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퇴근한 직후 다른 장소에 들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직행했다. 평소와 같은 금요일 밤이라면 적당한 식당에 들려 반주라도 걸쳤겠지만 오늘따라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정장과 셔츠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차가운 가을 밤바람이 그의 발길을 돌린 것일 지도 모르겠다. 대신 남자는 편의점에 들러 자신이 지나가다 눈여겨 보았던 도시락과 간식, 맥주를 사가는 것으로 자신과 합의를 보았다.
남자는 돌아가는 길에 어쩐 일로 자꾸 시선이 가는 달을 바라봤다. 이달의 마지막 날 뜨는 저 은은하면서도 화사한 보름달은 어딘가에서 기어나와 각자의 집으로 회귀하는 반시체들을 강제로 붙잡아두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그것에 걸려들어 발길을 재촉하는 밤바람의 한기를 견디며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그 기저에는 젊은 피에 대한 은근한 맹신과 고집이 깔려 있었다.
그렇게 그는 오른손에는 서류가방, 왼손에는 철없이 달랑거리는 봉투 하나를 천천히 흔들며 때아닌 풍경을 한껏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땅을 바라본 그의 시야에 가로등만 적적하게 빛을 내고 있는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며 자주 봐온 시립공원이었다. 가로등의 빛이 닿는 곳 이외 다른 곳들은 가로수에 가로막혀 달빛조차 받지 못해 한없이 어두워 생물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에 취한 남자의 눈에는 그런 것보다는 가로등 바로 아래 텅 빈 벤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시 어디를 가든 꼭 하나씩은 눈에 띄는 앙증맞은 물건을 포착한 남자는 별 망설임도 없이 천천히 광원을 향해 걸어갔다. 왼손에 들린 물건이 치킨 같이 따끈한 음식들이었다면 어림도 없이 집으로 서둘러 달려갔겠지만 마침 편의점의 레트로트들인지라 운이 좋았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걸어갈 때의 느긋한 속도와 달리 벤치에 앉을 때는 마치 집의 쇼파에 뛰어드는 것처럼 맥없이 힘을 풀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남자의 시야가 급변하며 직전까지 즐기던 보름달과는 색다른 풍경화가 펼쳐졌다.
멀리서 볼 때는 온통 어둠뿐인 줄 알았던 공원의 풍경은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조금 떨어진 안쪽에 있는 화장실 불빛, 조용히 울어대는 곤충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것들을 가로등 빛을 커튼 삼아 몰래 숨어보는 자신. 이번에는 자신이 달속으로 들어와 주변을 굽어살피는 것 같았다. 몽환적인 분위기에 남자는 양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역시 가끔씩 즐기는 일탈은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편안함과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슬슬 남자의 옷을 뚫고 들어오는 한기가 그 양을 더하고 있었다. 빛 아래 있음에도 저도 모르게 찾아온 오한에 몸을 크게 떤 남자는 괜한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크게 몸을 뒤틀어주자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던 그의 몸에서 뿌드득하는 소리들이 팔, 다리, 허리 할 것도 없이 울리며 그날의 일탈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으로 끝. 남자는 그 자리에 더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곧바로 뒤돌아 다시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짐들을 벤치에 그대로 두고 온 것을 겨우 깨닫고 종종걸음으로 벤치로 다가가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는 가방과 봉투를 낚아챘다. 잘못도 없이 거칠게 다뤄진 물건들이 저마다 부스럭대며 주인에게 나름의 항의를 했지만 추위에 질린 그가 들어줄 리는 만무했다.
공원에서의 휴식 이후 약간이나마 체력을 회복한 남자는 거칠 것 없이 곧바로 자택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시 외곽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2층짜리 단독주택이 남자의 집이었다. 원래 그의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이었지만 두 분 내외가 어릴 적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외동아들인 남자에게 물려준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남자는 이제 자신 혼자 남게 된 장소임에도 언제나 집에 돌아와 문을 열 때마다 그 너머에서 두 분의 기척이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장장 21년을 그렇게 살아왔던 남자가 그것을 부정하고 잊기에는 세월의 힘이 너무 컸다.
오늘도 시덥잖은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며 자조한 남자는 신발을 털고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난방은 켜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내인지라 확실히 바깥보다는 따뜻한 공기가 그를 반겼다. 먼저 부엌으로 향한 그는 편의점 봉투를 식탁에 슬쩍 올려놓았다. 내려놓을 때 왠지 그 안에 이상한 것이 흔들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자신의 착각이겠거니 넘겼다.
그다음 남자는 자신의 방 침대에 서류가방과 정장 따위를 대충 집어던지고 곧바로 거실로 들어가 티비를 틀었다. 요즘 시대에 남자와 같은 젊은 세대가 자주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주 찾아오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이렇게 의미없이 아무 채널이나 돌려봤다. 마침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가 방송 중인 것을 확인한 그는 채널을 고정시킨 후 음량을 높였다. 그리고 잠시 잊었던 편의점 봉투를 떠올린 그는 시선은 화면에 고정하며 천천히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람도 없이 혼자 춤을 추고 있는 봉투를 목격했다.
-테치
그리고 혼자 노래도 부르고 있었다. 현대인이라면 살면서 한 번은 꼭 들을 수밖에 없는 그 소리였다. 자신의 야식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뒤늦게 깨달은 남자는 한달음에 달려가 봉투 입구를 벌렸다. 그 안에는 불행하게도 남자가 예상한 생물이 멋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안에 들어있는 음식물들의 상태도 예상한 그대로였다. 도시락은 얇은 비닐이 처참히 찢겨져 내용물은 냄새 나는 녹색의 무언가와 섞여 이미 쓰레기로 전락했다. 몇 개 들어있던 과자 중 포장지가 얇은 것들은 반으로 갈라져 텅 빈 속내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행히 알루미늄 캔에 담긴 맥주만은 무사했지만 저 더러운 현장 한가운데 꼿꼿하게 서있는 캔을 따고 내용물을 마실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머지 멀쩡한 음식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요새 성행한다는 탁아를 자신이 당해버린 것이다. 같은 팀의 대리가 자신의 아내가 탁아를 당해 히스테리를 자신에게 부렸다고 투덜거릴 때만 해도 남 얘기로만 생각했었지만 막상 자신이 당하고나니 그저 아득한 기분이었다.
-레후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한 작은 벌레 하나,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작은 구더기 같은 벌레 하나. 테치라고 우는 걸 보면 큰 놈은 자실장이라고 불리는 개체일 것이고 작은 놈은 생긴 것처럼 구더기일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몇 번 가지고 놀았던 것을 제외하면 남자와는 큰 연이 없는 생물이었다. 그래서 봉투 안에 들어간 놈이 자실장이라는 것도 기억을 더듬어 겨우 떠올렸고 그 흔한 링갈도 가지고 있지 않아 봉투 안의 벌레들이 지껄이는 말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도 알아듣고 싶지도 않았다. 철없던 순수한 그 시절에도 녀석들과 대화할 생각 따위는 없었는데 지금이라고 자신의 야식을 더럽힌 저 벌레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의도를 파악할 기분이 날 리가 없었다.
그런 남자의 마음도 모르고 두 벌레들은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방긋 웃으며 칭얼대는 것처럼 두 팔을 들어올리며 흔들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우스워 남자는 그것들에 호응하여 팔을 들어올렸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귀찮음, 그리고 더러운 것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에서 나온 나태함이 불러온 행동이었다. 저것들을 취조하고 전후사정을 캐내 자신에게 탁아를 결행한 어미 벌레를 찾아가서 죽일 바에야 빨리 눈앞의 것들만 처리하고 주말을 즐기고 싶은 나태함. 정신없이 자신의 야식을 멋대로 쳐먹다가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자신을 발견한 후 미소를 띄우고 양팔을 흔드는 벌레들을 빨리 눈앞에서 치우고 싶다는 조급함. 상반되는 두 감정이 어서 남자에게 행동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고 남자는 그 충동에 저항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남자는 그대로 봉투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조심히 잡아든 후 현관을 향해 걸어가 그대로 마당으로 나갔다.
봉투 안의 벌레들은 남자가 자신들과 함께 산책이라도 나가려는 줄 착각했는지 만세와 환호라고 추정되는 몸짓을 반복하며 자신들이 만든 쓰레기 사이에서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지만 남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않았다. 무관심이 심통이 났는지 두 녀석은 갑자기 발을 구르며 더욱 날카롭게 울기 시작했다. 남자가 예전 친구들과 함께 어미 벌레를 밟아 죽였을 때 그 새끼 벌레들이 보여준 반응과 똑같았다. 아마 화를 내고 있는 거겠지.
-테츄아
그런 큰 벌레의 움직임에 맞춰 구더기라 불리는 벌레 녀석도 가분수의 대가리를 앞발 두 개와 함께 세워 몸을 꼿꼿하게 하고 레후-하고 낮고 굵직한… 목소리를 아마 흉내 내려는 것같은 얇은 목소리로 울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항의에도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끄고 약한 불빛 밖에 비춰지지 않는 자신의 마당을 둘러봤다.
그리고 적당히 수풀이 우거진 구석으로 다가가 봉투를 바닥에 내리고 입구를 벌렸다. 벌레들은 남자가 드디어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가 싶어 성내던 것을 뚝 그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 기대대로 남자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벌레들을 하나씩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테치? 테치치!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바닥에 내려진 큰 벌레는 곧 사방에서 몰아치는 추위에 몸을 쓸었다. 작은 벌레도 마찬가지로 똬리를 말고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인간의 집에서 편하게 처먹고 있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가을 밤바람의 두려움을 뒤늦게 상기한 것이다. 녀석들은 자연스럽게 남자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보호와 이 추위를 해결해줄 것을 요구함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남자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봉투를 다시 챙겨들고 집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철컥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큰 벌레는 남자가 곧 다시 자신들을 모시러 올 것이라며 작은 벌레를 달래고 서로를 껴안으며 추위를 견뎠다. 그리고 남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작은 벌레에게 되뇌였다. 그는 곧 올 것이다. 곧 올 것이다. 곧…
…
…
남자는 영화를 보며 배달앱으로 어느 브랜드의 치킨을 시켜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날 시간 즈음에 프리미엄 리그의 빅매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중대사항을 야식 없이 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원래는 오늘 좀 피곤하기도 해서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때울 생각이었지만 재수없게 탁아를 당해버리는 바람에 졸음이 확 달아나버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분위기를 내보기로 한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러서야 남자는 곧 자신이 마당에 내놓은 녀석들을 다시 떠올렸다.
탁아를 당했으니 곧 녀석들의 어미가 올 것이고 대문도 일부러 열어놨으니 무리없이 안으로 들어와 추위에 떨며 구슬프게 울어대는 자기 새끼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남자가 자기 새끼들을 무심하게 밖에 내놓은 것을 보고 자기 탁아가 나름 정중하게 거절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 얌전히 자기 새끼들을 데리고 돌아갈 터였다.라고 생각한 남자는 문득 지금쯤 녀석들의 어미가 도착했을까 싶어 슬쩍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얼굴 반쪽 내밀 정도로 커튼을 젖힌 남자는 대문에 설치한 희미한 조명의 불빛에 기대 녀석들을 놔둔 곳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보려 해도 제대로 된 빛도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장소를 똑바로 관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몇 번 끙끙거리며 고개를 돌려보던 남자는 내일 다시 확인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거실로 돌아가 주문을 마쳤다.
-툭툭
집안의 따스한 공기에 몸을 맡기며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남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좌우로 꺽어 몸을 풀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치킨을 주문한지 30분 정도 지나 있었다. 오늘이 대목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지금 배달원이 벌써 도착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남자는 살짝 긴장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실 한켠에 있던 배트를 들고 현관으로 다가가 실외경에 눈을 가져다댔다.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툭툭
그리고 또다시 들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 남자는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며 뒤로 두어발짝 물러섰다. 문밖의 존재도 그걸 눈치챘는지 갑작스럽게 소리가 멎었다.
-데스
-테츄아! 테챠!
서로가 한참을 숨을 죽인 채 말없이 대치를 이어나갔다. 이게 무협지의 한 페이지였다면 아마 잡다한 묘사들이 이 장면을 휘황찬란하게 장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것도 없이 이 대치는 문밖의 존재들의 인내심이 먼저 깨지며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울음소리로 알 수 있듯이 저것들의 정체는 실장석들이었다. 실외경을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도 신장이 너무 작아 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자신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했음을 깨달은 남자는 배트를 현관 옆에 대충 걸쳐두며 얼굴을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오해했다지만 실장석 따위에게 겁을 먹은 자신이 부끄러웠던 탓이다.
아까 들었던 새끼 벌레의 울음소리와 더불어 다 큰 성체 벌레의 소리도 같이 들리는 것을 보니 드디어 녀석들의 어미가 새끼들을 찾으러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순순히 돌아가지 않고 새끼들을 대동해 남자를 부르는 것을 보니 혼란스러웠다. 분명 거절의 의사를 보이기 위해 새끼들을 내쫓았는데 왜 돌아가지 않고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인가. 어렸을 때 잠깐 녀석들을 가지고 논 경험이 있을 뿐이지 그 외에는 실장석이란 생물을 제대로 접해본 적 없던 남자는 녀석들의 행위의 사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데스? 데스! 데샤아!
그래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거의 영하에 근접한 지금의 날씨라면 있으나마나 한 얇은 옷 한 벌이나 겨우 챙겨입은 녀석들을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몰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녀석들에게 생각이 있다면 그냥 내버려둬도 추위에 못 이겨 금방 나가떨어질 것이라 남자는 생각했다. 못해도 치킨이 도착하기 전에는 사라질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그와 별개로 문 너머의 남자를 눈치 챈 어미 벌레는 더욱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
…
-뎀바바! 뎀바바! 끊고 올라갑니다!
남자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땀은 오직 집 한구석에 있는 보일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경기는 정말 만족스러웠지만 두 가지 아쉬운 점이 남아 있었다. 치킨, 맥주. 오늘이 아무래도 대목 중의 대목인지 1시간이 넘었는데도 배달이 오지 않았다. 중간에 한 번 가게에 전화를 해봐도 아직 준비중이라는 상투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바삭한 튀김옷과 부드럽고 적당히 기름진 그 안의 살결, 끝으로 입안의 느끼함을 잡아줄 맥주의 시원한 탄산.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 경기와 함께 즐기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함이 살짝 올라왔다.
-똑똑
다시 한 번 전화라도 보낼까 생각하던 그때 정문에서 다시 한 번 노크 소리가 울렸다. 벌레들이 내는 희미한 소리가 아닌 사람이 두드리는 게 분명한 힘차고 또렷한 소리. 남자는 반가운 마음으로 당장 현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누구냐하며 밖에 선 사람의 정체를 물었다.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었다. 현관에 도착하기 전부터 들린 오토바이 엔진음, 코끝을 간질이는 치킨 냄새. 당연히 배달원이었다. 남자는 자기가 질문한 주제에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당연하게도 봉투를 들고 있는 배달원. 그리고 실장석들이었다.
-데스! 데슷!
-테츄웅…♥️
기뻐하고 있는지 화내고 있는지 구분도 가지 않는 얼굴로 짖어대는 어미 벌레. 다 죽어가는 몰골로 한 손을 뺨에 댄 채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새끼 벌레. 그리고 진짜 죽었는지 미동도 안고 어미벌레에게 안겨있는 구더기가 당연하다는 것처럼 배달원의 옆에 서 있었다. 남자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치킨이 든 봉투를 넘겨받은 자세 그대로 멍하니 배달원의 바이저를 빤히 쳐다보자 그 역시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바이저 위를 긁적이다 돌연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대문을 나섰다.
-아~ 이게 뭔가요!
때마침 지금 남자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는 듯한 해설진의 흥분에 찬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남자도 생각했다. 정말 이것들은 뭘까하고.
-데슷!
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저 시끄럽게 울어대는 벌레들을 먼저 처리할 때였다. 남자는 옷과 마당이 더러워지는 것을 감수하고 당장 곤죽으로 만들어버릴까 고민하며 슬쩍 뒤에 있는 배트를 돌아봤다 곧바로 마음을 바꿨다. 혹시라도 더러운 파편이 다시 한 번 치킨을 오염시키는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데스!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어미 벌레는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물건에 맹렬한 기세로 손을 뻗으며 팔짝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빈약한 몸뚱아리로 닿을 리가 없어 쓸데없는 행동일뿐이었다. 봉지에 닿을락말락하는 어미 벌레의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갑자기 무슨 변심이 들었는지 슬그머니 한쪽으로 몸을 틀었다.
-데걋! …데!?
목표를 잃은 어미 벌레는 당황한 탓에 중심을 잃고 미끄러져 버렸다. 곧바로 후두부에 강타하는 충격에 다시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강력히 항의를 하려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낯선 풍경이었다.
희미한 불빛이 밝히고 있는 익숙하지 않은 구조물. 조금 옛날 스타일의 현관이었지만 들실장인 그녀가 똑바로 구분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공원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주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던 그녀에게는 별 거 아닌 인간의 주택조차 별세계로 느껴졌다. 그녀는 순간 이것이 자신의 마마에게 말로만 듣던 콘페이토 별인가 싶었다.
-테치? 테츙! 테츄앗!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낯선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온기. 따듯한 바람. 본격적으로 가을에 들어선 요즘 기후에 맞지 않게 남자가 나온 공간에서는 마치 봄바람처럼 산뜻한 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따듯함에 홀린 어미와 새끼 모두 홀린 듯이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지만 어쩐 일인지 남자는 막지 않고 오히려 옆으로 더 비켜주었다. 그러고나서 친자가 모두 안에 들어오고나서야 문을 닿았다.
-데스…
-테츄! 테치치치! 테프프픗!
집안에 들어서 문까지 닫히고 나자 온기는 더욱 확실히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어죽어도 무리가 없을 한기에 노출되었다 인간의 난방 시서리 작동하고 있는 장소에 들어온 그들의 감상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단 그들이 실장석이어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같은 수준의 감동을 받았어도 마찬가지로 말문이 막혔을 터였다. 어쨌든 태어나서 처음 인간의 집에 들어온 모녀는 양팔을 벌리고 행복을 만끽했다.
-데깃!?
그 모습을 구경하며 신발을 벗어 정리한 남자는 어미 벌레가 팔을 들어올리자마자 그대로 양 겨드랑이를 붙잡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인간과 시선을 마주하게 돼 당황한 어미 벌레였지만 그것도 잠시, 곧 무슨 상상을 했는지 남자의 시선을 양뺨을 붉힌 채 피했다. 다행히 남자는 그 동작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미 벌레를 그대로 든 채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통 자기 어미가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는 모습을 본다면 그 새끼가 반발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새끼 벌레는 남자가 신발장 위에 올려둔 치킨만 멍하니 바라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데히…
어딘지 해탈한 표정의 어미 벌레는 어쩐지 집에 들어오기 전보다 하반신이 부푼 외형을 한 채 남자의 두 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어미벌레의 하반신에 매달린 팬티에는 악취 나는 녹색의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표정을 찌푸리며 숨을 참을 뿐 보통이라면 당장에 원흉을 때려 죽였을 행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목적지로 나아갈 뿐이었다.
잠시 후 어느 문에 도착한 남자는 불을 켜고 발로 밀어 문을 열었다. 그 내부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 방의 정체는 놀랍게도 학대파 전용 고문실 같은 것이 아닌 평범한 화장실이었다. 크게 변기, 욕조, 세면대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상할 정도로 이상할 것 없는 화장실. 남자는 그 화장실의 바닥에 어미 벌레를 내려놓은 후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다급해진 어미 벌레가 다급히 남자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남자가 나가는 것이 한 발 빨랐다. 결국 어미 벌레는 대답해주는 이 없는 문을 한참을 두드리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테츄웅~♥️
어미 벌레를 화장실에 가두고 남자가 향한 곳은 다시 현관이였다. 그 시점에서 새끼 벌레는 자신을 기준으로 한참 높이 있는 치킨을 향해 필사의 아첨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치킨이 알아서 제 앞으로 떨어져 주리라 확신하는 것처럼. 방금 남자의 음식을 그렇게나 많이 멋대로 처먹어 놓고도 아직도 배가 고픈지 계속해서 음식을 갈망하는 모습에 기가 찬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녀석을 계속 내려다봤다.
-테! 테츄웅~♥️
하지만 남자의 웃음소리에 새끼 벌레는 금방 남자의 존재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아첨. 아마 남자를 매료매료해서 본인에게 치킨을 가져다 바치게 만들 속셈이었겠지만 링갈도 없고 실장석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남자는 이번에도 새끼 벌레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없이 손을 뻗어 검지와 엄지손가락 사이에 녀석의 머리를 끼우고 들어올렸다.
-테챠아아아앗!
남자의 기습적인 스킨쉽에 의해 공중에 매달린 새끼 벌레는 어미와 달리 공포를 느끼며 비명을 지르며 빵콘했다. 남자는 이번에도 별로 화내는 기색없이 남은 한손으로 코를 꼬집고 어미 벌레가 갇힌 화장실까지 빠른 걸음을 다가갔다. 화장실에 가까워질수록 어미 벌레의 나름 처절한 난동이 느껴지자 자실장도 이를 눈치채고 더욱 큰 비명소리로 어미를 불렀다. 하지만 어미는 새끼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새끼는 그 행위가 자신에게 간절히 다가가려는 어미의 발악으로 보였는지 어느덧 남자가 문고리에 손을 올렸을 때는 울음을 뚝 그치고 치프픗하며 조소를 보이고 있었다.
-데슷! 뎃! 데기이이…
-테…?
하지만 문이 열리자 어미가 보여준 행동은 새끼의 기대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어미는 남자가 화장실에 다시 발을 딛자마자 달려들어 제멋대로 몸을 비비려 했다. 그 더러운 모습에 남자는 가차없이 어미를 살짝 발로 차는 것으로 대응했다. 살짝이라지만 예고없이 가해진 성인 남성의 힘에 어미 벌레는 제대로 버티지도 못하고 추하게 굴러 욕조 외벽에 부딪히고 쓰러져 신음을 내뱉었다.
예상치 못한 어미의 녹아웃에 놀란 새끼는 웃던 것을 멈추고 추가로 빵콘을 저질렀다. 여태 자신을 부양했던 어미가 쓰러진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나보다 하고 남자는 지레짐작했다.
-쏴아아…
남자는 거기서 더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욕조 안으로 넘어가 팔걸이 부분에 걸터앉고 호스를 꺼내 물을 틀었다. 그리고 온수가 나올 때까지 자기 손등에 물줄기를 가져다 대며 자신이 차버린 어미 벌레를 내려다봤다.
-치에엥! 치에엥!
화장실 중앙에 놔뒀던 새끼 벌레는 어느새 어미 벌레에게 다가가 그 몸을 흔들면서도 힐끔힐끔 남자를 엿보며 투명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가 어미를 해친 줄 알고 새끼가 분노에 차 그런 행동을 하는 줄 알고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감정을 느꼈다. 아무리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벌레들이라 해도 철이 들고 난 후 이런 모습을 보니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는 없었다. 남자는 괜히 시선을 돌리고 온수가 나오기 시작한 호스를 친자에게 겨눴다.
-칫! 치에엣! 츄아앗!
-뎃! 데슷! 데슷!
아무리 따뜻하다지만 갑자기 물줄기가 자기들을 덮치자 쓰러져 있던 어미도 울고 있던 새끼도 화들짝 놀라 펄쩍펄쩍 뛰며 물줄기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 더러운 것들을 일단 씻길 생각이었던 남자는 녀석들을 놔주지 않고 물줄기의 세기를 높이며 집요하게 두 벌레들을 추적하며 거품 형태의 비누를 난사했다.
-렛레레~! 레…! 레후! 레궬레레레레레뤱!
한편 친실장의 품에 안겨 있던 구더기는 사실 죽은 것이 아니었는지 온수가 몸에 닿자마자 금방 혈색을 되찾고 우렁찬 울음소리를 질렀지만 쉬지 않고 들이치는 물줄기를 잔뜩 마셔버려 가사 상태에서 부활하자마자 익사할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그 모습을 목격한 남자가 깜짝 놀라 물줄기를 돌린 덕분에 정말 죽지는 않을 수 있었다.
-데… 데스으으으으으으!
-테치…
한편 갑작스러운 물벼락에 놀랐던 친자도 이내 자신들을 덮치는 이 물줄기가 따듯하고 향기나는 거품까지 동반한 기분 좋은 것이라는 걸 깨닫자 금방 태세를 바꾸고 남자가 주는 물세례를 기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남자도 편하게 녀석들을 씻길 수 있었고 자신의 어미와 언니가 정체 모를 것을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맞이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구더기도 방금 전까지 익사할 뻔한 것을 잊어먹고 즐거운 표정으로 가족들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뎃!
-테치!
-레후~
하지만 남자는 방금 전 구더기가 고작 3초 가량 물줄기를 맞고 죽을 뻔한 것을 떠올리고 구더기를 피해 물줄기를 멀리 떨어트렸다. 갑자기 아와아와를 즐기지 못하게 돼 어리둥절하던 친자는 곧 남자가 구더기를 피해 물줄기의 방향을 튼 것을 확인하고는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며 노기를 띄기 시작했다.
-데슷!
이윽고 어미 벌레는 구더기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더기는 어미의 반응을 아예 이해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어미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더욱 답답해진 어미와 새끼 벌레가 구더기를 향한 화를 참지 못하고 발로 밟아 버리려 다리를 크게 들어올린 순간 남자는 슬쩍 상체를 굽혀 구더기를 빼내 세면대에 대충 던져넣었다.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구더기가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던 건지 모두 까먹었는지 구더기는 반구 형태의 세면대 안에서 레후레후 울며 몸을 뒤집었다. 좌우로 움직임을 반복하는 꼬리가 퍽 귀엽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구더기를 향해 한 번 웃어준 남자는 다시 관심을 친자에게 돌려 물줄기를 뿌려줬다. 그러자 분노의 대상을 잃고 당황하던 어미와 새끼 모두 구더기처럼 자신들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다시 환호성을 지르며 남자의 자비를 즐겼다. 남자도 그 모습이 즐거웠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열심히 녀석들의 더러움을 씻겨낸 덕분에 두 마리의 옷과 피부에 묻어있던 운치와 음식물쓰레기 국물, 먼지 등의 흔적이 하나둘 사라졌다.
-뎃!
-테치?
녀석들의 옷과 피부에서 더러운 것들의 흔적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남자는 열심히 놀리던 양손을 멈추고 수도꼭지를 잠궜다. 그러자 갑자기 끊긴 물줄기를 찾던 녀석들은 곧 남자가 범인임을 깨닫고 큰소리로 항의를 하려했지만 남자가 그보다 빨리 두 마리를 깨끗한 수건으로 감쌌다. 갑자기 시야를 가린 수건에 놀란 친자는 몸이 굳어버려 남자에게 따지려던 것도 있고 열심히 발버둥을 쳤지만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대로 수건 표면을 여러번 툭툭 쳐 물기를 제거한 후 드라이기를 틀어 쏘아주었다.
큰소리와 더불어 찾아온 아까와 비슷한 따뜻한 바람. 도대체 화를 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를 복잡한 상황에 갇힌 친자는 기묘한 두려움에 빠진 채 벌벌 떨며 수건에 갇혀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녀석들을 덮어둔 수건을 계속해서 흔들고 두드리는 바람에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는 슬쩍 수건을 치워 안에 있는 친자의 옷을 툭툭 두드려 옷과 머리카락이 전부 마른 것을 확인한 후 드라이기와 수건을 치웠다. 공포의 시간이 지난 후 나타난 남자가 두려움을 주던 것들을 모두 치워냈다. 친자는 이 멋진 스토리에 자기들도 모르게 홍조가 오르면서도 남자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헛짓거리를 하느라 녀석들은 자신들의 몸이 보송해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름의 감사를 하길 기대했던 남자도 녀석들의 노성에 기분이 상했는지 이번에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화를 내기도 민망했던지라 남자는 금방 얼굴을 펴고 다시 녀석들을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양손에 한 마리씩.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상대인 남자가 자신들을 들어올렸음에도 녀석들은 남자의 손에 몸이 닿자마자 금새 초승달 눈을 드며 기분 나쁜 저음으로 웃기 시작했다. 어미 벌레는 한술 더 떠 자꾸 몸을 비비적대며 신음소리를 내기까지 하였다. 다행히 남자는 그 행위가 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덕분에 어미 벌레는 당장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남자는 부엌에 도착해 방금 전 새끼 벌레가 멋대로 발을 들였던 테이블 위에 두 마리를 올려놓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남자 혼자 사는 식탁인 탓에 테이블 위에는 곽휴지와 조미료통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만한 물건이 올라가 있지 않았다. 때문에 두 벌레는 그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남자가 금방 돌아온 덕분에 녀석들은 벌떡 일어나 테이블의 끄트머리로 다가가 울기 시작했다.
-레후~
하지만 남자는 그것들에게 반응하지 않고 녀석들의 옆에 구더기를 내려놓았다. 그 짧은 틈에 어떻게 구더기를 잘 씼겼는지 구더기도 자신의 가족들처럼 한결 깨끗해진 상태였다. 구더기는 재회한 가족이 반가웠는지 어미를 향해 혀를 빼물고 웃으며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었다. 어미와 새끼 벌레도 아까 구더기를 죽이려 했던 것을 잊기라도 했는지 반색하며 녀석의 귀환을 반겼다.
가족의 상봉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옆에 있던 물건을 꺼내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벌레들 또한 시선을 집중했다. 치킨이었다. 그러고보니 남자의 집에 들어온 후 워낙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남자에게 가장 원했었던 물건은 저것이었다. 들생활에서 접했던 음식물쓰레기들과는 격을 달리 하는 냄새를 풍기는 아마아마를 다시 발견한 친자는 극도로 흥분해 뺴액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구더기 또한 미친듯이 침을 흘리며 꼬리를 흔드는 것도 잊고 남자의 손에 들려 흔들리는 치킨 상자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남자는 녀석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 봉지에서 상자를 꺼내 입구를 개봉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발견한 벌레들은 그만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치킨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었다. 노랗다기보다 금색에 더 가까운 튀김옷과 더욱 진해진 맛있는 냄새. 더욱 신난 것은 자실장이었다. 방금 전 먹은 것들은 냄새가 그다지 강하지 않았는데도 무심코 빵콘을 할 정도로 극상의 맛을 뽐냈었다. 분명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지금 남자가 보여주는 음식은 방금 전 음식이 쓰레기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극상의 자태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정신을 놓은 친자는 너나 할 것 없이 테이블의 가장자리에서 남자가 들고 있는 치킨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래봤자 결코 닿을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엸히 양팔을 가혹하게 늘렸다.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남자는 상자에서 닭다리 하나와 허벅지살 하나를 꺼내 녀석들의 앞에 올려주었다. 평소였다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남자는 왠지 오늘만큼은 이러고 싶어 기꺼이 가장 좋아하는 두 부위를 건네주었다.
남자의 마음도 몰라주고 녀석들은 치킨 조각이 테이블에 올려지자마자 미친듯이 달려들어 걸신 들린 것처럼 치킨을 먹어치웠다. 심지어 우지챠도 치킨을 향해 정신없이 기어가 튀김옷을 씹었지만 도리어 이빨이 부러져 버렸다. 이후 몇 번 더 치킨을 먹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미와 자매가 부드러운 살이 있는 부위를 자신들을 향하게 한 탓에 구더기의 눈앞에는 딱딱한 뼈와 튀김옷 밖에 없었다. 결국 절망한 구더기는 이빨이 모두 부러지고 입안이 까여 피가 흐르는 입가를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치킨을 처먹는 일가를 바라보던 남자는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좋아하던 축구 경기는 놓쳤지만 자신의 선행으로 다 죽어가던 일가족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여가를 잃은 대가를 충분히 치뤘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변덕도 아주 잠깐 지나가는 일일뿐. 남자는 이제 일가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판단하고 오직 치킨에만 정신이 팔린 세 마리 벌레의 밑에 깔린 신문지를 들어올렸다.
일가가 그저 테이블의 일부라고 여겼던 신문지는 남자가 이때를 대비해 미리 깔아둔 것이었다. 안전하게 일가를 들어올린 남자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둔 박스에 녀석들을 옮기는 것에 성공했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녀석들이 정신없이 치킨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후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문을 열자 바깥은 이전보다 더욱 추워져 있었다. 이정도면 거의 영하의 온도라 해도 될 정도였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입김을 뿜으며 천천히 대문을 나섰다. 남자의 행선지는 공원이었다. 자신이 어디서 탁아를 당했는지 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데스데슷!
-테챠앗!
-레훼엥…
얼마 후 공원에 도착한 남자는 슬쩍 박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거의 다 먹은 치킨 쪼가리와 어미 벌레를 사이에 둔 새끼 벌레가 네 발로 엎드려 짖고 있었고 구더기는 구석에 박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분위기 좋다가 어쩌다 이렇게 순식간에 태세가 돌변했는지 남자는 도저히 모르겠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제 자기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이제 녀석들을 집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줬으니 나머지는 자신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원래 야외에서 살던 놈들이니 집으로만 무사히 돌아간다면 이 추위에 얼어죽을 일도 없을 것이다. 여차하면 박스와 신문지를 덮고 버티면 그만이다. 원래 이런 녀석들이라고 들었으니까. 하여튼 자신의 친절, 정확히는 변덕은 여기까지다라고 남자는 속으로 선을 그으며 집으로 되돌아갔다.
남자의 변덕으로 오늘밤은 모두가 행복하리라. 선행을 베푼 남자도, 친절함을 받은 일가도, 추위와 내분에 지쳐 저항도 못할 고깃덩어리를 얻게 될 새벽의 들실장들도.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달도.
첫댓글 오~~~ 글 참 잘쓴다.
무지가 불러온 올바른 결말
훌륭한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