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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월 다하는 날
💚 김형석 교수님의 기도문 💚
내 세월 다하는 날
슬픔 없이 가게 하여 주소서
초대 없이 온 이 세상
정주고 받으며
더불어 살다가
귀천(歸天)의 그 날은
모두 다 버리고
빈손과 빈 마음으로
떠나기를 약속하고 왔나니
내 시간 멈추거든
그림자 사라지듯
그렇게 가게 하여 주소서
한 세상 한 세월
사랑하고 즐겁고 괴로웠던 생애였나니
이 세상 모든 인연들과
맺어 온
그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이
허락 없이 떠나는
그 날의 외로움으로
슬프게 지워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다만
어제 밤잠자리에 들 듯
그렇게 가고 보내는 이별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울러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
슬픔과 외로움을 잊고
이 세상의 삶을 더욱 알고 깨달아 굳건히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하여 주소서
아름다운 이 세상
마지막 소망을
아름답게 이루고
아름답게 떠나가게 하여 주소서
♡ 이 詩를 읽고 나서 ♡
이 詩에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구절은
"다만 어제 밤 잠 자리에 들 듯
그렇게 가고 보내는 이별이 되게 하소서"
입니다.
' 이 세상에 올 때 너는 울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웃었다
그런데 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세상 사람들은 울지만 너는 웃으면서 가도록 하라! '
울면서 왔지만
웃으며 떠난다.
生은 고달프게 살았으나
하늘로 돌아가는 길에 천국이 보여
기쁘기 때문이다.
..................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찾아내고
어려운 현실에서도
기쁨을 발견하고
고통의 순간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내고
부족한 삶속에서도
만족을 느끼고
절망의 시간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행복을 찾아 누리 줄 아는 사람이다.
♧ 재미있는 우리말 유래 ♧
1. 어처구니
첫째,
궁궐의 전각이나 남대문 같은 문루의 기왓지붕 위에 사람이나 갖가지 기묘한 동물들의 모양을 한 토우(土偶: 흙으로 만든 인형)들이 있는데 이를 '어처구니'라고 합니다.
'어처구니 없다'라는 말의 유래는 궁궐, 또는 성문을 짓는 와장(瓦匠)들이 지붕의 마무리 일로 어처구니를 올리는데, 이걸 실수로 잊어버리는 경우 '어처구니없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둘째,
어처구니는 맷돌의 손잡이를 가리키는 순 우리말입니다.
그 무거운 돌 두 짝을 포개어 놓고 한쪽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데, 손잡이가 없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겠네요.
2. 시치미
전혀 모르는 일인 양 딴 청을 피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 시치미는 사냥에 쓰려고 길들인 매의 꽁지 깃털에 매달아 놓은 마름 모양의 뼈 조각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입니다.
시치미에는 주인의 이름도 적혀 있었고, 길들인 사냥매는 '해동청'이라고 하는 유명한 중국 수출품이어서 꽤 고가였습니다.
길들인 매라고 하지만 꽁지에 매달린 시치미만 똑 떼어버리면 야생매는 물론 남의 물건과도 구별할 길이 없습니다.
3. 꼽사리
청하지도 않은 사람이 슬며시 끼어들어올 때 '꼽사리끼지 말라'고 합니다.
역마살, 도화살, 공방살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한 가지 살만 껴도 세상 살기가 어려운데 살이 곱으로 끼는 겁니다. 즉, '곱살이' 끼는 겁니다.
그래서 원치 않는 사람이 끼어들면 곱살이 끼지 말라고 합니다.
4. 팽개치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록 확 집어 던지는 걸 팽개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대나무나 싸리 가지 끝을 여러 갈래로 쪼개서 흙을 채워 넣고는 새들이 있는 쪽으로 힘껏 내동댕이칩니다. 후두둑하는 소리에 새들이 쫓겨가도록.
대나무나 싸리가지로 만든 그 도구의 이름이 바로 팡개입니다. '팡개'치는 겁니다.
5. 뜬금없다
조선시대 말단 벼슬 중에 '말감고'라는 벼슬이 있었습니다.
말감고가 하는 일은 그날그날 장에 나온 물건의 수요와 공급을 조사하여 가격을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사람이 기준가격을 공지해야 정상적인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즉, 말감고가 그날그날의 금(가격)을 띄워야(공지) 거래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이 되는 가격을 '뜬(띄운) 금(가격)'이라고 합니다.
'뜬금없다'라는 말은 띄운 금이 없는, 곧 시세가 없는 황당한 경우를 이르는 말하며 지금은 갑작스럽거나 엉뚱한 경우를 뜻합니다.
6.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
옛날 시골 흙벽돌집에 가면 창문을 달수도 없고 하니 문틀 없이 그냥 종이로 창문을 흉내 내서 종이만 발라 놓은 것이 있습니다.
열 수도 없으니 당연히 그걸 '봉창'이라 합니다.
어느 촌사람이 방안에서 자고 있다가 밖에서 누가 부르니 잠결에 문인지 창인지 구분 못하고 봉창을 문인 줄 알고 열려고 더듬거리다가 내는 소리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7. 터무니없다
터무니없다는 말은 '터의 무늬가 없다'는 말에서 유래했고, '터무니없다' 줄임 말이 '턱없다'입니다.
터의 무늬(자리)가 없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터무니는 터+무늬에서 유래한 것이고, 터는 본래 집이나 건축물을 세운 자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집을 허물면 주춧돌 자리나 기둥을 세웠던 자리들이 흔적으로 남아 있게 되는데 흔적(무늬)조차 없는 경우에는 그 자리에 집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게 됩니다. 터의 무늬(자리)가 없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8. 조바심
옛날 4대 곡식으로 쌀, 보리, 밀과 더불어 조가 있었습니다.
타작을 옛말로 ‘바심’이라고 했는데, ‘조’ 타작이 조바심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조를 수확할 때 이삭을 잘라다가 한꺼번에 두드려서 텁니다. 그런데 조는 두껍고 질긴 껍질에 겹겹이 쌓여 있어서 타작을 하려면 조 이삭을 모아놓고 아예 부술 정도로 두드려야 탈곡이 되므로 옛 농부들은 ‘조’ 탈곡을 가장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니까 농부들에게는 ‘조바심’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것입니다.
9. 산통 깨다
'일을 그르치게 하다'라는 뜻으로, 길이 10cm 가량의 향목이나 금속 혹은 대나무를 에어 괘(卦)를 새긴 것을 산가지 또는 산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산대를 넣은 통을 산통이라고 합니다. 점을 칠 때 산통을 대여섯 번 흔든 다음 산통을 거꾸로 들면 그 구멍으로 산가지가 나옵니다.
이 산 가지의 괘로 점을 치는 것을 산통점이라고 합니다.
이때 산가지를 집어넣는 산통을 깨버린다는 것이므로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틀어 버린다는 뜻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10. 벽창호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을 우리말로는 '벽창호'라고 하는데, 이 말은 원래 '벽창우(碧昌牛)'에서 나온 말입니다.
평안북도 벽동(碧潼)과 창성(昌城)지방의 소(牛)가 크고 억세다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게다가 이 지방의 소들은 제 기분에 맞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 고집불통이었으며, 모르는 사람이 와서 끌고 가려고 하면 고집스럽게 버텨서 웬만한 어른들도 다루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힘이 세고 고집이 센 벽동과 창성의 소들의 특성을 빗대어 '벽창우'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벽동과 창성의 소같이 '고집이 세고 무뚝뚝한 사람'을 가리킬 때도 쓰이게 되었습니다.
눈물 한 방울
몇몇 고교 선배들과 만나는 모임에서였다. 선배 한분이 이런 말을 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이어령 교수였어. 아직 이십대의 천재 선생이 칠판에 두보의 시를 써 놓고 해설을 하는데 황홀했었지.”
경기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그는 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되고 대한민국의 지성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22년 2월에 돌아가셨다.
말하던 그 선배가 덧붙였다.
“그 양반은 낮았던 대한민국의 정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거야.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
나라마다 민족의 나침반이 된 천재들이 있다.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 무렵 일본의 방향을 서구화와 민족주의로 잡고 교육에 헌신했었다.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인의 정신적 성장을 추구하고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남겼었다.
이어령 교수도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다. 이어령 교수가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할 무렵의 짧은 소감을 담은 시사 잡지를 보고 메모를 해 둔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면 빨리 줄기에서 떨어져야 하듯이 사람도 때가 되면 물러앉아야 해요. 새잎들이 돋는데 혼자만 남아 있는 건삶이 아니죠. 갈 때 가지 않고 젊은 잎들 사이에 누렇게 말라 죽어있는 쭉정이를 보세요.”
그는 아직 윤기가 있을 때 가을바람을 타고 땅에 내려오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귀중한 철학이었다. 죽음에 적용해도 될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겨두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어쩌다 화면에서 본 이어령 교수의 얼굴에 골 깊은 주름이 생기고 병색이 돌았다.
어느 날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그의 모습이 보이고, 얼마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 병을 맞이했고 죽음 앞에서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현자의 죽음은 많은 걸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어령 교수의 부인이 말하는 장면이 흘러나오는 걸 봤다.
“남편은 항암치료를 거부했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 안되는 데 항암치료를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남편은 남은 시간을 자기 맘대로 쓰고 싶다고 했어요. 다른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서 고민했는데 남편은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남편은 컴퓨터로 글을 썼어요.
남편은 몽테뉴의 수상록처럼 날마다 일지를 썼어요.
그날그날 생각나는 걸 가장 자유로운 양식으로 쓴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부터 손가락에 힘이 빠져 더블클릭이 안되는 거예요. 남편은 손글씨로 글을 썼어요.
처음에는 글 사이에 그림도 그려놓고 했는데 점점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거예요.
그림도 없어지고 갈수록 글씨도 나빠졌어요. 건강이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는 거죠.”
그는 무너져 내리는 몸을 보고 어떻게 했을까 ?.
그에 대해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걸으려고 애를 썼어요. 일어났다가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곤 했어요. 그러다 걸을 수 없게 된 걸 깨달았을 때 그렇게 펑펑 울더라구요.
그 머리가 좋던 남편이 기억이 깜빡깜빡하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치매가 온다고 생각하고 또 펑펑 울었죠.
남편은 두 발로 서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중년의 미남이었던 그의 장관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위에 금가루라도 뿌린 양 번쩍거리는 느낌이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녹이 슬고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 다음 순서인 죽음을 그는 어떻게 대면했을까?.
인터뷰 진행자는 이어령 선생께 질문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쭐게요.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고, 탄생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간다'라고 하신 말씀에는 변함이 없으신가요?"
이 질문에 이어령 선생은 그의 생각이 여전히 변함없음은 물론, 생은 선물이며 내 컵의 빈 공간과 맞닿은 태초의 은하수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선생은 여태껏 살아있는 의식으로 죽음을 말해왔다며, 진짜 죽음은 슬픔조차 인식할 수 없기에 슬픈 거라고 하시며 인사 말씀을 덧붙이셨다.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웠어요. (...중략)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
이어령 선생은 병원 중환자실로 가시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집에서 가족과 함께했다.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편은 보통사람보다 열배 스무 배 예민한 예술가였어요.
죽음 앞에 강인하지 않았어요.
고통과 죽음을 너무 민감하게 느꼈어요.
너무나 외롭고 두려운 심정을 자신의 글에 그대로 표현했죠.
남편은 노트에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라고 썼어요.
그 노트를 다 쓰고 ‘눈물 한 방울’ 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책을 내려고 했죠.
그런데 노트 스무 장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어요.”
듣고 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물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못 찾은 거죠. 죽어봐야 알 것 같다고 썼어요.”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제목으로 정한 ‘눈물 한 방울’의 의미는 뭐라고 보시나요?”
“자기를 위한 눈물이 아니예요.
남을 위해서 울 수 있는 게 진정한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남편은 남긴 거예요.”
거실 깊숙이 2월의 햇살이 비쳐 들어온 어느 날. 선생은 천천히 넘어가는 태양의 온기를 즐기셨다. 그리고 2022년 2월 26일 정오경. 환한 대낮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음과 따뜻하게 포옹하셨다.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 앞에 정직해져야 할 것 같았다.
지인이 보내 준 윗글을 읽으면서
함명춘 시인의 '종(鐘) 이야기' 가 떠올랐다.
"그의 몸은 종루였고
마음은 종루에 걸린 종이었다.
종은 날마다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흘린 땀방울과 눈물이 종소리였기 때문이다.
임종 직전까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땀방울과 눈물을 흘렸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주일에 한 번씩
그가 행했던 일을 따랐다.
날이 갈수록 종소리는
점점 더 크게
더 멀리
울려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귀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의 종소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종소리가 매일, 매시간, 일생을 통해 계속 들리지만 귀가 닫힌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욕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교만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열등감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합니다.
명나라 시인 진계유는
“뒤에야 알았네.” 라는 당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 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시인은 ‘후회’의 감회를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후회는 선택한 뒤에 따르는 경험과 연륜에 따른 진솔한 반성, 돌이킬 수 없는 애잔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생각하며 사는 우리네들의 삶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수의 김형석 교수님도 어느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으시냐고 묻는 기자에게 철없는 젊은 시절보다 모든 것을 알고 인생의 철이 든 6.70대가 좋다고...
우리는 지금 황금시기에 놓여있지요?! 예, 놓여있어요.
혹여 후회와 자책으로 세상의 슬픔과 아픔에 지지말고 힘을 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오늘도 소소한 감사와 소소한 사랑으로 채우며 기쁨을 누려요. 파이팅!! 열심히 삽시다. 그래서 행복합시다.ㅡ옮긴 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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