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지음, 알렉산데르 보그단스키 옮김. <<사랑의 기술>>을 읽고
사랑은 기술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물론 여기서 프롬이 의미하는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감정이다. 우리 시대에 사랑의 테크닉에 관한 책들은 무수히 많다. 그중에는 선정적인 경향 가운데 하나인 관음증에 대한 언급도 종종 발견된다. 나는 이러한 선정적인 경향의 목록에다 이른바 '글쓰기 도착증'을 하나 더 추가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박식한 체하는 작품들을 즐겨 쓰는 작가들은 분명 화를 낼 테지만 말이다. 글쓰기 도착증은 사회를 위협하는 일종의 일탈이다. 왜냐하면 활자를 통해 쾌락을 맛보려는 '독서 도착증'을 유발하여, 독자들로부터 직접 선정적 체험을 해보고 싶은 욕구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사랑을 일종의 심리상태로 인식하고 분석할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이 경우,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분석에 연연하여 실제로 감정을 느끼고 체험하는 걸 주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누구나 사랑을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선택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데 있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기술인데, 기술에는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프롬은 바로 이 재능의 문제를 간과한 채, 사랑에 빠진 사람들과 예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향을 분석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통제와 노력, 적극적인 개입과 집중력, 그리고 인내심이 요구된다고 프롬은 역설하고 있다. 나 역시 동의한다. 다만 이 중에서 무엇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게다가 사랑의 관계에 적용시킬 경우,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성향들이 예술에는 분명 존재한다. 프롬은 심리분석학자로서 이러한 사실을 틀림없이 알고 있었겠지만, 모럴리스트적인 열정과 아름다운 사랑의 모형을 창조하고 싶은 욕구에 휩싸여 더 이상의 분석과 고찰을 시도하지 않아서, 그의 추론은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이 책의 가치는 따로 있으니, 오늘날에는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며 소홀히 여겨지는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나 유희의 수단이 아니며,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고난이나 역경에 대한 단단한 각오 없이는 버텨내기 힘들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뭔가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모럴리스트가 그렇듯이 프롬 또한 성급한 약속을 자제하지 못했다. 능동적이고 강인한 사랑은 반드시 성공한다고 그는 단언했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 원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거나(이럴 수가!), 아니면 사회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쏟아부은 감정의 소비나 사회적 상관관계와는 상관없이 그저 실패로 끝나버린 사랑에 대해서 프롬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 딱 한 번 이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는데, 마르크스의 주장을 인용하는 대목에서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무턱대고 성격적 결함이나 정치제도에서 찾으려는 경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바로 그 마르크스 말이다. "만약 당신이 상대로부터 상호적인 사랑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사랑하고 있다면, 만약 타인을 사랑하고 있는 당신의 삶 일부가 당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한 것이다...." 이러한 슬픈 전망에 관해 프롬은 애석하게도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낙관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낙관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