 책은 검찰 퇴직 후 13년간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은 책입니다. 이 책을 버릴 것인가를 놓고 <추억>이 제 발목을 잡아 <물건 버리기> 시도가 늘 좌절되곤 했습니다.
이번에는 <과감하게> <단호하게> <두 번 생각하지 않기> 신공을 발휘하여 대부분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교양서입니다. 어림잡아 수백 권이 되어 보입니다. 책 제목을 훑어보니 지난 수십 년간의 저의 관심사가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저를 일으켜 세웠고, 걷게 했고, 달리게 했던 주제들입니다.
그러나 그 주제들은 이제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제 과거입니다. 이 과거를 부둥켜안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제 미래에는 새로운 관심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의 눈은 이미 그런 주제로 옮겨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과감하게> <단호하게> <두 번 생각하지 않기>를 발휘하여 대부분 버렸습니다. 옆에서 일을 도와주던 김 과장과 임 차장이 깜짝 놀랍니다. "이것을 다 버리신다고요." "아깝다."
물론 아깝습니다. 구입 비용으로 따져도 꽤 큰돈입니다. 그러나 그 책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된다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저 수단일 뿐입니다. 제가 살아가기 위한 지식과 지혜를 주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어찌 보면 책은 물살이 센 세상이라는 강을 건너가는 데 필요했던 징검다리입니다.
저는 이미 3분의 2쯤 건너왔습니다. 뒤돌아보면 크고 작은 징검다리들이 있습니다. 어떤 징검다리는 촘촘히 붙어 있어 건너기 쉬웠고 어떤 징검다리는 띄엄띄엄 있어 훌쩍 뛰어야 했습니다.
책은 징검다리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너무나도 필요하고 절실하였던 징검다리이지만 이제는 제 삶의 뒤에 추억으로 남아 있는 물건일 뿐입니다. 그 징검다리에 집착한다면 저는 뒤돌아 가야 합니다.
저는 남은 강을 건너기 위해 제 앞에 또 다른 징검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지식>일 수도 이미 아는 <지혜>일 수도 있습니다.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할 책만 남겨두고 대부분은 <버리기>를 하였습니다.
다음은 서류입니다. 서류는 업무를 위해 일정 기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실 1년 이상 지난 서류들은 들추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이번에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5년 이상 된 서류는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법무 관련 서류의 보존기간은 특별한 서류를 제외하고는 3년이고, 세무 관련 서류의 보존기간은 5년인 점을 감안하였습니다.
이 역시 <과감하게> <단호하게> <두 번 생각하지 않기>를 이용하여 대부분 버렸습니다. 서류 제목을 일별하니 저나 임직원들의 고뇌가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일 뿐입니다. 그 서류들은 이제 죽은 서류입니다.
다음으로 기념패를 공격할 차례입니다. 검찰에서 받았던 수많은 패는 열어 보지도 않고 책장을 하나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언젠가 열어서 정돈해야지 했던 것이 13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이번에 모두 다 열어 보았습니다. 재직기념패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다음으로 감사패였습니다. 저는 <책 버리기> 상공으로 텅 빈 책장에 그 패를 진열하였습니다. 그 패도 저의 과거이지만 한 번도 세상 빛을 보지 못한 것이라 적어도 이사 갈 때까지 2년간은 진열될 자격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건 버리기>를 어느 정도 성공한 후 사무실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사가 훨씬 수월하였습니다. 만약 그 많은 물건을 다 끌고 이사하였더라면 그 방은 다시 물건 더미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물건으로 가득한 방은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족쇄의 죄수 같습니다. 그 죄수는 탈출을 꿈도 못 꾸게 하기 위해 수십 개의 족쇄가 채워져 있고, 족쇄 끝에는 쇠사슬이 있고, 쇠사슬 끝에는 쇠뭉치들이 달려 있습니다.
이번에 버린 책, 서류, 기념패 박스는 제 삶의 족쇄입니다. 이 족쇄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저는 그 방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사무실 물건>이라는 족쇄를 끊는 시도를 하였지만 저에게는 아직도 수많은 족쇄가 물려져 있습니다.
인연의 족쇄, 선입견의 족쇄, 루틴이라는 족쇄 등 끊어야 할 수많은 족쇄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족쇄가 있으신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4.3.26. 조근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