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정상에 서다
백두산 천지 그 정상에 올랐다.
눈 아래 부복한 산야가 멀리 여운으로 이어져 청옥의 천지 물빛과 조화를 빚어 장관을 연출하였다.
중국 영토를 경유하여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서파(서쪽 비탈)로 오르는 길과 북파(북쪽 비탈)로 오르는 길 중 우리는
노약자와 어린이가 포함되어있어서차량으로 이동이 가능한 북파를 선택했다.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를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늘 안개로 덮여 있거나 구름에 가려 그 모습을 감추려는 산이기 때문에
수차례 올랐어도 천지를 구경하지 못하고 뒤돌아서야 하는 예가 많다는 것이다.
중국의 위대한 지도자 작은 거인 뎡사오평이 네 번인가 올랐음에도 천지를 볼 수없었다는 안내원의 표현이 과장만은 아닌 듯 했다.
산 아래는 흐려 있었고 산 중턱은 아침 안개가 자욱하여 큰 기대를 하지 못하고 정상에 올라 보는 것만으로 우리들은 만족하려 했었다.
그러나 정상에 가까이 오르자 하늘과 맞닿은 천지의 모습은 내가슴을 뭉클다못해 뻥 뚫리는 기분 감격 웅장함 표현키 어려웠다.
끝없이 분출 되는 물의 근원은 어디이며 얼마나 깊은 곳이기에 이토록 파랗다 못해검푸른 청옥의 빛을 지녔을까?
천지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장백 폭포를 이루고 압록강으로 흘러 서해에 이르며 두만강은 동해로 나가 태평양으로 합류한다.
우리민족이 수많은 전란과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세계를 향해 용트림 하듯이 백두산은 영원하고 천지의 물은 푸르러 변함이 없다.
아침 안개와 구름을 허리에 두른 거대한 산의 봉우리는 가슴에 청옥 빛 물을 품고 붉은 햇살아래 더욱 과감한 위용으로 방문객의 가슴을 서늘히
사로잡았다. 내려다보이는 만주벌판 일본사람들의 야망을 이해 했다 저 넓은벌판이 얼마나 욕심 났으면 심양에 군수공장을 세우고.....
황제 부이를 앞장세워 만주국을 세운 그들의 야욕을 알것같다
백두산 높이 2,744m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높이 2,500m 이상의 산봉이 16개가 있다. 이 산봉들의 명칭이 우리 문헌에는 병사봉을 비롯하여 망천후,
비류봉, 백암산, 차일봉, 층암산, 마천우 등만 밝혀져 있다. 중국 문헌에의하면 백두산의 최고봉인 백두봉(우리 나라에서는 병사봉, 또는
장군봉으로칭한다)을 비롯하여 삼기봉, 고준봉, 자하봉, 화개봉, 철벽봉,천활봉, 용문봉, 관일봉, 금병봉지반봉,백운봉, 옥주봉, 제운봉, 와호봉,관면봉
등의 명칭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최고봉인 병사봉은 조선 영조 때 윤광신이라는 인물에서 비롯된명칭이라고 한다.
편자 미상의 쇄편류초 에 의하면 “윤병사 광신이 일찍이 함경도절도사가 되었을 때 백두산상상봉에 올라가 천지를 임하여 창을 들고 춤을 추어,
지금까지 사람들이 병사봉이라고 일컫는다”라고 분명히 밝혀 놓았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높이 2,155m의 산정에 천지처럼 큰 호수를 가진 산은오로지 백두산뿐이다. 천지의 총 적수량은 20억400만㎥이다.수량은 20억400
만 톤으로 70%는 빗물이고 30%만이 지하 용천수이다.
천지 주변의 연평균기온이 영하7.3도C이며 1월 평균기온이 영하24도, 7월의평균기온은 8.5C도라고 하며 결빙기에는 영하 40도C까지 내려가기도 한다는것이다.동절기인 10월 -5월까지는 영하의 기온이며 해빙기인 6 -9월까지의 기온도10도C에서 머물기때문에 나무가자랄 수 없다고 해서인지 한 그루의 나무도볼수 없었다.
9월부터 다음해 6월 까지 257일간 눈이 쌓여있고 무상 기간은 7월 말에서 8월초 까지 약 20일간 뿐이니 중국의 <백암봉>에서 백두산 천지를 바로
볼 수 있었다 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해발고도가 높기 때문에 응결고도 지역이 넓어져서 6 -9월의 평균 안개일수가
많을수밖에 없다고 했다. 겨울은 북서풍, 여름은 남서풍으로 기상 변화가 매우 심한 고산 둔드라 기후라고하나 바람 한점 없는 따뜻한 날씨였다.
천지에서 발원한 푸른 물줄기가 중국 측 달문으로 유출 장백폭포(창바이)를이루고 얼다오바이허를 흘러 송화강을 이룬다.
다른 한 줄기는 북한 측의 장군봉은 2750m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민족의 영산이며 해발고도 2.000m에서 지하를 통하여 용천수로 흐르는 백두산 폭포
와 중국의 자린성,안투현, 얼다오바이허진과 국경을 이룬다.또한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천지에는 5종의 작은 동물과 4종의 곤충류가 생존하며 이끼가
생장하는 맑은 물이다.
높이 18m의 백두산 폭포는 천지물이 지하수화 하여 용천수로 떨어지기 때문에 년중 하루도 마를 날이 없이 흘러 찬지에서 흐르는 물같이 압록강과
두만강 두 줄기로 서해와 동해로 갈라져서 대양과 합류한다.백두산 폭포를 마음으로 새겨 안았으며 북한 측의 장군봉을 멀리 바라보는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내 땅을 밟지 못하고 남의 땅과 낯선 민족에게 그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까지 기어이오르고 싶었던 백두산이었기에 더욱 가슴이 아리고 또한 벅찼
다.
우리민족이 수많은 전란과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세계를 향해 용트림 하는 백두산은 영원하고 천지의 물은 푸르러 변함이 없었다.
아침 안개와 구름을 허리에 두른 거대한 산의 16개 봉우리는 가슴에 청옥빛 물을품고 붉은 햇살아래 더욱 과감한 위용으로 이억만리에서 찾아온
나를 사로잡았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장백산맥과 북서쪽에서 남서쪽으로 내 달리는마천령산맥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화산을 백두산이
라 부르는 것이다.
화산 폭발에 의해서 생긴 부석(경석)이 회백색인데다가 일년 중 8개월 (257일)이상눈이 덮여 있어서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창바이산이라 한다. 만주어로는 <귀러미산예아린>이라고 하며“귀러미”는 길다, 산예는 희다 는뜻이고마린은 산을 의미한다.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에 불함산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시대 압록강변 여진족을 <백두산> 바깥으로 쫓아내었다고 하여 문헌에 처음으로 백두산이
기록되기도하였다.현재 북한 측 백두산 면적은 8.000평방Km로 전라북도의 면적에 준하며 개마고원의일부를 이루고 중국 측의 화강암 분포지까지
합치면 3만평방Km에달한다. 200-400년 전의 화산 폭발로 형성된 산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수종이 적은 650여종의 식물의 분포를 보인다.
해발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의 키는 작아지며 침엽수, 자작나무, 사시나무,달피나무등 침엽수와 활엽수가 혼합 대를 이룬다.
민족의 영(靈)산으로 백두산 천지의 물빛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 민족은 언제까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외면하며 먼 곳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오는 기독교인들 “실지회복”버스에 그것도 중국어로 프랑카드를걸고 옛 고구려 땅을 찾자고 떠들고 천지에서는 목사 주제아래 통성기도를
해데니 같은 기독교인으로써 얼굴이 뜨겁고 중국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택민 중국 수반이 천지를 왜 왔다 갔을까?
생각해보아야할것이다. 동북 공정 이라는 이상한 역사논리를 펴는 중국사람들의 감정을 일으키는 한국에서 온 자신의 인기술에 연연 하는 한국 목사
님들....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아쉬웠다. 꼭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들어 주실련지 ㅎㅎㅎ
백두산에 오르려고 수많은 한국인이 중국 땅에 먼지바람을 일으키는 현실이 가슴아프고 저리게 한다.
백두산은 우리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자 생명력이 넘치는 민족의 성산이며 신산으로 숭앙 되었었다.
고조선 이래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주변의 숙진족, 읍루족,말갈과 여진 만주족들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면서 역사화
와전설화 신격화했었다.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 장백산의 지맥 설을 통해 풍수지리상 백두산의 정기를 암시하고 있다.이곳을 중심으로 수많은 국경의 분쟁이 발생하였고 17세
기 중엽 청나라는백두산을 장백산 신(神)에 봉하고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책>을 실시하였다.
조선인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 개척하자 그 지역을 그들의 영토로귀속 시키려고 1712년에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간도와 녹둔도의 영주권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27년 최남선의 <백두산 유산록>에 행방불명이 된 <백두산정계비>의 내용과 상황이 잘 기록 되어 있다.
지금은 천지까지도 양분이 되어 북쪽 2/5는 중국 측에 편입이 되고 남쪽 3/5은 북한 측에 속한다.
북한의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한국전쟁 도와준 댓가로 중국에 넘겨주었다 그래도 그가 민족을 나라를 사랑하고 조상 들이 물려준땅을 잘 관리했다고
할것인가 후세 역사가들이 평가할것이다
.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기의 결집이 낭림, 태백, 소백산맥을 통하며 기가 전달되는 등뼈라 하여 <백두대간>이라 하지 않던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백두산 일대가 활동무대 로서 실존하였다는 사실 또한 부인 할 수 없다.
기도 하건데 질 좋은 적송, 가문비나무, 자작나무 목재와 부석의 골재를 압록강과두만강 뗏목에 실어 길주와 만포에 쌓아 두었다가 단동으로 날라와
가공 미국에 수입 하여 북한주민들에게 도움이 될날이 언제나 올지 요원한 현실이 안타까울뿐....
백두산천연수로 모든 세계인이 목을 축이는 그날이 반드시 와야 할 터인데... 발바닥이 다 부르터서 물집이 터지고 붉은 피가 철철 흐르도록
내 땅을 밟으며 걷고 또 걸어서라도 기어이 다시 한 번 더 오르고 싶은마음은 정령 나만의생각은 아닐것이다.
첫댓글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오셨군요.