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같은 사랑, 다른 이름 03 ▒ ]
"언니언니! 있지, 내일 일요일인데 뭐할꺼야?! 내일도 윤석씨 만나?"
"응. 내일 약속있어.."
"그래?! 혹시 그럼,,,,,,,,,,,, 지난번처럼 나랑 재연이랑 넷이 모여서 같이 놀아도 돼?!..."
"..아,,,, 규진아 어쩌지?.. 내일 동신그룹에서 주최하는 리셉션이 있어서
윤석씨랑 거기 같이 가기로 했는데.. 윤석씨가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한테 나 정식으로
소개도 시킬겸, 또 그런 자리엔 나도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라면서 말야..
음, 넷이서 같이 놀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재연이랑 너만 가고 싶다면,
윤석씨한테 말해볼 수도 있는데.. 어쩔까?"
"에이.... 그래? 그런 데 우리가 껴서 뭐해. 넷이서 뭉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그나저나 언니, 이제 대기업에서 하는 파티 같은데도 다 가고! 정말로 출세했네?!"
"후후......규진아, 이거 볼래? 윤석씨가 사준 옷이야. 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인가봐"
규인언니가 옷장에서 꺼내든 옷은, 영화 속에서나 보았을 법한 세련된 드레스였다.
살구빛이 감도는 부드러운 실크 재질에 어깨라인을 돋보이게 하는 깔끔한 디자인.
"........와아!!...... 너무 예쁘다!! 내일 진짜 이거입고 가는거야?!"
"응, 후후. 근데 나 말이야. 벌써부터 떨려 죽겠어.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윤석씨 입장이 곤란해 질텐데...."
"아니야, 그런 걱정 마! 언니 조신하고 차분한 사람이잖아. 잘 할꺼야.
그나저나 머리는 풀고 갈거야? 깔끔하게 올리는 게 훨씬 예쁠 것 같아.
목걸이는 이거 어때? 어울리지?! 와, 정말 근사하겠다아-!"
"응, 그러네.. 니 말대로 해야겠어. 고마워. 아,,, 그나저나 정말 긴장되서 큰일이야...
머리도 왠지 지끈지끈 한 것 같고. 목도 좀 아프고. 뭔가 대단히 불편해..."
"어,,,, 그러고보니까, 언니 얼굴도 빨갛네!... 뭐야,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냐?!
이거 큰일이다! 언니, 감기여도 굉장히 심하게 앓아야 하잖아. 안되겠다. 약 가져 올테니까,
먹고 지금 빨리 자! 감기 오면 정말 큰 일이야! 내일 중요한 날이잖아...
가만,,,, 감기 약이 어딨더라?!"
허겁지겁 집 안을 뒤져 찾아낸 약을 언니에게 주고 나서, 머리 위엔 차가운 물수건을 올렸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것이 벌써 미열도 있는 듯,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그 날은, 마치 내가 내일 큰 일이라도 치루는 것 처럼 조바심을 떨면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 ▒ 같은 사랑, 다른 이름 03 ▒ ]
"언니, 좀 괜찮아? 어때?"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언니의 상태를 살폈다.
"어머.... 언니!!!!!"
언니는 생각보다 굉장히 아픈 모양이었다. 지난 밤 약까지 먹었는데 그 새 감기가 왔던 건지,
밤새 흘린 식은 땀에 베개가 푹 젖어 있었고, 입술까지 하얗게 질린 것이 보통 사태가 아니었다.
"이를 어째!... 일단 병원부터 가고 보자. 엄마!! 아빠!!! 여기 좀 와 봐요!!"
내 외침에 안방에서 달려나오신 엄마 아빠는 언니를 보더니 기겁을 하신다.
"어머!! 어머!! 어쩜! 규인아!! 괜찮아?? 그 동안 안 아프고 잘 버틴다 했는데......
여보!! 규인이 좀 업어요! 차에 시동 걸어 놓을테니까 응급실로 가자구요!"
아침부터, 아픈 언니 때문에 집안이 온통 발칵 뒤집혔다.
병원에서 입원 수속을 밟은 후에야 온 가족이 그나마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는데,
한 숨 돌리자 마자 생각난 것은.................
맞다!! 리셉션!!!!!!!!!!!
[ ▒ 같은 사랑, 다른 이름 03 ▒ ]
"별로 큰 병은 아니고 가벼운 몸살감긴데, 환자가 워낙 약하다보니
당분간은 휴식이 필요하겠습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어... 엄마..............."
"어머, 규인아! 이제 좀 정신이 드니? 괜찮아?!!"
"언니! 괜찮아?!............ 이렇게 많이 아프면 새벽에 나 깨우지 그랬어! 바보같이..."
"......괜찮아.... 그보다 엄마 아빠, 많이 놀라셨죠?.. 죄송해요......"
".....언니! 그나저나, 오늘 어떡해?! 언니가 정신을 못 차려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난 윤석씨 전화번호도 모르니까 연락 할수도 없고 말야............."
"어머........... 리셉션! 어떡하면 좋아?!...............지금 몇시야?!..."
"오후 4시 37분......"
"아,, 7시까지는 가야하는데!........"
"그 몸으로 어딜 갈려구! 할 수 없지 뭐, 도저히 아파서 못간다고 소개는 다음번에 시켜달라고 해.."
"......규진아, 나 니 핸드폰 좀!"
"..응, 여기"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미안해요.."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여보세요?'
"윤석씨! 나예요 규인이"
'규인아!! 하루종일 연락도 안되고,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지금 어디야?
집에도 전화 안 받던데..'
"미안해요.. 나... 지금 병원이예요."
'병원?!! 왜?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목소리가 아픈 목소린데?!'
"네.. 갑자기 지난 밤에 감기가 심해져서 오늘 아침에 입원했어요.
이제 깨는 바람에 미리 연락도 못하고... 미안해요......"
'얼마나 아픈건데 그래?! 입원까지 할 정도야?!'
"그냥 며칠 쉬면 된돼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나저나........ 오늘 약속은.. 어쩌죠?....."
'..........할 수 없지.. 아픈 데 어떡하겠어.........'
"오늘 중요한 분들 많이 오시는 자리라고, 내 얘기도 미리 해놨다고 그랬잖아요...
어쩜 좋아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빨리 나을 생각이나 해.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해하실거야.
끝나는 대로 병원에 찾아갈게'
"아,,,,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윤석씨 난처하게 할텐데.....
....................윤석씨.. 내 얘기 잘 들어요..........
.........우리 규진이는........... 어때요?"
'.................규진씨?!....."
"응,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알아서 그래요..... 그냥 얼굴 소개만 하는 자리니까
규진이를 소개하는 게 결국은 나 인사시키는 거잖아... 나쁜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고,
...내 대신, 규진이.. 보낼게요...... 그렇게 해줘요"
'.................규인아. 그럴 필요 없어.. 니가 걱정하고 생각해 주는 건 알겠는데,
규인이 니가 아니면 나한테 아무 의미가 없잖아. 규진씨도 곤란할테고...
리셉션엔 혼자가도 괜찮아'
"싫어.. 나 때문에 윤석씨, 약속 하나 못지키는 무책임한 사람 되는 거, 나 정말 싫어요....
규진이 착한 아이니까, 잘 따를 거예요. 내 말대로 해줘요........."
[ ▒ 같은 사랑, 다른 이름 03 ▒ ]
"........아,, 겨우 찾았다!... 근데 이 호텔이.... 맞나?.....아, 맞네..
와아, 완전 리무진이 줄을 섰구만!"
호텔 현관에서 이리저리를 둘러보다가 문득, 유리에 비친 내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살구색 드레스, 완전히 틀어올린 생머리.
이건,, 내가 추천한, 오늘의 언니 스타일인데....
'규진아,,,,,, 우리 어렸을 적에 했던 역할바꾸기 놀이 생각나?'
'병원에서, 뜬금없이 왠 옛날얘기? 윤석씨랑 통화는 했어? 못간다니까 뭐래?'
'.........언니 얘기 좀 들어봐. 우리 어릴적에, 서로 이름표 바꿔서
니가 나인척, 내가 너인 척 유치원 반 바꿔서 다니고 그랬던 거 생각나지?'
'당연히 생각나지. 후후. 근데 진짜 왜?....'
'규진아... 그럼 언니 부탁 좀, 들어줘............'
하여튼, 순진하다가도 문득문득 뜬금없는 건 진짜 알아줘야 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나 같은 덜렁이를 보내면 어떡해! 아,, 정말 심장마비 올 것 같아!.....
".........규진씨! 여기요!,.."
"아... 윤석....씨....."
정문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급하게 뛰어오는 윤석.
한 눈에 보아도, 멋지게 잘 차려입은 정장이 그 사람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그 동안 내가 알던 진솔하고 상냥한 사람과는 또 다르게 느껴지는 그의 매력에
난.... 한참을 머뭇거려야 했다.
"...... 아,,, 정말........ 규인이랑 똑같네요... 순간 깜짝 놀랐어요.."
"........... 네... 하아,, 그나저나 정말 제가 올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어쩜 좋죠?..
언니가 하도 부탁해서 이 옷 입고 오긴 왔는데........ 어떡해요................."
"... 할 수 없죠. 규인이가 꼭 그렇게 해달라고 하니까 오늘은 연기를 하는 수 밖에..."
".. 연.. 연기요? 어릴 땐 철 없어서 언니인 척 하고 다닌 적도 많은데......
지금은 자신 없어요! 더구나 이런 자리에서는......."
"크게 걱정하진 말아요. 어차피 다른 사람과 길게 대화 나눌 일은 없을테니까.
사실, 오늘 이 자리에 저희 집과 친분 있는 분들이 꽤 많이 오세요.
한성과 동신그룹 경영진 중엔 친인척 관계가 알게모르게 많이 숨어 있거든요.
한성이 주최하는 연회도 아닌데, 규인이 얘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규모가 커졌어요.
그래서 오늘 규진씨라도 오지 않았으면, 조금 난처할 뻔 하긴 했어요.
규인이한테는 혼자가도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큰 소리 쳤지만.. 하하
규진씨, 그냥 내 옆에 붙어서, 간단한 대답만 하면 돼요....알았죠?
그럼 오늘 좀 부탁할게요......."
"..................................네........................"
"그럼 자, 심호흡하고............... 들어가죠."
언니인 척 연기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아니면 살짝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그 사람 때문인지,
내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떨리지만, 걱정되지만,
윤석씨가 옆에 있다면...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 ▒ 같은 사랑, 다른 이름 03 ▒ ]
"아하하하, 윤석군. 이게 얼마만인가. 오늘 자네가 온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네."
"안녕하셨습니까 송회장님. 여전히 건강하신 것 같아서 기쁩니다"
"회사도 뭐 저 알아서 잘 돌아가고..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게 이제 운동밖에 없더라구 하하하..
그나저나, 그 옆에 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구신가?"
"아, 저와 약혼할 사람입니다. 규인아, 인사드려. 진도그룹 회장님이셔."
"..처음뵙겠습니다. 박규인입니다"
"오호,,, 그래그래! 아주 보기좋군! 하하하 좋을 때야. 그렇구먼.. 아하하하하.
후에 결혼식 장에서 보지. 그럼 이만.. 하하"
가볍게 고개숙여 인사한 후, 송회장이란 사람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작은 한숨이 나왔다. 아,, 이제 시작인데.............
"후후, 잘했어요.. 그렇게만 하면 되요..."
".....네... 그치만 정말 입 떼기가 왜 이렇게 힘들죠?
박규인 세글자 말하는 게 무슨 범죄인 것 마냥 느껴져요!"
"하하. 익숙해져야 할텐데... 규진씨, 저기 봐요. 저쪽에 계신 분이
동신 한승철 회장님이세요. 지금은 은퇴를 하셨지만, 저희 아버님과도 꽤 절친한 분이죠.
이번엔 얘기를 좀 많이 해야할거예요. 각오해요.."
내 팔을 이끌고, 거리낄 것도 없이 앞으로 척척 나가는 사람.
순간, 이 사람이 이끄는 길이라면 가시밭길이라도 헤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이러면 안돼. 박규진, 정신 차리자. 정말로 빠져서는 안돼.....
"회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아니.. 이게 누군가!! 하하하.. 정말 오랜만일세! 유학 가기 전에 보고나선 처음이구만.
이젠 대표이사라지? 자네 같은 재원을 밑에 두고 있으니, 아버님이 아주 든든하시겠어!"
"과찬이십니다. 회장님"
"쯧, 회장이라니.. 앞에 前 자를 붙여야지, 하하. 그나저나 정이사.
옆에 계신 이 분은 소개하려고 데려온 것 아닌가?"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박규인입니다."
"오호라, 약혼 한다던 그 친구인가 보군! 반듯하고 참한 신부감이라고,
자네 부친이 자랑을 많이 하시더만! 하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되서 영광입니다."
"음음, 아니지. 이런 미인을 만나게 되다니, 내가 오히려 영광일세. 하하하.
음,,,, 양친 어른들이 모두 교사시라고?"
".......네. 그렇습니다."
"자네도 일류대 영어교육과라지? 아주 바람직한 교사집안일세 그려. 하하.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누굴 만났고 내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따윈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내내 그의 팔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는 것,
화려한 드레스, 명품 액세서리를 내세우며 거들먹 거리는 사치스러운 여자들 틈에서도
이름만 대면 전국민이 알만한 거물급 재벌가 앞에서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가 끝까지 옆에서 나를 지켜주었다는 것...
그 사실만이, 온통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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