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에 관한 시모음 54)
마음이 봄비를 따라가서 빈 배를 흔든다 /박남준
정처 없는 것들이 밤새 숲을 흔들며 거센 강물 소리를 부려놓는다 잠자리를 뒤척이며 듣는 바람머리 길목 처마 끝에 목을 맨 풍경소리가 현기증처럼 어지럽다 이윽고 내리는 해묵은 것들 씻어내는 봄비구나 세상의 무엇이 힘겹지 않겠는가
빗발이 일고 이제 낙숫물 소리 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군 아침 봄비 속에 물안개가 자욱하다
나무들이 안개의 숲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구나
아무것도 없는데 내 입을 통해 나온 말이 내 귀에 닿는다 흠칫 놀란다 또 혼잣말을 하다니 그 말이 또 귀에…… 씁쓸한 웃음이 빗소리에 젖는다 젖은 마음이 비를 따라간다 깃을 적신 채 나뭇가지에 움츠린 저 작은 멧새, 벌레를 잡는지
깃을 적시는 봄비가 허기를 채우지는 않겠지
가만 배가 고픈 것인가 아니면 습관, 된장국을 끓일까 밥이 좀 남아 있던가
봄비 /허욱도
혹시 만나면 어떻게 할지
눈을 감고
펼치는 상상의 나래
남몰래 기다리는
내 마음 들킬세라
두리번두리번
얼어있던 대지 위에
똑똑 노크 소리
잠자던 아침을 깨우니
꽃샘추위 앞세워
길목을 지키던 겨울이
깜짝 놀라 자리를 비운다.
봄비 /두보 김기현
메마른 대지를 봄비가 애무하고
흥분한 초록草綠의 환희 속에
이천, 걷기 좋은 둘레길가엔
참 망초나물과 쑥이 불쑥 솟는다.
화려했던 왕벚꽃 꽃잎이
서럽게 눈꽃처럼 떨어지고
지나가는 산객의 시선視線사이로
산 고들빼기도 배시시 웃는다.
여기저기서 쑥떡거리는 신록新綠
산 고들빼기와 참 망초나물
쑥국과 쑥 수제비, 쑥버무리까지
언제 따라왔나 내 밥상에 앉아있다.
봄비 /김말란
실바람 사이로
살며시 내리는 비
푸른 잎에 맺히는 물방울이
또르르 구르면
몽글몽글 맺혀있는 꽃망울도
하나둘 숨을 고르며 피어난다
하늘문 열려
영롱한 무지개다리 놓으면
어느새 비가 개고
햇살이 머리 내민다
이름처럼 예쁜 봄비에
초록 잎 화들짝 피어나면
꽃길을 걷듯 행복한 순간
커피 한 잔에 웃음이 걸렸다
봄비 그친 뒤 /아동문학가 남호섭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안개다.
산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봄비맞은 편지 /평보
봄비 때문입니다
바람 때문입니다
참새의 수다 떠는 모습도
여린 새싹들의 고통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움 입니다.
창밖 유리창에 부서지는
물보라 속에
정다운 미소가 보입니다
환영
사람이 그립습니다
봄비 때문야
바람 때문야
문틈에 끼어놓은 편지
빗물에 번진 편지는
내게 속삭였습니다.
보고싶다.....
봄 비 /龜岩 박윤종
추녀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
연둣빛 초록 소녀
가슴 적신다
차겁던 우듬지엔
남풍 불어 매마름에
목마름 축이고
밤새 달려온 봄비는
수줍은 진달래
볼우물에 고이잠든다
순리의 봄비 /정찬열
빗소리가
후드득 밤을 적신다.
유리창을 두들기는 봄비가
미명을 벗지 못한 들녘에도
어둠을 밀어내니 비안개 자욱하다
봄비의 전령이 데려오셨나!
이 비가 그치면 남녘에는
머지않아 들려올 매화의 예찬
죽음에서 해방되어 피어나는 꽃
잎사귀 앞질러
꽃 매화 피우기 위해
경칩 지나 순리에 불 지피는 봄비
입춘에서 경칩까지 30일이고
경칩에 개구리가 밖으로 나오는데
결국엔
매화꽃을 피우기 위해
음기를 이겨낸 양기의 출발점
걱정에 소쩍새도 울었나보다
매화에 실어주는 절기의 봄비가
봄비 /김세창
겨울내내 데기 애끼샀더니
여엉 울음뽀라도 터지십니꺼
안개 찌인 유리창
빗물이 눈물맹키로 쏟네예
그라모예 상구 울어 보이소
소리치삼서 실컨 울어 보이소
인녁 울음이 흘러가꼬 오대로 가삐일 긴지
겨우살이 끄트리기
바람벽 창가에 땡기붙어
눈물로 콧물로 씻거대는
조로케 애절한 비
새까맣게 타삐린 애간장 뚜디리대며
매마른 가심에 디리붓는 비
봄비라예
봄비 /메주 고제웅
비가 온다
소곤소곤 봄비가 온다
풀, 나무의 새싹이 기립해 손뼉을 친다
비로소, 꽁꽁 언 대지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꽃피고 새가 운다
우리도 한 방울의 봄비가 되어
누군가에 돌아가
꽃피고 새들의 노래가 되자
푸르디푸른 심장이 뛰도록
아아, 내 영혼이 이슬 머금은 금낭화 꽃주머니로 흔들렸으면
봄비 /이정록
오늘 내리는 봄비는
안개비라서 보슬비라서
도랑까지 흘러가지 못합니다.
병아리 눈꼽만큼 내려서
쥐구멍에 스며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겨우
땅만 굽어보던 봄비라서
씨앗의 머리는 톡톡 정확히 맞춥니다.
늦잠 자는 개구리 이마는
간질간질 잘도 맞춥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땅속 씨앗과 개구리에겐
오늘 내리는 빗소리가 가장 크게 들립니다.
개구리가 슬금슬금 기어 나옵니다.
씨앗의 귀청이 새파랗게 터집니다.
봄비 /함민복
양철지붕이 소리 내어 읽는다
씨앗은 약속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
그리운 사람
내리는 봄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가죽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
마른 풀잎 이제 마음 놓고 썩게
풀씨들은 단단해졌다
봄비야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꽃 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봄 비 /박재도
창 너머 봄비가
사뿐사뿐 오시네, 앵두꽃 사이로
내리는 봄비가 참 좋다.
보슬보슬 빗방울이
새 꽃망울 잠 깨워, 봄이 활짝 피어
내리는 봄비가 참 좋다.
사알사알 빗소리
귀 기울이니, 고운 님의 숨결 같아
내리는 봄비가 참 좋다.
시집가는 봄처녀
연지 곤지 씻겨, 고운 뽈에 얼룩져도
내리는 봄비가 참 좋다.
사뿐사뿐 내리는
저 빗방울만큼, 그대를 사랑하고파서
내리는 봄비가 참 좋다.
봄비 /박라연
사는 일이 너무 깜깜해,
아ㅡ악 소리치고 싶을 때
꽃잎 발소리처럼 빗소리 들리면
쩍쩍 금이 간 마음 너무 가벼워,
차라리 불지르고 싶을 때
비, 내려 나 아닌 다른 것들이라도 적시면
벚꽃 떨어져 이리저리 헤맬 때
혼자서는 흘러갈 수 없는 가느다란 봄비
그녀의 가냘픈 다리로
꽃잎, 그 헤맴을 감아올리려고 애간장 태우는 걸 보면
나도 몰래 내 숨 속에 내 거친 마음 가두네
숨이, 막, 끊어지기, 직전까지,
비의 사랑 한 가지 닮아보고 싶었는데
봄비, 나를 춘몽 속으로 아득히 데려가네
봄비 오는 날 /천담 박흥락
봄비 솔솔 마당을 적시고
봄바람 타고 달려온 봄 빗방울이
창문에 눈물처럼 흐르네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에
흐르는 빗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니
덩달아 가슴속 그리움이 썩여져
쌉싸래한 맛을 내네
창도 눈물 흘리고
가슴도 눈물 흘린다
봄비는 그리운 그대 끄집어내어
빗방울 속에 태우고
흐르는 창에도 미끄럼 태우고
서산에 구름 붉게 물들일 때
내 가슴을 한없이 불사르네!
봄비 /문계봉
꾸중 듣는 아이처럼
소리 없이 내렸다 봄비
갑자기 늙어 버린 아들과 아기 같은 엄마가
불도 안 켠 방 안에 정물처럼 앉아
흘러간 시간 어디쯤에선가 놓쳐 버린
기억되지 않을 기억들을 더듬고 있을 때
보이지 않는 빗물은 벽을 타고 흐르고
흐르다 창문을 타고 흐르고
흐르다 방바닥을 적시고 끝내는
모자(母子)의 가슴속을 흐르다
스미었다 보이지 않는 빗물이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적시며 흐를 때
침묵처럼 무거워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은
저 혼자 물에 잠겨 컥컥 자맥질했다
가량없는 아들의 마음 밖으로
하염없는 엄마의 마음속으로
내리고 흐르고 고집스레 스몄다. 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