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을 복되게 하시는 성령님』 2023. 5.21
베드로전서 4:12-14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들어가며 – 아빠 저게 뭐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가 있고 하실 말씀이 있기에 불러주신 줄 믿습니다. 그냥 왔다가 그냥 가는 시간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저기 저 나무에 앉아 있는 새가 무슨 새냐?”
“아버지 까치에요.”
조금 있다가 아버지가 또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저기 저 나무에 있는 새가 무슨 새냐?”
아들은 조금 퉁명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까치에 까치.”
조금 있다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아들아! 저기 저 나무에 있는 새가 무슨 새냐?”
이번에는 아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말합니다.
“아버지 까치에요. 까치. 몇 번을 말해드려야 해요. 까치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어렸을 때.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너는 아빠에게 ‘아빠 저 새가 무슨 새야?’ 그렇게 물으면 언제나 네 아빠는 ‘아들아 까치란다!’ 또 네가 조금 있다가 ‘아빠 저 새가 무슨 새야?’ 물으면 네 아빠는 일을 하시다가 그 일을 멈추고 ‘아들아 까치란다.’ 그렇게 항상 웃으면서 대답해주셨단다. 그렇게 백번을 넘게 너는 물어봤고 그때마다 네 아빠는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너에게 대답해주셨어. 그 덕에 그때부터 너는 말문이 열린거야.”
하나님 아버지도 어쩌면 몇 번이고 아니 수백번 우리가 똑같은 것을 묻고 또 물어도 우리에게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바빠서, 때로는 우리가 여유가 없어서 주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해도
사는 게 버거워 주님께 감사와 기쁨이 아니라 불평과 원망을 쏟아낼 때도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오늘 그 하나님께 내 마음속에 있는 진심, 사실 우리 모두 주님을 정말 사랑하고 다른 무엇보다 주님을 위해 살고 싶은 그 마음 표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왜냐면 사랑은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사람은 어떤 고백을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2.문동환 박사 이야기
하루는 우물가에 있던 여인들이 지나가는 소년을 보고
“제는 누굴 닮아서 저렇게 못생겼을까? 진짜 못생겼다. 그치”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그 아이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큰 상처가 되었고 그 말은 늘 콤플렉스가 되어서 그 소년을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누굴 닮았을까? 누굴 닮아 이렇게 못생겼을까?’ 그 뒤로 사람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소년이 공부를 잘해서 미국 프리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아야 하는데 논문도 논문이지만 박사논문을 통과하려면 교수님들과 앉아서 논문에 대해 면접-구술시험을 봐야 하는데 교수님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겁니다. 미국은 또 얼굴을 마주 보는 것,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예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겁니다.
그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고 그 여인에게 자신이 받은 상처 고민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내 눈을 봐요. 당신은 진짜 멋져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용기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에요.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요.”
우리 옆에 계신 분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같이 축복하실까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한 번 더요. “용기를 가지세요.”
사랑하는 여인의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열공을 했고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문동환 박사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말에는 이처럼 파괴력도 있고요. 반대로 생명을 살리고 치유하는 능력도 갖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내 말은 과연 어떤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파괴력? 아니면 생명력?
저는 저와 여러분의 입술이 생명을 살리고 치유하는 치유의 능력, 회복의 능력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그런 의미로 12절 말씀 같이 보시겠습니다.
3.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사도 베드로는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단의 과정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냐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은 수천번 넘어져야 걸을 수 있다는 시인의 표현을 들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사람이 살아가는 단계, 단계마다 딛고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정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고백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친구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고3 수험생이라는 연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남자 친구들이 진짜 어른이 되고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군대라는 연단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왜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하냐면 군대에서 눈물 젖은 건빵도 먹어보고 밤하늘 달을 보며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그리워 남몰래 눈물도 훔쳐보고
그런데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런 과정을 겪어야 나중에 사회 나와서 모진 세상살이를 이겨내고 버틸 수 있다는 겁니다.
사회생활이 보통 힘든 게 아니잖아요?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된다는 것, 한 집안의 가장이 된다는 것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멍에와 무게를 감당하는 단계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연단 받지 못했는데 갑자기 남편이 되고, 연단 받지 못했는데 그래서 버티고 일어설 힘이 아직 없는데 아빠가 되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나에게 연단이 시간이 찾아왔다면 오늘 말씀처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해 지금 나를 연단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지금 나늘 연단하시는구나!”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찢어지는 구리나 쉽게 변질되는 알루미늄이 되길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믿음이 정금과 같이 되길 원하십니다.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연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은 그렇게 놓고 보면 이상하게 볼 것이 아니라 크게 보면 내가 정금이 되는 과정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내 가정이 정금이 된다는데 이상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욥처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 고백 위에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시험에 대한 베드로의 말씀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임할 때 오늘 말씀을 보면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12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같이 해볼까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자.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워하자.”
내 감정이 조금 상했다고 거부하지 말고 내 자존심이 조금 상처를 입었다고 반대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오히려 즐거움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시험을 대하는 태도와 목적이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천 번을 배는 ‘연’ 만 번을 찌르는 ‘단’ 이 연단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냐면? 자기 성공, 자아 성취 그래서 자아도취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연단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연단을 받고 연단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고 마침내 정금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임하면 연단의 시간이 임하면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나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기 때문에
두 번째 사도 베드로는 14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위해 치욕을 받으면 정말로 복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내가 무시를 당하고 망신을 당해서 치욕과 모욕을 받아도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될 것을 믿으십니까?
저는 토요일이 되면 성전을 돌보는 권사님들의 손길을 보면서, 주방에서 봉사하시는 권사님들의 손길을 보면서
“하나님 가장 어두운 곳, 가장 더러운 곳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저들을 축복하여 주소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이들이 복을 받아야. 저들의 가정이 잘 돼야. 다른 성도들도 그 복을 사모하며 더 헌신의 자리로 오지 않겠습니까?”
초대교회 감독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날 우연히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비아돌로 로사’를 지나가다 로마 병정들에 의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예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는 치욕과 고통을 당했지만, 그의 두 아들은 초대교회 감독이 되었고 로마서 16장 13절을 보면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그의 아내가 바울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기 때문에, 아니 주님께서 복되게 하시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던 중, 예수 때문에, 교회 때문에 망신을 당하거나 치욕을 받으셨습니까? 기뻐하십시오. 오히려 그 망신이 변하여 나의 기쁨이 되고 그 치욕이 변하여 복이 되도록 주님께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5.하나님의 영이 계심이로다
마지막 세 번째 사도 베드로는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복인 줄 알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 중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의지로 감사할 수 있고 내 능력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그 일은 영광의 영, 하나님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내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슴이 뜨겁게 뛰어야 합니다. 내 입에서
“내가 성령 받았다. 나에게 성령이 오셨다. 나는 성령의 사람이다.” 이렇게 고백 되어질 때 우리는 연단 중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치욕을 당할 때 그것을 복으로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화의 성도 여러분!
다음 주일은 성령 강림주일 입니다. 2,000여 년 전 마가의 다락방 120 문도에게 급하고 강한 성령의 바람이 불의 혀와 같이 각자에게 임하셨듯이 우리 모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위에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