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환경교육의 역사에 대해 30년이라는 말도 있고 20년이라는 말도 있고, 그보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몇 백년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역사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물려받고 또 배웠는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2005년 현재 한국에는 환경교육을 자신들의 중요한 임무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단체가 1,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환경단체의 활동이 과거의 분쟁 지역에서의 투쟁에만 한정되지 않고 시민에 대한 지속적이고 다양한 홍보와 교육을 병행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 있는 1만 개의 초중등학교의 대부분에서도 직간접적으로 환경교육을 하고 있다. 교과에서 다루는 경우도 있고 특별활동이나 재량활동에서 다룰 수도 있고 교과외 활동 전반에서 다룰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환경교육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의 수는 꽤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양적 팽창에 어울리는 질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하는 문제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특히 양적 팽창의 가속도가 현저하게 높은 사회환경교육의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양적 확대가 질적 개선을 동반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문제 해결책의 일부가 아니라 문제의 일부가 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환경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지도자들의 자질 문제가 그 핵심에 속한다. 현재 사회환경교육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도자나 활동가 중에서 체계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환경교육에 대해 학습할 기회를 가졌던 준비된 지도자의 비율이 얼마나 될 것인가? 또 자신의 역할에 걸맞게 꾸준히 심화학습의 기회를 가지고 자신의 역량을 강화해 온 사람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아마 매우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학습할 수 있는 교육 연수 프로그램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도자의 질적 저하와 역량 부족은 그들만의 책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 환경교육이 외화내빈의 형상으로 치닫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정보생산자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환경교육과 관련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생산하고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조직이나 절차가 존재하는가? 그냥 떠들면 그게 논리가 되고 이론이 되고 실천의 근거가 되는가? 경험만큼 위험한 근거는 없다. 반성되지 않은 경험은 거품이다.
거품의 붕괴는 부동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영역의 양적 팽창을 떠받칠 수 있는 내용과 방법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 부풀어 오른 거품은 질적으로 악화되고 경쟁은 심화되고 그 가운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여 선의를 가진 자들이 절망감속에 떠나고 그 자리를 엉뚱한 인간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2005년의 한국 환경교육.... 요란한 쇼 윈도우의 찬란한 불빛 뒤에 감추어진 궁색함과 불안감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우리가 재빠른 정보 탐색자와 소비자에서 성실한 정보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공유할 때 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다시 시작된 환경교육진흥법에 대한 논의 가운데 이 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지길 희망한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검고 흰 것, 푸르고 붉은 것, 깊고 얕은 것, 넓고 좁은 것, 버릴 것과 취할 것의 경계가 드러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