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물] 제3장 제1부
파리의 무희 6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뱅상은 콜랭의 고향 플랑시 마을에서 올라온 청년이었다. 콜랭의 어머니 쥘 가리네와 유일하게 소식을 주고받는 치즈가겟 집 태생이었다. 파리에 연고가 없어 이 집에 들어왔다. 우체국에 가는 일, 마차를 부르는 일, 콜랭이 수집해 들여온 물건들을 나누고 관리하는 일, 서류 접수 시키는 일, 집을 고치는 일까지 점점 뱅상이 하는 일이 늘어났다. 이제 뱅상이 없으면 콜랭은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지기가 힘들 것이다. 여간 해서 남이 하는 일에 만족을 표시하지 않는 콜랭이 여러 번 뱅상을 칭찬하는 소리를 리진은 들었다. 콜랭이 뱅상을 믿을만한 청년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정작 뱅상은 봉마르셰 백화점의 점원이 되고 싶어하다니. 콜랭이 알면 꽤나 서운해 할 것이다.
조선을 떠날 때 왕비가 외통을 뚫어 줄 테니 서찰을 써 보내라 했던 것은 리진 자신의 안부를 알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바다 건너, 낯선 나라 사람들은 어떤 법에 의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뱅상과 같은 파리의 젊은이들에게 평생 직장이라는 느낌을 주며 최고의 일터로 우상시되고 있는 봉마르셰 백화점에 대해 조선의 왕비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는지. 생각에 잠겨 있던 리진은 편지쓰기의 무력함이 느껴져 깃털 펜을 여태 썼던 편지 위에 내려 놓았다.
겨울이 되면서 오후 5시만 되면 어스름이 내렸다.
시몬느와 한 시간 동안 역사 공부를 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도 하루가 금방 흘러갔다. 잔느의 시중을 받으며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백단향을 뿌리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마쳤을 땐 거리에 하나 둘 가스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낮이 짧아진 대신 밤이 길어졌다. 뱅상이 불러 준 마차를 타고 봉마르셰 백화점으로 향하며 리진은 바깥을 내다보았다. 대도시의 높은 건물들과 상가의 상점들이 가스등속에서 번쩍거렸다. 예전엔 해가 지면 일찍 문을 닫았는데 가스등 덕분에 마가쟁 드 누보테의 영업시간이 길어졌다고 잔느가 일러주었다. 마가쟁 드 누보테라니? 되물으니 잔느는 여자들의 드레스나 각양각색의 천, 양산이나 구두 향수 같은 그때그때 유행하는 물건들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라고 했다. 잔느는 가스등이 켜진 유행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상점들 사이를 걸어 다니는걸 좋아했다. 잔느 만이 아니라 파리의 여인이라면 누구라도 새로운 유행상품이 물결치는 거리로 나가고 싶어했다. 마가쟁 드 누보테의 보도블록은 사람이 걷기에도 마차가 다니기에도 좋게 새로 깔려 있었다. 잔느는 윈도 안의 반짝거리는 새상품들이 즐비한 진열장들 사이를 걸어 다니노라면 딴 세상을 구경하는 것 같이 신이 난다고 했다. 리진은 밤 나들이를 허락받으려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는 잔느를 따라 나간 적이 있었다. 리진은 색색의 옷감들이나 종류가 다양한 천들이 즐비한 상점에 들어가 수놓기 적당한 두께의 면으로 된 흰 천을 끊어왔다. 색실과 수바늘도 종류별로 샀다. 천을 재단할 수 있는 가위와 줄자도 구했다. 흰 천을 네모나게 재단해 네 귀퉁이를 박음질한 뒤에 중앙에 붉은 모란을 수놓아 살롱에 온 손님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었다.
거리는 온통 축제를 맞이한 듯했다. 유리문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눈이 부셨다. 유리문마다 정찰제 판매점이라는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불빛들이 출렁거리는 축제 분위기는 봉마르셰 백화점에 닿아 절정을 이루었다. 멀리서도 봉마르셰백화점은 눈에 띄었다. 흰 석회벽의 밋밋한 구관에 비하면 에펠이 설계했다는 신관은 겉모습만으로도 웅장했다. 제장양식의 호화로운 모습은 쇼핑을 하러 나온 사람이 아니라도 그 앞을 지나다 보면 한번 들어 가 보고 싶게 유혹적이었다. 점원들의 친절한 인사도 자신도 모르게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데 한몫했다.
오가는 인파로 붐비는 백화점 신관 앞에서 리진이 탄 마차가 멈췄다. 2층 독서실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콜랭이 마차가 서는 자리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리진을 안아 내렸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의 파랑새, 라고 속삭이는 것도 마차몰이꾼에게 마차 삯 외의 팁을 지불하는 것도 콜랭은 잊지 않았다.
―이게 무슨 냄새요?
갑작스런 콜랭의 말에 리진이 놀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