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
나의 삶에서 제2의 인생 ‘문학’
나는 나주의 가난한 산골에서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나의 꿈을 이루고져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공부를 하여 더 넓은 서울에서 나의 삶의 목표를 달성하고져 고등학교의 졸업식도 참석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 와 그 다음날부터 시립남산도서관에서 대학교 입시공부에 매진하고 학원에서도 공부를 보충해 가면서 대학의 문턱을 노크 하였다. 나는 서울에서 도저히 대학을 다닐 정도의 가정경제가 못 되며 환경도 농촌에서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정도이며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며, 아르바이트라도 하여 서울에서 야간대학이라도 다닐 심산이었다. 대학을 서울에 둘째 누나 집에서 신세를 져가며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로 겨우 용돈을 마련하여 갔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하는데 갑작히 시골에 계시는 노(老) 부모님이 시골의 모든 재산을 정리를 하고 서울로 올라 오시게 되었다. 나는 이제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이 아니라 부모님을 부양하여야 할 부양 의무자로 전락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출판사의 문선공으로 수습을 단기로 베워서 출판사의 문선공(文選工)으로 가정을 이끌면서 주경야독을 하여가며 나의 젊음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대학을 다니기에는 어려운 처지이고 나에게 잘 적응활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인천교대 단기양성소’에 시험을 보아 합격을 하여 경기도의 어느 섬마을의 총각 선생이 되는게 나의 꿈 이었으며 섬 마을의 착한 처녀를 맞이하여 시골에서 올라오신 부모님을 부양하여 가며 오순도순 살고 싶은게 나의 조그마한 삶의 바람이었다. 모든 인생살이는 그렇게 나의 바램데로 되는것이 아니였다. 어렵게 합격한 초등학교 교사의 발령은 그렇게 쉽사리 나지를 않고 세월만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인천교육대 교육중에 평생 나를 위하여 고생만 하시다가 아들의 따뜻한 보살핌도 못 받으시고 병원 한번 가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막네로 태어나 장남이자 부모님을 부양하여야 할 위치에서 자식 노릇을 못하고 어머니께서 저 세상으로 떠나시니 가슴이 찟어지는 듯한 마음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어머니를 잃은 나는 혼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어려운 삶을 이어 가면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니 확실한 직업도 없는 얼치기 백수한테 삶을 의지하겠다고 착한 아내는 집으로 들어 오게 되어 혼자 계시는 아버지의 뒷 바라지와 나의 각종 공무원 시험을 보살펴 주는 동반자가 되어 주었으며 나는 이를 악물고 도시락 2 개씩을 가지고 도서관에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에 최선을 다 하였다. 공무원 시함은‘법원사무직’에서 부터 ‘검찰사무직’ 하다 못해 ‘교도소 교도관’까지 닥치는데로 시험을 치르다가 75년 가을에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합격을 하여 30여년간 근무를 하고 2004년 6월 상반기 정년 퇴임으로 나의 정들었던 서울시의 무대를 떠나고 자고 나면 서울시민들을 만나는 반가운 하루하루의 생활을 마감하게 하였다.
그래도 서울시의 공직을 퇴직을 하고도 그냥 놀 수가 없어 젊어서 인천교대에서 확보한 초등학교 교사자격으로 ’계약제 교사‘로 시간을 보내면서 암(癌)투병을 하는 아내의 병원비와 미대(美大)를 다니는 딸아이의 대학교의 학자금을 상환하는데 보탬을 주었다.그러면서 초등학교에 나가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고 공부를 하였다 평생을 서울시 행정공무원으로 생활을 한 사람이 어느날 초등학교의 교단에 서니 다소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 안의 학교 교육에 관한 교육학과 초등학교 교육과정등 공부를 하여 초등학교 계약제교사로써 어느 정도 가르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주위의 젊은 여자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초등학교의 교사의 생활은 그런데로 이어 갔다. 편의상 여기까지가 나의 인생의 제1의 삶이리고 말하고 싶다. 왜냐 하면 사회의 한 역활로 서울시 공무원으로써 최선을 다 하였고, 초등학교 교정에서 순진무구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하였기에 편의상 경제적인 활동을 하여 가정을 이끌고 왔으며 자녀들을 대학교를 다 마치는데 노력 하였기에 인생의 전반부 인생의 삶이라고 보고 싶다. 나는 평생을 서울시 시민과 함께 동거동락을 하면서 봉사를 하면서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써 직업을 가졌다는데서 자부심과 보람을 가져보곤 하였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제2인생 문학(文學)은 한 마디로 책과의 싸움이며 비경제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에서 우리의 삶과 함께 하는 학문이며 그 중에서도 ’문학이라‘는 장르이다. 산골의 농촌에서 학교를 다녀서 학교에 갔다 오면 소깔이나 베어서 소죽을 써 주는 일들은 나와 작은 누나의 몫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하얀 모시옷에 두루마기에 나주향교의 제관이나 문중일을 보는 선비셨다. 그러니 평상시에 소설책이나 시집 한 권을 읽어보지 못한 문학(文學)의 문자도 모르는 문학의 문맹인이었다. 겨우 중학교,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한 참 우리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시다가 김소월의 시 ’진달레‘’못잊어‘ ’산유화‘’금잔듸‘ 또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 김광균의 ’설야‘(雪夜)등을 낭송을 하며 우리들을 시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신 훌륭하신 시인이시며 국어 선생님으로 우리들의 머리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고대문 시간에는’장끼전‘이라든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등의 가사문학과 고산 윤선도의 시가에 대하여 머리에 남아 있고,특히 고향이 나주라 고대문 시간에 백호 임제에 대하여 자세한 가르침과 그 분의 훌륭하신 문학세계를 특별히 강조 하시며 가르치신 기억이 머리에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리고 특별히 공직에 있을때에도 문학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없고 직업이 법을 집행하는 공직이라 법학과 행정학이라든가 사회과학에 관한 책들을 주로 읽었다.
2004년 6월 상반기 서울시 정년 퇴임식을 하면서 나의 정들었던 서울시정의 무대에서 내려 오고야마는 현실 앞에 가슴이 멍멍하고 직장을 잃은 허전한 마음이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이미 암(癌)이라는 판정을 받고 평온한 가정이 파탄의 길로 가고 있었다. 정년은 하였지, 아내는 유방암이라는 병명으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집 부근에 있는 성당에 나가 영세도 받고 신앙생활로 나를 달레 보기도하고, 내가 퇴직을 하면 초등학교 교사자격 있고 또한 젊어서 하고 싶었던 일이라 비록 나이는 들었으나 초등학교 교단에 서 보고 싶었다. 전라남도 초등학교 임용고사에도 도전을 하였고 또 한 일차에 합격을 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계약제 교사로 시간을 보냈다. 전라남도 곡성의 ’고달초등학교‘ 강진의 ’계산초등학교‘등에 있으면서 원래가 글쓰기를 좋아하여 년말의 학교의 교지에도 나의 글이 나가고 강진에 있을 때에는 일요일이면 ’영랑‘의 생가와 다산 정양용의 유적지등을 다니면서 시심(詩心)을 키우며 서투른 시를 써 보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은 우리 인간의 스승이며 나의 삶을 뒤돌아보고 반추를 해 보는 성찰의 시간이며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더듬어 보는 자기만의 시간이다.
나는 서울시를 정년을 하면서 이제는 나의 시간뿐이니 원(願)없이 책장을 넘기기로 마음을 먹었다.그러나 아내의 암의 투병생활에 항상 마음편할 날이 없었다. 아내는 3년만의 긴 여정의 투병 끝에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아내 잃은 서글픔, 허전함, 아이들은 집을 떠나고 나혼자 식사문제 ,혼자 생활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이었고 삶의 늪속에서 허덕이는 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명심보감 논어 사자소학등 한문공부를 하여 한자1급자격도 확보 하였으며 역사 문학 유적지 답사등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고 ,저의 12 대조 시서 김선 할아버지의 유고집이 나주시청과 동신대 김종섭교수에 의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되어 할아버지께서 훌륭한 한시가 1.250수의 유고집에 실려 있고 조선 중기의 훌륭한 학자요 시인이며 유학자임을 알고 그 유고집의 한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이 어떠한 학문인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도전을 하였으며, 문학 답사도 부지런히 병행을 하였다. 저의 할아버지의 유고집인’시서유고집‘의 한시를 이해하는데 한국방송통신대학의 고전문학분야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나이도 있고 몸도 아픈몸을 이끌어가며 올 8월 23일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안동의 농암(聾巖) 이현보 선생의 유적지와 낙동강 상류의 생가와 정자에서 ’어부단가‘의 작품을 이해 하였고 도산서원 이황의 작품들을 청량산을 가는 도중에 접할 수가 있으며 하회마을의 입구의 ’병산서원‘을 답사를 갔을 때에는 정말 자연의 산수와 우리 인간의 삶의 조화를 이루어져가는 느낌을 받아 입이 벌어질 정도의 감정을 느낄수가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문학관도 답사를 하여 시집과 이육사평전을 구입하여 책을 부지런히 넘겼다. 그분은 시인이기 전에 일제강점기의 우리 민족의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의 선각자로 중국의 감옥에서 싸늘한 시체로 후손들에 의해 운구되어 왔을때에는 정말 가슴이 뭉쿨 하였다. 훌륭한 독립운동가임을 느꼈다. 역사의 현장을 좋아하니 당연히 고전문학을 좋아하여 문학공부를 하는데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 외에도 문학 답사로는 남춘천에 있는 김유정 문학관도 2~3번을 찾은거 같으며 김유정 작품을 거의 다 독서를 한 거 같으며 충청도 옥천의 ’정지용‘문학관과 생가를 답사하여 그의 작품 ’향수(鄕愁)‘를 실감 나게 그의 문학의 세계를 이해하게 큼 되었으며,경기도 양평의 북한강변에 있는’황순원 문학관‘도 답사를 다니면서 문학의 시야를 현장과 접목을 하면서 나의 문학의 세계를 넓혀 갔다.
이외에도 해남의 ’녹우당‘의 윤고산의 종택을 자주 찾아 유물관도 부지런히 찾아 다녔으며 작품들을 현장과 병행한 문학공부를 하였다 보기도를 찾아 남해의“이뫼를 지나면 저뫼가 나타나니”윤고산의 ’어부사시사“를 실감나게 문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나의 삶에 자아를 발견할 수가 있었으며,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무등산’의 줄기를 따라 정자들을 찾아 다니며 담양의 송강정(松江亭)을 찾아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의 현장에서 주옥같은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그리고 식영정과 서하당의 주변에서는 ‘가사문학관’이 우람히 건립이 되어 가사문학의 고장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우뚝 솟아 있다.이곳은 무등산의 계산풍류(溪山風流)의 흥취가 더욱더 난다 그 주변에는 소쇄 양산보의 원림인 소쇄원이 있으며,환벽당 그리고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원혼을 달레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취가정’이 말 없이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무등산의 동쪽으로는 ‘적벽강이 흐르며 한가로히 백구들이 하늘을 유유히 나르며 김삿갓이 한 시대를 풍미하고 보냈던 고장이기도 하며 문인묵객들이 항상 드나들던 ’물염정‘’환벽당‘’송석정‘등의 정자들이 요소요소에 자리를 하고 있어 ’적벽풍류‘(赤碧風流)속에 옛 문인들의 시 한수가 김삿갓의 시와 어울러 그 시혼이 물 위에 흐르면서 호남문학의 정취를 보여 주고 있다.
저는 저의 12대조 시서김선 할아버지의 문학의 현장을 찾고져 영산강변의 ’호가정‘’요월정‘호남의 십대안에 든 ’영모정‘안에는 지금도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세지면의 벽류장에도 당대의 4대 문장가 계곡 장유와 주고 받은 시문이 고스란히 정자안에 소장하고 있으며 영산강변의 풍광이 좋고 백구가 나르는 아름다운 정자에는 저의 할아버지의 시문이 남아 있으며 소실된 정자에도 책자에는 남아 있다. 훌륭하신 할아버지의 그어려운 한시를 이제는 좀 이해를 하고 호남의 향토문학을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으며,그 토록 원했던 2023년 6월경에는 할아버지의 묘소 앞에 조그마한 공원을 조성하여 4개문중과 후손들의 협조로 4천만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시비(詩碑)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화순문학회 이사,서울의 시우문학회 전 이사로 계속해서 글을 내고 있으며 나주.화순.광주 지역신문에도 기고하고 있으며 향토문학의 심취를 하여 호남의 문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정신문화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작금의 세태에 조그마한 역할을 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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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울시 공무원 현역에서 은퇴한 후 문학에 심취하여
글도 쓰고 선배 문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며 끊임없이 문학의 길을 가는
만장봉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시는 모습은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배운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배워서 익히면 곧 그것이 즐거움으로 다가온다'는 뜻이겠지요.
만장봉 선생님의 선조께서도 한시를 쓰신 시인이 계셨는데
그 발자취가 남아 시비를 건립하기로 했다니
참으로 보람된 일을 후손으로서 찾아서 하고 계시는군요.
박시인님 ......
나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면서 글을 써 보았습니다
지금 저의 12대조 시서 김선의 시비는 나주의 문화단체장들과 추진위원을 구성하여
나주 시와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꼭 아름문학상에 대상을 받으시기 바람니다
@만장봉 작년에 입상권에도 들지 못해
제 평생 쓴 시가 60 여편인데 '풀숲에 누워 쓸개를 빨면서 고통을 이겨낸다(와신상담)'는
심정으로 지난 1년간 다시 정정과 퇴고, 고심과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제 시 60여편은
올 연말쯤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 것 같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립니다.'
@박민순 와신상담 갈고 닦으시어 시집도 발간하시고 문학의 꽃을피우시기 바라며
문학상도 꼭 타시기를 기원합니다
꾸준히 문학도전하심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성실과 집념의 길을 멋지게 가
시는듯합니다
8/23일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미리 축하보냅니다
감사합니다 지인 운영자님 .....
항상 수고가 많으시어 수많은 회원님들이 즐겁게 카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즈금도 아름문학상의 상패가 저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긴 글이지만 잘 읽고 갑니다.
파란만장한 전반의 삶과 정신적 지주가 된 문학의 삶
그리고 화려하기도 한 문학순례기가 강물처럼 흐르네요.^^
아이구 석촌 선배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올해도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작년에 수고를 많이 하셨지요
잘 읽었습니다.
오랜 시간 삶을 이어가며
자신에게 도전하는 삶을 많이도 읽었습니다.
남은 시간 행복한 노후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아이구 꽁꽃운영위원님 .....
날씨가 무더운 데 건강 조심 하시기를......
그 안에 써 논 글을 아름문학상이 시작을 하는 거 같아 한편 올려보았습니다
네 자전적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자전적인 글이 되었나요 ?
문학사랑 으뜸이시네요
고운 정성 가득담으신 시집이
꼭 발간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