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오늘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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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운세] 4월 11일 목요일(음력 3월 2일 丁未) 24년생 근심 걱정을 줄일 것. 36년생 마음은 있으나 이뤄지지 않는다. 48년생 신경계통 질병 조심. 60년생 등잔 밑이 어두운 형상. 72년생 지식과 경험의 폭을 넓히도록 할 것. 84년생 너무 이기적이면 주변 사람이 없다.
꽃말 : 와 주세요 분류 : 꽃고비과 원산지 : 유럽 [꽃말 이야기] 보랏빛의 가엾은 꽃. 높이 2미터 정도의 다년초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평안북도와 함경도의 높은 지대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7~월에 피는 이 꽃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별명 '야곱의 사다리(Jacob's Ladder)'. 천사가 오르내리는 사다리, 따라 올라가면 천국까지 갈 수 있습니다. 잎새가 줄기에서 번갈아 가며 나는 모습이 사다리와 비슷하다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꽃점 이야기] 슬플 때, 쓸쓸할 때 별이 지듯 마음 속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 당신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웃는 얼굴이니까요. 연인만은 알고 있습니다. '와 주세요'하고 별에 기원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꽃고비 Bleminium Coeruleum-통화식물목 꽃고비과의 쌍떡잎식물 :
4월 11일 오늘의 역사 1506 (조선 연산 12) 연산군, 사간원 폐지 1914 현대사 연구가 송남헌 [宋南憲, 출생, 1919 국제노동기구(ILO) 설립 1929 자원조사법 공포 (12.1시행) 1933 시인 고은 [高銀] 출생 1943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가 김명식 사망 1959 장훈 일본 프로야구 데뷔 첫 안타 홈런 1970 경남 은행 개점 1972 치안국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 재건 등 획책한 고정간첩 9명 검거발표 1982 전북 남원군 아영면 고분서 가야시대의 철제갑옷 등 27점 발굴 2001 국민은행-주택은행 합병 타결 2004 민족사관고등학교 조기졸업생 박 원희양(17). 미국 10개 명문대 동시 합격 2004 탤런트 이미경씨 암투병 끝에 사망 2006 신상옥 감독 별세 2006 日정부 납북 메구미 남편은 78년 납북 김영남씨 2007 서울서도 소나무 재선충병 발견 2008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2009 김동규 전(前) 국회의원 별세
해 외 145 로마 제국 20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출생. 593 일본 성덕태자(聖德太子)섭정 672 77대 로마 교황 아데오다토 2세 취임. 678 78대 로마 교황 도노 선종 1241 킵차크 칸국의 바투 칸이 사조강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라 4세를 무찌르다. 1713 독일 오펠사 자동차 시속 238Km기록 수립 1713 지브롤터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영국 식민지에 편입 1810 롤린슨 Sir Henry Creswicke Rawlinson 출생 1869 노르웨이의 조각가 바겔란(Vigeland, Gustav,) 출생 1893 [애치슨 라인을 설정한 전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 출생 1902 엔리코 카루소. 최초로 호텔서 음반 녹음 1905 헝가리 시인 요제프 출생 1919 국제노동기구(ILO) 설립 1939 영화사의 큰 별 클라크 케이블의 결혼 1948 이란. 아제르바이잔에 계엄령 선포 1970 태평양 한복판 하와이에서 화산 폭발 1970 미(美) 아폴로 13호 우주발사 후 사고 1987 미국 소설가 어스킨 콜드웰 사망, 1991 유엔 안보리서 걸프전 종전 공식 선언 1997 앙골라 내전 종식하고 22년 만에 단일거국 정부 출범 1999 인도 핵탄두 탑재 중거리 대륙간 탄도미사일 (ICBM) 아그니 시험 발사 1999 다우다 말람 완케 소령 니제르 대통령에 취임 2007 영국서 운전자 필요없는 자동차 등장 2009 태국 반정부시위로 아세안+3 정상회담 취소
2009 - 김동규 전(前) 국회의원 별세 김동규(金東圭·77) 전 국회의원(12·13대)이 11일 오후 5시 노환으로 별세했다.김 전 의원은 충북 청주 출생으로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상공부 중공업 차관보, 민주당 총재비서실장, 대한주택공사 사장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복순(홍익의원 피부과 원장)씨와 아들 진욱(엘림테크놀러지 대표)·진상(화인C&B 대표), 사위 강철원(YTN 보도국 해설위원)·이건웅(법무법인 양헌 변호사)·남익현(서울대 경영대 교수)·박형천(연세대 의대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4일 오전 8시30분. (02)2227-7556 조선닷컴 2009.04.12 23:52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2007 - 서울서도 소나무 재선충병 발견 소나무 재선충병이 서울에서도 발견되는 등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가 위험하다 소나무재선충병이 마침내 서울까지 상륙했다.
2007 - 영국서 운전자 필요없는 자동차 등장 레이저 센서 장착..자동운전 SW 내장 운전자 없이 자동으로 가는 자동차 시대가 도래할 전망이다. 운전자 없이 인간의 눈처럼 작용하는 레이저 센서를 장착한 자동차가 11일부터 영국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선보이고 있다고 영국 채널 4 TV가 보도했다. 이 자동운전시스템을 장착한 차량은 작년에 생산된 폴크스바겐 파사트 2.0 TDI. 자동차 전면과 뒷면에 각각 눈 같은 레이저 센서를 부착했다. 이 레이저 센서는 최대 200m 거리 안에서 도로 상태, 건물, 다른 차량, 보행자 등 차량 주변 환경을 탐지할 수 있다. 센서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는 자동 운전 소프트웨어를 내장한 차량의 컴퓨터에 전달돼 운전명령을 내린다. 이 자동차는 11월에 미국 국방부 산하 첨단국방기술연구청(DARPA) 주최로 열리는 60마일 코스 어번 챌린지 대회에서 다른 무인 자동차와 운전 경쟁을 벌일 예정이다. 이 특별한 폴크스바겐 자동차는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탠더드 모델 자동차로서는 DARPA 대회에 처음 출전하는 것이다. 독일의 자동차 센서 회사인 이베오가 개발한 레이저 센서를 장착한 폴크스바겐 자동차는 내년쯤 소규모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제 보통 자동차에 이 기술이 도입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베오의 최고 경영자인 울리히 라게스는 "우리는 자동차 기술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위치를 놓고 싸우고 있다"며 "특히 대상물 및 환경 탐지 분야에서 우리의 혁신적인 레이저 기술은 경쟁업체들보다 몇 년 앞서 있다"고 자랑했다. 지난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회의에서 과학자들은 로봇 운전 무인 자동차가 2030년쯤 상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진형 특파원 kjh@yna.co.kr (런던=연합뉴스) /한겨레 2007-04-12 오후 05:11:25
2006 - 日정부 "납북 메구미 남편은 78년 납북 김영남씨" 4월11일 일본인 납치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남편으로 확인된 김영남씨. 납북 일본인을 처(妻)로 둔 북한의 대남간첩교관 ‘김철준’이 DNA 확인을 통해 납북자 ‘김영남’으로 확인된 것이다. /조선
2006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신상옥 사망 - 한국의 영화감독 신상옥(申相玉) 사망 신상옥 [申相玉, Shin Sangouk, 1926.10.18~2006.4.11] 영화감독 신상옥(申相玉)씨가 4월11일 오후 11시39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6세. 신씨는 1952년 영화 ‘악야(惡夜)’로 감독에 데뷔했으며 1953년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결혼했다. 1978년 홍콩에서 납북돼 1986년 북한을 탈출했고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평생을 영화계에 몸담아 왔다. 대표작으로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상록수’,‘ 연산군’,‘ 빨간 마후라’ 등이 있다. 신씨는 최근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 통원치료를 받아왔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족은 부인 최은희씨와 2남 2녀가 있다. /조선
2004 - 민족사관고등학교 조기졸업생 박원희양(17), 미국 10개 명문대 동시 합격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한 박원희양(17)이 2004년 4월 11일 미국의 명문대학 10곳에 동시 합격했다고 대전시교육청이 밝혔다. 박양은 또 지난해 10월 제2기 삼성 이건희 해외유학장학생으로 선발돼 연간 5만달러씩 4년간 장학금을 ‘예약’한 상태이다. 박양은 대전 전민중학교를 거쳐 지난 2월 민족사관고를 2년 만에 수석으로 조기 졸업했다. 박양은 또 미국 대학의 교양과정을 미리 고교에서 이수하는 11개 AP(Advanced Placement·대학 사전 학점 취득제) 과목에서 모두 5.0 만점을 받았다. 특히 박양은 해외 체류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미국 대학 진학 적성검사인 SATⅠ에서 1600점 만점에 1560점을 받았고, 미국 현지 학생들도 어렵다는 SAT II의 writing(논문) 과목에서 800점 만점을 받는 놀라운 실력을 과시했다. 박양은 고교 연극부장을 맡아 2003년 전국 영어연극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취미로 검도를 열심히 배우는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1남1녀 중 맏이인 박양은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해 불치병 치료제나 신약을 개발하고 노벨 과학상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조선
2004 - 암 투병 탤런트 이미경씨 별세
암 투병 탤런트 이미경씨 별세 폐암으로 투병 중이던 탤런트 이미경씨가 세상을 떠났다. 44세. 李씨는 11일 오후 10시30분쯤 서울 정릉 자택에서 가족과 대학 동창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가족들은 시신을 화장해 경기 일산의 납골당에 안치키로 했다. 李씨는 지난해 10월 말 SBS-TV 사극 '왕의 여자'에 출연하던 중 성대에 통증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병원과 집을 오가며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李씨의 한 친지는"유언을 남기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조인스 뉴스 2004.04.12 19:29
1999 - 다우다 말람 완케 소령, 니제르 대통령에 취임
다우다 말람 완케 니제르 대통령. /조선 다우다 말람 완케 소령, 니제르 대통령에 취임 니제르 대통령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대통령 경호대장 다우다 말람 완케 소령(49)이 1999년 4월 1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새 강자로 11일 등장한 완케 소령은 외부 세계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겸손하고 정직한 군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브라힘 바레 마이나사라 대통령은 수도 니아메의 공항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목격자들은 바레 대통령이 다오우다 말람 완케 소령 휘하의 대통령 경호부대원들로부터 기관총 세례를 받아 사망했다고 전했다. 총격 과정에서 군인 3명, 민간인 1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완케 사령관은 9개월 뒤 자유 선거를 치르기까지 과도기 니제르 군정을 이끌 대통령 겸 `민족화해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고 현지 방송이 보도했다. 군부는 대법원과 국회 해산, 헌정 중단, 지난 2월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조선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제15회 국회의원선거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조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15대 총선은 총유권자 3148만8294명 가운데 2011만8528명이 투표를 마쳐 63.9%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시도별로는 경북이 71.6%로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고, 인천이 60.1%로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정당별 의석수는 전체의석 299석(전국구 46석 포함) 가운데 신한국당 139석(전국구 18석), 국민회의 79석(전국구 13석), 자민련 50석(전국구 9석), 민주당 15석(전국구 6석)으로 집계됐다. 무소속 후보도 16명이 당선됐다. 전문가들은 15대 총선이 완승과 완패없는 선거였다고 평가했다. 철저한 지역분할구도 속에서 당초 집권당인 신한국당이 크게 고전할 것이란 전망속에 출발했던 이번 총선은 신한국당이 일단 패배를 모면하고 원내 과반수에 근접하는 결과로 막을 내렸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상대적으로 답보상태에 그쳤고,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이런 가운데 분전했다. /조선 대한민국 15대 총선이 실시되다. 대한민국 제15대 총선은 대한민국 제15대 국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이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하였고 총 299명(지역구에서 253명, 비례대표인 전국구에서 46명)을 선출하였다. 선거 정보 /위키백과
1995 마산상고, 60년 마산의거로 숨진 김주열 열사에게 명예졸업장 수여 김주열은 1944년 10월 7일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재계(金在桂)와 어머니 권찬주(權燦珠)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위로는 누이가 둘 있고 아래로 동생이 있었다. 할아버지 김태종(金泰鐘)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4월 11일 시신 인양으로 4·19혁명을 이끌어낸 김주열은 4월 14일 고향 선산인 남원시 금지면 우비산 자락에 묻혔으며, 1995년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는 김주열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고, 그 졸업장은 김주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1995 - 대종교 안호상 총전교와 김선적 종무원장, 단군릉 참배 위해 방북 - 안호상 대종교 총전교 방북(1995)
*건축가. 호는 오심(吾心). 평양(平壤) 출생. 1941년 일본 요코하마[橫濱]고등공업학교를 마치고 41∼46년 도쿄[東京]의 마츠다 히라다[松田平田] 설계사무소에 근무하였다. 4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가 되었고, 52년부터 4년간 프랑스 파리 <르코르뷔지에 건축연구소>에서 건축 및 도시계획을 연구하고, 르코르뷔지에와 협동하여 다수의 작품을 냈다. 56년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김중업합동건축연구소를 열었으며 57년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56∼65년 국전(國展) 심사위원, 71∼75년 프랑스 문화부성 고문건축가, 76년 미국 로드아일랜드미술대학 교수, 77년 미국 하버드대학 객원교수, 82년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기획위원을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국회의사당(1953, 파리)》 《종합아파트(1954∼55, 낭트)》 《원자력연구소(1959)》 《삼일로빌딩》 《주한 프랑스대사관》 등이 있고 저서에 《김중업-건축가의 빛과 그림자》가 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87 미국 소설가 어스킨 콜드웰 사망, 1987 미국 소설가 어스킨 콜드웰 ( [ Erskine Preston Caldwell, 1903-1987.4.11.]사망, *미국 소설가. 조지아주 출생. 아버지가 순회목사였으므로 소년시절부터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다. 대학시절부터 창작을 시작, 장편 《타바코 로드(1932)》 《신의 작은 토지(1933)》를 잇따라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들 작품은 남부 백인 빈농의 무지·나태·교활·물욕·섹스 등을 유머러스하게 그렸는데, 그 밑바닥에는 빈곤이 주는 비참한 생활을 고발하는 사회비판 정신이 깔려 있다. 역시 남부를 배경으로 한 《순회목사(1935)》 《7월의 소동(1940)》도 목사나 흑인 린치사건을 통하여 가난한 백인들의 광태를 희화화하였다. 그 밖에도 남부의 빈농과 인종문제에 관심을 나타낸 작품이 많다. 제 2 차세계대전중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몰두한 시기도 있었으며 사진작가인 부인 M.B. 화이트와 함께 쓴 르포르타주에는 반파시즘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단편집으로 《떠오르는 아침해에 무릎꿇다(1935)》 《조지아 보이(1943)》와 자서전 《경험이란 이런 것(1951)》 등이 있다.
1985년] 알바니아 최초의 공산주의자 국가원수인 에베르 호자(Hoxha, Enver) 사망
1983 서울시, 목동-신정동 택지 개발 계획 발표
면적 5.34㎢, 인구 16만 4267명(2008)이다. 서울특별시 양천구에 속한 동이다. 양천구의 동북쪽에 있으며, 동쪽의 영등포구 양평동, 남쪽의 신정동, 북서쪽의 염창동과 접한다. 조선시대까지는 양천군 남산면 월촌리 내목동·외목동이었다. 1914년 김포군 양동면(陽洞面) 목동리(木洞里)에 속하였고,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염촌동(鹽村洞) 관할이 되었다. 1970년 염창동(鹽倉洞)으로 바뀌었고, 1975년 염창동에서 분리되었다. 1977년 강서구를 거쳐 1988년 양천구 관할이 되었다.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작은 마을 단위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으나 1970년대부터 대규모 주택단지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983년 목동지구 신시가지 개발 계획이 발표되었고, 1988년에 신시가지가 완성되었다. 목동종합경기장, 서울국제우체국, 서울세관출장소, 기독교방송국, SBS, 현대백화점 목동점, 파리공원 등이 있다. 안양천 제방 위에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 도심지역 철거민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빈민들로 이루어진 빈민촌이 있었으나,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단지 조성과 함께 사라졌다. 자연마을 중 달거리마을은 월촌(月村)이라고도 하는데, 용왕산 동북쪽에 형성된 마을로서 용왕산에서 떠오르는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말은 용왕산 서쪽의 목동 가운데 있던 마을로서 내목동(內木洞)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의 목4동 북쪽과 목3동 남쪽에 해당한다. 150년 된 느티나무가 남아 있어 옛 마을의 흔적을 보여준다. [출처] 목동 [木洞, Mok-dong ] | 네이버 백과사전
1977 언론인. 정치인 전 총리 장기영[張基榮.1916-1977.4.11]사망, *언론인·체육인·정치인. 호는 백상(百想). 서울출생. 1934년 선린(善隣)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하였다. 48년 한국은행조사부장, 50년 한국은행부총재를 거쳐 52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54년 《한국일보》 《코리아타임즈》를 창간하고 사장을 겸하였다. 60년 《서울경제신문》 《소년한국일보》를 창간했으며, 이듬해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회 초대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어 64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기용되었으며 66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아시아경기연맹회장·국제올림픽위원에 선임되었다. 69년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였고, 73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어 남북조절위원희 부위원장,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공동위원장대리를 지냈다. 수교훈장 광화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독일 1 등 대십자공로훈장 등을 받았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75 시인 다형 김현승 세상 떠남 김현승(金顯承)에 대하여1913년∼1975년. 시인.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다형(茶兄). 평양 출생.
기독교 장로교목사인 아버지 김창국(金昶國)과 어머니 양응도(梁應道)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목회지(牧會地)를 따라 제주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7세 되던 해에 전라남도 광주로 이주하여 기독교계통의 숭일학교(崇一學校)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숭실전문학교 문과 3년을 수료하였다. 그뒤 모교인 숭일학교 교사(1936), 조선대학교 교수(1951∼1959), 숭전대학 교수(1960∼1975),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1970) 등을 역임하였다. 문단활동은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 장시(長詩)〈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 양주동(梁柱東)의 추천으로 《동아일보》 (1934)에 게재되면서부터 시작된 이후, 낭만적 장시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읍니다〉(1934)‧〈새벽 교실(敎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뒤 1953년부터 광주에서 계간지 《신문학(新文學)》을 6호까지 간행하였으며, 이때의 시로 〈내가 나의 모국어(母國語)로 시(詩)를 쓰면〉(1952)이 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정신과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을 시로 형상화하여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었다. 제1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 (1957)와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 (1963)에 나타난 전반기의 시적 경향은 주로 자연에 대한 주관적 서정과 감각적 인상을 노래하였으며, 점차 사회정의에 대한 윤리적 관심과 도덕적 열정을 표현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이미지들의 특징은 가을의 이미지로 많이 나타나는데, 덧없이 사라지는 비본질적이고 지상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꽃잎‧낙엽‧재의 이미지와, 본질적이며 천상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뿌리‧보석‧열매의 단단한 물체의 이미지의 이원적 대립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표현한 시적 방법의 특징은 절제된 언어를 통하여 추상적 관념을 사물화(事物化)하거나, 구체적 사물을 관념화하는 조소성(彫塑性)과 명징성(明澄性)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후기 시세계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제3시집 《견고(堅固)한 고독》 (1968)과 제4시집 《절대(絶對) 고독》 (1970)의 시세계는 신에 대한 회의와 인간적 고독을 시적 주제로서 줄기차게 추구함을 보여준다. 1974년에는 《김현승전시집(金顯承全詩集)》을 펴냈고, 유시집(遺詩集) 《마지막 지상(地上)에서》 (1977), 산문집 《고독(孤獨)과 시(詩)》 (1977)가 간행되었다. 문학개설서로는 《한국현대시해설》 (1972)이 있다. 1955년 제1회전라남도문화상을 받았고, 1973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광주 무등산도립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1975 서울농대생 김상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의하여 할복 자살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대생 김상진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했다. 윤보선은 김상진을 김상진군은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이 논리정연하고 위정자의 오류와 잘못을 세련된 문장으로 지적하였다. 결코 감정을 앞세운 글이 아니라 사려깊은 논리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으로 가득찬 애국적 충고문이었다[118]라고 평가하였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75년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갖기로 했다.[118] 4월 22일 윤보선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제지당하였다. 윤보선은 명동성당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주학생의 명복을 빌어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그의 안국동 사저에 모여들더니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다. 윤보선은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라고 하였다.[118]
1975년] 국립민속박물관 개관
1972 치안국, 통혁당(통일혁명당) 재건 등 획책한 고정간첩 9명 검거발표, *치안국은 통일혁명당 재건을 목적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간첩단의 핵심인물 9명을 검거했다고 1972년 4월 11일 발표했다.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의 활동이 외부세계로 드러난 것은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의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의 진상발표에 의해서였다. 이 조직은 북한노동당의 실질적인 대남 지하당 조직으로서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수도권 장악과 요인 암살 및 정부 전복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58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에는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었다. 이들 간첩단은 1969년 1월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상의 간첩죄·내란음모죄 등이 적용돼 핵심인물인 김종태, 김질락,이문규 등 5명은 사형, 신광현 등 4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21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관련사진 /조선
1970 - 미국 아폴로 우주선 발사-산소통 폭발로 실패 아폴로 13호 발사, 우주사고
어제의 오늘]1970년 우주선 아폴로 13호 발사 ㆍ성공적인 실패 “휴스턴,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지구로부터 32만1860㎞ 떨어진 우주공간에서 날아온 이 한마디로 휴스턴의 미항공우주국(NASA) 우주비행관제센터는 초긴장에 빠져들었다. 아폴로 13호는 당초 세 번째로 달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착륙지점인 프라 마우로 고지를 향해 날아가다가 기계선의 산소 탱크 하나가 갑자기 폭발했다. 이 폭발에 의해 1번 탱크도 손상됐다. 기계실 산소탱크 2개가 모두 고장난 것이다. 계기판의 산소 잔량 표시는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고, 수시간 후에는 기계선의 산소가 완전히 비어버릴 터였다. 막막한 우주공간에서 직면한 절체절명의 위기. 휴스턴에서 찾아낸 방법은 ‘자유 귀환 궤도’ 방법이었다. 우주인들은 동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 사령선을 지구 재진입시 활용하기 위해 일시 폐쇄하고 착륙선을 구명정으로 삼아 일단 피신했다. 달 인력을 이용해 우주선이 달 궤도를 돌고 나온 후 착륙선 엔진을 작동시켜 지구 귀환 궤도에 오른 아폴로 13호는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귀환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위기가 닥쳤지만 휴스턴과 우주인들이 기지를 발휘해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소멸된 착륙선을 뒤로한 채 사령선은 사모아섬 남서, 서경 165도 22분, 남위 21도 38분의 태평양에 무사히 도착했다. 류형열기자 /경향신문 2009-04-10 18:06:49
1965 대중가수 이난영[ 李蘭影, 1916 - 1965.4.11 ]사망, *대중가요 가수. 본명은 옥례(玉禮). 전라남도 목포(木浦) 출생. 16세 때 삼천가극단(三川歌劇團)의 제주도 순회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인정받음으로써 순회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삼천가극단의 일본 순회공연 때 작사가 강사랑(姜史郎)에게 발탁되어 오케이레코드사의 이철(李哲)을 만나 1932년 손목인(孫牧人) 작곡의 《불사조》를 처음 취입하였다. 34년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 작곡의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 뒤 《목포는 항구다》 《대망의 푸른 꿈》 등의 대표곡을 불러 대중가요 가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광복 후 무대가수로 활동하였고, 남편 김해송(金海松)이 납북된 뒤 KPK악단을 운영하였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체
부산 MBC의 김주열 군 시체 인양 보도로 마산에 유혈 데모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저항하다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다. 김주열(金朱烈,1943년 ~ 1960년)은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학생이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60년 3월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 참가 후에 실종되어 그해 4월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과 참혹한 시체의 발견은 대한민국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묘는 경남 마산시 구암동 국립 3.15 민주묘지에 있다. 실묘는 그의 고향인 전북 남원시 금지면에 있다. /위키백과 1960 부산 MBC의 마산상고생 김주열[ 金朱烈, 1944 - 1960.3.15 ] 시체인양 보도로-마산서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 가열 유혈 데모, *[김주열]-4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사건 희생자.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생. 농가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 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지원하였다.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던 중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여 형 김광렬(金光烈)과 함께 데모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이날 경찰대의 데모 진압으로 8명이 희생되었는네, 6명은 미성년자였다. ★1960년 4월 11일 실종되였던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 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자, 이에 분노한 마산시민의 2차 시위를 계기로 다시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를 유발하였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4·19]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일어난 민주주의혁명. 4·19의거, 4·19혁명 또는 4월혁명이라고도 한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에 동조한 시민들이 연합하여 전개되었다. 그 결과 이승만(李承晩)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집권여당인 자유당이 몰락하였으며, 허정(許政) 과도정부를 거쳐 내각책임제 개헌에 의한 7·29총선으로 장면(張勉)을 국무총리로 한 제 2 공화국이 출범하였다. [배경]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도적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교육계에서는 민주주의교육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어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식시켰다. 또한 6·25 이후 진전된 도시화와 산업화는 이러한 민주주의이념을 더욱 빠르게 보급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여 4·19가 일어날 즈음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높았고 이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이러한 국민의 의식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그동안 정당무용론(政黨無用論)을 주장하던 이승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도구로 51년 자유당을 창설하였고 이후 자유당은 집권여당이 되었다. 이로써 1948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후 1인 1당에 의한 장기집권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정권교체를 목표로 성장해 온 야당과, 여당의 부정사건을 비판하는 언론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그동안 전적으로 의존해 오던 미국의 원조가 57년부터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원조의 감소는 국민의 경제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정치권력과 결탁된 재벌기업을 제외한 중소기업과 민족자본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또한 6·25 이후 계속된 물가상승과 조세부담률 증가, 농촌경제의 파탄 등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불신임을 가중시켰다. 이 밖에 고등실업자의 누적과 학원의 정치도구화 및 이데올로기적 경직화에 의한 학생운동·사회운동·노동운동 등에 대한 탄압도 사회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당은 60년 실시될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승리를 확신할 수가 없게 되었다. 1956년 선거에서 자유당의 대통령후보로 이승만, 민주당에서는 신익희(申翼熙)가 나왔고, 부통령에는 이기붕(李起鵬)과 장면이 출마하였다. 선거를 10일 앞두고 민주당의 신익희가 갑자기 죽자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었고, 부통령에는 장면이 당선되었다. 선거 결과 다음 선거에서 이승만과 자유당에게 승산 없음이 거의 확실해진 것이다. 이에 자유당은 집권유지를 위한 일련의 강압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58년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제출하였는데, 이것은 다음 선거에서 야당과 언론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안이 국내외로부터 비난을 받자 자유당은 무술경위를 동원하여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59년에는 정치깡패와 폭력배들을 가입시킨 반공청년단을 결성하였으며 야당의 집회활동을 방해하였다. 또한 정·부통령선거의 러닝메이트제를 위한 개헌을 주장하였고 산업금융채권을 발행하여 70억 환에 이르는 정치자금을 모금하였다. 60년 야당지도자로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간 사이에 정부는 2월 1일부터 선거유세기간으로 정하고 3월 15일을 선거일로 공고하였다. 조기선거 실시의 이유로는 농번기 회피, 정국안정 등을 들었는데, 2월 15일 조병옥이 심장병으로 죽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해졌다. 따라서 자유당의 관심은 부통령선거에 집중되었다. 부통령이 중요시되었던 것은 고령인 대통령을 대신하여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이 부통령이었고, 다음 대통령에는 현직 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개] -선거유세기간인 2월 28일 대구에서는 그동안 관제데모에 동원되어 오던 학생들이 시위를 하였다.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직접적인 원인은 학생들의 민주당 강연회 참석을 막기 위해 일요일에 등교를 강요한 데 있었다. 이날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학교를 비롯한 고등학교학생 1800여 명이 <학원자유화> <학원의 정치도구화 반대> 등을 내세우며 도청광장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을 제지하려는 경찰과 시위학생들이 충돌하여 20여 명이 부상당하고 200여 명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 사이에 격심한 논란이 일어났으며 전국적으로 시위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3월 8일 대전에서는 시위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하여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5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원자유화와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한편 전라남도 여수(麗水)·광산(光山)에서는 반공청년단과 폭력배들에 의해 민주당원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윽고 선거일인 3월 15일 제 4 대 대통령, 제 5 대 부통령 선거 및 개표가 실시되었다. 이날 자유당과 반공청년단에 의한 부정선거는 극에 달하여 민주당 출신의 선거참관인이 반공청년단에게 구타당하거나 투표소에서 쫓겨나기도 하였고, 사전대리투표·무더기투표 및 3인조·5인조 등 조직투표에 의해 개표 때에는 자유당 지지표가 유권자 총수보다 많이 나오는 결과가 빚어졌다. 선거기간에는 조용했던 마산(馬山)에서는 이날 첫번째 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시위는 마산시 민주당원들이 3·15선거의 부정을 폭로하면서 이루어졌다.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여 행진하다가 경찰과 대치하였는데 이때 정전이 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고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이에 맞섰다. 이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은 시위대의 해산이 아닌 살상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이 국회조사단에 의해 밝혀졌다. 마산은 다른 지역과 통신이 두절되었고 경찰은 이날 사건이 공산당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조작하였다. 3월 18일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내무부장관·치안국장 등이 사임하였다. 이승만은 마산사건을 난동으로 규정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국회와 내무부는 따로 마산사건을 조사하였다. 4월 11일 마산사건 때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金朱烈)의 시체가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다.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20㎝ 정도의 대무장폭도용 최루탄이 박혀 있는 시체를 확인하였다. 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 2만여 명이 경찰의 잔혹성을 규탄하는 시위를 하였다. 마산사건은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킴으로써 4·19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9일 서울에서는 오전부터 10만여 명에 달하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연합시위대가 시위를 시작하였다. 오후부터 경찰의 본격적인 발포가 시작되면서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정부는 5시부터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를 동원하여 시위대와 동조자의 구분 없이 무차별진압을 감행하였고 시위대도 이에 맞서 탈취한 총으로 경찰에 발포함으로써 평화적인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하였다. 밤 10시경 계엄군이 진주하면서 시위는 수그러들었다. 이날 시위로 전국에서 6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21일 전국의 소요사태에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4월 22일 시국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정부는 사태수습을 위해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을 공직에서 해임하였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미온적인 수습태도에 시민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시위에 가담하면서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 시위는 계엄령으로 위축되었던 시민을 다시 시위에 끌어들였고, 미국은 D.D. 아이젠하워대통령의 한국 방문 취소와 원조 중지 등으로 이승만에게 경고하였다. 한편 민주당은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과 정·부통령선거의 재실시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4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시위군중이 서울 중심가로 모여 이승만의 사퇴를 요구하며 광화문으로 행진하였다. 광화문에 대기중이던 군대는 시위대에 발포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였으며, 11시경 이승만은 대통령직 사퇴와 정·부통령 선거의 재실시 등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서가 수리되면서 허정이 권한대행이 되었으며, 국회는 부정선거와 관련하여 의원 8명의 사퇴를 받았다. 한편 자유당 의원들은 개헌 후 총사퇴할 것을 발표하였다. 4월 28일 과도국무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달성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학생들은 질서회복과 학교로의 복귀를 결의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7월 29일 민의원·참의원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이 압승하였다. 선거결과에 따라 대통령 윤보선(尹潽善), 국무총리 장면의 제 2 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결과] -4·19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정치참여의 의식이나 욕구가 없었기 때문에 혁명적 과제의 수행을 새로운 정부에 맡기고 학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자유당정권 퇴진 후 허정과도정부는 처음에 표명했듯이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경제 건설과 군부의 정화 등 그동안 누적되어 온 문제의 해결, 부정축재자의 처리, 부정선거 관련자의 처벌 등에 대한 정부의 보수적이고 온건한 접근은 혁명세력은 물론 혁명에 동조·참가하였던 시민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 전반적인 불만은 7·29총선으로 출범된 장면정부에 과대한 기대감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허정정부는 단기간에 혁명적 요구를 수행할 만한 능력이나 정치적 기구들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은 제 2공화국의 장면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장면정부가 혁명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기구들, 즉 경찰과 법원 등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들 기구의 고위간부들이 처벌대상이었고, 이들의 처벌은 곧바로 사회체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과 법적 절차의 준수를 표방하던 장면정부로서는 처벌대상자에 대한 무거운 형량을 법원에 요구할 수 없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만족할 수 없었던 혁명세력들은 혁명의 완수를 위한 항의와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의 확산은 장면정부를 성립시킨 혁명세력이 장면정부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제정된 특별법은 민주당의 신·구파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특별법의 제정으로 장면이 이끄는 행정부는 민주당 구파에 밀려났고 장면 자신도 중요한 의안에 대해서는 민주당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구파가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장면을 중심으로 한 행정부는 약체화되어 혁명과제를 수행할 힘을 잃게 되었다. 정부 내부의 분열, 정부와 국민 사이의 의식의 불일치 등은 사회혼란을 가중시켜 결국 군부 소장파에 의한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키게 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실천을 목표로 일어났던 4·19는 사회질서 회복과 정부의 통치력 확보의 명분으로 일어난 5·16으로 중단, 제 2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59 - 장훈 일본 프로야구 데뷔 첫 안타·홈런
일본 프로야구 롯데 마린스의 장훈 선수. /조선 장훈 일본 프로야구 데뷔 첫 안타·홈런 1959년 4월 10일 일본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이날, 나니와(浪華)상고를 갓 졸업하고 프로야구단 도에이(東映)에 입단한 6번 타자 장훈(張勳) 선수가 타석에 섰다. 고교 시절 왕정치와 고교야구계를 양분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지만 프로야구는 역시 달랐다. 상대 투수가 던진 공은 3개뿐, 3구 3진을 당한 것이다. 더구나 수비에서도 외야플라이를 머리 위로 넘기는 결정적인 실수까지 범했다. 교체. 그날 밤 장훈은 2군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초조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4월 11일의 상대 투수는 전년도 성적 14승4패라는 발군의 성적을 기록한 한큐(返急)의 아키모토. 프로야구 데뷔 두 번째 타석에 나선 장훈의 눈에 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좌중간 2루타, 데뷔 첫 안타였고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인 3085안타의 시작이었다. 다음 타석은 우측담장을 넘기는 홈런, 역시 23년간 기록했던 504개 홈런의 첫 출발이었다. 데뷔 첫 해 장훈은 신인왕을 수상했다. 1982년 41세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7차례 ‘수위타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일본 프로야구의 대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 장훈, 일본 프로 야구에서 자신의 첫 안타 기록 장훈(張勳, 1940년 6월 19일 ~ )은 재일 한국인 출신의 전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다. 일본에서는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勲)라는 일본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안타 제조기(安打製造機)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본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오즈 정(大洲町)에서 아버지 장상정(張相禎)과 어머니 박순분(朴順分)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군이지만, 아버지가 먼저 도일(度日)해 왔었고, 그 후에 어머니가 가족들을 이끌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시 단바라 신마치(현 : 미나미 구 단바라)에서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11세의 큰 누나를 잃었다. 5세 때 후진하는 트럭을 피하다 화덕에 오른손이 들어가 화상을 입고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네째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이 붙었다. 또한, 오른손의 다른 부분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본래 오른손잡이였지만,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왼손을 사용하였다. 이같은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귀화하지 않은 재일 한국인에 대한 수많은 차별을 견뎌 내면서 일본 프로 야구사에 길이 빛날 통산 3085안타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은퇴 후에는 2006년부터 TBS, TBS 라디오의 야구 해설자로 맡았으나, 2007년부터 전속이 흐트러졌기 때문에 프리랜서가 되었다.(하지만 TBS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야구 위원회 고문으로서 한국 프로 야구 탄생과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인물 ... 좌투좌타였던 그는 1959년 데뷔전 첫 타석에서 "터프가이"와 "가솔린 탱크"로 불리던 한큐 브레이브스의 에이스 투수인 요네다 데쓰야에 의해 3구 삼진으로 물러 났고, 곧 이은 외야 수비에서 평범한 뜬 공을 놓치고 바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데뷔 후 2차전인 4월 11일 고마자와 구장에서 열린 한큐전에서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2루타를 치고, 이어진 타석에서 홈런을 날리면서 향후 수립할 3085안타라는 대기록에 시동을 걸었다. ... /위키백과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國際聯合敎育科學 文化機構,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 Cultural Org -UNESCO]회관, 서울 명동서 기공. *[유네스코] -교육·과학·문화부문의 국제협력을 도모함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연합 전문기구. 약칭 UNESCO. 1945년 유엔총회에서 프랑스대표가 제의하여 같은해 12월 런던에서 개최된 44개국 교육부장관 회의에서 합의를 이루어 헌장이 채택되었다. 46년 제 1 차 총회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시 회원국은 28개국이었다. 유네스코헌장의 서문에 <전쟁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평화수호의 방벽도 인간의 마음 속에서부터 구축되어야 한다>라고 밝힌 것과 같이, 세계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간의 정치적·경제적 협정에 의존하기보다 인류의 지적·정신적인 유대관계를 가져야만 된다고 주장한다. 제 2 차세계대전이 끝나자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성취하려는 전 인류의 노력으로 마침내 세계평화기구인 국제연합을 창설하게 되었고, 식량·보건·노동 등 실제적인 국제문제를 다루는 여러가지 전문기구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때 국제연합교육문화기구도 창설되었다. 기구는 각 회원국의 5명 이내로 구성되고 2년에 1회 개최되는 총회와 총회에서 선출된 58명으로 구성되며 매년 2회 이상 개최되는 집행위원회가 있다. ★한국은 50년 파리총회에서 가입하여 국내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를 두고 있다. 87년 10월 31일에 열린 제24회 총회에서 아시아지역 5개국을 뽑는 집행위원회 선거를 통해 일본·파키스탄·말레이시아·스리랑카 등의 대표들과 함께 한국의 윤석헌(尹錫憲)대표가 임기 4년의 집행위원에 당선되었다. 88년 4월 유네스코 독립상주대표부가 설치되었고, 북한은 74년 가입과 동시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하였다. 98년 현재 회원국은 186개국이며, 본부는 파리에 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51년] 트루먼, 맥아더를 유엔군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
맥아더(1945) /브리태니커 맥아더, 주한 유엔군 사령관직 해임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한전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주한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이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맥아더가 사령관에 발탁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맥아더는 1950년 9월 대담하게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10월에 북한으로 진격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인한 1·4후퇴로 잠시 서울 이남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맥아더군이 공세를 전환하여 북쪽으로 재진격하던 참에 해임소식이 들려왔다. 해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을 떠나 처음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943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가 김명식 사망 김명식(金明植, 1890년 9월 26일 ~ 1943년 4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한국의 운동가이다. 아호는 송산(松山)이다. 생애 제주도의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도쿄 유학 기간 중 아시아 지역의 피압박 국가 청년들로 구성된 비밀결사 신아동맹단에서 활동했다. 신아동맹단은 이후 사회혁명당으로 개편되었고, 귀국한 김명식은 사회혁명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노동운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에 참가했다. 상하이파는 민족주의 세력과의 광범위한 연대를 꾀하는 통일전선 노선을 걷다가, 1922년 동아일보 사장 김윤식의 사망을 계기로 김윤식 사회장을 추진한 장덕수의 우파와 이를 반대한 김명식, 유진희의 좌파로 분리되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명식은 상하이파 좌파를 이끌고 기독교 청년 세력과 합작하여 신생활사를 설립하고, 사회주의 대중잡지 《신생활》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사장은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가 맡았고, 김명식은 주필이 되었다. 1922년 11월 발생한 신생활 필화 사건으로 체포된 김명식은 징역 2년형을 언도 받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923년 출옥했다. 이때 고문과 수감 생활로 건강을 상한 그는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1927년 좌우합작으로 결성된 민족운동 단체 신간회의 제주지회장을 맡았으며 1930년에는 오사카 시에서 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수감된 바 있다. 이후 전향하여 일제 강점기 말엽에는 《동양지광》과 《조광》을 통해 다수의 친일 평론을 발표하였다. 1943년 병사했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어 있다. /위키백과
1939년] 영화사의 큰 별 클라크 케이블의 결혼
1919 - 국제노동기구(ILO) 설립 [어제의 오늘]1919년 국제노동기구(ILO) 설립ㆍ아무리 권고해도 정부는 모른체 제1차 세계대전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19년 4월11일, 세계각국의 대표들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목적으로 설립한 국제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가 창립됐다. 제1차대전 직후 31개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강화조약인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해 국제연맹 산하기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ILO는 국제노동기준을 협약과 권고의 형태로 제정해 결사의 자유·단결권·단체교섭권·고용평등 등 노동기본권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설정하고 이의 준수를 감독하는 기능을 한다. 1991년 남북 UN동시 가입을 계기로 ILO의 152번째 회원국이 된 우리나라도 ILO 협약과 권고의 자장 아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ILO의 협약과 권고는 국경 넘어 노동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회원국들의 고질적 조약불이행, 각종 반인권적 부당노동행위는 ILO가 넘어야 할 산 중의 하나로 지적된다. 이영경 기자 /경향신문 2011-04-10 21:31:53
1919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大韓民國臨時議政院 ] 개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 1919년 4월 임시의정원이라는 명칭이 결정되고 정식으로 구성, 개원되었다. 의정원은 각 지방 인민의 대표위원으로 조직했고, 의원의 자격은 중등교육을 받은 만 23세 이상의 남녀에 한하였다. 19년 완성된 <임시의정원법>에 의하면, 의정원은 행정부가 집행하는 국정 전반에 대한 것을 심의·의결하고 각종 동의권을 가지며 국무원이 대통령을 선출하고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국토회복 뒤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하고 그 국회가 성립되는 날에 임시의정원은 해산하며 그 직권은 국회가 행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광복된 뒤 46년 소집된 비상국민회의에 의해 임시의정원의 직능이 계승되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조직, 선포한 한국의 임시정부. 국내외에서 3·1운동이 전민족운동으로 확산될 때 그 독립정신을 집약하여 한민족이 주권국민이라는 뜻을 표현하고, 또 독립운동을 능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하였다. 임시정부는 그 뒤 45년 8·15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각처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임시정부는 통치권을 행사할 국토와 국민이 없어 일반 정부와는 달랐으며, 대한제국과는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세력과 이념이 달라서 망명정부도 아니었다. 그러나 3·1운동에 의해 수립된 임시정부였으므로 전민족의 의지와 이념적 기반 위에 설립된 정부적 조직이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는 주권국민의 대표기관(정부), 또 대내적으로는 독립운동의 통할기구로서의 구실을 담당했다. 일제의 반격과 중일전쟁(1937)으로 상하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1939]·충칭[重慶, 1940] 등으로 몇 차례에 걸쳐 거처를 옮겼다. 상하이시기(1919∼32)에는 국내외 동포사회에 통할 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통할하는 데에 주력했고, 충칭시기(1940∼45)에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여 미얀마전선에 참전하였다. [수립] -당초에 임시정부는 조선민국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고려공화국(高麗共和國)·간도임시정부(間島臨時政府)·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노령정부(露領政府)·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 등 7개가 있었다. 상하이의 지도자들은 베르사유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과정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당 인사들이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있던 중 한성정부 수립 추진의 소식을 듣고, 13도 대표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이때 임시의정원에서는 한성정부의 각료구성을 수정하는 형식의 절차를 밟았다. 노령에서는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를 국민의회로 개편하고 국민의회에서 1919년 3월 21일 임시정부의 체제를 정비했다. 이리하여 상하이 노령정부는 활동을 개시하였고,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로 선임된 이승만(李承晩)이 워싱턴에서 집정관총재사무소를 설치, 운영하고 있어 마치 3개의 정부로 분열한 것처럼 보였다. 의회를 가지고 있는 상하이와 노령에서 통합작업을 추진하여 1919년 9월 6일 제 1 차개헌 형식을 거쳐 대통령중심제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되었다. 국호는 상하이 정부의 것으로 정했고, 각료구성은 한성정부의 것을 따랐다. [정부형태] -통합정부의 성립 이후 임시정부에서는 1919년의 임시헌법(제 1 차개헌), 25년의 임시헌법(제 2 차개헌), 27년의 임시약헌(제 3 차개헌), 40년의 임시약헌(제 4 차개헌), 44년의 임시헌장(제 5 차개헌) 등 5번의 헌법개정이 있었고, 권력구조를 나타내는 정부형태도 5번 바뀌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부형태의 주류는 의원내각제였는데, 19년 9월의 헌법에서는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한 절충형을 취했고, 27년의 헌법에서는 국무위원중심제에 의한 스위스방식의 관리정부형태를 채택하였던 것 외에는 의원내각제를 따랐다. [정부조직] -1919년 9월 통합정부의 각료조직은 한성정부의 것을 인수하였다.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한인사회당의 당수였으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립내각의 성격을 띠었다. 20년에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떠나자 이동녕(李東寧)·신규식(申圭植)·노백린(盧伯麟)이 국무총리대리를 맡았다. 국무총리대리체제는 22년 9월 노백린내각 이후에 종식되었으나, 독립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외면과 이승만 대통령의 독주가 겹쳐 정부의 기반이 흔들렸다. 그리하여 23년 1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로개척을 위해 국민대표회가 열렸으나, 곧 해산되었다. 국민대표회 해산 후에 이승만은 탄핵되고 25년 박은식(朴殷植)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어 국무령(國務領)을 수반으로 한 헌법을 개정했다. 26년 말에 구성된 김구내각은 27년 제 3 차개헌을 통해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방조직은 국내의 연통부(聯通府)와 교통국(交通局)이 있었고, 해외에는 거류민단조직이 있었다. 연통부와 교통국은 국내 북서지방에 결성되어 있었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서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대행했다. 이때 대동단(大同團), 서울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평양의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대한적십자회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관계 위에서 활동했다. 또한 거류민단조직은 상하이 등의 중국 본토에만 있었고, 미국과 멕시코·프랑스에서는 대한인국민회의 조직이 대신했고, 만주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결성되어 있던 서간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조직이 대신하였다. 그러나 8·15 직전의 지방조직은 충칭의 거류민단과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국 본토에 산재해 있는 광복군의 정보망에 의지한 것뿐이다. 이때 중앙조직은 40년 9월 광복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주석 김구·내무 조완구(趙琬九)·외무 조소앙(趙素昻)·군무 조성환(曺成煥)·법무 박찬익(朴贊翊)·재무 이시영(李始榮)·비서장 차이석(車利錫)으로 국무위원회를 구성하고, 고문제도를 채택해 송병조(宋秉祚)·홍진(洪震)이 추대되었다. 44년 국무위원회와 행정각부를 이중구조로 개편했다. 이때 국무위원은 김구(주석)·김규식(부주석) 외에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이석·장건상·박찬익·조소앙·성주식(成周寔)·김붕준(金朋濬)·유림(柳林)·김원봉·김성숙(金星淑)·조경한(趙擎韓) 등 14명이었고, 국무위원회에서 선임한 행정각부는 조소앙(외무)·김원봉(군무)·조완구(재무)·신익희(申翼熙, 내무)·최동오(崔東旿;법무)·최석순(崔碩淳, 문화)·엄항섭(嚴恒燮;선전)으로 구성되었다. 정부직원은 45년 3월에 109명이 있었으며, 충칭에 있던 한국인은 600명 정도였다. [국제관계] -초창기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독립군단체에 거의 일임하고 외교활동을 전담하였으므로, 1919년 11월의 예산에서 69.2%를 외교항목에 배당할 정도였다. 종전기에 광복군을 설치한 뒤에도 군사비와 외교비가 예산의 주종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는 여러 가지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치권을 유효하게 미치는 곳이 없었으므로 국제법상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외교활동의 대상은 대미외교와 대중외교가 대종을 이루었는데 대미외교는 초기에, 대중외교는 종전기에 보다 두드러졌다. 그 다음에 파리통신부가 주도한 강화회의와 유럽 각국에 대한 외교, 그리고 소련과의 외교가 있었으나 초기의 일에 불과하였다. 초기에 대미외교가 주종을 이루었던 것은 제 1 차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미국이 주도하였다는 점, 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노백린·김규식·안창호 등 미국 유학 또는 그 밖에 미국과 인연이 많았던 인사가 집권하고 있었던 점, 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도시인 상하이에 있었으므로 구미와의 창구가 열려 있었던 점에 이유가 있었다. 그리하여 강화회의에 대한 외교도 주로 미국정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3개월간 계속된 21년 워싱턴회의(이른바 태평양회의) 때도 미국정계를 창구로 교섭했으나 모두 냉대를 받았다. 제국주의가 국제정계의 주류이었던 당시이므로 민족자결의 원칙이라는 것은 독일·오스트리아·터키 등 동맹국의 식민지에 적용하는 구실이었던 것 외에는 도덕적인 효과조차 없었다. 그러나 대미외교에서 민간외교의 효과는 커서 한국독립을 위한 인도주의적 고려를 심각하게 반성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대중관계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고, 또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920년대에는 중국의 국내분란으로 정부와는 쑨원[孫文]의 광둥정부[廣東政府]와의 교섭이 약간 있었을 뿐, 그밖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개인적 친분을 따라 교섭하는 길밖에 없었다. 개인적 교섭은 신규식·박찬익 등이 많은 활동을 폈는데, 그 결과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은 북벌을 완성한 1928년 뒤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에 냉담했다. 대중외교에서 중요한 몫은 만주, 즉 둥산성[東三省] 동포의 생활문제였는데, 30년 국민당대회 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둥산성한교문제[東三省韓僑問題]를 제안했을 때 접수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32년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를 계기로 접근하였다. 이때에도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주저하여 비밀리 지원하는 길을 택했고, 그것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공식 지원을 삼가고 김구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 또는 김원봉 등의 독립운동가를 개별적으로 지원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후부터 종전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정당 또는 정부적 차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었다. 중국은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재정지원을 공식적으로 전담해 주어 정부의 운영은 물론, 광복군의 독립전쟁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보조가 되었다. 전후 처리에서도 한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한 유일한 국가였다.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의 유럽 각국과는 민간부문의 교섭이 비교적 활발하였고, 국제연맹·국제적십자사 등에 대한 교섭도 있었다. [독립전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은 군사활동과 의열투쟁의 2가지로 나뉜다.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부터 군사관계 제규정을 만드는 등 본격적 활동을 계획하였으나,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에서 남의 나라에서 무장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만주의 독립군단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조직하여 지원하는 것에 그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북간도에 북로군정서, 서간도에 서로군정서를 두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북서간도의 군정서 조직이 1920년 일제의 젠다오출병[間島出兵]으로 파괴된 뒤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33년 새로운 각도에서 군사활동이 계획되었다. 윤봉길의 상해의거로 중국정부와의 관계가 친밀해졌을 때 장제스의 배려로 중국의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中央軍官學校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이 설치되어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입교시켜 독립전쟁에 소요되는 사관을 양성하게 되었다. 군사활동의 다음 단계는 40년 9월 17일 결성한 광복군의 활동이었다. 광복군은 42년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1938년 결성된 延安의 조선 의용군과는 다름)의 병력을 통합하여 사령부(사령관 池靑天) 밑에 3개 지대로 편성하여 제1·2지대는 인도·버마전선에까지 출정했고, 제 2 지대는 미군의 오에스에스(OSS)라는 특수부대와 합동작전을 폈다. 제 3 지대는 중국전선에서 활약하며 일본군으로 파견된 한국인을 광복군에 복귀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광복군은 처음에 중국의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작전권 밖에 있었으나, 8·15 직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관됨으로써 대한민국의 광복군이 되었다. 의열투쟁은 한두 사람의 무장활동으로 일제의 관공서나 기관을 폭파하거나, 일본의 고관이나 친일한국인을 처단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종식하고, 아울러 한국사람들에게는 민족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무장활동을 말하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직접 관여한 투쟁은 그리 많지 않다. 20년 소련자금문제로 이동휘의 비서였던 김립(金立)을 처단한 외에도 상하이에서 몇몇 주구배를 처단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소라도 관여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열투쟁은 계열단체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 단행한 32년 이봉창(李奉昌)의 도쿄의거[東京義擧]와 윤봉길의 상하이의거가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재정 및 홍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정내역은 1926년 이전은 비밀에 붙여졌고, 또 그 뒤의 것도 관계문서를 6·25 때 분실하여 현재 알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 초기에는 인구세와 애국금(愛國金)으로 세입에 충당하였다. 그런데 국내의 연통부와 교통국이 22년을 전후하여 일본경찰에게 파괴된 뒤 국내자금이 두절되고, 또 재미동포의 헌납금을 구미위원부에서 전용하여 25년부터는 재원의 고갈을 초래하고 있었다. 27년부터 30년까지 4년간의 예·결산에 따르면, 세입의 90% 정도가 인구세와 애국금이었는데, 그 총액이 적어 세출에 40% 정도를 가옥세에 충당할 정도이었고, 30년에는 결산총액 511원으로 용인 1명도 채용할 형편이 못되었다. 재정은 32년 윤봉길의거 뒤부터 재미동포의 성금이 모이면서 다소 좋아졌다. 그리하여 35년에는 인구세와 애국금에 의존한 세입이 1547원이었는데, 그 중에서 515원을 부채상환(당시 부채액은 1205원)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41년도 결산서에 의하면 인구세가 802원이나 초과수입될 정도로 여유를 보이고 있다. 충칭시대의 재정세입의 대종이던 것은 인구세와 애국금(혈성금 포함), 그리고 중국정부의 지원금이었는데, 지원금은 32년 윤봉길의거 후 김구 개인의 활동비로 지급되어 오다가 충칭시대에는 처음으로 정당별로 주어졌다. 41년 결산액이 55만 2816원이었고, 그 중에서 50%가 중국정부·중국인사의 후원금이었다. 광복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8·15 직전에는 중국정부의 지원금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운영의 절대적 재원이었을 뿐 아니라, 충칭에 살던 600명 한국인의 생활비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정형편은 《독립신문》의 운영과도 연관이 있다. 초기와 종전기에는 신문을 발행할 수 있을 정도로 유족한 형편이었다. 초기의 상하이판 《독립신문》은 19년 8월 21일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어, 그해 10월 25일부터 《독립신문》으로 고쳐 간행되었는데, 총 189호가 발행, 배부되었다. 충칭판 《독립신문》은 상하이판과 달리 한문으로 편집했는데, 43년 6월 1일 창간하여 45년 7월 20일 제 7 호까지 발행하였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문화공보활동은 초기와 종전기에 활발했다. 《독립신문》 외에 관보로서 《공보(公報)》가 있었고, 임시사료편찬회에서는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와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구미위원부에서는 《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 Libre》를 발행하였는데, 파리통신부의 《자유한국》은 간추려서 《구주(歐洲)의 우리 사업》이라는 책자로 간행되었다. [지도이념]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이념의 기조를 이룬 것은 자유주의이념이었다. 그러나 초기 《독립신문(상하이판)》의 논조나 정부지도자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러시아혁명이나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에서 사회주의, 특히 공산주의의 실체에 대하여 상당한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은 27년의 민족유일당촉성운동을 전후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유일당촉성운동 이후부터 공산주의를 배척하였다. 그리고 31년에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제창했다. 삼균이란 인균(人均)·족균(族均)·국균(國均)인데, 인류평등·민족평등·국제평등과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내용으로 한 정치·경제·사회적 민주주의 원리였다· 이 삼균주의이념은 44년에는 새헌법에 반영되어 광복한국의 기초이념으로 다져졌다. 또 다른 이념적 측면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어떠한 제한독립도 부정했다는 점이다.
1914 현대사 연구가 송남헌 [宋南憲, 1914.4.11 - 2001.2.20] 출생, *한국의 독립운동가, 현대사 연구가로 1914년 4월 11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1934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재동초등학교 교사 겸 아동문학가로 활동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4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상황과 광복군의 전과를 주위에 전했다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단파방송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뒤에는 우사 김규식(金奎植) 선생의 비서실장을 맡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1년에는 군사정부에 의해 혁신정당 활동을 한 혐의로 좌익으로 몰려 1963년까지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한 뒤에는 통일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산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한국사료연구소 대표, 우사연구회 회장 등을 지내며 현대사 연구가로 여생을 보냈다. 광복 정국의 체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해방 3년사》는 현대사 연구를 촉발한 역작으로 평가되며, 이밖에도 주요저서에 《한국현대정치사》 《김규식 박사 전집》(5권) 등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05 헝가리 시인 요제프[ Jozsef Attila, 1905 - 1937 ] 출생 *헝가리 시인. 부다페스트 출생. 아버지가 실종된 뒤 어머니 손에 자라며 노동자의 어려움을 어려서부터 체험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는 매부의 경제적 원조로 교육을 받았으며, 17세 때 처녀시집을 냈다. 그 뒤 대학을 중퇴하고, 빈·파리에서 생활하면서 새로운 문학·정치사상에 접하였고, 망명중이던 T. 데리·B. 발라지 등을 알게 되었다. 귀국한 뒤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여러 신문에 시를 발표하며 G. 예에슈와도 친교를 맺었다. 이 시기에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당내의 당파주의와 정신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점차 실천활동에서 멀어진 이후 자살하였다. 현대인의 불안과 고뇌를 노래한 그의 작품은 《미(美)의 거지(1922)》 《뒷골목의 밤(1932)》 등 몇 권의 시집이 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02 이탈리아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 세계최초로 호텔서 음반 녹음, *1902년 4월11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그랜드호텔 306호실. 마이크가 아직 발명되지 않은 시절, 테너가수 엔리코 카루소가 객실 안에 설치된 집음(集音)나팔 앞에 섰다.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 등 10곡의 아리아가 강하면서도 서정적인 목소리로 녹음되면서 세계최초의 음반녹음이 2시간 만에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이 자리가 마련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날의 녹음을 진행한 영국의 그라모폰사(社)가 처음엔 카루소의 음반녹음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라모폰사의 녹음책임자 가이스버그가 밀라노 스칼라좌에서 카루소의 노래를 듣고 본사에 카루소의 음반녹음을 타진했지만, 본사는 카루소가 아직 런던과 뉴욕의 큰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는 젊은 가수라는 이유를 들어 레코딩을 하지말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가이스버그가 본사의 이런 지시를 무시하고 녹음을 강행한 것이다. 카루소가 녹음 댓가로 받은 금액은 100파운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불티나게 팔린 음반 덕에 그라모폰사는 1만5000파운드나 되는 이익을 냈다. 카루소도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게 돼 이때부터 1921년 48세로 숨질 때까지 무려 607회에 달하는 오페라에 출연, ‘황금의 테너’라는 격찬을 받았다 엔리코 카루소, 최초로 호텔서 음반 녹음
1893 [애치슨 라인을 설정한 전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 출생 1893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설정한 전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ooderman Acheson, 1893.4.11.-1971)출생 *미국 정치가. 코네티컷주 출생. 예일대학·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고, 정계와 경제계에 관계하는 변호사가 되었다. 1933년 루스벨트정권의 재무차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금매입정책에 반대하고 사임하였다. 제 2 차세계대전중 다시 국무차관보가 되어 연합국 원조 외에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창설에 노력하였다. 45년부터 국무차관으로서 트루먼독트린과 마셜플랜 형성에 참여하였다. 49∼53년 국무장관을 지내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미·일안보조약 체결 등으로 소련에 대해 봉쇄정책을 폈다. 은퇴 후에도 대외정책의 권위자로서 정계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베트남전쟁의 조기종결을 존슨정권에 제언하였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애치슨라인 Acheson Line] -미국 국무장관 D.G.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위선. 1950년 1월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미국의 대공산권방위는 알류샨열도에서 일본 류큐제도[琉球諸島]를 거쳐 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하고, 이 방위선 밖에 위치한 나라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하여 아무런 보장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애치슨의 발언은 한국과 타이완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됨을 시사하는 것으로 북한의 6·25남침 의도를 굳히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869년] 노르웨이의 조각가 바겔란(Vigeland, Gustav,) 출생
1814년] 나폴레옹, 무조건 퇴위에 서명, 엘바섬으로 귀양
1810년] 롤린슨 Sir Henry Creswicke Rawlinson 출생
1713 - 지브롤터,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영국 식민지에 편입
스페인 남단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향하고 있는 작은 반도 지브롤터. /조선 지브롤터,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영국 식민지에 편입 1713년 4월 11일 프랑스-스페인과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스페인령 지브롤터가 영국 식민지에 편입됐다. 지브롤터는 스페인 남단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향하고 있는 작은 반도로, 높이 425m의 바위산 `지브롤터 바위`가 깍아지른 듯 서있다. 면적이 5.8만 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한 바위산이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북단과 지중해를 가운데 두고 바짝 붙어있어 역사적으로 전략요충지로 중요시되어온 온 지역이다. 이 반도가 영국의 손에 들어간 것은 1704년이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에 참가한 영국 해군이 이 근처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지브롤터에 영국 국기를 처음으로 꽂은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유트레히트 조약을 통해 점령을 공식화했다. 스페인은 이 지역을 빼앗긴 이후 지금까지 줄곧 영국에 영토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영국의 반응은 늘 냉담했다. 스페인은 이 지역이 면세지대라는 특성으로 밀수와 마약거래, 돈세탁이 성행해 스페인 경제가 타격을 입는다며 줄곧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1964년에는 유엔 식민지위원회에 영토 반환요구를 제출한 바 있고, 1969년과 1981년에는 국경을 폐쇄, 현지 주민과 영국의 불만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1964년 지브롤터에 부분자치를 허용했고, 지브롤터 주민들은 1967년 9월 10일, 자체 투표를 통해 계속 영국령에 남겠다는 의사를 재확인함으로써 스페인을 당혹케 하고 있다. 1969년부터는 지브롤터 정부가 대부분 내정에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영국의 상주 병력과 스페인계를 포함해 3만1천명이 살고 있다. /조선
1510 (조선중종5) 삼포왜란[三浦倭亂] 일어남, * 1510년(중종 5)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사건.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건국 뒤 국방문제를 감안,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1407년(태종, 7) 부산포(釜山浦;東萊)와 내이포(乃而浦;또는 薺浦, 熊川), 26년(세종 8) 염포(鹽浦;蔚山)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하여 교역과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조선은 삼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내왕을 허락하였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60명 외에는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를 지키지 않아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1510년 4월, 제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인 오바리시[大趙馬道]와 야스고[奴古守長] 등이 대마도주의 아들 소[宗盛弘]를 대장으로 삼아 4000∼5000명의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과 제포를 공격하는 왜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을 각각 경상좌·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로 보내어 진압하였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탔으며, 일본측은 배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참획되었다. 이를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어 통교가 끊겼으며, 이 상태는 12년에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국교를 다시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1506 (조선 연산 12) 연산군, 사간원 폐지 휘 융(). 성종의 맏아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甲子士禍].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출처] 연산군 [燕山君 ] | 네이버 백과사전
1241 - 킵차크 칸국의 바투 칸이 사조강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라 4세를 무찌르다. 바투(1205년 ~ 1255년)는 몽골제국 킵차크 한국의 칸(재위:1242년~1255년)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쥬치 칸의 둘째 아들이다. 쥬치의 아들들 가운데 훌륭한 임금이란 뜻의 바투가 아버지의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바투의 영토는 이르티쉬의 서쪽인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또는 약튜빈스크, 우랄스크, 아다지, 호레즘 본토(히바)를 포함하였고, 또한 킵착인들의 땅부터 볼가 강 서쪽의 정복지인 제베와 수베에테이의 원정으로 얻은 땅을 포함하였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나와 바투와 다른 칭기스 칸의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으로 나타난다. 우구데이는 쥬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킵차크 한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린다. 몽골 전승에 의하면 현명하고 온화한 왕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훌륭한 임금'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1237년에 바투 칸이 러시아의 도시 쿠르스크, 벨고로드, 랴잔 등을 파괴했고 1238년에는 러시아 노브고로드 주의 크레스테츠키 군 을 침략했다. 1241년 킵차크 칸국의 바투 칸이 사조강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라 4세를 무찔렀다. 그는 칭기즈 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대칸 옹립자'도 알려져 있다. 1241년에 우구데이가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유크와 킵차크 한국의 바투 간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구유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위에 올랐다. 구유크의 즉위 이후 구유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재위 3년째인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구유크의 사망으로 무산됐다. 구유크가 사망한 이후 바투는 톨루이 계의 소르칵타니와 손을 잡고 우구데이계간의 분쟁이 다시 발생하게 됐다. 1251년에 툴루이의 장남인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톨루이 계의 몽케를 칸위에 올렸다. 바투와 그의 아들 사르타크가 죽었을 때 바투의 형제 베르케가 킵차크 한국을 계승하였다. 베르케는 몽골의 그의 사촌들과 통합하려하지 않았으며 훌라구 칸과는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베르케는 중국을 그의 이론적인 상부로 공식적으로 인식하였다. 사실 베르케는 그때까지 독립적인 군주였다. 다행스럽게도 베르케는 유럽을 공략하는 데 바투와 이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바투는 적어도 두 아이가 있었는데 사르타크 칸과 토코칸이었다. /위키백과
678 - 78대 로마 교황 도노 선종 교황 도노(라틴어:Donus, 이탈리아어:Papa Dono)는 제78대 로마 교황(재위: 676년11월 2일 - 678년4월 11일)이다. 로마 출신인 도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테오도루스가 도노에게 보낸 단성론에 관한 서신에서 일치를 요구하면서도 정통 교리에 관한 언급이 없자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에 678년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콘스탄티누스 4세는 유화적인 서신을 도노에게 보내어 이 문제를 종식시킬 신학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하였다. 도노는 이미 선종한 후여서 차기 교황에 의하여 이 문제는 종식되었다. 라벤나의 대주교 레파라투스는 야심적인 선임자 마우루스와는 달리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안을 제안하였다. 도노는 로마에서 시리아계 네스토리우스파의 수도원을 강제로 해체시키고 여러 성당들을 신축하여 장식하였다. /위키백과
672 - 77대 로마 교황 아데오다토 2세 취임. 교황 아데오다토 2세(라틴어:Adeodatus II, 이탈리아어:Papa Adeodato II)는 제77대 로마 교황(재위: 672년4월 11일 - 676년6월 17일)이다. 아데오다토 2세는 첼리아노 언덕에 있던 성 에라스무스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사 출신으로 전임 교황처럼 단성론을 반대하고 정통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였다. 아데오다토 2세는 관대하였고 재위 중 정해진 행사 날짜를 충실히 지킨 인물이었다. 수도원의 면제를 보호하는 두 서신들이 남아 있다. 그냥 ‘교황 아데오다토’ 또는 ‘교황 데우스데디트 2세’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은데, 그건 앞선 교황이 아데오다토 1세가 데우스데디트라는 이름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
145 - 로마 제국 20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출생.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45년 4월 11일 - 211년 2월 4일)는 로마 제국의 스무 번째 황제이다. 생애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벌어진 내란에서 도나우 주둔군이 193년에 추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 트리폴리 출신인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한 반면 로마인과 원로원을 무시했다. 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병사의 봉급을 인상하며 상여금을 많이 주어 군대를 특권계급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관료제를 강화해 중앙권력을 강화함으로써 관료층인 에퀴테스를 우대하는 동시에 지방자치를 더욱 압박했다. 이러한 조치로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물렸다. 그의 황제권은 사실상 군대에 의존해 있었으며, 세습에서 황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한 그는 카라칼라와 게타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211년에 죽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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