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에 관한 시모음 3)
봄날이 간다 /임영준
어쩌란 말이냐
이 청춘을
어쩌란 말이냐
이 세월을
사방에 퍼지른 것들이
미처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는데
사르르 꺼져가는구나
또 마감의 시간이 되면
허루한 자취만 남겠구나
숨 가쁜 봄날이
이렇게 가고 나면
파닥거리던 풋날개들은
또 어쩌란 말이냐
그 하염없는 욕망을 질러놓고
봄날이 다시 이렇게 가는구나
봄날은 간다 /박이화
모란을 보면 왜 먼로가 생각나는지 몰라 어째서 그 풍성한 금발의 젖은 입술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어 아직 꽃다운 꽃이 없는 그런 봄날, 왜 오늘 따라 모란이 풍선 같은 젖가슴 흔들며 서 있는 것 같을까? 그래서 말인데 내친김에 모란에게 샤넬을 뿌려주면 어떨까? 그 관능의 향기라면 내 집 정원도 얼마 못 가 문란해져 버리려나? 촌실촌실한 철쭉은 이제 설자리조차 없을 거야 헐리웃식으로 잘 생긴 측백나무 너 아조 살판 나겠구나 옆집의 담쟁이 넝쿨도 넌출넌출 추파를 던질테고, 선비 같은 사철도 더 이상 점잔빼진 못할 테지 더욱이 낮술에 불콰해진 저, 저 홍단풍 아예 담장을 넘을지도 그래, 그래 올해 서른아홉의 저 모란 이제 흐드러질 대로 흐드러진 저 모란,
하루 종일 전화통도 시들하고
우편함도 따분하게
아무런 소식 하나 피워주지 못하는 이 봄날,
이 하품나는 봄날에
나 저 모란에게
샤넬을 뿌려줄까 말까?
잠잠한 정원에
풍파를 일으킬까 말까?
봄날은 간다 /송정(松亭) 장영길
빛이 정성으로
피워낸 꽃이라 할지라도
그 향기가 영원할 수 없듯이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바람을 따라
화려한 꽃잎도 퇴색되어 간다.
한때 모든 것은 반드시 변한다는
진리를 익히지 못하고 그저
잊혀져간다는 가슴 때문에
열병처럼 앓아야 했던 시절,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아련해서 오히려 더 많이
아름다웠던 봄날의 기억들이
노래 속에 머물러 있는 시간
봄날은 또 그렇게 간다…….
봄날은 간다 /藝香 도지현
문득 유행가 한 구절이
입안에서 맴돈다
흐르는 것이 인생이고
머물러 주지 않는 세월이다
한 순간의 아름답던 사랑도
흔들리며 옮겨가고
머물러 주리라 했던
내 마음도 잠시 어디론가 간다
모든 것이 머물러 주지 않고
떠나가는 것을
하물며 봄이라고 머물러 주랴
유행가 가사처럼 봄날은 간다
꽃 비도 팔랑거리며 가고
내 젊음도 가고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봄날은 간다 /강정애
마당 시멘트바닥에 찍힌 고양이 발자국
한 잎 한 잎 떨어진 꽃잎 같다
지난 봄 떨어진 꽃잎인데
올해까지 시들지 않았다
문을 열면 황급히 돌아 나가는
허공 발자국 소리가 있고
세로로 세운 눈빛
발자국 속에 어둠으로 말라있던 한파도 다 지나갔다
나뭇가지만 서성거렸던 보폭들이 화르르 뛰어내린다
지나가는 꽃송이들,
잘못 들어선 듯 머뭇거린 흔적이
군데군데 헌 신발처럼 남아있다
시멘트 바닥에 또각또각 꽃피워 놓고
그 가벼운 꽃송이 마다 햇살을 발라내는 적요의 나절
담을 넘는 초록들과 훌쩍 단숨에 돋음 한 고양이의 척추와 털 고르기를 하고 있는 햇볕
하루에도 몇 명의 아이들이 다녀가는
치매(癡呆)가 지키는 집
물기가 가득 차 빈방이 없는 꽃나무마다
몸을 헐어 음각이 되는 발자국들,
낭떠러지 위 벗어놓았던 신발은 아이가 다시 신고 내려오고 구겨지던 울음이 낮잠에 들어있다
구름이 박힌 하늘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오후가 되면 저 구름도
막대 사탕처럼 다 녹을 것 같다.
봄날은 간다 /김준기
눈보라 찬바람 속에서
연보라 꽃망울 익혀낸 햇살이
마침내
붉은 이파리 활활 피우더니
어느덧
여린 초록 잎새에 밀려
하얗게 마른 꽃잎
봄비 젖은 한줄기 바람에 흩날리며
이제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이외수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썩어 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린 눈물은
아직 고통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사
또 한 해
어느 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 /이재무
아내한테 꾸중 듣고
집 나와 하릴없이 공원 배회하다가
벤치에 앉아 울리지 않는 핸드폰 폴더
괜스레 열었다 닫고
울타리 따라 환하게 핀 꽃들 바라보다가
꽃 속에서 작년 재작년 죽은 이들
웃음소리 불쑥 들려와 깜짝 놀랐다가
흘러간 옛 노래 입 속으로만
흥얼, 흥얼거리다가 떠나간 애인들
어디서 무얼 지지고 볶으며 사나
추억의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스레 핸드폰 자지러진다
“아니, 싸게 들어와 밥 안 먹고 뭐해요?”
아내의 울화 어지간히 풀린 모양이다
봄날은 간다..2 /유승희
봄바람 타고 아롱대는 아지랑이
재 너머 오니 봄인가 싶더니
낮은 산골짝 달싹달싹 낙엽 이불 헤집고
야생화 피나 싶더니
뽀얀 목련 등불 밝히나 싶더니
잇빛 진달래, 노랑 개나리, 꽃물 들이나 싶더니
뭐니 뭐니 해도 벚꽃 흐드러지게 피나 싶더니
서둘러 여기저기 꽃망울 터트려놓나 싶더니
싱숭생숭한 가슴마다에 화드득 불 질러 놓나 싶더니
얄미운 바람 한 차례 스쳐간 자리
난분분난분분 꽃비 내리나 싶더니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이승훈
낯선 도시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당신과 함께 봄날은 간다
달이 뜬 새벽 네시
당신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봄날은 간다
맥주를 마시며 봄날은 간다
서울은 머얼다
손님 없는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달이 뜬 거리도 간다
술에 취한 봄날은 간다
안개도 가고 왕십리도 가고 노래방도 간다
서울은 머얼다
당신은 가깝다
내 목에 두른 마후라도 간다
기차는 가지 않는다
나도 가지 봄날은 가고 당신은 가지 않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해가 뜨면 같이 웃고 해가 지면 같이 울던 봄날은 간다
바람만 부는 봄날은 간다
글쟁이, 대학교수, 만성 떠돌이, 봄날은 간다
머리를 염색한 우울한 이론가, 봄날은 간다
당신은 남고 봄날은 간다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봄날은 간다 /杜宇 원영애
남으로 문 냈어요
따스한 온기로
꽃의 이름표를 달고 오세요
풀잎에도 꽃잎에도 보고 싶다, 그럴게요
그림을 그렸어요
나무에 기댄 사람도
꽃을 만지는 사람도
사랑의 몸짓이네요
그게 다 내가 그리워했던 거예요
청보리밭에 바람이 들렀나 봐요
아름다운 곡선으로 출렁거려요
어릴 때 보았던
그때가
마냥 몰려와요
종달새 소리가
날 부르는데
봄날은 그렇게 가고 있네요.
봄날은 간다 /손로원(1911~1973)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박언숙
아직 찾아야할 것을
못 찾은 암컷들이 붉다
복사꽃 꽃술에다 얼굴 붉게 타오르던 소녀는
들키지 않으려고 붉은 색깔의 옷을 피했다
저절로 물들어 오는 분홍으로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그나저나 알록달록
노인정의 저 할머니들은 왜 붉고 싶은 걸까
분홍과 꽃분홍 사이 빨강과 주황으로 차린 옷들
어렵게 꽃이 핀다 그러나 다시 열매 맺을 일 없는데
아직은 알지 못하는 길 오늘도 걷는다마는
저 꽃잎 붉게 물이 들고 싶은 사연
복사꽃 낯 붉히는 봄이다
봄날은 간다 /이연주(1953~1992)
토요일 오후 봄날
어른 셋에 여자아이 하나가 거실에 있다
아이는 몇 해를 숨어 있었는지 모를
박제가 돼버린 이상한 나무열매를 들고 있다
솜털에 박힌 마른 씨앗을 하나씩 뜯어내더니
- 아줌마, 땅에 심으면 나요?
아이가 베란다 돌밭으로 간다
잠이나 잤으면 싶은 봄 날
- 꼭 꼭 눌러줄 돌을 찾아봐라
싹이 되려면 큰 바람에도 끄덕없는
무거운 돌의 힘이 필요하니까
거실의 노란빛 조명등이 웃는다
어른 셋이서 따라 웃는다
토요일 오후,
나른하기 짝이 없는 봄 날.
봄날이 간다 –2016 /임영준
연분홍 햇살 아래
시름 널어 두었는가
넉넉한 그리움에
연한 추상 아쉽구나
화사한 꽃길 사이
세속은 번득이는데
알알이 엮은 꿈은
또 그리 흩어지고 마는가
봄날은 간다 /전병일
여명의 빛이 창가에 스며든다
다친 장막을 밀치니 창안에 들어온
먼 산의 청솔과 나목 사이로
산 벚꽃이 새하얀 영역을 표시하고 있다
길가에 방긋 웃던 개나리 진달래꽃
연푸른 잎 날갯짓에 꽃잎 떨구며
슬픔에 이별의 인사를 나눈다
화려한 자태 코로나19에 움츠린 몸
만인에게 그 자태 뽐내지도 못하고
기약 없는 무거운 발걸음 내디딘다
새봄의 전령사 봄꽃들의 향연
나목에 새 희망의 연초록 날개 달고
저 하늘 희망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