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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스넥탄 2세:지난 번엔 짐이 잉글랜드에서 대활약을 한 이야기를 보았을 것이오.
오늘은 짐이 스코틀랜드왕으로 즉위한 이후의 역사를 말해볼까 하오.
헬가 오브 위체:어머, 여태까지 말을 놓으시다가 오늘은 하오체를 쓰시는군요?
말스넥탄 2세:음... 즉위 전후의 신분이 다르지 않소? 무엇보다 짐은 '성왕'이란 칭호로 불리는 위대한 대왕이란 말이오!
헬가 오브 위체:흥, 예루살렘 원정전의 치세에도 그 존함이 적용될 수 있으시나요?
말스넥탄 2세:끄응.., 뭐 짐의 치세의 흑역사긴 하지만 원래 영웅의 탄생은 시련을 수반하는 법이니...,
왕비가 이야기를 꺼냈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겠군.
1110년 7월, 짐은 선왕 '공정한' 말스넥탄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 왕위를 물려받았소.
섭정의 도움으로 짐은 즉위 과정에서 곤란은 겪지 않았소. 아버마마가 물려는 영토와 재정은 풍요로웠고,
국방과 군대는 튼튼했지.
허나 로디언 공작가... 선왕때도 골치거리였던 그 집안이 문제였소!
고스패트릭의 자식놈이 위대한 치세의 시작에 훼방을 놓을 줄은...!
헬가 오브 위체:1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시아버지의 공신이었던 로디언 공작 고스패트릭은
말년에 스코틀랜드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었죠.
그러다 비명에 갔지만 로디언 공작위는 그의 장남에게 계승 되었어요.
로디언 공작의 장남은 허약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시아버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죠.
그래도 고스패트릭에겐 아들이 셋이 있었어요.
장남이 요절하고 셋째는 신학자가 되었지만, 공작위를 이을 둘째가 남아있었던 것이죠.
말스넥탄 2세:바로 그 개 자식이 짐의 시작을 방해했었지!
놈은 왕국의 선거군주제를 이용하여 자신이 왕이 되려고 했었단 말이야!
아바마마가 살아계셨을 때는 영지에 쳐박혀 있던 놈이 내가 즉위한 이후엔 파벌을 형성하며
귀족들을 꼬시고 다니더구만!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대놓고 찬탈을 운운하는 잠재적 반역자! 짐같은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는 얼간이!
짐은 아바마마로부터 물려받은 왕위과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연적인 수단을 동원했지.
헬가 오브 위체:그것이 치졸한 암살이었다는 것이 문제지요.
좀더 차분히 기다리며 반역자가 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면 좋았을 것을...,
남편은 상당한 비용을 들여 로디언 공작 암살을 시도했지만,
스코틀랜드 제일의 모사꾼으로 불리던 로디언 공작은 허술하지 않았지요.
첫 암살시도가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실패하자, 남편은 다시 로디언 공작 암살을 지시했고
로디언 공작은 함정을 팠어요. 그리고 두번째 암살시도에서 암살범은 함정에 빠져 로디언 공작에게 생포당했구요.
악랄하고 끊없는 고문끝에 암살범은 배후를 말하였고, 로디언 공작은 그 사실을 스코틀랜드 귀족의회에서 공포했죠.
그리고 남편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어요. 주종관계를 배반한 왕이라고.
말스넥탄 2세:덕분에 즉위 초 어수선한 스코틀랜드 귀족사회가 한번 요동쳤었지!
그때 아바마마 밑에서 숨죽이고 살던 기회주의자놈들이 떨쳐 일어난 꼬락서니란!
오히려 북아일랜드 귀족들이 짐에 대한 신의를 지키더군!
밥값도 못하는 얼간이랑 분수를 모르는 작자 덕분에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로디언 공작과 짐의 편으로 나뉘어졌지.
하지만 소득이 없진 않았어. 누가 충신이고 누가 잠재적 반역자인지 알 수 있게 되었으니.
헬가 오브 위체:하지만 즉위 초의 이 부끄러운 사건 때문에
남편은 한동안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다독이며 내정에만 주력해야 했어요.
반면 로디언 공작의 위세는 높아졌고, 실망한 귀족들과 기회주의자들은 그의 파벌 밑에 결집했지요.
남편의 치세 초기동안 전 뭘했냐구요? 제가 비록 대공이자 스코틀랜드 왕비이긴 하나, 잉글랜드 왕의 봉신.
남편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해주는 것 외에는 제가 스코틀랜드 내정에 개입할 여지는 없었어요.
스코틀랜드의 국운을 건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말스넥탄 2세:즉위 후 몇년동안 로디언 공작놈 패거리들이 기고만장한 꼬락서니를 보며 살았더니
어떤 나라나 집안을 끔살시켜도 이상해지지 않을 것 같더라고.
그러던 1117년, 독실한 신자들의 헌금을 받아처먹기만 하던 교황청에서 대성전을 포고하더군.
성지 예루살렘 탈환하는 원정이 발표된 것이야!
드디어 지루한 귀족놈들과의 분쟁에서 벗어나 짐의 위엄을 떨칠 기회가 온 것이지!
헬가 오브 위체:남편은 십자군 원정에 참전함으로써 그동안 지은 죄악을 속죄하겠다고 선포했지요.
그리고 그무렵에 막 창설된 구호기사단과 성전기사단에 막대한 지원금을 지급하고 스코틀랜드로 초청했지요.
스코틀랜드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은 구호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의 단장들은
스코틀랜드왕을 위해 성전에 종군하겠다고 맹세했지요.
그리하여 1117년 가을, 남편과 기사단장들이 지휘하는 17000명의 스코틀랜드 십자군은 스콘에서 출정했어요.
남편에게 충성하는 스코틀랜드 귀족 뿐만 아니라 척을 지고있던 귀족들 상당수도 자발적으로 참전을 했지요.
다만 로디언 공작은 제외였어요.
남편은 로디언 공작에게 선박 제공을 요구했지만 종군은 요청하지 않았어요.
결국 로디언 공작은 자발적으로 참전을 해야했지만 당시 유럽 전체가 첫 십자군 원정을 위해 선박을 동원한 상태였죠.
따라서 선박이 없는 로디언 공작은 남편에게 신하의 예를 다해 종군을 청원했어요.
그것이 안된다면 자발적인 참전이라도 할 수 있게끔 선박을 돌려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로디언 공작의 공손한 청원을 받은 남편은 보급상의 이유와 잉글랜드와 대치하는 문제를 근거로
로디언 공작의 종군은 기각했지요. 단 선박을 돌려주고 자발적인 참전은 허용한다고 했지요.
말스넥탄 2세:내 답변을 들은 로디언 공작놈은 아마 즐거워했겠지.
자발적 참전을 통해 자기네 가문의 명예와 이익을 드높히고 싶었겠지.
그리고 원정 후엔 자신의 종군을 거절한 짐을 치졸한 군주로 폄하하고 싶었을테고.
하지만 말이야... 아까전에도 말했지만 놈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놈이었지.
난 왕비에게 따로 서신을 보냈어. 그리고 왕비는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주었고.
헬가 오브 위체:당시 잉글랜드도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저도 잉글랜드의 대영주이자 가톨릭 신자이니 종군하고 싶었구요.
하지만 잉글랜드 왕 애설울프는 저의 종군요청을 거절했어요.
제가 스코틀랜드를 견제해야할 영주이고, 여자이기 때문이라면서요.
속상했지만 잉글랜드 왕의 명분은 분명했어요.
저는 어쩔수 없이 제 장성한 맏아들 로버트라도 자발적으로 참전시키기로 마음먹었죠.
원정군 조직을 아들에게 명한 직후에 남편의 서신이 전해졌어요.
심부름꾼은 남편이 로디언 공작의 자발적 참전을 승인해줬다는 소식을 구두로 전하라는 남편의 명을 먼저 수행했어요.
그 다음 준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어요. '컴벌랜드를 볼 생각이 없나?'라고요.
그 순간 전 남편의 의도를 알 수 있었어요. 컴벌랜드는 제가 가진 공작령 중 하나인 노섬벌랜드에 속한 지역이었죠.
하지만 이 당시엔 스코틀랜드가 점령한 상태였고, 로디언 공작이 경영하던 곳이었어요.
그러니 저에겐 컴벌랜드를 공략할 명분이 있었어요.
하지만 현재 상황은 십자군 원정시기라 카톨릭 교도간에 '신의 평화'가 발동되어 있었죠.
뭐 무리해서 전쟁을 벌일 수는 있지요.
하지만 자칫하다간 주군인 잉글랜드 왕이나 저를 시기하는 다른 귀족들에게
탄핵당할 명분을 제공할 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전 참사회와 논의 끝에 묘안을 얻어 실행에 옮겼어요.
말스넥탄 2세:왕비는 맏아들이자 대장군인 로버트에게 원정군을 노섬벌랜드에 집결시키란 명을 내렸지.
그것만으로도 로디언 공작놈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어.
하지만 원정군이 떠난다면 로디언 공작놈도 안심하고 원정을 떠날 수 있었지.
그래서 왕비는 로버트와 함께 노섬벌랜드에 가서 원정군을 사열했어.
그리고 원정군의 절반만 로버트에게 주어 성전에 참전시켰지.
그리고 왕비는 나머지 절반의 군대를 노섬벌랜드에 주둔시켰어.
대공인 왕비가 주둔시킨 병력은 로디언 공작이 동원할 수 있는 군세 전체보다 많았지.
거기에 왕비는 결정타를 날렸어. 로디언 공작놈 동생은 주교수업을 받고 주교령 후임자가 되었지만,
야심있는 자식놈을 낳았더군.
왕비는 재상과 첩보관을 투입하여 로디언 공작의 조카를 해리퍼드 궁정으로 불러들였지.
데쥬르와 작위에 클레임이 걸린 로디언 공작은 결국 잉글랜드 침공에 대비하겠다고 하고는 영지에 눌러앉더군.
뭐, 왕비도 스코틀랜드의 침입에 대비하라는 잉글랜드 왕명에 충실했으니,
'신의 평화' 위반이라 딴지 걸릴 일도 없을 것이고.
헬가 오브 위체:스코틀랜드군이 자파에 상륙한 건 1117년 12월 경이었어요.
그때 신성로마제국이나 프랑스,아퀴탱의 십자군은 겨우 병력과 선박 동원이 끝난 상태였고,
단지 교황의 군대 1만여명이 아크레를 함락시킨 뒤에 티베리아스로 진을 치고 있었어요.
다마스커스에서부터 쳐들어올 사라센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죠.
당시 우트르메르(예루살렘 왕국지역)의 사라센군은 교황의 군대와의 회전에서 크게 패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엔 수비대만 남은 상태였어요. 그리고 사라센의 대군은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서 집결 중이었죠.
그래서 스코틀랜드군이 상륙한 자파 인근에는 수비대만 있었죠.
스코틀랜드군은 상륙 후 즉시 자파를 공성하여 함락시키고 그곳에서 첫 크리스마스를 보냈죠.
그당시 모두들 서전의 승리에 크게 고무되었다고 하더군요. 더군다나 자파는 예루살렘 이웃 백작령이었어요.
남편은 자파에서 새해를 보낸 후 곧장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어요.
그러나... 다음해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정반대의 상황이 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말스넥탄 2세:자파 공성전을 손쉽게 끝낸 우리군은 새해까지만 자파에서 보낸 뒤,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지.
서전의 승리와 신앙심에 고취된 우리군은 적의 요새와 마을을 무너뜨리며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어.
마침내 1118년 2월, 우리군은 예루살렘에 이르렀지. 곧바로 공성을 준비하고 있는데, 정찰대가 급보를 가지고 오더군.
이집트에서 조직된 사라센군 2만명이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오고있다고.
내일 아님 모레면 예루살렘에 도착할 것이라고!
그래서 짐은 이집트의 사라센군을 격멸한 뒤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로 결심했지.
어차피 예루살렘은 하루 이틀 안에 함락시킬 수 없는 곳이니.
스코틀랜드군은 적의 예상 진군로로 기동했어. 그리고 요충지에 진을 치고 놈들을 기다렸지.
그리고 다음날 사라센군은 나타났어. 그리고 양군은 치열하게 싸웠지.
사라센인들은 경장궁수와 궁기병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계속 활을 쏘았어.
하지만 멀리서 쏘면 우리군의 갑옷과 방패를 뚫을 수 없었고,
가까이에서 쏘면 우리군은 방패에 은폐한 상태에서 투석기와 석궁을 쏘며 대응했지.
결국 며칠간의 전초전에서 아군의 피해는 경미했지만 적군은 상당수의 궁기병을 잃었어.
말스넥탄 2세:적군은 전초전을 진행하는 한편, 아군의 수원지와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시도도 병행했지.
이에 짐은 수원지와 보급로에 쉴트론 상비군과 석궁수, 그리고 소규모 기병대를 배치했어.
그리고 절대로 적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어. 어차피 우리는 지키는 입장이고 아쉬운 건 놈들이었지.
결국 사라센놈들은 재미보지 못했어.
오히려 전초전을 통해 우리군의 사기는 더욱 올랐지. 아무 문제없어 보였어.
다만 낮에 오질나게 덥고 밤엔 혹독하게 추운 것이 우리를 힘들게 했을 뿐이지.
하나님은 가끔 낮에 해를 사라지게 하시어 더위에 지친 군사들을 쉬게 해주셨지.
그때는 밤처럼 어두워서 사라센인들은 우리에게 활을 쏠 수 없었어. 따라서 그때는 전투가 중단될 수 밖에 없었지.
하지만 전투가 시작된지 열흘째 되던 날... 놈들은 일식을 이용해 우리군을 사방에서 공격했어.
'일식때에 화살을 쏠 수 없어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라는 우리의 상식을 역이용한 것이지.
놈들의 기습은 성공적이여서 별피해 없이 우리군의 전초까지 접근하여 교전일 일으키는데는 성공했어.
우리군은 쳐들어온 사라센 놈들에게 투석이나 사격을 할 수 없었고. 기병돌격도 할 수 없었지.
하지만 기병을 쓸 수 없는 것은 사라센인들도 마찬가지였지.
그리고 사라센인들은 우리군의 전초부대를 쓸어버리는데엔 성공했지만,
곧 밀려오는 우리 중보병들과의 백병전에서 오히려 되밀리기 시작했어.
우리 스코틀랜드군 1만 7천 중 상비군과 기사가 8천에 달했지만,
사라센놈들은 징집군이었으니 무장상태나 전투력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곧 해가 다시 모습을 비추자 사라센인들은 썰물처럼 물러나더군.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라센인들은 2천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어.
우리는 놈들의 시체를 방벽과 장애물로 활용했지. 우리군의 피해는 600명 정도 였어.
다만 이 전투에서 우리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휴식이었지. 이제 어둠조차 우리에게 안식을 제공할 수 없었던 것이야.
비록 적에 비해 피해는 경미했지만 이 싸움에서 적은 우리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혔고,
이제 적은 일식때에도 전투를 강행했어.
다만 적도 그날 가장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때만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일은 없었어.
물론 지금처럼 계속 전투가 진행된다면 언젠가 우리는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어.
짐은 병력을 교대로 쉬게하며 맞서싸웠고, 적의 피해는 우리보다 훨씬 크게 누적되고 있었지.
말스넥탄 2세:전투가 벌어진지 1달이 지난 1118년 3월 어느날,사라센인들은 오후 일식에 대대적으로 공세를 취했어.
짐은 평소의 기습공격이라 생각했지만, 상당히 강력한 기습공격이라 전초부대가 맥없이 무너졌고,
중보병대도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지.
시간이 지나 일식이 걷혀도 적군은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그때 짐은 확인할 수 있었지.
다마스쿠스의 사라센군이 교황이 아닌 나를 상대하러 온 것을!
사라센군 3만이 스코틀랜드군 1만 6천에게 대공세를 펼치고 있었던 것이야!
이날 적군은 다마스쿠스에서 온 대규모의 중보병대를 1선에 투입해 우리 전초부대를 밀어버린 뒤,
우리 중보병대를 상대했어.
그리고 그들 뒤로 대규모의 징집부대를 투입해 물량으로 우리를 밀려고 했어.
전선이 고착되고 일식이 걷히자 적군은중기병과 궁기병 전력을 양익에 모두 쏟아부었어. 즉 총공격이 감행된 것이야.
짐은 즉시 구호기사단과 성당기사단을 양익에 출동시켰어.
하지만 적의 기병대가 이미 중앙의 아군 보병대를 협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기사단은 돌격전술의 잇점을 활용할 수 없었어.
더군다나 적 기병의 수는 아군의 2배나 되었기 때문에 격멸이 아닌 지연전을 명령할 수 밖에 없었지.
만약 밀린다면 그들은 포위섬멸당하기 전에 아군의 사격을 얻어맞으며 궤멸될 운명이라고 말해줬어.
그리고 투석기와 석궁수들을 양익에 지원보냈어. 짐은 그들에게 잔인한 명령을 내렸어.
만약 사라센 기병이 기사단을 밀어낸다면 무차별 속사를 퍼부으라고.
양익에서 사라센 기병대의 공세를 막지 못하면 우리는 포위섬멸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어.
기사단까지 사격을 얻어맞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어.
마지막으로 쉴트론 상비군을 중앙에 투입하여 엄청난 무게의 사라센 보병 압력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들에겐 명령없이 전진도 퇴각도 하지말고 위치를 고수하라는 지침을 하달했어.
양익에서의 전투가 끝나기 전에 중앙이 돌파당한면 양익도 각개격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될 수 밖에 없었거든.
이날 일몰때, 짐은 더이상 승리를 바라지 않았어. 단지 최대한 많은 군사들의 목숨을 구한채 퇴각할 수 있기만을 바랬지.
양익의 기사단은 짐의 명령을 완수했어. 그들은 자신들의 2배가 되는 적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았지.
비록 적 기병대를 패퇴시키지 못하고 결국 밀려났지만, 투사부대가 적 기병대 측면에 전개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줬어.
그리고 그들도 측면으로 조금씩 밀려나서 사격에 휘말리지 않았지.
반면 기사단에게 발이 묶인 사라센 기병대는 측면에서 사격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어.
덕분에 양익의 사라센 기병대는 후퇴하여 재정비를 해야했어. 이로써 사라센의 포위섬멸 의도는 실패했지.
그리고 큰 타격을 입은 적의 기병대는 전과확대 및 추격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지.
그래서 우리군은 패배했지만 살아남아 재정비를 할 수 있었지.
중앙의 중보병대는 쉴트론 상비군의 지원을 받으며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지.
양익의 적 기병대가 재정비를 위해 물러난 동안,
양익의 아군 사격부대가 중앙의 적 보병진 측면에 사격을 가해 타격을 가했어.
그리고 짐이 경기병 상비군을 이끌고 몇차례 돌격하여 적군을 되밀어내기도 했지.
덕분에 전투가 야간까지 이어지자, 지친 적군의 공세는 크게 약화되었고, 짐은 군사들을 축차적으로 후퇴시킬 수 있었지.
대신 짐은 소중한 상비군 다수와 상당수의 기사들을 잃었지만...,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자 적군은 기병대를 동원하여 철수하는 아군의 배후를 공격했지만,
보병방진과 투사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더군. 적 보병대는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결국 우리가 퇴각하게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지.
결국 이 예루살렘 전투에서 우리 스코틀랜드군은 사라센군에 패배하여 퇴각해야했어.
전투전 1만 7천이었던 스코틀랜드군은 전투후 4천 5백명만 남았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던 성당기사단장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구호기사단장은 큰 부상을 입었지.
4천명이 넘던 기사들 중 살아남은 자들은 1500명이었고 쉴트론 상비군 3000명 중 절반이 목숨을 잃었어.
나중에 사라센인들에게서 들은 소식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사라센군은 다마스쿠스군 1만 8천이 도착하기 전까지 2만명이었고, 그 중에서 5천명이 전사햇다고 하더군.
우리의 피해는 2천명 정도 죽거나 다쳤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패배한 그 날 사라센군은 1만명 정도 죽었다고 하는군. 우리도 그날 그정도의 피해를 입었지.
아니 그것보다 더 큰 피해는 짐이 나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었지.
내가 잘난 놈이 맞을까? 신의 편인 우리가 질 수 있다니?
헬가 오브 위체:남편의 패전 소식은 몇개월 뒤 브리튼에 전해졌지요.
어떤이들은 스코틀랜드군이 성지에서 전멸하고 왕이 전사했다고 까지 하더군요.
스코틀랜드 귀족들 중 상당수가 성전에 참여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로디언 공작이 남편의 부재를 틈타 스코틀랜드 왕위를 찬탈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더군다나 스코틀랜드의 후계자인 로버트는 군대를 이끌고 성전에 참전했기 때문에
당장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할 수 없었어요.
결국 저는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어요.
비록 명예롭진 않지만, 왕국을 찬탈하려는 로디언 공작을 살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웨일즈 궁수들을 고용해서 로디언 공작의 사냥터에 보냈어요.
성전에 나갈 수 없게 된 로디언 공작은 영지에서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죠.
1118년 여름 어느날, 로디언 공작은 평소처럼 사냥을 떠났고,
몰이 사냥 도중 의문의 화살을 맞아 사망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로디언 공작의 젖먹이가 로디언 공작의 뒤를 이었지요.
그리고 며칠 후 첩보관이 우리 영지에서 머물고 있던 전 로디언 공작의 조카가
교살당한채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전달했어요.
그해 가을, 성지에서 아들 로버트가 서신을 보내왔어요.
로버트는 스코틀랜드의 왕세자이긴 하지만,
그가 거느린 군대는 잉글랜드 영지의 징집병이라 어쩔수 없이 잉글랜드왕의 군대에 합류해 있었거든요.
남편은 예루살렘 전투 이후 남은 병력을 데리고 우트르메르를 휩슬고 있다고 하더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센의 대군을 피해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죠.
다만 남편의 자신감과 용기가 예전같지 않다고도 하더군요. 큰 전투를 피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말을 듣고 전 스코틀랜드의 왕비로써 성전에 종군하기로 결심했어요.
스코틀랜드와의 분쟁은 이제 걱정할 일이 아니고, 성지에서 싸우고 있는 잉글랜드 왕은 저를 막을 방법이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제가 성지로 가기 위해서는 스코틀랜드의와 잉글랜드 영지의 안정이 필요했어요.
다행히 잉글랜드는 제가 장기간 통치했는데다가 성전의 분위기에 휩싸여 전쟁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달랐지요. 비록 파벌의 수장이었던 로디언 공작은 죽었지만,
로디언 공작을 지지하던 갤러웨이 공작과 아일즈 공작은 제 아들을 지지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전 1118년 가을 동안 잉글랜드의 영지에서 제가 부재중의 통치체제를 참사회와 협의하여 구성했어요.
그리고 그해 늦가을 스코틀랜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스코틀랜드의 왕비로써 왕의 소식을 전했어요.
그무렵 성지에서 돌아온 부상병들에 의해 남편의 패배는 신화적인 수준으로 부풀려진 채 퍼지고 있더군요.
30만명의 적을 상대로 한달간 싸워 절반을 죽였지만 수적 열세와 이교도들의 술수에 의해 아깝게도 패배했다고요.
저는 스코틀랜드에서 남편의 영광스러운 패배신화가 유럽 각지에 퍼지도록 조치를 취했어요.
그리고 아일즈 공작과 갤러웨이 공작을 설득했지요.
비록 그들은 남편에 대한 지지로 바뀌진 않았지만, 성전에 자발적으로 참전하겠다는 결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어요.
이로써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문제는 성전이 종료될 때까지는 해결된 셈이었죠.
이렇게 1118년 겨울은 스코틀랜드 내정과 계승 문제로 지나갔고, 이듬해 봄은 성지로 가는 바닷길에서 지나갔지요.
스코틀랜드왕과 합류할 보충부대를 이끌고 말이지요.
말스넥탄 2세:예루살렘 전투에서 짐은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수만 없었어.
이교도들이 득실거리는 이 우트르메르에서 살아남아야 했지. 짐의 군대는 한동안 적과의 교전을 피했어.
만약 한번 더 대규모 전투를 치룬다면 설사 적에게 큰 피해를 주더라도 우리군은 궤멸될 수 밖에 없었지.
자파에서 2개월간 보내면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한편으로 인근의 사라센 도시와 성을 함락시켰어.
비록 작은 승리에 불과했지만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어.
하나님이 우리편이란 것과 내가 하늘로부터 선택 받은 영웅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어.
물론 패배의 기억으로 인한 회의감도 밀려들었고.
다행히 1118년 여름에 신성로마제국의 원정군 2만명, 프랑스와 아퀴탱의 원정군 각각 1만명이 성지에 도착했어.
그리고 잉글랜드 왕이 1만 2천의 병력을 이끌고 자파에 상륙했지. 그의 군대 중엔 짐의 후계자 로버트도 있더군.
우리군은 우리가 겪은 경험들을 그들에게 알려주었고, 왕들과 황제는 우리의 분전에 경의를 표했지.
하지만 난 그들의 경의를 받는 것보단 그들이 가진 군세를 빌리고 싶었지.
유럽 제왕들의 원정군을 이끌수만 있다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니.
하지만 유럽의 제왕들은 서로 전공을 세워 우트르메르를 차지하길 원했지. 사실 짐도 그것을 바랬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죽도록 싸우다 병력 대부분을 잃었는데,
다른 왕들은 별다른 손실 없이 우트르메르의 성읍들을 장악하는게 아니꼬왔어.
그리고 다마스커스의 사라센군이 무서워 전투를 회피한 교황도 미웠고.
그래서 먼저 잉글랜드 애설울프왕에게 예루살렘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어.
말그대로 사실이었기에 애설울프왕은 예루살렘 수복의 영광을 위해 그곳으로 진군하더군.
그 다음 짐은 군대를 이끌고 우트르메르 내륙에 재정비 중인 사라센군을 유인했지.
당시 사라센인들은 예루살렘 전투 이후 교황을 잡으러 북상을 했고,
결국 1118년 6월 사페드에서 교황의 군대를 격파했지.
1118년 8월, 2만에 가까운 사라센군은 5천도 채 안되는 우리군을 격멸하기 위해 남하했고,
우리군은 케락까지 후퇴했다가 몬레알을 거쳐 이집트 방면으로 기동했어.
케락에서 우리군을 놓친 사라센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잉글랜드군을 공격했고,잉글랜드군은 패배했어.
인근에는 프랑스왕의 군대가 있었지만, 그들은 승리의 영광이 잉글랜드에 넘어가는 것이 싫어서 돕지 않았다고 하더군.
한편 우트르메르 남쪽 끝에 도착한 우리군은
이집트 방면에서 사라센군 6천명이 우트르메르의 사라센군과 합류하기 위해 기동중인 것을 알아냈어.
당시 부상병과 보충병을 합하여 5천을 간신히 넘긴 우리군은 적의 예상 진군지역인 네게브에서 적군을 기다렸지.
그리고 1118년 9월 네게브에서 사라센군을 습격했어.
적의 궁기병과 경기병은 중무장한 우리의 기사단을 유인하려고 했지만, 기사단은 오직 적군 보병대에 돌격했어.
그리고 우리의 중보병대는 적 보병대를 물고 늘어졌고. 결국 전투는 아군의 대승리로 끝났어.
아군의 피해는 1500 정도였고, 사라센군은 적어도 4천명 이상 전사했지.
이날 짐은 전사한 성당기사단장을 대신하여 성단기사단을 지휘하며 적군에게 돌격했어.
적의 궁기병들이 화살을 쏘았고 그중 3발이나 맞았지만, 기적적으로 다치진 않았어.
적의 기병들이 나를 막으려다가 돌파당하기 일쑤였지.
이날의 승리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어느 정도 되찾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아직 들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이집트령으로 퇴각하는 사라센군을 추격하여 섬멸하기로 마음먹었어.
불과 3500의 병력으로 이집트로 쳐들어간거야!
그리고 다음달인 1118년 10월, 짐은 도주하던 2천의 사라센군을 섬멸했어.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공성중이던 잉글랜드군이 패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아들 로버트는 후군에 있어서 무사했었고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사라센군은 다마스커스의 보충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북상했다고 하더군.
그제서야 짐은 하나님이 다시 짐의 편을 들기 시작했음을 깨달았어.
그래서 짐은 이집트에서의 모험을 그만두고 군대를 자파로 기동시켰지.
그리고 1119년 여름까지 그곳에서 병력을 재정비했어. 사라센군과의 결전을 위해서 말이야!
그리고 그해 여름 짐은 자파에서 스코틀랜드 보충부대와 왕비를 만났지.
헬가 오브 위체:다행히 자파에서 다시 만난 남편은 예루살렘 전투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난 상태였어요.
그 오만하고 이기적인 성격만 없어졌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동안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일을 들은 남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더군요.
그리고 스코틀랜드 보충부대를 얻은 남편의 군대는 7천에 달했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패전하여 돌아온 잉글랜드 왕 애설울프는 남편과 연합군을 결성했더군요.
비록 애설울프왕은 저에게 종군을 허락하진 않았지만, 제가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온 것은 탓하진 않더군요.
말스넥탄 2세:거점없는 애설울프가 뭐 어쩌겠어?
애설울프는 예루살렘을 먼저 점령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거점을 확보하지 않았지.
덕분에 사라센군이 보급을 끊고 포위공격하니 패배할 수 밖에.
그래도 4천이 넘는 병력을 건졌으니 불행중 다행이었어.
하지만 거점은 없고 자파는 그나마 제일 가까우니 우리에게 의지하더구만.
짐은 그들에게 거점을 빌려주는 댓가로 짐을 수장으로 한 연합군 결성을 제의한 것이고.
뭐 꼬우면 집에 돌아가면 그만이고.
이렇게 1119년 8월, 자파에서 1만 1천의 군대를 재정비한 짐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진군했어.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은 보급문제 때문에 우르트메르 북부에서 약탈을 벌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고,
교황의 군대는 아스칼론에서 재정비후 내륙으로 조심스레 진군을 재개했지.
프랑스군은 예루살렘에서 북상하던 사라센의 대군에게 패퇴당했고,
아퀴탱군은 우르트메르 남부에서 성읍들을 공략하고 있었지.
1119년 9월, 짐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했지만, 공성전을 준비하진 않았어.
짐은 예루살렘을 공성전으로 점령할 생각이 없었지.
그러기엔 희생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굳이 함락하기 위해 공성전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왜냐면 사라센의 대군이 다시 올 것이니까.
그리고 다마스쿠스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사라센의 2만 2천 대군이 예루살렘으로 남하하기 시작했지.
헬가 오브 위체:남편은 사라센의 대군의 대군을 맞이하러 예루살렘에서 물러났지요.
그 다음 내륙으로 진군하는 교황의 군대와 합류를 했어요. 그리고 교황에게 연합군 결성을 요청했지요.
이에 교황은 연합군 결성에 찬성했지만 연합군의 수장은 자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에 남편은 반발을 했지만, 저는 교황님을 수장으로 모시자고 설득을 했어요.
결국 교황님과 남편은 논의 끝에 수장으로써 명예는 교황이 가지고,
승전후 세속적 지배권은 남편이 가지기로 합의를 보았죠.
이후 저는 남편과 교황님께 제안을 했어요. 결전을 우르트메르 북부에서 하자고 한 것이죠.
그곳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이 있었어요. 다만 보급 문제로 약탈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을 뿐이었죠.
그래서 교황님은 그들에 대한 축복을 거두신 상태셨어요.
하지만 전 교황님을 설득하여 신성로마제국 십자군이 사면 받을 수 있게 했어요.
대신 조건은 '우르트메르에서 교황의 연합군이 교전시 지원할 것.'이었죠.
그리하여 우리 연합군은 우트르메르 중부지역에서 사라센군을 기다렸어요.
말스넥탄 2세:사라센군은 예루살렘을 거쳐 우르트메르 남부에 있던 아퀴탱군에게 쳐들어갔지.
그랬더니 아퀴탱군은 해안가를 따라 우리 연합군쪽으로 도주하더구만.
그래서 전령을 보내 연합군에 합류하여 명예를 회복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니 아퀴탱군은 받아들이더군.
그리고 패퇴된 프랑스군도 재정비를 마친 뒤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합군에 합류했지.
이렇게 약 2만 2천의 연합군이 결성되더구만. 이때가 1119년 12월의 일이었지.
그런데 사라센군이 우르트메르 남부에 있던 아퀴탱군을 몰아냈기 때문에
사라센군은 이집트의 징집군을 불러들일 수 있었지. 거기에 아라비아에서도 징집군이 북상했어.
그래서 약 3만의 사라센 대군이 우르트메르 남부에 집결했어.
하지만 사라센 놈들도 우리의 전력을 잘 아니 섵불리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였지. 그래서 미끼를 던지기로 했어.
그 미끼는 우리 스코틀랜드군이었지.
당시 십자군의 상황은 덩치 큰 신성로마제국군 2만이 약탈로 보급을 해결하며 간신히 북부에서 중부로 내려온 상태였고,
나머지 왕국의 연합군 2만 2천이 중부지역에서 집결한 상태였지.
우르트메르의 십자군은 한 전장에 집결할 수만 있다면 어떤 군대도 격파할 수 있었어.
하지만 3만의 사라센군은 십자군을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지.
그래서 그들이 바라던대로 연합군을 다시 나눴어.
교황군은 신성로마제국군에 합류시키되 항상 연락망을 유지하게 했어.
그 다음 프랑스군을 자파, 아퀴탱군을 카락으로 보냈어. 이들과도 연락망을 유지하게 했지.
마지막으로 우리 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군은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했어.
이제서야 3만의 사라센 대군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더구만.
1120년 3월, 브리튼의 십자군 1만 1천과 사라센군 3만은 예루살렘에서 다시 결전을 벌였고,
아퀴탱,프랑스,신성로마제국군은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어.
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반드시 이겨야 했지.
왜냐하면 스코틀랜드군에는 스코틀랜드 왕과 왕비 모두 참전한 상태였거든.
헬가 오브 위체:상황은 1107년 잉글랜드 귀족들이 랭커스터 공작령을 요구하며 쳐들어올 때보다 훨씬 않좋았죠.
아군의 4배가 넘는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었고 십자군이 집결하기까진 7일이 필요했어요.
스코틀랜드군에게 유리한 점은 경험과 무장에서 우수하고, 요충지를 점령한 것 외엔 없었어요.
시간싸움이라는 것은 사라센인들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7일 밤낮으로 전투가 전개되었지요.
궁기병의 매서운 사격이 끝나면 중기병의 돌격이 이어졌고 그들 뒤론 수많은 보병들이 밀려들었어요.
남편의 명령은 간단했어요. '쉴트론, 산개하라! 쉴트론, 전개하라! 궁수, 일제사격! 궁수, 사격중지!'
매일 수많은 부상병들과 전사자들이 후방으로 밀려들어왔고, 저와 시녀들, 종군창녀들은 그들을 간호했어요.
귀족이라해서 더 나은 간호를 기대할 수 없었어요. 오직 부상 경중에 따라서 치료와 간호의 우선순위가 결정되었어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전투에 투입시키기 위해서였죠.
다행히 귀족들도 군말없이 따라주었어요. 어차피 지면 다죽을테니까.
말스넥탄 2세:짐이 기대했던것보다 우리 스코틀랜드군은 훨씬 잘 싸워주었지만, 사라센놈들의 공세도 상상이상 이었지.
놈들은 제파식 공세로 끊임없이 공격하더군.
만약 3일째 되던 날의 아퀴탱군과 5일째 되던 날의 프랑스군이 합류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7일을 버티지 못했을거야.
3일째 되던날 아퀴탱의 기사대가 사라센군의 측면을 돌파하며 전투에 합세햇지.
덕분에 악랄한 사라센 궁기병 다수가 죽어서 화살비에 좀 덜 시달리게 되었지.
5일째 되던날엔 프랑스군이 아군의 배후에서 합세해서 사라센 보병대를 잠시 밀어냈지.
이 고마운 연합군 덕분에 우리군은 많은 부상자들을 살릴 수 있었고, 휴식도 좀 취할 수 있었어.
7일째 되던날 우리 연합군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어.
그날 아침 교황이 지휘하는 신성로마제국군 선발대가 전장에 도착했거든.
그리고 그날 정오까지 신성로마제국군은 전장에 당도하여 사라센군을 포위하기 시작했어.
물론 사라센놈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아침부터 후퇴하기 시작하더군.
그래서 이 예루살렘에서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는 없었지.
하지만 우리 연합군은 이 7일간의 전투에서 아껴둔 카드가 하나 남아있었지. 그것은 기사단이었어.
짐은 1천의 기사들과 5백의 스코틀랜드 기병대를 앞세우고 연합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지.
곧 아퀴탱,프랑스,잉글랜드의 기병 1000기와 신성로마제국의 기사대 2500기도 추격에 가세했지.
이 5천의 기병대 뒤로 스코틀랜드,잉글랜드,아퀴탱,프랑스의 보병대 1만 2천이 진군했고,
1만 9천의 신성로마제국군이 사라센군의 배후와 측면에서 쏟아져 사라센군의 퇴각을 견제했지.
퇴각이 지체되고 있던 사라센군 뒤에 5천의 기사대가 돌격해 들어갔고!
헬가 오브 위체:1120년 3월, 3차 예루살렘 전투에서 십자군은 집결에 성공하고 사라센의 대군을 대파했지요.
이 전투에서 사라센군은 약 2만 5천여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잡혔어요. 십자군은 8천녀명이 전사했고요.
그중에서 스코틀랜드 전사자가 약 4천, 잉글랜드 전사자 약 2천, 아퀴탱군과 프랑스군이 각각 1천명이 전사했고,
신성로마제국과 교황군은 기록도 남지 않을만큼의 적은 피해를 입었다고 하네요.
예루살렘 회전이 끝난 직후, 십자군은 예루살렘 공성전을 준비했어요.
하지만 그 공성전에서 스코틀랜드군은 빠졌죠. 전투의 피해가 컷기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남편은 퇴각하는 사라센군을 추격하여 섬멸하고 싶어했던 것이였죠.
그래서 남편은 예루살렘 수복을 간절히 원하던 저와 교황을 예루살렘 공성군에 남겨두고 공성을 지휘하게 했어요.
그리고 자기는 제왕들에게서 약 1만의 병력을 빌려 패퇴한 사라센군을 추격했고요.
전 예루살렘에 공성을 지휘하는 제왕들과 황제와 교황에게 불필요한 희생을 막자고 제안했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 항복을 권유해보자고도 했지요. 모두 동의하여 항복을 권유했지만
불쌍한 이교도들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그리하여 저를 포함한 모든 제왕들은 예루살렘의 이교도들을 완전히 박멸하기로 결의를 했지요.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공성을 진행했어요.
가장 병력수가 많은 신성로마제국군이 공성을 주도 했고,
투석공격에 성벽이 무너지자 십자군은 일제히 성으로 진입했어요.
말스넥탄 2세:1120년 4월, 짐은 1만 3천의 군대를 이끌고 카락으로 도주한 8천의 사라센인들을 사냥했지.
편제가 무너진 사라센군은 몰이사냥 당하는 짐승들 같았어.
물론 그들을 살육하는 우리들은 사자와 호랑이같은 맹수처럼 용맹했지.
우리군은 지난 수년간 죽어간 카톨릭 교도들을 위해서 그들을 인정사정없이 도륙냈어.
그리하여 사라센인 6천을 도살했고, 나머지놈들은 아라비아 방면으로 도주하더군.
뭐, 이 정도면 한동안 우르트메르로 오진 않겠다 싶어서 예루살렘으로 회군하니 이미 예루살렘은 탈환되어 있더군.
그런데 짐이 다스릴 영지가 지저분하게 탈환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랬어.
아무리 이교도들이라지만 아녀자들까지 무자비하게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짐이 공성했더라면 그자들의 몸값을 받고 추방했을 것인데...,
헬가 오브 위체:1120년 4월, 저는 2만 3천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격했어요.
우리 십자군은 성지에 기생하던 어리석은 이교도들을 박멸했죠.
우리는 그들이 회개하여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은 거절하고 끝까지 저항하더군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오직 죽음만이 그 어리석음을 치료해줄 수 있었어요.
예루살렘이 탈환되던 그날 얼마나 많은 이교도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전 잘 모르겠군요.
나중에 들으니 피가 발목까지 넘쳤느니, 시체가 성벽높이만큼 차올랐느니 말이 많았지만
그 현장을 목격한 저에겐 사실이 아니였어요.
그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 기록이나 사람을 본 적은 없었어요.
그저... 그날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기를 기원할 따름이에요.
이후 십자군은 끝까지 저항하는 우트르메르의 성읍과 도시들을 하나하나 탈환해나갔어요.
모스크를 불태우고 이맘의 목을 베어 효수했지요.
그리고 저항하는 이교도 수비대와 소규모 저항군에겐 어김없이 신의 철퇴가 내려쳐졌어요.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마침내 우트르메르는 평정되었어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라센인들의 수장이 우르트메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죠.
하나님의 자식들이 성지를 되찾는데 성공한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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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정작 그 당시의 스샷이 없는 저는 머리속 기억과 상상력을 짜내면서 노잼으로 연재중입니닷! 원래 5부작으로 계획했는데 쓰다보니 넘어가게 되는군요. 하지만 정작 보는 사람은 없으니... 빨리 끝장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